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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101-1}}李朝 太祖 太宗 兩代에는 漢陽(京城)의 建都 與否 問題로 上下 間에 論議가 한참 複雜하고 또 이로 因하여 心身을 勞함이 많았지만, 太宗의 子로 그 位를 이으신 世宗朝에 있어서는 京城의 主山更定 乃至 新闕 創建 問題로 이는 마침내 實現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一時 議論이 紛紜하여 君臣 間에 心身의 勞를 免치 못하였다. 이 前後 두 事實이 鮮初 國都에 關한 著名한 또 興味있는 事題 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地理 圖讖의 思想史的 方面으로 보아 더욱 興味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高麗時代에 盛行하는 이 種類의 思想이 鮮初의 人心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太祖 太宗 世宗과 같은 英傑의 主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關心을 가졌으며? 또 이런 思想이 實際에 있어 얼마만치의 實現과 影響을 끼쳤는지? 이들 諸點에 나아가 考察하는것은 자못 興味있는 研究이므로써다. 이 小論文은 즉 그 方面 硏究의 一小部分으로, 主題의 事實이 鮮初에는 著名하였지만, 지금에는 世間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事實인 듯하므로 筆者는 이제 特히 그에 對한 顚末을 論述하여 저 讀者의 叅考에 供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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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TagSpage|101-1}}이조 {{TagPerson|[[태조]]}}, {{TagPerson|[[태종]]}} 양대에는 한양(경성)의 건도(建都) 여부 문제로 상하 간에 논의가 한참 복잡하고 또 이로 인하여 심신을 피곤하게 함이 많았지만, {{TagPerson|[[태종]]}}의 아들로 그 자리를 이으신 {{TagPerson|[[세종]]}}조에 있어서는 경성의 주산(主山) 경정(更定) 내지 신궐(新闕) 창건 문제로 이는 마침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일시 의론이 분운하여 군신 간에 심신의 피로함을 면치 못하였다. 이 전후 두 사실이 조선초 나라의 도읍에 관한 저명한 또 흥미있는 사제(事題)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지리 도참의 사상사적 방면으로 보아 더욱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고려시대에 성행하는 이 종류의 사상이 조선 초의 인심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TagPerson|[[태조]]}}, {{TagPerson|[[태종]]}} {{TagPerson|[[세종]]}}같은 영걸의 군주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으며? 또 이런 사상이 실제에 있어 얼마만치의 실현과 영향을 끼쳤는지? 이러한 점들에 대해 고찰하는것은 자못 흥미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소논문은 즉 그 방면 연구의 한 작은 부분으로, 주제의 사실이 조선 초에는 저명하였지만, 지금에는 세간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인 듯하므로 필자는 이제 특히 그에 대한 전말을 논술하여 저 독자의 참고에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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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 (화) 18: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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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의 국도주산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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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 11월
시작쪽 101쪽 종료쪽 108쪽 전체쪽 018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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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1-1이조 태조인물, 태종인물 양대에는 한양(경성)의 건도(建都) 여부 문제로 상하 간에 논의가 한참 복잡하고 또 이로 인하여 심신을 피곤하게 함이 많았지만, 태종인물의 아들로 그 자리를 이으신 세종인물조에 있어서는 경성의 주산(主山) 경정(更定) 내지 신궐(新闕) 창건 문제로 이는 마침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일시 의론이 분운하여 군신 간에 심신의 피로함을 면치 못하였다. 이 전후 두 사실이 조선초 나라의 도읍에 관한 저명한 또 흥미있는 사제(事題)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지리 도참의 사상사적 방면으로 보아 더욱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고려시대에 성행하는 이 종류의 사상이 조선 초의 인심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태조인물, 태종인물 세종인물과 같은 영걸의 군주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으며? 또 이런 사상이 실제에 있어 얼마만치의 실현과 영향을 끼쳤는지? 이러한 점들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자못 흥미 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소논문은 즉 그 방면 연구의 한 작은 부분으로, 주제의 사실이 조선 초에는 저명하였지만, 지금에는 세간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인 듯하므로 필자는 이제 특히 그에 대한 전말을 논술하여 저 독자의 참고에 제공하고자 한다.
쪽수▶P101-1李朝 太祖 太宗 兩代에는 漢陽(京城)의 建都 與否 問題로 上下 間에 論議가 한참 複雜하고 또 이로 因하여 心身을 勞함이 많았지만, 太宗의 子로 그 位를 이으신 世宗朝에 있어서는 京城의 主山更定 乃至 新闕 創建 問題로 이는 마침내 實現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一時 議論이 紛紜하여 君臣 間에 心身의 勞를 免치 못하였다. 이 前後 두 事實이 鮮初 國都에 關한 著名한 또 興味있는 事題 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地理 圖讖의 思想史的 方面으로 보아 더욱 興味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高麗時代에 盛行하는 이 種類의 思想이 鮮初의 人心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太祖 太宗 世宗과 같은 英傑의 主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關心을 가졌으며? 또 이런 思想이 實際에 있어 얼마만치의 實現과 影響을 끼쳤는지? 이들 諸點에 나아가 考察하는것은 자못 興味있는 研究이므로써다. 이 小論文은 즉 그 方面 硏究의 一小部分으로, 主題의 事實이 鮮初에는 著名하였지만, 지금에는 世間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事實인 듯하므로 筆者는 이제 特히 그에 對한 顚末을 論述하여 저 讀者의 叅考에 供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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