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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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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병도, 손진태, 조윤제, 이윤재, 송석하 등이었는데, 역사학자·국어국문학자·민속학자가 힘을 합친 것이었다. 조윤제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전공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진단학회의 예비모임을 자택에서 열 정도로 진단학회 성립과 운영에서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진단학회의 성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br> | 진단학회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병도, 손진태, 조윤제, 이윤재, 송석하 등이었는데, 역사학자·국어국문학자·민속학자가 힘을 합친 것이었다. 조윤제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전공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진단학회의 예비모임을 자택에서 열 정도로 진단학회 성립과 운영에서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진단학회의 성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br> | ||
“1934. 5. 송석하, 손진태, 이병도, 이윤재 등 제동지와 협의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니, 이것은 사실상 당시의 조선민속학회의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다.”<br> | “1934. 5. 송석하, 손진태, 이병도, 이윤재 등 제동지와 협의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니, 이것은 사실상 당시의 조선민속학회의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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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br> | 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br> | ||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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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도는 창립총회 당시 학회 명칭을 정하는데 ‘朝鮮’이나 ‘靑丘’ 같은 좋은 표현을 이미 일본인들에게 선점당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제안에 의해 결국 ‘震檀’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학회명을 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창립된 朝鮮史學會나 청구학회 등을 의식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br> | ||
+ |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144쪽)<br> | ||
+ | ‘진단’은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을 가리켰다. ‘진단’의 뜻에 대해서는 진단학보 창간호에 실린 이병도의 「震檀辨」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br> | ||
+ | 해당 글에 따르면, ‘震檀’은 본래 중국을 지칭하는 梵語名 ‘Cinisthaua(泰人의 化地)’에 대한 음역어로 불교 전적에 많이 쓰이다가 동방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음역어인 만큼 다양한 표기로 나타났는데 그중 ‘震旦’으로 쓴 예가 가장 많았지만 조선에서는 太祖의 이름인 ‘李旦’과 ‘旦’자가 겹치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 ‘檀’으로 바꾸어 쓴 것이며, 궁예가 후고구려의 국호로 사용한 뒤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秘記를 통해 이 명칭이 이어져 내려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1쪽).<br> | ||
+ | 이병도는 ‘震檀’은 도참사상에서 유래한 ‘大東方(今日의 滿鮮을 包含한 當義의 朝鮮)’을 가리키는 ‘秘稱’ 혹은 ‘讖緯家 理想의 大朝鮮에 對한 別名’이라고 설명했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3쪽).<br> | ||
+ | 이병도는 “吾人의 目的하는 硏究의 範圍가 朝鮮을 中心으로 하야 隣近 諸國을 包括한 以上, 震旦을 俠義로 取하지 않고 廣義로 거의 東洋과 같은 뜻으로 取한 것”이라고 밝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4쪽).<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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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단학회와 진단학보가 의식한 일본인 주도의 청구학회, 청구학총의 ‘청구’도 실은 ‘진단’과 비슷한 뜻을 지녔다. 靑丘學叢 창간호 휘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br> | ||
+ | “따라서 역사·고고·토속·사회·언어·문학·종교·미술 등 각 방면에 걸친 업적은 해마다 깊어져갔으나, 이들 연구의 결과를 硏鑽琢磨할 통일적인 기관이 없었던 것은 큰 유감이었다. 또한 일반에 그 성과를 보급하고 교육상의 참고자료로 제공하는 일이 현재 가장 절실한 요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 이러한 기도는 시도되지 않았다. 이번에 경성제국대학·조선총독부 및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와 기타 동지들이 노력하여 ‘청구학회’를 조직한 것은 실제로 상술한 결함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극동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br> | ||
+ | 靑丘라고 이름 지은 것은, 대저 청구가 동방의 나라의 汎稱이며 나아가 古來 조선의 異名이기도 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계간잡지 청구학총을 간행하여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연구자료 및 저술을 출판하고, 강연 또는 강습회를 개최하고, 연구 여행을 계획하며, 기타 학계의 진전에 동반하여 점차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그 목적의 달성을 기할 것이다.”<br> | ||
+ | (「彙報」, 『靑丘學叢』 1, 1930.8., 157~158쪽; 조범성(2021), 「1930년대 靑丘學會의 설립과 활동」, 『민족운동사연구』 107, 90~91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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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도는 이윤재의 주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발간 비용을 부담했다고 회고했다.<br> | ||
+ | “1934年 初夏에 朝鮮語學會(評議員會)의 主幹인 故 李允宰 氏가 漢城圖書株式會社의 意思 傳達이라 하여 우리들에게 먼저 學會를 조직하고 學術誌를 편찬하게 되면 活版所를 가진 自己네가 物質的으로 負擔하겠노라는 好誼를 표시하여 왔다. 생각컨대 이는 실상 李允宰 氏의 권고와 교섭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br> | ||
+ |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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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을 담당했다. 그가 『한글』을 주간한 것은 1934년 4월(11호)에서 1937년 5월(45호)까지였고, 인쇄소가 바로 한성도서주식회사였다. 인쇄비가 밀리자 이윤재는 자신이 편집한 『문예독본』의 판권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넘길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br> | ||
+ | (박용규(2013),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역사공간, 85~86쪽)<br> | ||
+ | 진단학회 발기인인 이선근이 한성도서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이었다는 점도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후원을 얻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霞城李瑄根博士古稀紀念論文集刊行委員會(1974), 『韓國學論』, 형설출판사, 11쪽) 한성도서의 전무 한규상도 진단학회의 찬조회원이 되었다.<br> | ||
+ | 결국 이윤재·이선근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창간호 발행비용을 제공했지만, 이는 순수 전문학술지여서 전혀 대중성이 없었다. 창간호 발행 이후 한성도서주식회사는 발을 뺐고, 그 이후는 찬조회원(윤치호·김성수·김연수·윤보선·방응모·윤치창·최선익·이완영), 이병도·이인영·노익형·최규동 등의 사재로 충당되었다. 진단학보의 1회 발행비용은 200~300원이었다.<br> | ||
+ |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7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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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기인은 총 24명이었다. 위원은 편집위원 겸 임원을 겸하는 자리였는데, 출입이 있으나 모두 합하면 17명이었다. 또한, 진단학보 논문투고자는 총 21인(78편)이었다. 이 가운데 중복을 제외하면 총 36인이 집계되는데, 이들은 진단학회의 주력이자 학문적 동력을 제공한 ‘적극 회원’으로 볼 수 있다.<br> | ||
+ |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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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공별로 보면 역사 11명, 국문학 6명, 국어학 5명, 민속학 3명, 고고학 2명, 미술사 1명, 사회학 1명, 불교사 1명, 베트남문학 1명, 일본문학 1명, 윤리학 1명, 종교 1명, 경제 1명, 철학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br> | ||
+ |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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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별로는 경성제대 14명, 와세다대 10명, 도쿄제대 1명, 교토제대 1명, 다이쇼대 1명 등 일본의 제국대학 및 사립대학 출신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일본 이외에는 미국 예일대 1명, 오스트리아 빈대 1명, 스위스 프리부르대 1명, 중국 베이징대 1명 등이 있었다.<br> | ||
+ | 후일 이들 가운데서 서울대 교수 15명, 동국대 교수 3명, 연대 교수 2명,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낸 사람이 6명 나왔다.<br> | ||
+ |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13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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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명의 찬조회원은 1930~40년대 한국 사회·문화계의 대표적인 저명인사였다. 1930~4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학술·문화계의 정수분자를 거의 망라한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br> | ||
+ | (민현구(2012), 「두계 이병도의 수학과정과 초기 학술활동」, 『진단학보』 116, 8~9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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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6A5ACD">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span> | <span style="color:#6A5ACD">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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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순혁 洪淳赫 || 1899~? || 早稻田大(1927) || 역사학(국어학) || 연세대 교수, 납북 | | 홍순혁 洪淳赫 || 1899~? || 早稻田大(1927) || 역사학(국어학) || 연세대 교수, 납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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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원(1934~1939)=== | + | ====위원(1934~1939)==== |
<span style="color:#6A5ACD">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span> | <span style="color:#6A5ACD">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s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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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2일 (수) 10:22 기준 최신판
목차
창립과 활동
창립과 의의
진단학회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병도, 손진태, 조윤제, 이윤재, 송석하 등이었는데, 역사학자·국어국문학자·민속학자가 힘을 합친 것이었다. 조윤제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전공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진단학회의 예비모임을 자택에서 열 정도로 진단학회 성립과 운영에서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진단학회의 성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1934. 5. 송석하, 손진태, 이병도, 이윤재 등 제동지와 협의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니, 이것은 사실상 당시의 조선민속학회의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다.”
(조윤제(1964), 「(趙潤濟自編) 陶南年譜」,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事業會,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論文集』, 신진사, 17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5쪽)
진단학회 설립, 진단학보 발간을 주도한 것은 역사학자 이병도다.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주도한 것은 그 사무소를 자신의 집에 둔 데서 알 수 있다.
(「彙報 震檀學會創立」, 『震檀學報』 1, 1934.12, 224쪽)
1920년 이병도는 염상섭, 김억 등이 주도한 문예지 『廢墟』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아카데미즘 역사학의 태두로서는 뜻밖의 경력이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로 된 잡지를 발간하는 의의를 일찍이 깨닫고 있던 셈이다. 권보드래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조선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유사-사회’에서 ‘유사-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456쪽.)
이병도의 『震檀學報』 발간 역시 우리말과 글로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후식민(postcolonial) 주체의 싹을 틔우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震檀學報』는 한국인이 주도하는 우리말로 된 학술지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震檀學報』 창간호 「휘보」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근래 조선(문화)을 연구하는 경향과 誠熱이 날로 높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慶賀에 견디지 못하는 바이나, 그런 경향과 誠熱이 조선인 자체에서보다 조선인 이외의 인사 간에 더 많고 큼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 스스로 냉정히 캐어볼 필요가 있지만, 어떻든 우리는 그런 연구까지 남에게 밀어 맡기어, 오직 그들의 노력과 성과만을 기다리고 힘입기를 바라는 자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힘이 빈약하고 연구가 拙劣할지라도, 自奮自進하야 또 서로 협력하야, 조선문화를 개척 발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의무와 사명을 가진 것이다. 어느 社會의 文化든지 그것을 眞實 且 正確히 檢討 認識하고, 또 이를 向上發達함에는 그 社會에 生을 受하고, 그 風俗 慣習中에서 자라나고, 그 言語를 말하는 社會의 사람의 努力과 誠熱에 期待함이 더 큰 까닭”이라고 적었다.
(「彙報 震檀學會創立」, 223~227쪽;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日政 中期까지도 우리 社會에는 아직 우리 손으로 된, 이렇다 할 權威 있는 學術誌가 없었다. 그래서 純粹 學術的인 論文은 부득불 外國 學術에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筆者도 그러한 類의 論文은 일찌기 日本東大 中心의 《史學雜誌》 및 《東洋學報》와 또 朝鮮史編修會의 《靑丘學叢》 등에 발표하였던 것이다. 1930年을 前後하여 京城帝大 出身 중에 國學 同志들이 생기게 되고, 또 日本 留學에서 돌아오는 同志들이 해마다 늘게 되자 우리들 사이에는 자연히 國學 中心의 學會와 學術誌의 必要性을 절실히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이러한 宿志는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1934년 『震檀學報』 창간 이후 이병도의 일본어 글쓰기는 중단된다. 차마 우리말 논문을 보낼 수 없었을 『稻葉博士還曆紀念滿鮮史論叢』(1938)에는 한문으로 지은 글을 보탰다.
(「斗溪先生 論著目錄」, 『歷史家의 遺香』, 501〜517쪽, 참조.).
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진단'이라는 이름
이병도는 창립총회 당시 학회 명칭을 정하는데 ‘朝鮮’이나 ‘靑丘’ 같은 좋은 표현을 이미 일본인들에게 선점당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제안에 의해 결국 ‘震檀’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학회명을 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창립된 朝鮮史學會나 청구학회 등을 의식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144쪽)
‘진단’은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을 가리켰다. ‘진단’의 뜻에 대해서는 진단학보 창간호에 실린 이병도의 「震檀辨」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해당 글에 따르면, ‘震檀’은 본래 중국을 지칭하는 梵語名 ‘Cinisthaua(泰人의 化地)’에 대한 음역어로 불교 전적에 많이 쓰이다가 동방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음역어인 만큼 다양한 표기로 나타났는데 그중 ‘震旦’으로 쓴 예가 가장 많았지만 조선에서는 太祖의 이름인 ‘李旦’과 ‘旦’자가 겹치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 ‘檀’으로 바꾸어 쓴 것이며, 궁예가 후고구려의 국호로 사용한 뒤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秘記를 통해 이 명칭이 이어져 내려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1쪽).
이병도는 ‘震檀’은 도참사상에서 유래한 ‘大東方(今日의 滿鮮을 包含한 當義의 朝鮮)’을 가리키는 ‘秘稱’ 혹은 ‘讖緯家 理想의 大朝鮮에 對한 別名’이라고 설명했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3쪽).
이병도는 “吾人의 目的하는 硏究의 範圍가 朝鮮을 中心으로 하야 隣近 諸國을 包括한 以上, 震旦을 俠義로 取하지 않고 廣義로 거의 東洋과 같은 뜻으로 取한 것”이라고 밝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4쪽).
진단학회와 진단학보가 의식한 일본인 주도의 청구학회, 청구학총의 ‘청구’도 실은 ‘진단’과 비슷한 뜻을 지녔다. 靑丘學叢 창간호 휘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따라서 역사·고고·토속·사회·언어·문학·종교·미술 등 각 방면에 걸친 업적은 해마다 깊어져갔으나, 이들 연구의 결과를 硏鑽琢磨할 통일적인 기관이 없었던 것은 큰 유감이었다. 또한 일반에 그 성과를 보급하고 교육상의 참고자료로 제공하는 일이 현재 가장 절실한 요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 이러한 기도는 시도되지 않았다. 이번에 경성제국대학·조선총독부 및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와 기타 동지들이 노력하여 ‘청구학회’를 조직한 것은 실제로 상술한 결함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극동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靑丘라고 이름 지은 것은, 대저 청구가 동방의 나라의 汎稱이며 나아가 古來 조선의 異名이기도 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계간잡지 청구학총을 간행하여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연구자료 및 저술을 출판하고, 강연 또는 강습회를 개최하고, 연구 여행을 계획하며, 기타 학계의 진전에 동반하여 점차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그 목적의 달성을 기할 것이다.”
(「彙報」, 『靑丘學叢』 1, 1930.8., 157~158쪽; 조범성(2021), 「1930년대 靑丘學會의 설립과 활동」, 『민족운동사연구』 107, 90~91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재정
이병도는 이윤재의 주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발간 비용을 부담했다고 회고했다.
“1934年 初夏에 朝鮮語學會(評議員會)의 主幹인 故 李允宰 氏가 漢城圖書株式會社의 意思 傳達이라 하여 우리들에게 먼저 學會를 조직하고 學術誌를 편찬하게 되면 活版所를 가진 自己네가 物質的으로 負擔하겠노라는 好誼를 표시하여 왔다. 생각컨대 이는 실상 李允宰 氏의 권고와 교섭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을 담당했다. 그가 『한글』을 주간한 것은 1934년 4월(11호)에서 1937년 5월(45호)까지였고, 인쇄소가 바로 한성도서주식회사였다. 인쇄비가 밀리자 이윤재는 자신이 편집한 『문예독본』의 판권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넘길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박용규(2013),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역사공간, 85~86쪽)
진단학회 발기인인 이선근이 한성도서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이었다는 점도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후원을 얻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霞城李瑄根博士古稀紀念論文集刊行委員會(1974), 『韓國學論』, 형설출판사, 11쪽) 한성도서의 전무 한규상도 진단학회의 찬조회원이 되었다.
결국 이윤재·이선근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창간호 발행비용을 제공했지만, 이는 순수 전문학술지여서 전혀 대중성이 없었다. 창간호 발행 이후 한성도서주식회사는 발을 뺐고, 그 이후는 찬조회원(윤치호·김성수·김연수·윤보선·방응모·윤치창·최선익·이완영), 이병도·이인영·노익형·최규동 등의 사재로 충당되었다. 진단학보의 1회 발행비용은 200~300원이었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7쪽)
사람들
발기인은 총 24명이었다. 위원은 편집위원 겸 임원을 겸하는 자리였는데, 출입이 있으나 모두 합하면 17명이었다. 또한, 진단학보 논문투고자는 총 21인(78편)이었다. 이 가운데 중복을 제외하면 총 36인이 집계되는데, 이들은 진단학회의 주력이자 학문적 동력을 제공한 ‘적극 회원’으로 볼 수 있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8쪽)
전공별로 보면 역사 11명, 국문학 6명, 국어학 5명, 민속학 3명, 고고학 2명, 미술사 1명, 사회학 1명, 불교사 1명, 베트남문학 1명, 일본문학 1명, 윤리학 1명, 종교 1명, 경제 1명, 철학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쪽)
대학별로는 경성제대 14명, 와세다대 10명, 도쿄제대 1명, 교토제대 1명, 다이쇼대 1명 등 일본의 제국대학 및 사립대학 출신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일본 이외에는 미국 예일대 1명, 오스트리아 빈대 1명, 스위스 프리부르대 1명, 중국 베이징대 1명 등이 있었다.
후일 이들 가운데서 서울대 교수 15명, 동국대 교수 3명, 연대 교수 2명,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낸 사람이 6명 나왔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132쪽)
41명의 찬조회원은 1930~40년대 한국 사회·문화계의 대표적인 저명인사였다. 1930~4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학술·문화계의 정수분자를 거의 망라한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현구(2012), 「두계 이병도의 수학과정과 초기 학술활동」, 『진단학보』 116, 8~9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4쪽)
발기인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
이름 | 생몰년 | 학력(졸업연도) | 전공 | 비고 |
---|---|---|---|---|
고유섭 高裕燮 | 1905~1944 | 경성제대(1930) | 미술사 | 사망(1944) |
김두헌 金斗憲 | 1903~1981 | 도쿄제대(1929) | 윤리학 | 서울대 교수 |
김상기 金庠基 | 1901~1977 | 早稻田大(1931) | 역사학(동양사) | 서울대 교수 |
김태준 金台俊 | 1905~1950 | 경성제대(1931) | 국문학사 | 사망(1950) |
김효경 金孝敬 | 1904~? | 大正大(1932) | 종교학·민속학 | 동국대교수, 납북 |
문일평 文一平 | 1888~1939 | 早稻田大(1911입) | 역사학 | 사망(1939) |
박문규 朴文奎 | 1906~1971 | 경성제대(1930) | 경제사 | 월북, 김일성대 교수 |
백낙준 白樂濬 | 1895~1985 | 예일대(1927) | 철학(교회사)박사 | 경성대 총장, 연희대 총장 |
손진태 孫晉泰 | 1900~? | 早稻田大(1927) | 민속학 | 서울대 교수, 납북 |
송석하 宋錫夏 | 1904~1948 | 동경상과대 (1922입) | 민속학 | 서울대교수, 사망(1948) |
신석호 申奭鎬 | 1904~1981 | 경성제대(1929) | 역사학 | 조선사편수회, 고려대 교수 |
우호익 禹浩翊 | 1897~1983 | 早稻田大(1927) | 역사학 | 숭실대 교수 |
유홍렬 柳洪烈 | 1911~1995 | 경성제대(1935) | 역사학 | 서울대 교수 |
이병기 李秉岐 | 1891~1968 | 한성사범(1913) | 국문학(시조) | 서울대 교수 |
이병도 李丙燾 | 1896~1989 | 早稻田大(1919) | 역사학 |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
이상백 李相佰 | 1904~1966 | 早稻田大(1927) | 사회학(사회사) | 서울대 교수 |
이선근 李瑄根 | 1905~1983 | 早稻田大(1929) | 역사학(서양사) | 서울대 교수 |
이윤재 李允宰 | 1888~1943 | 北京大(1921입) | 국어학 | 옥사(1943) |
이은상 李殷相 | 1903~1982 | 早稻田大 (1925~27청강) | 국문학/역사학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재욱 李在郁 | 1906~? | 경성제대(1931) | 국문학 | 총독부도서관, 납북 |
이희승 李熙昇 | 1896~1989 | 경성제대(1930) | 국어학 | 서울대 교수 |
조윤제 趙潤濟 | 1904~1976 | 경성제대(1929) | 국문학사 | 서울대 교수 |
최현배 崔鉉培 | 1894~1970 | 교토제대(1925) | 국어학 | 연세대 교수 |
홍순혁 洪淳赫 | 1899~? | 早稻田大(1927) | 역사학(국어학) | 연세대 교수, 납북 |
위원(1934~1939)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
이름 | 1934 | 1936 | 1937 | 1939 | 생몰년 | 학력(졸업연도) | 전공 | 비고 |
---|---|---|---|---|---|---|---|---|
고유섭 高裕燮 | ㅇ | 1905~1944 | 경성제대(1930) | 미술사 | 사망(1944) | |||
김두헌 金斗憲 | ㅇ | ㅇ | ㅇ | 1903~1981 | 도쿄제대(1929) | 윤리학 | 서울대 교수 | |
김상기 金庠基 | ㅇ | ㅇ | 1901~1977 | 早稻田大(1931) | 역사학(동양사) | 서울대 교수 | ||
김태준 金台俊 | ㅇ | ㅇ | 1905~1950 | 경성제대(1931) | 국문학사 | 사망(1950) | ||
서두수 徐斗銖 | ㅇ | 1907~1994 | 경성제대(1930) | 일본문학 | 워싱턴주립대 교수 | |||
손진태 孫晉泰 | ㅇ | ㅇ | ㅇ | ㅇ | 1900~? | 早稻田大(1927) | 민속학 | 서울대 교수, 납북 |
송석하 宋錫夏 | ㅇ | ㅇ | 1904~1948 | 동경상과대 (1922입) | 민속학 | 서울대교수, 사망(1948) | ||
양주동 梁柱東 | ㅇ | 1903~1977 | 早稻田大(1928) | 국문학사 | 동국대 교수 | |||
유홍렬 柳洪烈 | ㅇ | ㅇ | 1911~1995 | 경성제대(1935) | 역사학 | 서울대 교수 | ||
이병기 李秉岐 | ㅇ | ㅇ | ㅇ | 1891~1968 | 한성사범(1913) | 국문학(시조) | 서울대 교수 | |
이병도 李丙燾 | ㅇ | ㅇ | ㅇ | ㅇ | 1896~1989 | 早稻田大(1919) | 역사학 |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
이상백 李相佰 | ㅇ | 1904~1966 | 早稻田大(1927) | 사회학(사회사) | 서울대 교수 | |||
이숭녕 李崇寧 | ㅇ | 1908~1994 | 경성제대(1933) | 국어학 | 서울대 교수 | |||
이윤재 李允宰 | ㅇ | 1888~1943 | 北京大(1921입) | 국어학 | 옥사(1943) | |||
이인영 李仁榮 | ㅇ | 1930~? | 경성제대(1930) | 역사학 | 서울대 교수, 납북 | |||
이희승 李熙昇 | ㅇ | ㅇ | 1896~1989 | 경성제대(1930) | 국어학 | 서울대 교수 | ||
조윤제 趙潤濟 | ㅇ | ㅇ | ㅇ | ㅇ | 1904~1976 | 경성제대(1929) | 국문학사 | 서울대 교수 |
데이터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