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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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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3년 백남운이 일본어로 쓴 한국 고대 사회경제사. 일본 도쿄 가이조사(改造社)에서 일본어로 간행되었다. A5판, 462쪽. 원시 사회부터 삼국시대까지 한국의 고대 경제사를 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서술했다. 조선 특수성론이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을 비판하고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이 한국사에도 관철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단순 신화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삼국시대가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1937년 이 책의 속편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다룬 『[[조선봉건사회경제사]](朝鮮封建社會經濟史)』를 같은 가이조샤에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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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3년 백남운이 일본어로 쓴 한국 고대 사회경제사. 일본 도쿄 가이조사(改造社)에서 일본어로 간행되었다. A5판, 462쪽. 원시 사회부터 삼국시대까지 한국의 고대 경제사를 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서술했다. 조선 특수성론이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을 비판하고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이 한국사에도 관철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단군 신화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삼국시대가 그리스-로마와 같은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1937년 이 책의 속편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다룬 『[[조선봉건사회경제사]](朝鮮封建社會經濟史)』를 같은 가이조샤에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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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개조사경제학월보 0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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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編輯便」, 『改造社 經濟學月報』 56, 1933.9.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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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예정대로 조선 연희전문학교 교수 백남운 씨의 연구 성과 『조선사회경제사』를 배본 드립니다. 풍부한 자료를 구사하여 종래 학자와 다른 독자적인 입장에 서서 연토한 본서는 우리 나라 학계에 대한 계몽적 역할을 이루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하는 책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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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 개조사경제학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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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조선사회경제사
 
|페이지=조선사회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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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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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백남운(박광순 역), 『조선사회경제사』, 범우사, 198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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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북에서 한국어 번역은 출판되지 않았다. 남에서는 민주화 이후 월북 작가 해금, 남북 학술·문화 교류 기운 속에 여러 번역본이 출판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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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박광순 역), 『조선사회경제사』, 범우사, 1989.<br>
 
백남운(하일식 역), 『(백남운전집 1) 조선사회경제사』, 이론과 실천, 1994.<br>
 
백남운(하일식 역), 『(백남운전집 1) 조선사회경제사』, 이론과 실천, 1994.<br>
 
백남운(심우성 역), 『조선사회경제사: 부록 조선민족의 진로』, 동문선, 2004.<br>
 
백남운(심우성 역), 『조선사회경제사: 부록 조선민족의 진로』, 동문선, 200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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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 제2장 제1절을 전재했다.<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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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 제2장 제1절을 전재했다.<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23765 KCI 논문 원문 연결])</ref>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사회경제사 항목도 참조(<font color="blue" size="3">[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073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fon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사회경제사 항목도 참조(<font color="blue" size="3">[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073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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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한국사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백남운은 특수성론 비판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우리 선배’의 ‘특수사관’에 대해, 역사학파의 이데올로기를 수입하여 조선 문화사를 독자적인 소우주로 특수화한다고 비판했다(20쪽). ‘우리 선배’는 [[최남선]](崔南善)과 [[신채호]](申采浩)였다. 백남운은 “피정복군 스스로가 자기의 특수성을 고조하게 되면 그것은 이른바 갱생의 길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노예화의 사도(邪道)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했다(372쪽). 한편 이와 구별되는 ‘관제 특수성’이 존재한다며, [[와다 이치로]](和田一郞) 등 여러 어용학자의 ‘조선 특수 사정’ 이데올로기를 들었다. 전자가 신비적ㆍ감상적인 데 반하여 후자는 독점적ㆍ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닮은 꼴 특수성은 인류 사회 발전의 역사적 법칙의 공통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라고 비판했다(20쪽).<br>
 
|내용=한국사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백남운은 특수성론 비판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우리 선배’의 ‘특수사관’에 대해, 역사학파의 이데올로기를 수입하여 조선 문화사를 독자적인 소우주로 특수화한다고 비판했다(20쪽). ‘우리 선배’는 [[최남선]](崔南善)과 [[신채호]](申采浩)였다. 백남운은 “피정복군 스스로가 자기의 특수성을 고조하게 되면 그것은 이른바 갱생의 길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노예화의 사도(邪道)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했다(372쪽). 한편 이와 구별되는 ‘관제 특수성’이 존재한다며, [[와다 이치로]](和田一郞) 등 여러 어용학자의 ‘조선 특수 사정’ 이데올로기를 들었다. 전자가 신비적ㆍ감상적인 데 반하여 후자는 독점적ㆍ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닮은 꼴 특수성은 인류 사회 발전의 역사적 법칙의 공통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라고 비판했다(20쪽).<br>
백남운은 [[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에서 고대 사회ㆍ봉건 사회ㆍ부르주아 사회는 생산 관계의 총화이자 인류 역사에서 일정하고 특정한 발전 단계를 표시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법칙’에 따른 ‘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을 규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남운은 “조선 민족의 발전사는 그 과정이 아무리 아시아적일지라도 사회구성의 내면적 발전법칙 그 자체는 완전히 세계사적”이라고 주장했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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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은 [[칼 마르크스|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에서 고대 사회ㆍ봉건 사회ㆍ부르주아 사회는 생산 관계의 총화이자 인류 역사에서 일정하고 특정한 발전 단계를 표시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법칙’에 따른 ‘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을 규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남운은 “조선 민족의 발전사는 그 과정이 아무리 아시아적일지라도 사회구성의 내면적 발전법칙 그 자체는 완전히 세계사적”이라고 주장했다(22쪽).}}
  
 
==='''단군 신화의 비판적 이해'''===
 
==='''단군 신화의 비판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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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은 “전자의 경우 환상적인 독자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후자의 경우 합리주의적인 가상(假象)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27쪽). 백남운은 [[삼국유사]]와 [[세종실록]]에 실린 단군 신화 전문을 번역한 뒤, 전자에서 농업공산체의 붕괴과정을, 후자에서는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 및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읽어냈다(40쪽).}}
 
백남운은 “전자의 경우 환상적인 독자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후자의 경우 합리주의적인 가상(假象)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27쪽). 백남운은 [[삼국유사]]와 [[세종실록]]에 실린 단군 신화 전문을 번역한 뒤, 전자에서 농업공산체의 붕괴과정을, 후자에서는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 및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읽어냈다(40쪽).}}
  
==='''푸날루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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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의 연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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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원시 씨족사회 설명에서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과 미국 인류학자 [[모건]](Lewis H. Morgan)의 󰡔고대사회󰡕(1877)를 원용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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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원시 씨족사회 설명에서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엥겔스]](Friedrich Engels)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과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모건|모건]](Lewis H. Morgan)의 󰡔고대사회󰡕(1877)를 원용했다. <br>
 
가족의 발전은 혈연가족(군혼) → [[푸날루아 가족]] → 대우혼(對偶婚) 가족으로 설명했다. 푸날루아 가족은 모건이 40년간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족(Iroquois)을 관찰하여 발견한 것이다. 백남운은 같은 문중의 사위들이나 형제의 처들이 서로 ‘동서’라 부르는 사실이 우리나라에 푸날루아 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운의 화석’이라고 주장했다(64쪽). 한편 고대 중국의 푸날루아 가족 형태로서 ‘아혈족(亞血族) 결혼설’을 주창한 ‘지나(支那)의 마르크스주의 학자 [[궈모뤄]](郭沫若)’를 소개하고 그의 책 󰡔支那古代社會史論󰡕(1931, 󰡔中國古代社會硏究󰡕(1930)의 일본어판)을 각주에 인용했다(67쪽). <br>
 
가족의 발전은 혈연가족(군혼) → [[푸날루아 가족]] → 대우혼(對偶婚) 가족으로 설명했다. 푸날루아 가족은 모건이 40년간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족(Iroquois)을 관찰하여 발견한 것이다. 백남운은 같은 문중의 사위들이나 형제의 처들이 서로 ‘동서’라 부르는 사실이 우리나라에 푸날루아 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운의 화석’이라고 주장했다(64쪽). 한편 고대 중국의 푸날루아 가족 형태로서 ‘아혈족(亞血族) 결혼설’을 주창한 ‘지나(支那)의 마르크스주의 학자 [[궈모뤄]](郭沫若)’를 소개하고 그의 책 󰡔支那古代社會史論󰡕(1931, 󰡔中國古代社會硏究󰡕(1930)의 일본어판)을 각주에 인용했다(67쪽). <br>
 
신석기 시대 한반도와 일본의 생산력 차이를 설명하면서는 [[와타나베 요시미치]](渡部義通), 󰡔日本母系時代の硏究󰡕(1932)를 인용했다(89쪽). 와타나베는 궈모뤄와도 교류가 있던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신석기 시대 한반도와 일본의 생산력 차이를 설명하면서는 [[와타나베 요시미치]](渡部義通), 󰡔日本母系時代の硏究󰡕(1932)를 인용했다(89쪽). 와타나베는 궈모뤄와도 교류가 있던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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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궈모뤄]]의 󰡔[[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會硏究]]󰡕(1930)와 동시대성을 띠었다.<ref>백남운과 궈모뤄의 동시대성에 대해서는 洪宗郁, 「白南雲─普遍としての<民族=主体>─」, 趙景達 외 편, 󰡔講座 東アジアの知識人 4: 戦争と向き合って󰡕, 有志舎, 2014, 110~112쪽, 참조.</ref> 궈모뤄 역시 고대 중국에 푸날루아 가족 형태에 바탕한 원시 씨족사회와 순장이 행해진 노예제 사회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br>
 
|내용=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궈모뤄]]의 󰡔[[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會硏究]]󰡕(1930)와 동시대성을 띠었다.<ref>백남운과 궈모뤄의 동시대성에 대해서는 洪宗郁, 「白南雲─普遍としての<民族=主体>─」, 趙景達 외 편, 󰡔講座 東アジアの知識人 4: 戦争と向き合って󰡕, 有志舎, 2014, 110~112쪽, 참조.</ref> 궈모뤄 역시 고대 중국에 푸날루아 가족 형태에 바탕한 원시 씨족사회와 순장이 행해진 노예제 사회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br>
백남운은 1932년 6월 경성 YMCA에서 열린 ‘경제 대강연회’에서 “지나 문제로써 보편사관을 삼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말했는데,<ref>「朝鮮史觀樹立の提唱」, 『經濟硏究』 4, 1933.</ref> 아마도 곽말약을 의식한 언급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의 좌파 역사학 학술지 『역사학연구』 제3호 「〈學界動向〉最近の支那社會經濟史硏究」(志田不動麿記)에서도 『朝鮮社會經濟史』를 언급하면서 “흡사 저번에 곽말약이 중국 사학계에 준 충동보다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평가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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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은 1932년 6월 경성 YMCA에서 열린 ‘경제 대강연회’에서 “지나 문제로써 보편사관을 삼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말했는데,<ref>「朝鮮史觀樹立の提唱」, 『經濟硏究』 4, 1933.</ref> 아마도 궈모뤄를 의식한 언급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의 좌파 역사학 학술지 『역사학연구』 제3호 「〈學界動向〉最近の支那社會經濟史硏究」(志田不動麿記)에서도 『朝鮮社會經濟史』를 언급하면서 “흡사 저번에 궈모뤄가 중국 사학계에 준 충동보다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평가했다.<br>
 
백남운의 연구에 대해서는 ‘공식주의’ 특히 모건과 엥겔스의 도식적 적용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궈모뤄도 같은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본서의 성질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당당히 밝혔다.<ref>郭沫若([[후지에다 다케오|藤枝丈夫]]譯), 「原著者 序」, 󰡔支那古代社會論󰡕, 內外社, 1931.</ref>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조선 민족은 특수한 전통의 아들이 아니며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온 일반적 정상적인 인간”(23쪽)이라고 밝혔다. 궈모뤄 역시 󰡔중국고대사회연구󰡕에서 “중국인은 하느님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니다. (중략) 우리의 요구는 인간의 관점에서 중국 사회를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ref>郭沫若(藤枝丈夫譯), 「原著者 序」.</ref> 백남운과 궈모뤄의 보편사관은 <식민지=아시아>의 인간선언이었다.}}
 
백남운의 연구에 대해서는 ‘공식주의’ 특히 모건과 엥겔스의 도식적 적용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궈모뤄도 같은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본서의 성질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당당히 밝혔다.<ref>郭沫若([[후지에다 다케오|藤枝丈夫]]譯), 「原著者 序」, 󰡔支那古代社會論󰡕, 內外社, 1931.</ref>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조선 민족은 특수한 전통의 아들이 아니며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온 일반적 정상적인 인간”(23쪽)이라고 밝혔다. 궈모뤄 역시 󰡔중국고대사회연구󰡕에서 “중국인은 하느님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니다. (중략) 우리의 요구는 인간의 관점에서 중국 사회를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ref>郭沫若(藤枝丈夫譯), 「原著者 序」.</ref> 백남운과 궈모뤄의 보편사관은 <식민지=아시아>의 인간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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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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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3년 9월 동아일보는 “조선 경제사가 우리의 손으로 처음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우리 학계의 큰 공헌임은 물론이어니와 큰 충동을 줄 것”<ref>「白南雲氏新著 朝鮮經濟史」, 󰡔東亞日報󰡕 1933.9.9.</ref>이라고 기대를 드러냈다. 10월 16일에는 송진우, 백낙준, 여운형(呂運亨) 등이 발의한 출판 축하회가 열렸다. 다음날인 17일 동아일보는 사진까지 곁들여 출판 축하회 소식을 전하고, 백남운을 객원 논설위원으로 임명했다.<ref>윤덕영, 「위당 정인보의 교유 관계와 교유의 배경: 백낙준・백남운・송진우와의 교유 관계를 중심으로」, 󰡔東方學志󰡕 173, 2016.2., 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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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3년 9월 동아일보는 “조선 경제사가 우리의 손으로 처음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우리 학계의 큰 공헌임은 물론이어니와 큰 충동을 줄 것”<ref>「白南雲氏新著 朝鮮經濟史」, 󰡔東亞日報󰡕 1933.9.9.</ref>이라고 기대를 드러냈다. 10월 16일에는 [[송진우]], [[백낙준]], [[여운형]](呂運亨) 등이 발의한 출판 축하회가 열렸다. 다음날인 17일 동아일보는 사진까지 곁들여 출판 축하회 소식을 전하고, 백남운을 객원 논설위원으로 임명했다.<ref>윤덕영, 「위당 정인보의 교유 관계와 교유의 배경: 백낙준・백남운・송진우와의 교유 관계를 중심으로」, 󰡔東方學志󰡕 173, 2016.2., 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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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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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경성제대 조교수였던 末松保和는 ‘문헌 연구’의 불철저를 비판하고 ‘저자의 고증학적 정진’을 요구했다.<ref>「〈書評〉朝鮮社会経済史」, 『青丘学叢』 14, 1933.11.</ref> 旗田巍도 『歴史学研究』에 실은 서평에서 “저자가 미리 고정적인 단계론을 소지하고 이에 재료를 집어 넣은 공식주의적 경향이 보인다”고 지적했다.<ref>「〈書評〉白南雲著朝鮮社会経済史」, 『歴史学研究』 3, 1934.1.</ref> 조선 사회사 연구자로 경성제대 교원이었던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백남운의 책을 가리켜 “조선의 종합경제사는 이에 새로운 출발점을 부여받았다”<ref>四方博, 「朝鮮」, 社會經濟史學會社編, 󰡔社會經濟史學の發達󰡕, 岩波書店, 1944, 385쪽.</ref>고 평가했지만, ‘마르크스주의 공식의 고수’를 지적했다. 특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모건의 『고대사회』라는 “2대 명저의 직접적 감화에 의해 구성된 것은 명백”하다는 末松의 지적을 비롯해, 旗田나 四方로부터도 “모건, 엥겔스적 방법의 고정”이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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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경성제대 조교수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문헌 연구’의 불철저를 비판하고 ‘저자의 고증학적 정진’을 요구했다.<ref>「〈書評〉朝鮮社會經濟史」, 『靑丘學叢』 14, 1933.11.</ref>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도 『歷史學硏究』에 실은 서평에서 “저자가 미리 고정적인 단계론을 소지하고 이에 재료를 집어 넣은 공식주의적 경향이 보인다”고 지적했다.<ref>「〈書評〉白南雲著朝鮮社會經濟史」, 『歷史學硏究』 3, 1934.1.</ref> 조선 사회사 연구자로 경성제대 교원이었던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백남운의 책을 가리켜 “조선의 종합경제사는 이에 새로운 출발점을 부여받았다”<ref>四方博, 「朝鮮」, 社會經濟史學會社編, 󰡔社會經濟史學の發達󰡕, 岩波書店, 1944, 385쪽.</ref>고 평가했지만, ‘마르크스주의 공식의 고수’를 지적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엥겔스|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루이스 모건|모건]]의 『[[고대사회]]』라는 “2대 명저의 직접적 감화에 의해 구성된 것은 명백”하다는 스에마쓰(末松)의 지적을 비롯해, 하타다(旗田)나 시카타(四方)로부터도 “모건, 엥겔스적 방법의 고정”이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김광진과 논쟁'''===
 
==='''김광진과 논쟁'''===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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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보성전문학교 교원 김광진은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한 서평에서 백남운의 삼국시대 노예제 사회론에 의문을 던졌다.<ref>金洸鎭, 「新刊評 白南雲教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東亞日報󰡕, 1933.9.21. 백남운과 김광진의 논쟁에 대해서는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歷史學報󰡕 232, 2016.12., 307~309쪽, 참조.</ref> 백남운 역시 󰡔普專學會論集󰡕 제1호(1934.3.)에 실린 김광진의 논문 「이조 말기 조선의 화폐 문제」<ref>金洸鎭, 「李朝末期における朝鮮の貨幣問題」, 󰡔普專學會論集󰡕 1, 1934.3.</ref>를 문제 삼았다. 백남운은 김광진이 조선 시대의 ‘경제적 기구’를 “십구세기 말까지 「아세아적생산양식」으로서, 불역성(不易性)을 반복한 생산형태”로 본 데 대해, “상업자본도 발생되지 못한 구(舊)사회가 「이양선」의 침입으로 돌연히 붕괴되엇다는 견해는 지나(支那)에 침입한 구라파의 자본주의가 그 「아세아적 생산양식」과 봉착하엿다는 견해와 유형적(類型的) 견해이므로 도저히 찬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f>白南雲, 「普專學會論集에 對한 讀後感(完)」, 󰡔東亞日報󰡕, 1934.5.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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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보성전문학교 교원 [[김광진]]은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한 서평에서 백남운의 삼국시대 노예제 사회론에 의문을 던졌다.<ref>金洸鎭, 「新刊評 白南雲敎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東亞日報󰡕, 1933.9.21. 백남운과 김광진의 논쟁에 대해서는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歷史學報󰡕 232, 2016.12., 307~309쪽, 참조.</ref> 백남운 역시 󰡔普專學會論集󰡕 제1호(1934.3.)에 실린 김광진의 논문 「이조 말기 조선의 화폐 문제」<ref>金洸鎭, 「李朝末期における朝鮮の貨幣問題」, 󰡔普專學會論集󰡕 1, 1934.3.</ref>를 문제 삼았다. 백남운은 [[김광진]]이 조선 시대의 ‘경제적 기구’를 “십구세기 말까지 「아세아적생산양식」으로서, 불역성(不易性)을 반복한 생산형태”로 본 데 대해, “상업자본도 발생되지 못한 구(舊)사회가 「이양선」의 침입으로 돌연히 붕괴되엇다는 견해는 지나(支那)에 침입한 구라파의 자본주의가 그 「아세아적 생산양식」과 봉착하엿다는 견해와 유형적(類型的) 견해이므로 도저히 찬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f>白南雲, 「普專學會論集에 對한 讀後感(完)」, 󰡔東亞日報󰡕, 1934.5.4.</ref>
  
김광진은 1937년 1월 다시 백남운을 “조선사의 특수성과 그 구체적 발전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치 못하엿다”고 비판했다.<ref>金洸鎭, 「朝鮮歷史學 硏究의 前進을 爲하여」, 󰡔朝鮮日報󰡕, 1937.1.3.(新年號 其十五).</ref> 같은 해 2월에도 󰡔보전학회논집󰡕 제3호에 실은 논문에서, 백남운의 삼국시대 노예제 사회론을 비판하면서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공납제(貢納制)’였다고 주장했다.<ref>金洸鎭, 「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普專學會論集󰡕 3, 1937.2., 34쪽.</ref> 백남운은 1937년 11월에 출간한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高麗の部)󰡕 서문에서 김광진이 “「歴史教程」의 밀수입에 의해 모처럼 생장한 바의 선진적인 노예사회인 고구려의 역사발전계열을 압축함으로써, 예의 「봉건사」의 對幅을 그리고”<ref>白南雲, 「序文」,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高麗の部)―朝鮮社會經濟史(第二巻)―󰡕, 改造社, 1937, 2쪽.</ref>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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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은 1937년 1월 다시 백남운을 “조선사의 특수성과 그 구체적 발전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치 못하엿다”고 비판했다.<ref>金洸鎭, 「朝鮮歷史學 硏究의 前進을 爲하여」, 󰡔朝鮮日報󰡕, 1937.1.3.(新年號 其十五).</ref> 같은 해 2월에도 󰡔[[보전학회논집]]󰡕 제3호에 실은 논문에서, 백남운의 삼국시대 노예제 사회론을 비판하면서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공납제(貢納制)’였다고 주장했다.<ref>金洸鎭, 「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普專學會論集󰡕 3, 1937.2., 34쪽.</ref> 백남운은 1937년 11월에 출간한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高麗の部)󰡕 서문에서 김광진이 “「歷史敎程」의 밀수입에 의해 모처럼 생장한 바의 선진적인 노예사회인 고구려의 역사발전계열을 압축함으로써, 예의 「봉건사」의 對幅을 그리고”<ref>白南雲, 「序文」, 󰡔[[조선봉건사회경제사|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高麗の部)―朝鮮社會經濟史(第二卷)―󰡕, 改造社, 1937, 2쪽.</ref> 있다고 비판했다.
  
와타나베 요시미쓰(渡部義通)와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郞) 등이 집필한 󰡔日本歷史敎程 第一冊󰡕(1936.12.)은 일본 고대 사회에서 노예제적 존재를 추출하려고 노력했다. 백남운은 김광진이 “반도(半島) 노예사회의 생산적 「노예제」와 재외 노예인 「부곡제」 또는 「속민제」와의 상호회귀적인 연관 결합 관계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모른다고 비판했는데, 여기서 말한 ‘반도 노예사회’의 특징은 바로 와타나베가 주장하는 노비제와 부민제(部民制)가 ‘연관ㆍ결합’된 ‘일본형 노예제’의 그것이었다.<ref>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는 백남운이 와타나베 요시미쓰의 ‘일본 노예제’론을 비판한 것으로 분석했는데(309쪽) 잘못된 해석이었다.</ref> 그럼에도 백남운이 「歴史教程」을 ‘밀수입’해 노예제를 부정한다고 김광진을 비판한 것은, 하야카와 지로의 공납제론의 영향을 지적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야카와가 󰡔日本歷史敎程 第一冊󰡕에 참여한 것을 놓고 자설을 수정하여 노예제론을 인정한 결과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실제 서술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뚜렷했다. 하야카와는 󰡔日本歷史敎程 第二冊󰡕(1937.6.)에는 참여하지 않았다.<ref>田中聡, 「転機としての󰡔日本歴史教程󰡕」, 63~8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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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요시미쓰]](渡部義通)와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郞) 등이 집필한 󰡔日本歷史敎程 第一冊󰡕(1936.12.)은 일본 고대 사회에서 노예제적 존재를 추출하려고 노력했다. 백남운은 김광진이 “반도(半島) 노예사회의 생산적 「노예제」와 재외 노예인 「부곡제」 또는 「속민제」와의 상호회귀적인 연관 결합 관계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모른다고 비판했는데, 여기서 말한 ‘반도 노예사회’의 특징은 바로 와타나베가 주장하는 노비제와 부민제(部民制)가 ‘연관ㆍ결합’된 ‘일본형 노예제’의 그것이었다.<ref>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는 백남운이 [[와타나베 요시미쓰]]의 ‘일본 노예제’론을 비판한 것으로 분석했는데(309쪽) 잘못된 해석이었다.</ref> 그럼에도 백남운이 「歷史敎程」을 ‘밀수입’해 노예제를 부정한다고 김광진을 비판한 것은, 하야카와 지로의 공납제론의 영향을 지적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야카와가 󰡔日本歷史敎程 第一冊󰡕에 참여한 것을 놓고 자설을 수정하여 노예제론을 인정한 결과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실제 서술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뚜렷했다. 하야카와는 󰡔日本歷史敎程 第二冊󰡕(1937.6.)에는 참여하지 않았다.<ref>田中聡, 「転機としての󰡔日本歴史教程󰡕」, 63~80쪽.</ref>
  
김광진은 1928년에 백남운과 같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조수를 거쳐 1932년에 보성전문학교에 부임했다. 식민지 조선은 물론 초기 북한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주도하게 되는 김광진의 연구가 첫선을 보인 것은 바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한 서평이었다. 백남운과 김광진의 논쟁은 노예제 사회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자본주의 맹아론 등 해방 후 남북한 학계로 이어지는 역사학의 주요 쟁점을 포함했다. 어찌 보면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촉발한 논쟁 과정에서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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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은 1928년에 백남운과 같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조수를 거쳐 1932년에 [[보성전문학교]]에 부임했다. 식민지 조선은 물론 초기 북한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주도하게 되는 김광진의 연구가 첫선을 보인 것은 바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한 서평이었다. 백남운과 김광진의 논쟁은 노예제 사회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자본주의 맹아론]] 등 해방 후 남북한 학계로 이어지는 역사학의 주요 쟁점을 포함했다. 어찌 보면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촉발한 논쟁 과정에서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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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원과 논쟁'''===
 
==='''이청원과 논쟁'''===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ref>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re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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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에 참여한 이청원은 1934년에 검거되었다가 풀려난 뒤 역사학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첫 글은 역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 대한 서평이었다.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로 보고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봉건제=아시아적 생산양식(통일신라~이조)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백남운의 역사상과 동일했다. 또한, 사노 마나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적 한국사 인식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을 지지했다.<ref>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読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참조. 이청원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洪淳權, 「1930년대 한국의 맑스주의 역사학과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 󰡔東亞論叢󰡕 31, 1994.2.; 広瀬貞三, 「李清源の政治活動と朝鮮史研究」,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 7, 2004.3.;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38, 2017.10, 참조.</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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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에 참여한 [[이청원]]은 1934년에 검거되었다가 풀려난 뒤 역사학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첫 글은 역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 대한 서평이었다.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로 보고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봉건제=아시아적 생산양식(통일신라~이조)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백남운의 역사상과 동일했다. 또한, 사노 마나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적 한국사 인식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을 지지했다.<ref>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讀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참조. 이청원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洪淳權, 「1930년대 한국의 맑스주의 역사학과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 󰡔東亞論叢󰡕 31, 1994.2.; 広瀬貞三, 「李淸源の政治活動と朝鮮史研究」,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 7, 2004.3.;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38, 2017.10, 참조.</ref><br>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던 이청원은 1936년 들어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전환한다. 이청원은 1936년 4월 󰡔朝鮮社會史讀本󰡕을 펴냈는데,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고려)→봉건제(이조)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ref>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ref> 이 책의 특징은 고려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 없이 한국사를 정체성론적으로 이해한 데 있었다. 이청원은 1937년에 󰡔조선사회사독본󰡕에 근대사 부분을 추가하여 󰡔조선역사독본󰡕을 펴냈다. 여기서는 “이양선 출몰 이전 아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을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선 사회는 한번 외국 자본주의의 강요적 개국에 부딪히자마자 그 봉건적 구성은 갑자기 취약하게도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ref>李淸源, 󰡔朝鮮歷史讀本󰡕, 白揚社, 1937, 311쪽.</ref> 백남운과 이청원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던 김광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바탕한 정체성론과 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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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던 이청원은 1936년 들어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전환한다. 이청원은 1936년 4월 󰡔[[조선사회사독본|朝鮮社會史讀本]]󰡕을 펴냈는데,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고려)→봉건제(이조)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ref>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ref> 이 책의 특징은 고려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 없이 한국사를 정체성론적으로 이해한 데 있었다. 이청원은 1937년에 󰡔조선사회사독본󰡕에 근대사 부분을 추가하여 󰡔[[조선역사독본|朝鮮歷史讀本]]󰡕을 펴냈다. 여기서는 “이양선 출몰 이전 아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을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선 사회는 한번 외국 자본주의의 강요적 개국에 부딪히자마자 그 봉건적 구성은 갑자기 취약하게도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ref>李淸源, 󰡔朝鮮歷史讀本󰡕, 白揚社, 1937, 311쪽.</ref> 백남운과 이청원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던 김광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바탕한 정체성론과 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br>
 
이청원은 1934년 말의 서평에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높게 평가했지만, 1937년 3월에 는 “전형적인 로마 희랍적인 노예사회를 그대로 조선의 역사 발전 행정에 적합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구출할 수 없는 결점은 공식주의”라고 비판했다.<ref>李淸源, 「「朝鮮의 얼」의 現代的 考察」, 󰡔批判󰡕 5-3, 1937.3., 78쪽.</ref> 백남운 역시 이청원의 고려 노예제론을 ‘소아병적 희화술(戱畵術)’이라고 비판했다.<ref>白南雲, 「序文」,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改造社, 1937.</ref>
 
이청원은 1934년 말의 서평에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높게 평가했지만, 1937년 3월에 는 “전형적인 로마 희랍적인 노예사회를 그대로 조선의 역사 발전 행정에 적합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구출할 수 없는 결점은 공식주의”라고 비판했다.<ref>李淸源, 「「朝鮮의 얼」의 現代的 考察」, 󰡔批判󰡕 5-3, 1937.3., 78쪽.</ref> 백남운 역시 이청원의 고려 노예제론을 ‘소아병적 희화술(戱畵術)’이라고 비판했다.<ref>白南雲, 「序文」,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改造社, 193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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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7일 (일) 18:3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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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경제사
조선사회경제사 속표지.png
출처 : 서울대 도서관 고문헌자료실
 
원제목 (經濟學全集 第六十一卷) 朝鮮社會經濟史 저자 백남운 편자 역자
발행처 가이조샤(改造社) 인쇄소 발행연도 1933년 발행월일 9월9일 인쇄부수



항목

차례


개요 개정 및 증보 저자 목차 원문 내용 인용문헌 관련 논의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1933년 백남운이 일본어로 쓴 한국 고대 사회경제사. 일본 도쿄 가이조사(改造社)에서 일본어로 간행되었다. A5판, 462쪽. 원시 사회부터 삼국시대까지 한국의 고대 경제사를 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서술했다. 조선 특수성론이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을 비판하고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이 한국사에도 관철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단군 신화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삼국시대가 그리스-로마와 같은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1937년 이 책의 속편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다룬 『조선봉건사회경제사(朝鮮封建社會經濟史)』를 같은 가이조샤에서 펴냈다.



개조사경제학월보 03.jpg
「編輯便」, 『改造社 經濟學月報』 56, 1933.9.9.
"이번에는 예정대로 조선 연희전문학교 교수 백남운 씨의 연구 성과 『조선사회경제사』를 배본 드립니다. 풍부한 자료를 구사하여 종래 학자와 다른 독자적인 입장에 서서 연토한 본서는 우리 나라 학계에 대한 계몽적 역할을 이루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하는 책이라고 믿습니다."
출처 : 개조사경제학월보





개정 및 번역


개정

(내용 서술)


번역

북에서 한국어 번역은 출판되지 않았다. 남에서는 민주화 이후 월북 작가 해금, 남북 학술·문화 교류 기운 속에 여러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백남운(박광순 역), 『조선사회경제사』, 범우사, 1989.
백남운(하일식 역), 『(백남운전집 1) 조선사회경제사』, 이론과 실천, 1994.

백남운(심우성 역), 『조선사회경제사: 부록 조선민족의 진로』, 동문선, 2004.





저자

백남운은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사관에 입각해 한국 경제사를 연구한 학자이다. 수원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의무 규정에 따라 강화 보통학교의 교원, 강화군 삼림조합 기사로 근무하다 191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고등상업학교와 도쿄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도쿄 상과대학에는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고, 백남운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다. 1925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연희 전문학교 교수가 된 후 마르크스주의 유물 사관과 계급 투쟁론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강의 및 집필을 통해 식민사관에 입각한 ‘정체성론’과 민족주의자들의 개량주의적 입장을 동시에 반박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한 연구 성과의 결과물이 1933년 간행된 『조선사회경제사』이다. (※출처: 「조선 문화의 과학적 연구」〈우리역사넷〉)




목차


순서 장절 제목 수록면
01 서론
02 제1장 조선경제사 방법론 5
03 제2장 단군신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 13
04 본론
05 제1편 원시 씨족사회
06 제3장 씨족사회에 관한 학설 39
07 제4장 조선의 친족제도 용어 분석 45
08 제5장 조선의 푸날루아식 가족형태 56
09 제6장 성씨제 71
10 제7장 원시조선의 생산형태 86
11 제8장 원시 씨족 공동체 104
12 제2편 원시 부족국가의 제형태
13 제9장 삼한 123
14 제10장 부여 145
15 제11장 고구려 160
16 제12장 동옥저 170
17 제13장 예맥의 촌락공동체 잔적 173
18 제14장 읍루의 미개상태와 대우혼의 흔적 175
19 제3편 노예국가 시대
20 제15장 고구려 181
21 제16장 백제 242
22 제17장 신라 319



원문

내용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 제2장 제1절을 전재했다.[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사회경제사 항목도 참조(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후쿠다 도쿠조의 봉건제 결여론 비판

백남운은 「서문」에서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봉건제 결여론을 비판했다. 도쿄상과대학에서 백남운을 가르친 후쿠다는 「經濟單位發展史上韓國の地位」(1905)를 통해 한국은 봉건제가 결여되고 소유권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후쿠다는 일원적 경제발전법칙을 중시했지만, 조선은 예외이자 특수라서 경제 발전과정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선진 문명인 일본이 정체되어 있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개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임무’라고 주장했다.[2] 백남운은 이런 후쿠다에 대해 “근래 조선경제사의 영역에 착안한 최초의 학자”이지만, “조선에서 봉건제도의 존재를 전혀 부정한 점에서 그에 승복할 수 없”(14쪽)다고 비판했다.[3]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 강조

백남운은 자신의 ‘조선 경제사의 기도(企圖)’를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①원시 씨족 공산체의 양태, ②삼국 정립 시대의 노예경제, ③삼국시대 말기 경에서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적 봉건사회의 특질, ④아시아적 봉건국가의 붕괴과정과 자본주의 맹아 형태, ⑤외래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과 국제적 관계, ⑥이데올로기 발전의 총 과정인데, 1933년의 󰡔조선사회경제사󰡕는 이 가운데 ①과 ②에 해당했다(14~15쪽).
백남운은 “인류 사회의 일반적 운동 법칙인 사적 변증법에 의해 그 민족 생활의 계급적 제관계 및 사회체제의 역사적 변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나아가 그 법칙성을 일반적으로 추상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한국사에도 관철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의 이식 발전 과정”을 파악하고 “지구상의 사회평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19쪽).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중시하는 태도와 자본주의 ‘이식’이라는 인식은 서로 부딪히는 면이 있지만, 식민지 상황을 직시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라는 보편성의 관철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지구상의 사회평원’은 사회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수성론 비판

한국사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백남운은 특수성론 비판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우리 선배’의 ‘특수사관’에 대해, 역사학파의 이데올로기를 수입하여 조선 문화사를 독자적인 소우주로 특수화한다고 비판했다(20쪽). ‘우리 선배’는 최남선(崔南善)과 신채호(申采浩)였다. 백남운은 “피정복군 스스로가 자기의 특수성을 고조하게 되면 그것은 이른바 갱생의 길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노예화의 사도(邪道)에 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했다(372쪽). 한편 이와 구별되는 ‘관제 특수성’이 존재한다며, 와다 이치로(和田一郞) 등 여러 어용학자의 ‘조선 특수 사정’ 이데올로기를 들었다. 전자가 신비적ㆍ감상적인 데 반하여 후자는 독점적ㆍ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닮은 꼴 특수성은 인류 사회 발전의 역사적 법칙의 공통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라고 비판했다(20쪽).
백남운은 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에서 고대 사회ㆍ봉건 사회ㆍ부르주아 사회는 생산 관계의 총화이자 인류 역사에서 일정하고 특정한 발전 단계를 표시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법칙’에 따른 ‘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을 규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남운은 “조선 민족의 발전사는 그 과정이 아무리 아시아적일지라도 사회구성의 내면적 발전법칙 그 자체는 완전히 세계사적”이라고 주장했다(22쪽).


단군 신화의 비판적 이해

백남운은 단군 신화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신채호최남선에 대해서는 “단군 신화를 조선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을 독자적 신성화함으로써 동방문화에의 군림을 시도”하여 ‘특수문화사관’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일본 학자의 ‘실증주의적 편견성’도 문제 삼았다. 단군에 대해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무조건적으로 부정’했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고구려의 국조(國祖)로서 가작(假作)된 인물’로 간주했고,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묘향산의 산신’이라고 단정하고 대발견이나 한 듯 만족했다고 비판했다.

백남운은 “전자의 경우 환상적인 독자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후자의 경우 합리주의적인 가상(假象)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27쪽). 백남운은 삼국유사세종실록에 실린 단군 신화 전문을 번역한 뒤, 전자에서 농업공산체의 붕괴과정을, 후자에서는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 및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읽어냈다(40쪽).


지(知)의 연쇄

원시 씨족사회 설명에서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과 미국 인류학자 모건(Lewis H. Morgan)의 󰡔고대사회󰡕(1877)를 원용했다.

가족의 발전은 혈연가족(군혼) → 푸날루아 가족 → 대우혼(對偶婚) 가족으로 설명했다. 푸날루아 가족은 모건이 40년간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족(Iroquois)을 관찰하여 발견한 것이다. 백남운은 같은 문중의 사위들이나 형제의 처들이 서로 ‘동서’라 부르는 사실이 우리나라에 푸날루아 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운의 화석’이라고 주장했다(64쪽). 한편 고대 중국의 푸날루아 가족 형태로서 ‘아혈족(亞血族) 결혼설’을 주창한 ‘지나(支那)의 마르크스주의 학자 궈모뤄(郭沫若)’를 소개하고 그의 책 󰡔支那古代社會史論󰡕(1931, 󰡔中國古代社會硏究󰡕(1930)의 일본어판)을 각주에 인용했다(67쪽).

신석기 시대 한반도와 일본의 생산력 차이를 설명하면서는 와타나베 요시미치(渡部義通), 󰡔日本母系時代の硏究󰡕(1932)를 인용했다(89쪽). 와타나베는 궈모뤄와도 교류가 있던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삼국시대 노예제 사회설

󰡔조선사회경제사󰡕의 핵심적인 주장은 삼국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보는 데 있었다. 백남운은 삼국지 위서 마한전과 부여전에 나오는 ‘하호(下戶)’를 노예라고 간주하고, 삼한을 ‘노예국가의 맹아 형태’라고 분석했다(125ㆍ142쪽). 백남운은 원시적 부족국가인 삼한 단계에서는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종족 노예제였던 것이 삼국이 형성되면서 개인 노예제로 바뀌면서 사회경제의 기저를 이루었다고 보았다(374쪽).

백남운은 순장 제도를 노예제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파악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연구에서 아프리카 체와족 사례를 빌려와 순장이 다른 노예제 사회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했다고 설명했다(143쪽).

삼국은 ‘노예제’ 국가이고 신라에 의한 통일 이후 ‘아시아적 봉건제’로 이행했다고 파악했다. 백남운은 삼국의 중앙집권제, 토지국유제, 관개정책 등을 ‘마자르 내지는 비트포겔 류의 곡해된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375쪽). 1931년 레닌그라드 토론회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비판과 상통하는 설명이었다.


궈모뤄와 동시대성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궈모뤄의 󰡔中國古代社會硏究󰡕(1930)와 동시대성을 띠었다.[4] 궈모뤄 역시 고대 중국에 푸날루아 가족 형태에 바탕한 원시 씨족사회와 순장이 행해진 노예제 사회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백남운은 1932년 6월 경성 YMCA에서 열린 ‘경제 대강연회’에서 “지나 문제로써 보편사관을 삼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말했는데,[5] 아마도 궈모뤄를 의식한 언급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의 좌파 역사학 학술지 『역사학연구』 제3호 「〈學界動向〉最近の支那社會經濟史硏究」(志田不動麿記)에서도 『朝鮮社會經濟史』를 언급하면서 “흡사 저번에 궈모뤄가 중국 사학계에 준 충동보다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백남운의 연구에 대해서는 ‘공식주의’ 특히 모건과 엥겔스의 도식적 적용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궈모뤄도 같은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본서의 성질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당당히 밝혔다.[6]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조선 민족은 특수한 전통의 아들이 아니며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온 일반적 정상적인 인간”(23쪽)이라고 밝혔다. 궈모뤄 역시 󰡔중국고대사회연구󰡕에서 “중국인은 하느님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니다. (중략) 우리의 요구는 인간의 관점에서 중국 사회를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7] 백남운과 궈모뤄의 보편사관은 <식민지=아시아>의 인간선언이었다.


식민주의 비판

백남운은 혼돈한 조선 사학계에 투신하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며 참월(僭越)”이지만, 자신이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런 모험을 감행할 ‘선험적 자격’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과 글이 형식적이고 다소 부조리하더라도, 조선어를 모르는 이들의 대저작보다 ‘체험적’이고 ‘진실한 절규’라고 자부했다(13~14쪽).

백남운은 “불란서(佛蘭西)인이 흉한(兇漢)으로 규정한 자가 안남(安南)인에게 의열사(義烈士)가 될 수 있고, 영국인이 신사라 불러도 인도인에게는 주구(走狗)로 매도될 수도 있다.”(371쪽)는 말로 일본의 식민주의를 에둘러 비판했다.

일본 공산당의 지도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사노 마나부(佐野學)에 대해서도, “일본에 전수된 조선 문화란 것은 실은 지나(支那)의 것이었고 조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日本歷史の硏究󰡕), 만약 과연 그렇다면 금일의 일본 문화를 단순히 구미로부터의 수입 문화로만 규정해 버릴 수 있을까.”(372쪽)라고 비판했다.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은 상대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없었다. 백남운의 보편사관은 조선인의 주체성에 대한 강조와 하나였다.





인용문헌


주석에서 언급한 연구 문헌

저자 문헌 지역 빈도 사상
1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구미 38 M
2 세키노 데이 조선미술사 일본 27
3 마르크스 경제학비판 구미 9 M
4 와다 이치로 조선토지제도 요론 일본 6
5 다나베 히사오 일본음악강화 일본 6
6 오다 쇼고 조선상세사 일본 5
7 나카타 가오루 미야자키 선생 법제사논집 일본 5
8 레닌 국가와 혁명 구미 4 M
9 하니 고로 역사학비판 서설 일본 4 M
10 곽말약 지나고대사회사론 중국 4 M
11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구미 2 M
12 마르크스 자본 구미 2 M
13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경제학 입문 구미 2 M
14 하니 고로 전형기의 역사학 일본 2 M
15 이아모토 요시후미 외 북선의 개척 일본 2
16 와타나베 요시미치 일본 모계시대의 연구 일본 2 M
17 사노 마나부 일본역사연구 일본 2 M
18 포치야로프 외 유물사관 세계사교정 구미 1 M
19 엥겔스 자연변증법 구미 1 M
20 보그다노프 마르크스주의 계급의식학 구미 1 M
21 마르크스 임노동과 자본 구미 1 M
22 그림 독일 고대 법제사 구미 1
23 오타 료 일본 상대 사회조직 연구 일본 1
24 야마미치 조이치 조선반도 일본 1
25 아사미 린타로 조선법제사고 일본 1
26 시라토리 구라키치 일한아이누 삼국어의 수사에 대하여 일본 1
27 다마기 하지메 고대 로마에 있어서 노예제도의 기원(아등) 일본 1 M
28 다나카 고가이 일본민족 변태풍속의 연구 일본 1
29 나카무라 시게오 상업원론 일본 1
30 기무라 야스지 원시 일본 생산사론 일본 1
31 고토 아사타로 문자의 사적 연구 일본 1
32 경성제대 조선경제의 연구 일본 1
33 최남선 괴기 조선 1
34 최남선 살만교차기(계명 19) 조선 1
35 최남선 신라 진흥왕 재래 삼비와 신출현의 마운령비(청구학총 2) 조선 1
36 이능화 조선해어화사 조선 1
37 신채호 조선사 조선 1

구미와 일본의 연구에 의존했다. 한국인 학자로는 최남선, 이능화, 신채호를 언급했다.




주석에서 언급한 연구 문헌(중복 포함) 지역별

구미 일본 조선 중국
62 71 5 4 142

연구 지역별.png

주석에서 언급한 연구 문헌(중복 포함) 지역별 및 사상별

마르크스주의 비마르크스주의
구미 61 1
일본 11 60
중국 4 0
조선 0 5
76 66

연구 지역별 사상별.png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는 구미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일본의 비마르크스주의 실증 연구를 원용하여 사료를 분석했다.




주석에서 언급한 마르크스주의 연구 문헌

저자 문헌 지역 빈도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구미 38
마르크스 경제학비판 구미 9
레닌 국가와 혁명 구미 4
하니 고로 역사학비판 서설 일본 4
곽말약 지나고대사회사론 중국 4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구미 2
마르크스 자본 구미 2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경제학 입문 구미 2
하니 고로 전형기의 역사학 일본 2
와타나베 요시미치 일본 모계시대의 연구 일본 2
사노 마나부 일본역사연구 일본 2
포치야로프 외 유물사관 세계사교정 구미 1
엥겔스 자연변증법 구미 1
보그다노프 마르크스주의 계급의식학 구미 1
마르크스 임노동과 자본 구미 1
다마기 하지메 고대 로마에 있어서 노예제도의 기원 일본 1

백남운의 사적 유물론은 엥겔스, 마르크스, 레닌의 원전과 일본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 그리고 중국 마르크스주의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주석에서 언급한 사료 및 사서

사료 및 사서 지역 빈도
삼국지 위서 동이전 중국 65
수서 중국 32
신당서 중국 28
북사 중국 27
구당서 중국 25
주서 중국 24
후한서 중국 10
진서 중국 6
이아(爾雅) 석친(釋親) 중국 5
양서 중국 4
위서 중국 3
관자 중국 2
석명(釋名) 석친속(釋親屬`1) 중국 2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 중국 2
흠정 만주원류고 중국 2
산해경 중국 1
서전 중국 1
서청고감전록 중국 1
설문해자 중국 1
설부 중국 1
전한서 중국 1
주역계사 중국 1
한위총서 소이아 광의조 중국 1
흠정 서경전설휘찬 중국 1
삼국사기 한국 263
삼국유사 한국 32
해동역사(한치윤) 한국 20
동사강목(안정복) 한국 6
고려사 한국 3
동국통감(서거정) 한국 2
세종장헌대왕실록 한국 2
훈몽자회(최세진) 한국 2
경국대전 한국 1
성호사설(이익) 한국 1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 1
고적조사보고 총독부 10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 총독부 10
조선고적도보 총독부 5

한국 '실학자'의 역사 인식을 적극적으로 계승했다.







관련 논의


동아일보의 환영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8] 참조.

1933년 9월 동아일보는 “조선 경제사가 우리의 손으로 처음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우리 학계의 큰 공헌임은 물론이어니와 큰 충동을 줄 것”[9]이라고 기대를 드러냈다. 10월 16일에는 송진우, 백낙준, 여운형(呂運亨) 등이 발의한 출판 축하회가 열렸다. 다음날인 17일 동아일보는 사진까지 곁들여 출판 축하회 소식을 전하고, 백남운을 객원 논설위원으로 임명했다.[10]



동아일보 19330909.png
「白南雲氏新著 朝鮮經濟史」, 󰡔東亞日報󰡕 1933.9.9.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사적유물론의 도식적 적용이라는 비판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11] 참조.

경성제대 조교수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문헌 연구’의 불철저를 비판하고 ‘저자의 고증학적 정진’을 요구했다.[12]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도 『歷史學硏究』에 실은 서평에서 “저자가 미리 고정적인 단계론을 소지하고 이에 재료를 집어 넣은 공식주의적 경향이 보인다”고 지적했다.[13] 조선 사회사 연구자로 경성제대 교원이었던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백남운의 책을 가리켜 “조선의 종합경제사는 이에 새로운 출발점을 부여받았다”[14]고 평가했지만, ‘마르크스주의 공식의 고수’를 지적했다. 특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모건의 『고대사회』라는 “2대 명저의 직접적 감화에 의해 구성된 것은 명백”하다는 스에마쓰(末松)의 지적을 비롯해, 하타다(旗田)나 시카타(四方)로부터도 “모건, 엥겔스적 방법의 고정”이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김광진과 논쟁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15] 참조.

보성전문학교 교원 김광진은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한 서평에서 백남운의 삼국시대 노예제 사회론에 의문을 던졌다.[16] 백남운 역시 󰡔普專學會論集󰡕 제1호(1934.3.)에 실린 김광진의 논문 「이조 말기 조선의 화폐 문제」[17]를 문제 삼았다. 백남운은 김광진이 조선 시대의 ‘경제적 기구’를 “십구세기 말까지 「아세아적생산양식」으로서, 불역성(不易性)을 반복한 생산형태”로 본 데 대해, “상업자본도 발생되지 못한 구(舊)사회가 「이양선」의 침입으로 돌연히 붕괴되엇다는 견해는 지나(支那)에 침입한 구라파의 자본주의가 그 「아세아적 생산양식」과 봉착하엿다는 견해와 유형적(類型的) 견해이므로 도저히 찬동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8]

김광진은 1937년 1월 다시 백남운을 “조선사의 특수성과 그 구체적 발전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치 못하엿다”고 비판했다.[19] 같은 해 2월에도 󰡔보전학회논집󰡕 제3호에 실은 논문에서, 백남운의 삼국시대 노예제 사회론을 비판하면서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공납제(貢納制)’였다고 주장했다.[20] 백남운은 1937년 11월에 출간한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高麗の部)󰡕 서문에서 김광진이 “「歷史敎程」의 밀수입에 의해 모처럼 생장한 바의 선진적인 노예사회인 고구려의 역사발전계열을 압축함으로써, 예의 「봉건사」의 對幅을 그리고”[21] 있다고 비판했다.

와타나베 요시미쓰(渡部義通)와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郞) 등이 집필한 󰡔日本歷史敎程 第一冊󰡕(1936.12.)은 일본 고대 사회에서 노예제적 존재를 추출하려고 노력했다. 백남운은 김광진이 “반도(半島) 노예사회의 생산적 「노예제」와 재외 노예인 「부곡제」 또는 「속민제」와의 상호회귀적인 연관 결합 관계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모른다고 비판했는데, 여기서 말한 ‘반도 노예사회’의 특징은 바로 와타나베가 주장하는 노비제와 부민제(部民制)가 ‘연관ㆍ결합’된 ‘일본형 노예제’의 그것이었다.[22] 그럼에도 백남운이 「歷史敎程」을 ‘밀수입’해 노예제를 부정한다고 김광진을 비판한 것은, 하야카와 지로의 공납제론의 영향을 지적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야카와가 󰡔日本歷史敎程 第一冊󰡕에 참여한 것을 놓고 자설을 수정하여 노예제론을 인정한 결과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실제 서술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뚜렷했다. 하야카와는 󰡔日本歷史敎程 第二冊󰡕(1937.6.)에는 참여하지 않았다.[23]

김광진은 1928년에 백남운과 같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조수를 거쳐 1932년에 보성전문학교에 부임했다. 식민지 조선은 물론 초기 북한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주도하게 되는 김광진의 연구가 첫선을 보인 것은 바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한 서평이었다. 백남운과 김광진의 논쟁은 노예제 사회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자본주의 맹아론 등 해방 후 남북한 학계로 이어지는 역사학의 주요 쟁점을 포함했다. 어찌 보면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촉발한 논쟁 과정에서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청원과 논쟁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2021)[24] 참조.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에 참여한 이청원은 1934년에 검거되었다가 풀려난 뒤 역사학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첫 글은 역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 대한 서평이었다.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로 보고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봉건제=아시아적 생산양식(통일신라~이조)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백남운의 역사상과 동일했다. 또한, 사노 마나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적 한국사 인식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을 지지했다.[25]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던 이청원은 1936년 들어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전환한다. 이청원은 1936년 4월 󰡔朝鮮社會史讀本󰡕을 펴냈는데,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고려)→봉건제(이조)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26] 이 책의 특징은 고려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 없이 한국사를 정체성론적으로 이해한 데 있었다. 이청원은 1937년에 󰡔조선사회사독본󰡕에 근대사 부분을 추가하여 󰡔朝鮮歷史讀本󰡕을 펴냈다. 여기서는 “이양선 출몰 이전 아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을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선 사회는 한번 외국 자본주의의 강요적 개국에 부딪히자마자 그 봉건적 구성은 갑자기 취약하게도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27] 백남운과 이청원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던 김광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바탕한 정체성론과 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이청원은 1934년 말의 서평에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높게 평가했지만, 1937년 3월에 는 “전형적인 로마 희랍적인 노예사회를 그대로 조선의 역사 발전 행정에 적합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구출할 수 없는 결점은 공식주의”라고 비판했다.[28] 백남운 역시 이청원의 고려 노예제론을 ‘소아병적 희화술(戱畵術)’이라고 비판했다.[29]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Book: 조선사회경제사 Person: 백남운 A writer B
Book: 조선사회경제사 Institution: 개조사 A publisher B
Book: 조선사회경제사 Book: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A cites B
Book: 조선사회경제사 Book: 경제학비판 A cites B
Book: 조선사회경제사 Book: 국가와 혁명 A cites B
Book: 조선사회경제사 Book: 역사학비판 서설 A cites B
Book: 조선사회경제사 Book: 지나고대사회론 A cite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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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KCI 논문 원문 연결)
  2. 이태훈, 「일제하 백남운의 부르주아 경제사학 비판과 맑스주의 역사인식 형성과정」, 󰡔한국사상사학󰡕 64, 2020.4., 308~309쪽.
  3. 백남운(하일식 역), 󰡔백남운 전집 1: 朝鮮社會經濟史󰡕, 이론과 실천, 1994, 14쪽. 이하 같은 책에서 인용은 본문에 쪽수만 표시.
  4. 백남운과 궈모뤄의 동시대성에 대해서는 洪宗郁, 「白南雲─普遍としての<民族=主体>─」, 趙景達 외 편, 󰡔講座 東アジアの知識人 4: 戦争と向き合って󰡕, 有志舎, 2014, 110~112쪽, 참조.
  5. 「朝鮮史觀樹立の提唱」, 『經濟硏究』 4, 1933.
  6. 郭沫若(藤枝丈夫譯), 「原著者 序」, 󰡔支那古代社會論󰡕, 內外社, 1931.
  7. 郭沫若(藤枝丈夫譯), 「原著者 序」.
  8.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
  9. 「白南雲氏新著 朝鮮經濟史」, 󰡔東亞日報󰡕 1933.9.9.
  10. 윤덕영, 「위당 정인보의 교유 관계와 교유의 배경: 백낙준・백남운・송진우와의 교유 관계를 중심으로」, 󰡔東方學志󰡕 173, 2016.2., 52쪽.
  11.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
  12. 「〈書評〉朝鮮社會經濟史」, 『靑丘學叢』 14, 1933.11.
  13. 「〈書評〉白南雲著朝鮮社會經濟史」, 『歷史學硏究』 3, 1934.1.
  14. 四方博, 「朝鮮」, 社會經濟史學會社編, 󰡔社會經濟史學の發達󰡕, 岩波書店, 1944, 385쪽.
  15.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
  16. 金洸鎭, 「新刊評 白南雲敎授의 新著 󰡔朝鮮社會經濟史󰡕」, 󰡔東亞日報󰡕, 1933.9.21. 백남운과 김광진의 논쟁에 대해서는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歷史學報󰡕 232, 2016.12., 307~309쪽, 참조.
  17. 金洸鎭, 「李朝末期における朝鮮の貨幣問題」, 󰡔普專學會論集󰡕 1, 1934.3.
  18. 白南雲, 「普專學會論集에 對한 讀後感(完)」, 󰡔東亞日報󰡕, 1934.5.4.
  19. 金洸鎭, 「朝鮮歷史學 硏究의 前進을 爲하여」, 󰡔朝鮮日報󰡕, 1937.1.3.(新年號 其十五).
  20. 金洸鎭, 「高句麗社會の生産樣式-國家の形成過程を中心として」, 󰡔普專學會論集󰡕 3, 1937.2., 34쪽.
  21. 白南雲, 「序文」,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高麗の部)―朝鮮社會經濟史(第二卷)―󰡕, 改造社, 1937, 2쪽.
  22.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는 백남운이 와타나베 요시미쓰의 ‘일본 노예제’론을 비판한 것으로 분석했는데(309쪽) 잘못된 해석이었다.
  23. 田中聡, 「転機としての󰡔日本歴史教程󰡕」, 63~80쪽.
  24. 홍종욱,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아시아 인식과 조선 연구」, 󰡔한국학연구󰡕 61, 2021.5.
  25.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讀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참조. 이청원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洪淳權, 「1930년대 한국의 맑스주의 역사학과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 󰡔東亞論叢󰡕 31, 1994.2.; 広瀬貞三, 「李淸源の政治活動と朝鮮史研究」,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 7, 2004.3.;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38, 2017.10, 참조.
  26.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
  27. 李淸源, 󰡔朝鮮歷史讀本󰡕, 白揚社, 1937, 311쪽.
  28. 李淸源, 「「朝鮮의 얼」의 現代的 考察」, 󰡔批判󰡕 5-3, 1937.3., 78쪽.
  29. 白南雲, 「序文」,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改造社,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