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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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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887년 충청도 서천의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으며,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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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887년 {{TagLocation|충청도 서천}}의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TagPerson|황기주(黃麒周))}}이며, 한말의 문인 황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1894년 할아버지 {{TagPerson|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으며,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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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은 1887년 9월 2일 충청도 서천(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년간 수료하고, 1909년 북간도 중영촌 명동학교, 1911년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등에서 국사를 가르치며 역사 교육을 통한 애국사상 고취에 힘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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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9일 (금) 23:16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송민혁(K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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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돈 (黃義敦)
출처 :
 
한글명 황의돈 한자명 黃義敦 영문명 Hwang Eui Don 가나명 이칭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號)는 해원(海圓)
성별 남성 생년 1887년 몰년 1964년 출신지 충청도 서천 전공 역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1887년 충청도 서천공간의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황기주(黃麒周))인물이며, 한말의 문인 황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인물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으며,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 이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은 1887년 9월 2일 충청도 서천(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하게 되어 1906년까지 한서 수십여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해 1년간 수료하고, 1909년 북간도 중영촌 명동학교, 1911년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기관등에서 국사를 가르치며 역사 교육을 통한 애국사상 고취에 힘쓰기도 했다.


교원시절의 모습

1908년(융희 2) 만주 간도(間島)의 명동서숙(明東書塾)에서 본격적으로 교편을 잡게 된 황의돈은 1911년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기관 교원이 되어 국사를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였고, 그 후 휘문의숙(徵文義塾) 보성학교(普成學校) 중동학교(中東學校) 등의 교원을 지냈다. 하지만 1916년 YMCA 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에서 파면됐으며, 1920년 이후 약 20여 년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을 강의하는 등 국권상실 시대에 청년들에게 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일깨우기 위해 앞장섰다. 이후 국사 교육이 금지되자 1938년 조선일보사의 기자가 되기도 하였다.


언론계와 교수계에서의 활동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보성고등보통학교기관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하였고,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으며, 52세 때인 1942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이후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1945년 12월부터 1947년 1월까지 한국독립당단체 당무위원 역임하였고, 1948년 문교부 편수관이 되고, 단국대학(檀國大學),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교수를 역임했다. 이렇듯 황의돈은 한국사(韓國史)에 관한 많은 논문을 남겼으며, 1962년 1월, 동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文化勳章)을 받았다.





연구


민족사학의 보급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최초로 형성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의 제국주의의 침입을 모방한 일제의 한국 점령으로부터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는데, 한말의 경우 민족주의사학의 과제는 근대이전의 자기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근대적 민족을 발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반제투쟁을 벌이면서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사관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기본적으로 한말의 과제를 발전시켜 근대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데 두었다. 황의돈은 1909년 국내에서 안흥(安興), 오산(五山), 대성(大成)학교 등에서 자신이 저술한『대동청사』를 강의함으로써 민족사학을 보급시켜나갔고 이후에도 1920년『조선통사(朝鮮通史)』를, 1922년에는『조선신사(朝鮮新史)』를 저술하면서 명실 공히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로 그 명성을 떨쳤다. 또한 사학사에 있어서는『대동청사』라는 대표적인 통사를 서술한 신채호와 함께 근대 사학을 수립하였다.


인재양성을 위해 황의돈이 한 노력

국권상실의 시대였던 일제강점기, 청년들에게 국사를 가르치며 역사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사상을 일깨워주었고, 대부분의 생애를 역사서와 교과서 저술에 힘쓰며 일제에 저항하고, 역사 교육을 위해 힘쓰기도 하였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황기주 Person: 황의돈 A hasSon B
Person: 황의돈 Institution: 군산공립보통학교 A worksAt B
Person: 황의돈 Group: 한국독립당 A isMemberOf B



Timeline


[1]

Network Graph






참고자원


황의돈 역사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