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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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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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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과 활동==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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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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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연구회]]’가 설립되었다. 1952년 3월 내각 결정 제57호로 교육성 산하의 두 조직을 각각 ‘[[조선력사연구소]]’와 ‘[[조선언어학연구소]]’로 개편하여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로 이관했다.<ref>「조선력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어문연구회를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에 이관함에 관하여(1952.3.27. 내각 결정 제57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99~100쪽, 수록).</ref>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는 1949년 12월 8일 내각 결정에 따라 1950년 1월 10일에 창립되고 2월 1일에 개교한 정치인, 관료 재교육기관이었다.<ref>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88쪽.</ref> 두 조직의 이관은 ‘정치경제학아까데미야’를 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2월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두 연구소는 다시 과학원 소속으로 이관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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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과 의의===
한편, 1946년 10월 17일에 ‘조선 과학자, 기술자 대회’가 열렸다.<ref>「(북조선과학기술인대회)결정서」, 『공업지식』(46.11), 81~82쪽(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95~130, 109쪽에서 재인용.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102쪽.</ref> 1947년 2월 7일에 ‘[[북조선중앙연구소]]’가 세워졌다. 소장은 [[신건희]]였다.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자립적 민족공업 발전을 위한 과학 기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고 가장 중요한 기술 자재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 해결하고 선진 과학 기술을 광범하게 섭취 도입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ref>「북조선중앙연구소 설치에 관한 결정서」, 『북한법령집 4』, 242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5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2쪽.</ref>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지질, 광업, 금속, 섬유, 기계, 전기, 화학의 7개 연구부서를 두고, 행정관리부서로 서무부, 부서별 연구활동을 조정하는 기구로서 연구위원회를 두었다. 하지만 북조선중앙연구소는 계획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그곳으로 관련 기능 및 설비들이 이관되었다.<ref>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116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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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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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병도, 손진태, 조윤제, 이윤재, 송석하 등이었는데, 역사학자·국어국문학자·민속학자가 힘을 합친 것이었다. 조윤제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전공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진단학회의 예비모임을 자택에서 열 정도로 진단학회 성립과 운영에서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진단학회의 성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br>
1952년 4월 27일에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전국 과학자 대회’가 열렸다. [[국가계획위원회]](위원장 [[정준택]]) 과학연구국이 소집한 대회에는 전국에서 190여 명의 과학자 대표와 정부·당 고위 인사, 각 대학과 연구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정준택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에서 교육상 [[백남운]]은 ‘1951년 공화국 과학연구 사업의 총결과 1952년 당면 과업’을 발제 보고했다.<ref>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192~193쪽.</ref>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과학원 설립을 처음으로 제안했다.<ref>윤명수, 『조선 과학기술 발전사 1』, 50쪽. 김일성, 「우리나라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과학자대회에서 한 연설, 1952년 4월 27일)」, 『김일성저작집 7』, 182~20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7쪽.</ref> 29일과 30일에는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초이론, 공업, 농업, 의학 등 5개 분과의 연구 보고회가 진행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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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5. 송석하, 손진태, 이병도, 이윤재 등 제동지와 협의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니, 이것은 사실상 당시의 조선민속학회의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다.<br>
1952년 5월 7일에 내각 결정 제86호로 ‘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가 채택되고 ‘조선과학아카데미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홍명희]], 부위원장은 정준택과 백남운이었다.<ref>「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1952.5.7. 내각 결정 제86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8~239쪽, 수록).</ref> 같은 해 10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조직에 관하여’가 내각 결정 제183호로 채택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10.9. 내각 결정 제183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40~243쪽, 수록).</ref> 이에 따라 과학원 조직에 관한 규정이 최종 확정되었고 10명의 원사와 15명의 후보원사, 원장, 부원장, 서기장 및 각 부문 위원회 위원장이 선출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9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9쪽.</ref> 11월 5일에 ‘1차 과학원 총회’를 열어 1기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연구소 소장을 인선하는 등 세부적인 인선 작업을 마쳤다. 1952년 12월 1일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개원식이 열렸다.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의학, 농학을 포괄하는 명실공히 북한 최고의 전문연구기관이 설립된 것이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5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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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1964), (趙潤濟自編) 陶南年譜」,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事業會,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論文集』, 신진사, 17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5쪽)
‘과학원 규정’에 따르면 과학원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7~18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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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 과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문제, 특히 전국적 의의를 가진 과학적 문제에 집중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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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내의 자연부원 및 생산력과 쏘베트 동맹의 과학을 위시한 인류의 과학적 성과를 연구하며 전국적 의의를 가진 과업에 대한 학술적 계획을 수립한다. 이 과업은 과학원의 조직 자체 또는 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과학원에 소속되어 있는 학술연구소에서 수행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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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 설립, 진단학보 발간을 주도한 것은 역사학자 이병도다.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주도한 것은 그 사무소를 자신의 집에 둔 데서 알 수 있다. <br>
3. 공화국 과학기관의 사업개선과 과학 활동가들의 력량 제고에 협력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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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彙報 震檀學會創立」, 『震檀學報』 1, 1934.12, 224쪽)<br>
4. 공화국 정부의 자문에 응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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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학술연구의 제 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보고회를 조직하며, 잡지를 출판하며, 외국학자들의 권위 있는 로작들을 번역 출판하며 매년 자기 사업을 총결하여 출판한다. 출판물은 조선어로 출판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외국어로도 출판할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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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이병도는 염상섭, 김억 등이 주도한 문예지 『廢墟』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아카데미즘 역사학의 태두로서는 뜻밖의 경력이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로 된 잡지를 발간하는 의의를 일찍이 깨닫고 있던 셈이다. 권보드래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조선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유사-사회’에서 ‘유사-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br>
6. 근로 인민들에게 과학지식을 계획적으로 보급시키며 그들의 문화수준 향상을 촉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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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456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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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震檀學報』 발간 역시 우리말과 글로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후식민(postcolonial) 주체의 싹을 틔우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br>
===제1기(1952~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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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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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와 후보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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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952년 선출된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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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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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檀學報』는 한국인이 주도하는 우리말로 된 학술지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震檀學報』 창간호 「휘보」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br>
!style="width:10%"|  || style="width:45%"| 원사 || style="width:45%"| 후보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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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조선(문화)을 연구하는 경향과 誠熱이 날로 높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慶賀에 견디지 못하는 바이나, 그런 경향과 誠熱이 조선인 자체에서보다 조선인 이외의 인사 간에 더 많고 큼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 스스로 냉정히 캐어볼 필요가 있지만, 어떻든 우리는 그런 연구까지 남에게 밀어 맡기어, 오직 그들의 노력과 성과만을 기다리고 힘입기를 바라는 자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힘이 빈약하고 연구가 拙劣할지라도, 自奮自進하야 또 서로 협력하야, 조선문화를 개척 발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의무와 사명을 가진 것이다. 어느 社會의 文化든지 그것을 眞實 且 正確히 檢討 認識하고, 또 이를 向上發達함에는 그 社會에 生을 受하고, 그 風俗 慣習中에서 자라나고, 그 言語를 말하는 社會의 사람의 努力과 誠熱에 期待함이 더 큰 까닭”이라고 적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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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彙報 震檀學會創立」, 223~227쪽;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 사회과학 || 김두봉(언어학, 48.7. 어문학박사), 홍명희(문학, 월북), 백남운(경제학, 월북), 박시형(역사학, 월북, 50.2. 력사학박사) || [[김광진]](경제학), [[도유호]](고고학, 월북), [[이청원|리청원]](역사학, 월북), [[최창익]](경제학), [[장주익]](경제학), [[이극로|리극로]](언어학, 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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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기술과학 || [[최삼열]](화학, 월북, 48.7. 공학박사), [[김지정]](수학, 월북), [[리승기]](화학, 월북, 52.9. 공학박사), [[도상록]](물리학, 월북) || [[신건희]](물리학), [[김인식]](공학), [[원홍구]](생물학, 48.7. 생물학학사), [[려경구]](화학, 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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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br>
| 의학 || [[최명학]](외과학) || [[최응석]](내과학, 월북, 49.11. 의학박사), [[리호림]](이비인후과, 월북, 49.7. 의학박사), [[도봉섭]](생약학, 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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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政 中期까지도 우리 社會에는 아직 우리 손으로 된, 이렇다 할 權威 있는 學術誌가 없었다. 그래서 純粹 學術的인 論文은 부득불 外國 學術에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筆者도 그러한 類의 論文은 일찌기 日本東大 中心의 《史學雜誌》 및 《東洋學報》와 또 朝鮮史編修會의 《靑丘學叢》 등에 발표하였던 것이다. 1930年을 前後하여 京城帝大 出身 중에 國學 同志들이 생기게 되고, 또 日本 留學에서 돌아오는 同志들이 해마다 늘게 되자 우리들 사이에는 자연히 國學 中心의 學會와 學術誌의 必要性을 절실히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이러한 宿志는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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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 농학 || [[계응상]](잠사학, 월북, 48.7. 농학박사) || [[김량하]](농예과학, 월북), [[김종희]](축산학, 월북, 48.7. 수의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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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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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震檀學報』 창간 이후 이병도의 일본어 글쓰기는 중단된다. 차마 우리말 논문을 보낼 수 없었을 『稻葉博士還曆紀念滿鮮史論叢』(1938)에는 한문으로 지은 글을 보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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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溪先生 論著目錄」, 『歷史家의 遺香』, 501〜517쪽, 참조.).<br>
전체 원사 10명 중에서 월북한 사람은 8명으로 80%였다. 후보원사 15명 중에서는 월북한 사람은 9명으로 60%였다. 여전히 연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과학원 구성원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과학원 구성원이 전임을 보장받는 것은 1956년이 되어야 가능했다.<ref>『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 103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1~3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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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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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상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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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원의 최고 기관은 ‘총회’이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4조.</ref> 총회는 원사, 명예원사, 후보원사로 구성되고 1년에 한 번 소집되는 ‘정기총회’와 상무위원회 결정에 따라 개최되는 임시총회가 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6조.</ref> 총회에서는 “상무위원회 총결보고를 청취 승인하며 과학원 및 그의 각 구성부문의 일반 로선을 수립하며, 조직적 성질의 기본 문제를 해결하며, 예산안을 승인하며, 과학원의 각 기관 및 개인의 보고를 청취하며, 과학-기술적 및 과학-사회적 성질을 띤 제 문제를 토의하며, 과학원 원사, 명예원사 및 상무위원을 선거하며 또 후보원사를 승인”하게 된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5조.</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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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위원회는 “총회 휴회 중에 있어서 과학원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 “과학원의 활동을 지도하며, 과학원 각 기관의 사업계획을 검토 승인하며, 각 기관의 보고를 청취하며, 과학사업 조직문제를 심의 해결하며, 과학원의 매년도 예산안을 작성하며, 재정을 감독하며, 국가기관, 협동단체 및 사회단체와 련계를 가지며, 과학원 편집-출판 위원회의 사업을 지도하며, 과학원 총회를 소집하며, 각 부문 회의 및 위원회의 결정을 승인”하는 기구로 정의되어 있다. 상무위원회는 1개월에 1차 이상 소집되어야 한고, 위원장(과학원 원장), 부위원장(과학원 부원장), 서기장(과학원 서기국 서기장), 각 부문위원장 및 기타 위원 3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상무위원 임기는 3년이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31~33조.</ref>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확대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이 때는 과학원 상무위원들뿐만 아니라 각 연구소장, 원사, 후보원사가 모두 모였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쪽.</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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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이라는 이름===
부문위원회는 “과학적 보고와 제의를 청취하며, 그들의 관하에 있는 과학기관에 대한 지도를 하며, 분기마다 자기 사업에 대하여 상무위원회에 보고하며, 부문의 활동방향을 결정하며 그 부문의 학습 연구 계획을 준비하여 부문 회의에 제출하며 자기 부문사업에 관계되는 각종 예산안을 작성하며 그 실행을 보장한다”고 되어 있다. 임기는 3년이고 1개월에 1차 이상 소집되어야 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37조.</ref> 상무위원회는 정책적 차원에서 과학원 전체를 관리하는 조직이었고 부문위원회는 소속 연구소들의 실제 연구 내용을 직접 관리하는 조직이었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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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상무위원회는 과학원이 창립된 1952년 12월부터 1956년 1월까지 활동하였고, 2기 상무위원회는 1956년 2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활동했다. 과학원 3기 상무위원회는 언제까지 활동했는지 명확치 않으나 적어도 1961년 하반기에는 새로운 상무위원회가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상무위원의 임기는 원칙적으로 3년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1기 상무위원들은 3년 2개월 동안 재임했다. 2기 상무위원들은 2년 10개월 동안 재임했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11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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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창립총회 당시 학회 명칭을 정하는데 ‘朝鮮’이나 ‘靑丘’ 같은 좋은 표현을 이미 일본인들에게 선점당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제안에 의해 결국 ‘震檀’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학회명을 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창립된 朝鮮史學會나 청구학회 등을 의식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br>
<표> 과학원 제1기 상무위원회(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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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144쪽)<br>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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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은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을 가리켰다. ‘진단’의 뜻에 대해서는 진단학보 창간호에 실린 이병도의 「震檀辨」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br>
!style="width:30%"| 직위 || style="width:70%"| 이름 및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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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에 따르면, ‘震檀’은 본래 중국을 지칭하는 梵語名 ‘Cinisthaua(泰人의 化地)’에 대한 음역어로 불교 전적에 많이 쓰이다가 동방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음역어인 만큼 다양한 표기로 나타났는데 그중 ‘震旦’으로 쓴 예가 가장 많았지만 조선에서는 太祖의 이름인 ‘李旦’과 ‘旦’자가 겹치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 ‘檀’으로 바꾸어 쓴 것이며, 궁예가 후고구려의 국호로 사용한 뒤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秘記를 통해 이 명칭이 이어져 내려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1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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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震檀’은 도참사상에서 유래한 ‘大東方(今日의 滿鮮을 包含한 當義의 朝鮮)’을 가리키는 ‘秘稱’ 혹은 ‘讖緯家 理想의 大朝鮮에 對한 別名’이라고 설명했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3쪽).<br>
| 위원장 || 홍명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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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吾人의 目的하는 硏究의 範圍가 朝鮮을 中心으로 하야 隣近 諸國을 包括한 以上, 震旦을 俠義로 取하지 않고 廣義로 거의 東洋과 같은 뜻으로 取한 것”이라고 밝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4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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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위원장 || 최삼열(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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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와 진단학보가 의식한 일본인 주도의 청구학회, 청구학총의 ‘청구’도 실은 ‘진단’과 비슷한 뜻을 지녔다. 靑丘學叢 창간호 휘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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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역사·고고·토속·사회·언어·문학·종교·미술 등 각 방면에 걸친 업적은 해마다 깊어져갔으나, 이들 연구의 결과를 硏鑽琢磨할 통일적인 기관이 없었던 것은 큰 유감이었다. 또한 일반에 그 성과를 보급하고 교육상의 참고자료로 제공하는 일이 현재 가장 절실한 요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 이러한 기도는 시도되지 않았다. 이번에 경성제국대학·조선총독부 및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와 기타 동지들이 노력하여 ‘청구학회’를 조직한 것은 실제로 상술한 결함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극동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br>
| 서기장 || 장주익(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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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丘라고 이름 지은 것은, 대저 청구가 동방의 나라의 汎稱이며 나아가 古來 조선의 異名이기도 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계간잡지 청구학총을 간행하여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연구자료 및 저술을 출판하고, 강연 또는 강습회를 개최하고, 연구 여행을 계획하며, 기타 학계의 진전에 동반하여 점차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그 목적의 달성을 기할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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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彙報」, 『靑丘學叢』 1, 1930.8., 157~158쪽; 조범성(2021), 「1930년대 靑丘學會의 설립과 활동」, 『민족운동사연구』 107, 90~91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 부문위원장 || 사회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청원(후보원사, 역사학), 자연 및 기술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승기(원사, 공업화학), 농학 및 의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최명학(원사, 외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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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원장은 [[홍명희]]였다. 1948년부터 북한 내각 부수상을 맡고 있던 그를 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과학원이 북한 최고의 학술기관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조치였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4쪽.</ref> 그를 보좌하여 과학기술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사람은 부원장 최삼열이었다. [[최삼열]]은 [[도호쿠제국대학]] 화학과 출신으로 [[이화학연구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월북한 후 [[김일성종합대학]]의 화학부장을 역임했다.<ref>박성래, 「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한국과학재단, 1995), 부록.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5쪽.</ref> 과학원 사업을 검열하는 서기장은 사회주의 체제와 이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장주익]]이 담당했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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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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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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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는 이윤재의 주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발간 비용을 부담했다고 회고했다.<br>
1952년 11월 총회에서는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8개로 결정했는데, 1952년 12월 29일에 열린 상무위원회에서 ‘공학연구소’ 추가 설치를 결정했다. 이로써 과학원 초기 연구조직은 9개 연구소와 43개 연구실 및 편찬실로 구성되었다.
+
“1934年 初夏에 朝鮮語學會(評議員會)의 主幹인 故 李允宰 氏가 漢城圖書株式會社의 意思 傳達이라 하여 우리들에게 먼저 學會를 조직하고 學術誌를 편찬하게 되면 活版所를 가진 自己네가 物質的으로 負擔하겠노라는 好誼를 표시하여 왔다. 생각컨대 이는 실상 李允宰 氏의 권고와 교섭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br>
<br/><br/>
+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br>
<표> 과학원 연구소 현황(1952~1953)<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7쪽.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11~212쪽.</ref>  
+
<br>
 +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을 담당했다. 그가 『한글』을 주간한 것은 1934년 4월(11호)에서 1937년 5월(45호)까지였고, 인쇄소가 바로 한성도서주식회사였다. 인쇄비가 밀리자 이윤재는 자신이 편집한 『문예독본』의 판권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넘길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br>
 +
(박용규(2013),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역사공간, 85~86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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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학회 발기인인 이선근이 한성도서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이었다는 점도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후원을 얻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霞城李瑄根博士古稀紀念論文集刊行委員會(1974), 『韓國學論』, 형설출판사, 11쪽) 한성도서의 전무 한규상도 진단학회의 찬조회원이 되었다.<br>
 +
결국 이윤재·이선근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창간호 발행비용을 제공했지만, 이는 순수 전문학술지여서 전혀 대중성이 없었다. 창간호 발행 이후 한성도서주식회사는 발을 뺐고, 그 이후는 찬조회원(윤치호·김성수·김연수·윤보선·방응모·윤치창·최선익·이완영), 이병도·이인영·노익형·최규동 등의 사재로 충당되었다. 진단학보의 1회 발행비용은 200~300원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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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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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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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인은 총 24명이었다. 위원은 편집위원 겸 임원을 겸하는 자리였는데, 출입이 있으나 모두 합하면 17명이었다. 또한, 진단학보 논문투고자는 총 21인(78편)이었다. 이 가운데 중복을 제외하면 총 36인이 집계되는데, 이들은 진단학회의 주력이자 학문적 동력을 제공한 ‘적극 회원’으로 볼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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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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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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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별로 보면 역사 11명, 국문학 6명, 국어학 5명, 민속학 3명, 고고학 2명, 미술사 1명, 사회학 1명, 불교사 1명, 베트남문학 1명, 일본문학 1명, 윤리학 1명, 종교 1명, 경제 1명, 철학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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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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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별로는 경성제대 14명, 와세다대 10명, 도쿄제대 1명, 교토제대 1명, 다이쇼대 1명 등 일본의 제국대학 및 사립대학 출신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일본 이외에는 미국 예일대 1명, 오스트리아 빈대 1명, 스위스 프리부르대 1명, 중국 베이징대 1명 등이 있었다.<br>
 +
후일 이들 가운데서 서울대 교수 15명, 동국대 교수 3명, 연대 교수 2명,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낸 사람이 6명 나왔다.<br>
 +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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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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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41명의 찬조회원은 1930~40년대 한국 사회·문화계의 대표적인 저명인사였다. 1930~4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학술·문화계의 정수분자를 거의 망라한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br>
 +
(민현구(2012), 「두계 이병도의 수학과정과 초기 학술활동」, 『진단학보』 116, 8~9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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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기인====
 +
<br>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
<span style="color:#6A5ACD">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span>
!style="width:10%"| 연구소 || style="width:10%"| 소장 || style="width:10%"| 연구실 수 || style="width:30%"| 연구실|| style="width:20%"| 연구사 상황|| style="width:10%"| 부속시설|| style="width:10%"| 소재지
+
{| class="wikitable sortable"
 +
! 이름 !!        생몰년 !!        학력(졸업연도) !! 전공 !!          비고
 
|-
 
|-
| 연구소 || 소장 || 연구실 수 || 연구실 || 연구사 상황 || 부속 기수 || 소재지
+
| 고유섭 高裕燮 || 1905~1944 || 경성제대(1930) || 미술사 || 사망(1944)
 
|-
 
|-
| 물리수학연구소 || 김지정 || 3 || 수학연구실, 실험물리연구실, 이론물리연구실 || 전임·겸임 연구사(9명), 보조성원 확보 || 도서실, 공작부 || 평남 순천(1지구)
+
| 김두헌 金斗憲  || 1903~1981 || 도쿄제대(1929) || 윤리학 || 서울대 교수
 
|-
 
|-
| 화학연구소 || 려경구 || 7 || 일반화학연구실, 생물화학연구실, 고분자화학연구실, 분석화학연구실, 연료화학연구실, 유기합성연구실, 건재화학연구실 || 겸임연구사(화학건재공업성 중앙연구소)<br/>리승기 연구시작 || 도서실, 공작부<br/>청수화학공장에 있는 화학건재공업성(화학공업성으로 이름 바꿈) 중앙연구소 설비 활용" || 평북 삭주군(3지구)
+
| 김상기 金庠基 || 1901~1977 || 早稻田大(1931) || 역사학(동양사) || 서울대 교수
 
|-
 
|-
| 공학연구소 || 김인식 || 6 || 지질연구실, 광업연구실, 금속연구실, 기계연구실, 전기연구실, 건설연구실 || 전임연구사(11명), 겸임연구사(14명), 보조성원(14명) 확보 || 도서실. 실험실 거의 갖추지 못함. || 평북 피현군(2지구)
+
| 김태준 金台俊 || 1905~1950 || 경성제대(1931) || 국문학사 || 사망(1950)
 
|-
 
|-
| 농학연구소 || 계응상 || 7 || 생물학연구실, 농산학연구실, 축산수의학연구실, 잠학연구실, 농림화학연구실, 림산학연구실, 수산학연구실 || 계응상 연구시작 || 시험장, 동물실, 도서실 || 평북 정주와 차령관(2지구)
+
| 김효경 金孝敬 || 1904~? || 大正大(1932) || 종교학·민속학 || 동국대교수, 납북
 
|-
 
|-
| 의학연구소 || 이호림 || 7 || 실험의학연구실, 임상의학연구실, 위생학연구실, 생약학연구실, 제약학연구실, 군진 내과학 연구실, 군진 외과학 연구실 || 처음부터 연구실 실장과 연구사들의 절반 이상을 전임, 겸임으로 해결 || 다른 대학과 병원, 야전병원 활용 || 평북 의주, 영변, 정주(2지구)
+
| 문일평 文一平 || 1888~1939 || 早稻田大(1911입) || 역사학 || 사망(1939)
 
|-
 
|-
| 경제법학연구소 || 김광진 || 6 || 정치경제학연구실, 조선인민경제연구실, 외국경제연구실, 법학연구실 등 || 겸임연구사(8명), 보조성원 겨우 확보 || 도서실 || 평남 순천군(1지구)
+
| 박문규 朴文奎 || 1906~1971 || 경성제대(1930) || 경제사 || 월북, 김일성대 교수
 
|-
 
|-
| 역사연구소 || 박시형 || 3 || 조선고대사연구실, 조선중세사연구실, 조선근세 및 최근세사연구실, 자료편찬실 || 전임, 겸임 연구사(8명), 상급 편찬원(4명), 보조성원 확보 || 도서실<br/>정치경제학 아까데미야 역사연구소가 이관된 것." || 평남 순천군(1지구)
+
| 백낙준 白樂濬 || 1895~1985 || 예일대(1927) || 철학(교회사)박사 || 경성대 총장, 연희대 총장
 
|-
 
|-
| 물질문화사연구소 || 도유호 || 3 || 고고학연구실, 민족학연구실, 미술사연구실 || 연구사(3명) || 도서실. || 중앙역사박물관(평양)
+
| 손진태 孫晉泰  || 1900~? || 早稻田大(1927) || 민속학 || 서울대 교수, 납북
|-
 
| 조선어·조선문학연구소 || 리극로 || 3 || 조선어학연구실, 조선문학연구실, 사전편찬실 || 언어학연구실: 겸임연구사(7명), 보조성원<br/>사전편찬실: 상급편찬원(4명), 보조성원 || 정치경제학 아까데미야 조선언어학연구소가 이관된 것 || 평남 승호군(1지구)
 
|-
 
| 도서관 ||  ||  ||  ||  ||  || 모란봉 중앙역사박물관 청사의 일부 사용
 
|}
 
 
 
<br/>
 
===제2기(1956~1958)===
 
<br/><br/>
 
====상무위원회====
 
<br/>
 
<표> 과학원 제2기 상무위원회(1956년)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style="width:30%"| 직위 || style="width:70%"| 이름 및 전공 
 
 
|-
 
|-
| 위원장 || 백남운(경제학)
+
| 송석하 宋錫夏  || 1904~1948 || 동경상과대 (1922입) || 민속학 || 서울대교수, 사망(1948)
 
|-
 
|-
| 부위원장 || 최삼열(화학, 1대 부원장)
+
| 신석호 申奭鎬 || 1904~1981 || 경성제대(1929) || 역사학 || 조선사편수회, 고려대 교수
 
|-
 
|-
| 서기장 || 신건희(물리학)
+
| 우호익 禹浩翊 || 1897~1983 || 早稻田大(1927) || 역사학 || 숭실대 교수
 
|-
 
|-
| 기타위원 || 홍명희(문학, 1대 원장), 장주익(경제학, 1대 서기장), 려경구(화학)
+
| 유홍렬 柳洪烈 || 1911~1995 || 경성제대(1935) || 역사학 || 서울대 교수
 
|-
 
|-
| 부문위원장 || 사회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청원(후보원사, 역사학), 자연 및 기술과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리승기(원사, 공업화학), 의학 부문위원회 위원장: 최명학(원사, 외과학)
+
| 이병기 李秉岐  || 1891~1968 || 한성사범(1913) || 국문학(시조) || 서울대 교수
|}
 
<br/>
 
예정보다 2개월 늦은 1956년 1월에 과학원 원장은 [[홍명희]]에서 [[백남운]]으로 교체되었고 21일에 열린 ‘4차 과학원 총회’에서 2기 상무위원회가 구성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6쪽.</ref> 백남운은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교원을 지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1948년 9월부터 1956년 1월까지 내각 교육상을 지냈다. 서기장 [[신건희]]는 [[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원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공학부장을 맡았고 월북 과학자가 중심이 돼 설립된 [[흥남공업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부위원장과 부문 위원장은 유임됐다.<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7쪽.</ref><br/>
 
2기 상무위원회 기간 동안 과학원 본사 청사가 마련되었다. 1956년 11월 착공하여 1958년 상반기에 완공하였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ref>
 
<br/><br/>
 
====소속 연구소====
 
<br/>
 
<표> 과학원 연구소 현황(1956)<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5쪽.</ref>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style="width:30%"| 연구소 || style="width:70%"| 소장 
 
 
|-
 
|-
| 연구소 || 소장
+
| 이병도 李丙燾  || 1896~1989 || 早稻田大(1919) || 역사학 ||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
 
|-
| 역사연구소 || [[김석형]]
+
| 이상백 李相佰 || 1904~1966 || 早稻田大(1927) || 사회학(사회사) || 서울대 교수
 
|-
 
|-
| 고고학·민속학연구소 || 도유호
+
| 이선근 李瑄根 || 1905~1983 || 早稻田大(1929) || 역사학(서양사) || 서울대 교수
 
|-
 
|-
| 언어·문학연구소 || 김병제
+
| 이윤재 李允宰 || 1888~1943 || 北京大(1921입) || 국어학 || 옥사(1943)
 
|-
 
|-
| 경제법학연구소 || 윤행중
+
| 이은상 李殷相  || 1903~1982 || 早稻田大 (1925~27청강) || 국문학/역사학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
| 물리수학연구소 || 리재곤
+
| 이재욱 李在郁 || 1906~? || 경성제대(1931) || 국문학 || 총독부도서관, 납북
 
|-
 
|-
| 화학연구소 || 려경구
+
| 이희승 李熙昇 || 1896~1989 || 경성제대(1930) || 국어학 || 서울대 교수
 
|-
 
|-
| 공학연구소 || 김덕모
+
| 조윤제 趙潤濟  || 1904~1976 || 경성제대(1929) || 국문학사 || 서울대 교수
 
|-
 
|-
| 의약학연구소 || 최명학
+
| 최현배 崔鉉培 || 1894~1970 || 교토제대(1925) || 국어학 || 연세대 교수
 
|-
 
|-
| 생물학연구실 || 원홍구(겸임)
+
| 홍순혁 洪淳赫 || 1899~? || 早稻田大(1927) || 역사학(국어학) || 연세대 교수, 납북
 
|}
 
|}
<br/>
+
<br>
농학연구소가 농업성 직속 ‘[[농업과학연구원]]’으로 확대, 분리됨으로써 8개 연구소와 1개 독립연구실로 구성되었다. 각 연구소 소속 연구실에도 변화가 있었다. [[경제법학연구소]]는 남조선경제연구실을, [[력사연구소]]는 [[철학연구실]]을, [[언어문학연구소]]는 [[외국어문연구실]]을 새로 여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밖에 [[고전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자개혁위원회]]도 새로 설치되었다.<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93~9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ref>
 
<br/><br/>
 
  
===제3기(1959~1961)===  
+
====위원(1934~1939)====
<br/>
+
<span style="color:#6A5ACD">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span>
====상무위원회====
+
{| class="wikitable sortable"
<br/>
+
{| class="wikitable sortable"
1958년 11월 7일에 ‘과학원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고 3기 상무위원회와 부문위원회를 예정보다 앞서 조직했다. 총회, 상무위원회, 부문위원회 등의 역할구분이 명확해졌다. 원사나 후보원사, 명예원사 칭호를 박탈할 수 있는 조건을 명시한 조항이 들어간 것은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들이 연루된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창익]], [[리청원]], [[김두봉]], [[김정도]], [[김원규]], [[손군창]], [[최정환]] 등이 [[8월 전원회의 사건]]에 연루되어 과학원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김두봉]]은 원사 칭호를 박탈 당하였고, [[최창익]]과 [[이청원|리청원]]은 후보원사 칭호를 박탈당했다.<ref>백남운,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보고」, 『과학원 통보』 1958-1, 3~11쪽. 「과학 대열의 순결성을 위하여」, 『과학원 통보』 1958-3, 5~10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5쪽.</ref>
+
! 이름 !! 1934 !! 1936 !! 1937 !! 1939 !! 생몰년 !! 학력(졸업연도) !! 전공 !! 비고
<br/>
+
|-
<표> 과학원 3기 상무위원회(1959년)<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2쪽.</ref>  
+
| 고유섭 高裕燮 || || || ||ㅇ|| 1905~1944 || 경성제대(1930) || 미술사 || 사망(1944)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style="width:30%"| 직위 || style="width:70%"| 이름 및 전공 
 
 
|-
 
|-
| 위원장 || 백남운(경제학)
+
| 김두헌 金斗憲  || ||ㅇ||ㅇ||ㅇ|| 1903~1981 || 도쿄제대(1929) || 윤리학 || 서울대 교수
 
|-
 
|-
| 부위원장 || 박성욱(52.1. 지질광물학 학사)
+
| 김상기 金庠基 || || ||ㅇ||ㅇ|| 1901~1977 || 早稻田大(1931) || 역사학(동양사) || 서울대 교수
 
|-
 
|-
| 서기장 || 전두환(공학)
+
| 김태준 金台俊 ||ㅇ|| ||ㅇ|| || 1905~1950 || 경성제대(1931) || 국문학사 || 사망(1950)
 
|-
 
|-
| 위원 || 정준택(48.7. 공학 학사), 강영창(공학), 리승기(공학), 배기영, 강혜구(공학), 김광진, 도유호, 오동욱(공학), 김석형(55.3. 역사학 학사), 김덕모(공학)
+
| 서두수 徐斗銖 || || |||| || 1907~1994 || 경성제대(1930) || 일본문학 || 워싱턴주립대 교수
|}
 
<br/>
 
 
 
====부문 위원회와 소속 연구소====
 
<br/>
 
<표> 과학원 제3기 부문위원회(1959년)<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3쪽.</ref>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style="width:10%"| || style="width:30%"| 사회과학부문 || style="width:30%"| 자연과학부문 || style="width:30%"| 기술과학부문 
 
 
|-
 
|-
| 위원장 || 김석형(상무위원) || 박성욱(상무위 부위원장) || 김덕모(상무위원)
+
| 손진태 孫晉泰  ||ㅇ||ㅇ||ㅇ||ㅇ|| 1900~? || 早稻田大(1927) || 민속학 || 서울대 교수,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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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위원장 || 남춘화 || 최재오 || 한순덕
+
| 송석하 宋錫夏  || || ||ㅇ||ㅇ|| 1904~1948 || 동경상과대 (1922입) || 민속학 || 서울대교수, 사망(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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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 || 홍명희(문학 원사), 백남운(경제학 원사, 상무위원), 리극로(언어학 후보원사), 박시형(역사원사), 김광진(경제학 후보원사, 상무위원), 도유호(고고학 후보원사, 상무위원), 배기영(상무위원), 김경인, 김병제, 김한주, 채희정(경제학, 54.2. 경제학 학사), 김시중, 황장엽(53.10. 철학 학사), 김후선 || 도상록(물리학 원사), 김지정(수학 원사), 신건희(물리학 후보원사), 원홍구(생물학 후보원사), 신상국, 한기만, 박태훈, 리세훈, 김재길(55.6. 화학 학사), 최여구 || 정준택(상무위원), 강영창(상무위원), 리승기(화학 원사, 상무위원), 최삼열(화학 원사), 김인식(공학 후보원사), 전두환(서기장, 상무위원), 강혜구(상무위원), 최성세, 오동욱(상무위원), 곽대홍, 김정희(53.7. 건축학 학사), 김종성, 김응상(52.7. 공학 학사), 박인빈(53.11. 공학 학사), 박명초(53.11. 공학 학사), 리재우(55.10. 공학 학사), 최제식(54.11. 공학 학사), 김운집(김은집?, 54.4. 공학 학사), 송정기,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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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동 梁柱東 || || || |||| 1903~1977 || 早稻田大(1928) || 국문학사 ||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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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과학원 연구소 현황(1959)<ref>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2쪽.</ref>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width:100%;"
 
!style="width:30%"| 연구소 || style="width:70%"|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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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연구소 || 김석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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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렬 柳洪烈 || || ||ㅇ||ㅇ|| 1911~1995 || 경성제대(1935) || 역사학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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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민속학연구소 || 도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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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기 李秉岐  || ||ㅇ||ㅇ||ㅇ|| 1891~1968 || 한성사범(1913) || 국문학(시조)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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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문학연구소 || 김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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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도 李丙燾  ||ㅇ||ㅇ||ㅇ||ㅇ|| 1896~1989 || 早稻田大(1919) || 역사학 ||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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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법학연구소 || 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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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백 李相佰 || || || ||ㅇ|| 1904~1966 || 早稻田大(1927) || 사회학(사회사)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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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수학연구소 || 리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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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숭녕 李崇寧 || || || ||ㅇ|| 1908~1994 || 경성제대(1933) || 국어학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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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학연구소 || 려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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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재 李允宰 ||ㅇ|| || || || 1888~1943 || 北京大(1921입) || 국어학 || 옥사(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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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학연구소 || 김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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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영 李仁榮 || || || ||ㅇ|| 1930~? || 경성제대(1930) || 역사학 || 서울대 교수,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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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조사연구소 || 박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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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승 李熙昇 ||ㅇ|| ||ㅇ|| || 1896~1989 || 경성제대(1930) || 국어학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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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물학연구실 || 원홍구(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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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윤제 趙潤濟  ||ㅇ||ㅇ||ㅇ||ㅇ|| 1904~1976 || 경성제대(1929) || 국문학사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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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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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에 [[강영창]]이 과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2월 17일에 [[경제법학연구소]]와 [[언어문학연구소]] 등은 [[경제연구소]], [[법학연구소]], [[력사연구소]], [[철학연구소]], [[언어학연구소]], [[문학연구소]],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고전연구소]] 등 8개의 연구소를 가진 ‘[[사회과학원]]’으로 분리 독립되었다.<ref>『조선중앙연감 1964』(조선중앙통신사, 1964), 207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331쪽.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3~23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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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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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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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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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Instit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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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2일 (수) 10:22 기준 최신판

창립과 활동



창립과 의의


진단학회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병도, 손진태, 조윤제, 이윤재, 송석하 등이었는데, 역사학자·국어국문학자·민속학자가 힘을 합친 것이었다. 조윤제는 경성제대 조선어문학전공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진단학회의 예비모임을 자택에서 열 정도로 진단학회 성립과 운영에서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진단학회의 성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1934. 5. 송석하, 손진태, 이병도, 이윤재 등 제동지와 협의하여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니, 이것은 사실상 당시의 조선민속학회의 『조선민속』과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을 통합한 종합학술지다.”
(조윤제(1964), 「(趙潤濟自編) 陶南年譜」,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事業會, 『陶南 趙潤濟博士 回甲紀念論文集』, 신진사, 17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5쪽)

진단학회 설립, 진단학보 발간을 주도한 것은 역사학자 이병도다.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주도한 것은 그 사무소를 자신의 집에 둔 데서 알 수 있다.
(「彙報 震檀學會創立」, 『震檀學報』 1, 1934.12, 224쪽)

1920년 이병도는 염상섭, 김억 등이 주도한 문예지 『廢墟』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아카데미즘 역사학의 태두로서는 뜻밖의 경력이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로 된 잡지를 발간하는 의의를 일찍이 깨닫고 있던 셈이다. 권보드래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조선인들은 새롭게 형성된 ‘유사-사회’에서 ‘유사-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456쪽.)
이병도의 『震檀學報』 발간 역시 우리말과 글로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후식민(postcolonial) 주체의 싹을 틔우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震檀學報』는 한국인이 주도하는 우리말로 된 학술지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震檀學報』 창간호 「휘보」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근래 조선(문화)을 연구하는 경향과 誠熱이 날로 높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慶賀에 견디지 못하는 바이나, 그런 경향과 誠熱이 조선인 자체에서보다 조선인 이외의 인사 간에 더 많고 큼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 스스로 냉정히 캐어볼 필요가 있지만, 어떻든 우리는 그런 연구까지 남에게 밀어 맡기어, 오직 그들의 노력과 성과만을 기다리고 힘입기를 바라는 자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힘이 빈약하고 연구가 拙劣할지라도, 自奮自進하야 또 서로 협력하야, 조선문화를 개척 발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의무와 사명을 가진 것이다. 어느 社會의 文化든지 그것을 眞實 且 正確히 檢討 認識하고, 또 이를 向上發達함에는 그 社會에 生을 受하고, 그 風俗 慣習中에서 자라나고, 그 言語를 말하는 社會의 사람의 努力과 誠熱에 期待함이 더 큰 까닭”이라고 적었다.
(「彙報 震檀學會創立」, 223~227쪽;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日政 中期까지도 우리 社會에는 아직 우리 손으로 된, 이렇다 할 權威 있는 學術誌가 없었다. 그래서 純粹 學術的인 論文은 부득불 外國 學術에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筆者도 그러한 類의 論文은 일찌기 日本東大 中心의 《史學雜誌》 및 《東洋學報》와 또 朝鮮史編修會의 《靑丘學叢》 등에 발표하였던 것이다. 1930年을 前後하여 京城帝大 出身 중에 國學 同志들이 생기게 되고, 또 日本 留學에서 돌아오는 同志들이 해마다 늘게 되자 우리들 사이에는 자연히 國學 中心의 學會와 學術誌의 必要性을 절실히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이러한 宿志는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1934년 『震檀學報』 창간 이후 이병도의 일본어 글쓰기는 중단된다. 차마 우리말 논문을 보낼 수 없었을 『稻葉博士還曆紀念滿鮮史論叢』(1938)에는 한문으로 지은 글을 보탰다.
(「斗溪先生 論著目錄」, 『歷史家의 遺香』, 501〜517쪽, 참조.).
일본어 글쓰기 회피가 그저 우연이 아닌 의식적인 실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震檀學報』는 오늘날 한국어로 된 인문학을 가능하게 한 원점이었다.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진단'이라는 이름


이병도는 창립총회 당시 학회 명칭을 정하는데 ‘朝鮮’이나 ‘靑丘’ 같은 좋은 표현을 이미 일본인들에게 선점당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제안에 의해 결국 ‘震檀’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학회명을 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창립된 朝鮮史學會나 청구학회 등을 의식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144쪽)
‘진단’은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을 가리켰다. ‘진단’의 뜻에 대해서는 진단학보 창간호에 실린 이병도의 「震檀辨」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해당 글에 따르면, ‘震檀’은 본래 중국을 지칭하는 梵語名 ‘Cinisthaua(泰人의 化地)’에 대한 음역어로 불교 전적에 많이 쓰이다가 동방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음역어인 만큼 다양한 표기로 나타났는데 그중 ‘震旦’으로 쓴 예가 가장 많았지만 조선에서는 太祖의 이름인 ‘李旦’과 ‘旦’자가 겹치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 ‘檀’으로 바꾸어 쓴 것이며, 궁예가 후고구려의 국호로 사용한 뒤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 秘記를 통해 이 명칭이 이어져 내려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1쪽).
이병도는 ‘震檀’은 도참사상에서 유래한 ‘大東方(今日의 滿鮮을 包含한 當義의 朝鮮)’을 가리키는 ‘秘稱’ 혹은 ‘讖緯家 理想의 大朝鮮에 對한 別名’이라고 설명했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3쪽).
이병도는 “吾人의 目的하는 硏究의 範圍가 朝鮮을 中心으로 하야 隣近 諸國을 包括한 以上, 震旦을 俠義로 取하지 않고 廣義로 거의 東洋과 같은 뜻으로 取한 것”이라고 밝혔다(李丙燾, 「震檀辨」, 『震檀學報』 1, 174쪽).

진단학회와 진단학보가 의식한 일본인 주도의 청구학회, 청구학총의 ‘청구’도 실은 ‘진단’과 비슷한 뜻을 지녔다. 靑丘學叢 창간호 휘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따라서 역사·고고·토속·사회·언어·문학·종교·미술 등 각 방면에 걸친 업적은 해마다 깊어져갔으나, 이들 연구의 결과를 硏鑽琢磨할 통일적인 기관이 없었던 것은 큰 유감이었다. 또한 일반에 그 성과를 보급하고 교육상의 참고자료로 제공하는 일이 현재 가장 절실한 요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 이러한 기도는 시도되지 않았다. 이번에 경성제국대학·조선총독부 및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와 기타 동지들이 노력하여 ‘청구학회’를 조직한 것은 실제로 상술한 결함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극동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靑丘라고 이름 지은 것은, 대저 청구가 동방의 나라의 汎稱이며 나아가 古來 조선의 異名이기도 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계간잡지 청구학총을 간행하여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연구자료 및 저술을 출판하고, 강연 또는 강습회를 개최하고, 연구 여행을 계획하며, 기타 학계의 진전에 동반하여 점차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그 목적의 달성을 기할 것이다.”
(「彙報」, 『靑丘學叢』 1, 1930.8., 157~158쪽; 조범성(2021), 「1930년대 靑丘學會의 설립과 활동」, 『민족운동사연구』 107, 90~91쪽; 安禮悧, 「20세기 국어학과 진단학회」, 『진단학보』 139, 2022.12.)

재정


이병도는 이윤재의 주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발간 비용을 부담했다고 회고했다.
“1934年 初夏에 朝鮮語學會(評議員會)의 主幹인 故 李允宰 氏가 漢城圖書株式會社의 意思 傳達이라 하여 우리들에게 먼저 學會를 조직하고 學術誌를 편찬하게 되면 活版所를 가진 自己네가 物質的으로 負擔하겠노라는 好誼를 표시하여 왔다. 생각컨대 이는 실상 李允宰 氏의 권고와 교섭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병도(1984), 「진단학회 50년 회고: 창립에서 광복까지」, 『진단학보』 57, 217쪽)

이윤재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을 담당했다. 그가 『한글』을 주간한 것은 1934년 4월(11호)에서 1937년 5월(45호)까지였고, 인쇄소가 바로 한성도서주식회사였다. 인쇄비가 밀리자 이윤재는 자신이 편집한 『문예독본』의 판권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넘길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박용규(2013),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역사공간, 85~86쪽)
진단학회 발기인인 이선근이 한성도서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이었다는 점도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후원을 얻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霞城李瑄根博士古稀紀念論文集刊行委員會(1974), 『韓國學論』, 형설출판사, 11쪽) 한성도서의 전무 한규상도 진단학회의 찬조회원이 되었다.
결국 이윤재·이선근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창간호 발행비용을 제공했지만, 이는 순수 전문학술지여서 전혀 대중성이 없었다. 창간호 발행 이후 한성도서주식회사는 발을 뺐고, 그 이후는 찬조회원(윤치호·김성수·김연수·윤보선·방응모·윤치창·최선익·이완영), 이병도·이인영·노익형·최규동 등의 사재로 충당되었다. 진단학보의 1회 발행비용은 200~300원이었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7쪽)



사람들


발기인은 총 24명이었다. 위원은 편집위원 겸 임원을 겸하는 자리였는데, 출입이 있으나 모두 합하면 17명이었다. 또한, 진단학보 논문투고자는 총 21인(78편)이었다. 이 가운데 중복을 제외하면 총 36인이 집계되는데, 이들은 진단학회의 주력이자 학문적 동력을 제공한 ‘적극 회원’으로 볼 수 있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28쪽)

전공별로 보면 역사 11명, 국문학 6명, 국어학 5명, 민속학 3명, 고고학 2명, 미술사 1명, 사회학 1명, 불교사 1명, 베트남문학 1명, 일본문학 1명, 윤리학 1명, 종교 1명, 경제 1명, 철학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쪽)

대학별로는 경성제대 14명, 와세다대 10명, 도쿄제대 1명, 교토제대 1명, 다이쇼대 1명 등 일본의 제국대학 및 사립대학 출신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일본 이외에는 미국 예일대 1명, 오스트리아 빈대 1명, 스위스 프리부르대 1명, 중국 베이징대 1명 등이 있었다.
후일 이들 가운데서 서울대 교수 15명, 동국대 교수 3명, 연대 교수 2명,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낸 사람이 6명 나왔다.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1~132쪽)

41명의 찬조회원은 1930~40년대 한국 사회·문화계의 대표적인 저명인사였다. 1930~4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학술·문화계의 정수분자를 거의 망라한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현구(2012), 「두계 이병도의 수학과정과 초기 학술활동」, 『진단학보』 116, 8~9쪽;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10, 2016.6, 134쪽)

발기인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

이름 생몰년 학력(졸업연도) 전공 비고
고유섭 高裕燮 1905~1944 경성제대(1930) 미술사 사망(1944)
김두헌 金斗憲 1903~1981 도쿄제대(1929) 윤리학 서울대 교수
김상기 金庠基 1901~1977 早稻田大(1931) 역사학(동양사) 서울대 교수
김태준 金台俊 1905~1950 경성제대(1931) 국문학사 사망(1950)
김효경 金孝敬 1904~? 大正大(1932) 종교학·민속학 동국대교수, 납북
문일평 文一平 1888~1939 早稻田大(1911입) 역사학 사망(1939)
박문규 朴文奎 1906~1971 경성제대(1930) 경제사 월북, 김일성대 교수
백낙준 白樂濬 1895~1985 예일대(1927) 철학(교회사)박사 경성대 총장, 연희대 총장
손진태 孫晉泰 1900~? 早稻田大(1927) 민속학 서울대 교수, 납북
송석하 宋錫夏 1904~1948 동경상과대 (1922입) 민속학 서울대교수, 사망(1948)
신석호 申奭鎬 1904~1981 경성제대(1929) 역사학 조선사편수회, 고려대 교수
우호익 禹浩翊 1897~1983 早稻田大(1927) 역사학 숭실대 교수
유홍렬 柳洪烈 1911~1995 경성제대(1935) 역사학 서울대 교수
이병기 李秉岐 1891~1968 한성사범(1913) 국문학(시조) 서울대 교수
이병도 李丙燾 1896~1989 早稻田大(1919) 역사학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이상백 李相佰 1904~1966 早稻田大(1927) 사회학(사회사) 서울대 교수
이선근 李瑄根 1905~1983 早稻田大(1929) 역사학(서양사) 서울대 교수
이윤재 李允宰 1888~1943 北京大(1921입) 국어학 옥사(1943)
이은상 李殷相 1903~1982 早稻田大 (1925~27청강) 국문학/역사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재욱 李在郁 1906~? 경성제대(1931) 국문학 총독부도서관, 납북
이희승 李熙昇 1896~1989 경성제대(1930) 국어학 서울대 교수
조윤제 趙潤濟 1904~1976 경성제대(1929) 국문학사 서울대 교수
최현배 崔鉉培 1894~1970 교토제대(1925) 국어학 연세대 교수
홍순혁 洪淳赫 1899~? 早稻田大(1927) 역사학(국어학) 연세대 교수, 납북


위원(1934~1939)

정병준, 식민지 관제 역사학과 근대 학문으로서의 한국역사학의 태동: 진단학회를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110, 2016) 129쪽 표를 재구성.

이름 1934 1936 1937 1939 생몰년 학력(졸업연도) 전공 비고
고유섭 高裕燮 1905~1944 경성제대(1930) 미술사 사망(1944)
김두헌 金斗憲 1903~1981 도쿄제대(1929) 윤리학 서울대 교수
김상기 金庠基 1901~1977 早稻田大(1931) 역사학(동양사) 서울대 교수
김태준 金台俊 1905~1950 경성제대(1931) 국문학사 사망(1950)
서두수 徐斗銖 1907~1994 경성제대(1930) 일본문학 워싱턴주립대 교수
손진태 孫晉泰 1900~? 早稻田大(1927) 민속학 서울대 교수, 납북
송석하 宋錫夏 1904~1948 동경상과대 (1922입) 민속학 서울대교수, 사망(1948)
양주동 梁柱東 1903~1977 早稻田大(1928) 국문학사 동국대 교수
유홍렬 柳洪烈 1911~1995 경성제대(1935) 역사학 서울대 교수
이병기 李秉岐 1891~1968 한성사범(1913) 국문학(시조) 서울대 교수
이병도 李丙燾 1896~1989 早稻田大(1919) 역사학 편집겸발행인 서울대 교수
이상백 李相佰 1904~1966 早稻田大(1927) 사회학(사회사) 서울대 교수
이숭녕 李崇寧 1908~1994 경성제대(1933) 국어학 서울대 교수
이윤재 李允宰 1888~1943 北京大(1921입) 국어학 옥사(1943)
이인영 李仁榮 1930~? 경성제대(1930) 역사학 서울대 교수, 납북
이희승 李熙昇 1896~1989 경성제대(1930) 국어학 서울대 교수
조윤제 趙潤濟 1904~1976 경성제대(1929) 국문학사 서울대 교수

데이터





참고문헌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