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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
이순신.jpg
출처 : 충무공 이순신은 2024년 4월 21일 블로그[1]
 
한글명 이순신 한자명 李舜臣 영문명 Yi Sunsin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545년 몰년 1598년 출신지 조선국 한성부 건천 전공




항목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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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순신은 용감하고 전략적인 사고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장군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움으로서 한국 역사상 가장 높은 존경을 받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생애


어린시절

이순신은 조선시대 건천동에서 태어난 조선의 뛰어난 장군으로, 어린 시절을 건천동과 아산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가계는 학문적인 전통을 가졌으며, 조부 이거(李蕖)인물와 아버지 이정(李貞)인물은 각자 정치적 활동을 했으나, 가정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인물은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고, 아버지 이정은 뒤늦게 관직에 올랐으나 가정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변씨는 생원 변함의 딸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순신은 용감하고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나중에 조선의 역사를 크게 바꿔놓게 될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무관생활

이순신은 전라도감사 이광(李洸)인물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조방장과 선전관을 역임했으며, 이를 토대로 1589년에는 무신들을 다시 채용받아 공을 세우고 관직을 승진해 나갔습니다. 그 후 1590년에는 조정에서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2]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선조(宣祖)인물는 이순신을 여러 직책에 임명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와 논핵에 부딪혀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1591년, 이순신은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비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수륙의 전투와 수비를 모두 강화해야 한다고 지시하여 전라좌도 수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출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은 전략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전략을 세워 임진왜란에 임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옥포해전

옥포해전사건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일본군이 보유한 군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파천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都元帥)인물 김명원(金命元)인물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일본군이 황해도까지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음력 6월 원균인물이순신인물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3]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4]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 이원익(李元翼)인물이 체찰사로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반듯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2]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러한 두 인물에 대한 입장차이가 심하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산채로 매장한 최악의 제독으로 평가한다.


임진왜란 종전과 전사

1597년 10월 26일,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명량해협에서 일본군 수백 척과 맞섰다[5] 급류가 빠른 울돌목의 지형을 활용해 임하도로 진을 옮긴 뒤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최소 130척 이상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사건에서 이순신은 탄환을 맞고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5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노량해전사건 대승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사건이 끝났다.





주요 저서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장초》(壬辰狀草)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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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https://blog.naver.com/superwriter12/223413541417
  2. 관직명
  3. 이순신의 저술을 모아 엮은
  4. 경상·전라·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지휘 통솔한 삼남지방의 수군 총사령관이다.
  5. 명량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