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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 (화) 18: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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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의 국도주산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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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 11월
시작쪽 101쪽 종료쪽 108쪽 전체쪽 018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제목@


쪽수▶P101-1이조 태조인물, 태종인물 양대에는 한양(경성)의 건도(建都) 여부 문제로 상하 간에 논의가 한참 복잡하고 또 이로 인하여 심신을 피곤하게 함이 많았지만, 태종인물의 아들로 그 자리를 이으신 세종인물조에 있어서는 경성의 주산(主山) 경정(更定) 내지 신궐(新闕) 창건 문제로 이는 마침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일시 의론이 분운하여 군신 간에 심신의 피로함을 면치 못하였다. 이 전후 두 사실이 조선초 나라의 도읍에 관한 저명한 또 흥미있는 사제(事題)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지리 도참의 사상사적 방면으로 보아 더욱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고려시대에 성행하는 이 종류의 사상이 조선 초의 인심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태조인물, 태종인물 세종인물와 같은 영걸의 군주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으며? 또 이런 사상이 실제에 있어 얼마만치의 실현과 영향을 끼쳤는지? 이러한 점들에 대해 고찰하는것은 자못 흥미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소논문은 즉 그 방면 연구의 한 작은 부분으로, 주제의 사실이 조선 초에는 저명하였지만, 지금에는 세간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인 듯하므로 필자는 이제 특히 그에 대한 전말을 논술하여 저 독자의 참고에 제공하고자 한다.
쪽수▶P101-1李朝 太祖 太宗 兩代에는 漢陽(京城)의 建都 與否 問題로 上下 間에 論議가 한참 複雜하고 또 이로 因하여 心身을 勞함이 많았지만, 太宗의 子로 그 位를 이으신 世宗朝에 있어서는 京城의 主山更定 乃至 新闕 創建 問題로 이는 마침내 實現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一時 議論이 紛紜하여 君臣 間에 心身의 勞를 免치 못하였다. 이 前後 두 事實이 鮮初 國都에 關한 著名한 또 興味있는 事題 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地理 圖讖의 思想史的 方面으로 보아 더욱 興味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高麗時代에 盛行하는 이 種類의 思想이 鮮初의 人心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太祖 太宗 世宗과 같은 英傑의 主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關心을 가졌으며? 또 이런 思想이 實際에 있어 얼마만치의 實現과 影響을 끼쳤는지? 이들 諸點에 나아가 考察하는것은 자못 興味있는 研究이므로써다. 이 小論文은 즉 그 方面 硏究의 一小部分으로, 主題의 事實이 鮮初에는 著名하였지만, 지금에는 世間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事實인 듯하므로 筆者는 이제 特히 그에 對한 顚末을 論述하여 저 讀者의 叅考에 供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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