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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0일 (금) 23: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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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왕과 장원정 창구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高麗 文宗王과 長源亭 創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6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11월
시작쪽 148쪽 종료쪽 156쪽 전체쪽 00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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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문


본문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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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8-1高麗의 文宗(第十日代)은 第六代 成宗과 한가지, 아니 그 以上으로 太祖의 遣業을 守成한 英明의 主로서, 在位 三十七年間 內로 民政에 힘쓰고 官制를 革整하고 人才를 登用하고 儒佛을 崇獎하야 治績이 크게 늘어나고, 또한 外로 宋遼各國과의 交通도 頻數하야 諸般 文物에 있어 進步 發達을 致한―말하자면 高麗의 文化는 이때에 이르러 最高의 域에 達한 觀이 있거니와, 同時代의 思想 及 信仰의 一特徵을 지어가지고 있든 地理圖讖의 說도 一般 文運의 進展과 步調를 같이하여 이때에 相當한 거름을 것고 있었으며 따라 種種의 秘記 圖書를 利用 혹은 造作하는 이 方面의 專門家들이 出하야 各各 奇異한 言說로 宸聰을 어지럽게 한 일이 있었다. 崔滋의 補閑集(卷上)을 보면 文宗朝의 儒臣 李顗에 關한 記事에 「初顗在諫垣 時 陰陽者流 各執圖讖 互言裨補 上間之 顗封曰 陰陽本乎大易 易不言地理裨補 後世詭誕者曲論之 以至成 文字 惑衆人 況圖讚荒虛怖妄 一無可取 上心然之」라고 한 것이 있다. 顗는 곧 文宗의 后父인 李子淵의 第三子요 睿宗朝의 有名한 淸平山人 李資玄의 父로 儒佛에 兼通한 學者이었고 文宗 二十三年에 그가 春州(今春川) 道監倉使로 있었을 때에 同州 淸平山의 勝境을 사랑하여 普賢院(後에 其子 賽玄이 그곳에 隱居하야 文殊院이라 改稱함)이란 寺院을 둔 일도 있거니와 (金石總覽上, 春川文殊院重條碑) 右記事에 보이는 事實은 勿論 文宗 時代에 屬한 것일지며 同▶P149-1時에 「上」이라 한 것은 文宗을 指稱한 말일 것이니, 이는 그때의 陰陽圖讖家들의 活躍이 어떠하였든 거와 또 그들에 對한―李顗와 같은―儒者들의 態度가 어떠하였든 것을 보여주는 자못 貴重한 史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但 거기 李顗의 地理圖讖誕妄說에 對하야 「上心然之」라고 한 것은 王의 그 當時의(一時的) 氣分과 態度를 表現한 말에 不過한 것이요 決코 王의 終始一貫한 心理의 表示는 아니다. 文宗은 思想 信仰의 人으로 太祖 및 其他의 王과 같이 浮屠陰陽地理圖讚의 說을 惑信함이 尋常치 아니하였든 所以다. 睿宗朝의 名臣 吳延寵의 睿宗을 諫하는 말 가운데 「以文宗明睿猶惑術數」라고 (麗史 吳延寵傳)함과 같이, 文宗은 英明의 主로써 非科學的 非實利的 術數(地理圖讖)思想의 支配를 받는 님금의 하나이다(文宗의 法力 地力에 對한 信念은 太祖 以來의 傳統的 思想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當時 浮屠陰陽家의 說에 刺戟 影響된 바도 만헛든 것이다) 法力에 依하야 國家의 福利를 增進하려 하야 同王 十年에 城南 德水縣의 地(今開豐郡 進鳳面 興旺里)를 卜하야 興王寺란 大伽藍을 創起한 것은 著名한 事實이지만, 또한 一方으로(圖讖說에 依하야) 旺盛한 地力을 빌어 國家의 基業을 延長하려 하야 處處에 地를 相卜하야 新離京 新離宮을 經營하고 때를 따라 巡住를 行한 일이 있었다. 本稿에 말하려는 餅岳의 長源亭을 비롯하야 南京(今京城)의 設置 及 其新宮, 西京(今平壤)의 西京畿 設置 및 그 左右闕은 다 文宗王 時에 된 延基京闕로서 以後 歷代 諸王의 이 方面에의 建闕·巡住·其他 施設의 先驅를 지었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文宗의 南京宮 西京畿 及 西京 左右闕에 就하여는 이미 他稿에 詳述한 바가 있음으로 여기에는 再論치 아니하고 오즉 長源亭에 就하야 創構의 事情 및 그 地理 遺址 等에 對하야 調査 考察한 바를 論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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