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하

North Korea Humanities

조수민(C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10일 (수) 19:06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조수민(C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권태하 (한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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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글명 권태하 한자명 權泰夏 영문명 Kwon Tae-ha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06년 몰년 1971년 출신지 대한제국 충청북도 충주군 전공 육상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마라톤보급회 단체 위원장, 대한육상경기연맹단체 회장 등을 역임한 체육인. [1]


생애


출생 및 학력

충청북도 충주 출생. 서울 중동학교 졸업 후 휘문고보에 입학하였다. 일본 리츠메이칸중학[立命館中學]에 전학하였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였다. 1932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2]


학창 시절 및 선수 경력

권태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특별시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리츠메이칸 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3] 메이지 대학 시절에는 하코네 역전 경주에 1927년부터 매년 출전하여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1928년에는 4구간, 1930년에는 7구간에서 구간 신기록을 세우며 구간상을 수상했고, 럭비 선수로도 활동했다.[3]


1932년 메이지 대학 졸업 후에는 경성부에서 양정고등보통학교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1]", online, waybackmachine.</ref>

같은 해 5월 8일,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 조선 예선에서 2시간 35분 12초의 기록으로 첫 마라톤 출전임에도 우승을 차지했다.[4]
5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최종 예선에서도 2시간 36분 50초로 우승하며, 김은배, 복싱의 황을수와 함께 조선인 최초의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었다."[2]", online, waybackmachine.</ref>


올림픽 본선에서는 무더운 날씨 속에 9위를 기록했다."[3]", online, waybackmachine.</ref>

골인 지점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체력이 다해, 골인 지점 10m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관중들의 응원 속에, 스태프의 도움을 받기 직전 권태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걸었고, 골인과 동시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 갔다."[4]", online, waybackmachine.</ref>

이 모습은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현지 언론에서도 입상한 쓰다 세이이치로나 김은배보다 더 크게 보도되었다. 대일본체육협회의 『제10회 올림픽 대회 보고서』에도 이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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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태하(權泰夏)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곽형기."[6]", 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권태하."[7]", online, waybackmachine.
  4. Ai위키."[8]", online, waybackmac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