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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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탑파의 연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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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4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6월
시작쪽 051쪽 종료쪽 095쪽 전체쪽 045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2. 典型的樣式成立以後의一般石塔樣式의變遷相


우리는 석조 탑파의 제1절 제1항에서 익산군 용화산 하 미륵사지에 있는 다층석탑 조선 석탑파로서의 최초의 시원형식을 이룬 유일한 유구로서 설명하였고, 같은 곳 왕궁면 왕궁리 속칭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 저 미륵탑의 모방적 재현 형식의 유구로서 건축적 구조특질보다도 조각적 응집 결태로서의 과도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였으며, 부여읍 추정 정림사지에 있는 오중탑(속칭 평제탑)은 미륵탑의 건축적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다 더 완성태로의 발전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직접 계련 관계는 여하간에 양식적으로는 다른 시원적인 일례가 의성군 영니산 하 일명사지에 오중탑 일기가 있어 이것들이 경주 감은사지의 삼중탑 양기, 고선사지의 삼중탑, 나원리 일명사지의 오중탑, 충주 가금면 탑정리 일명사지의 칠중탑(속칭 중앙탑) 등에서 종합적으로 취합되어 그곳에 조선석탑으로서의 최초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이 있었다는 것을 제2항에서 설명하였고, 그리고 제3항에서 이 양대부류의 세대관을 말하여 미륵탑·왕궁평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통일 이전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을 통일 이후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 후 필자의 반성과 추구는 이상 논고 중 한 개의 모순을 발견케 되었으니 즉 그것은 왕궁평탑에 대한 의견이다. 무엇이냐 하면 왕궁평탑은 외형으로서는 제1부류 즉 시원적 양식부류에 유사시킬 수 있는 양식 감정을 충분히 가졌고 또 일부 옥개의 구조법 같은 데에서 정림탑과의 유사점이 있지만, 옥리층단형 「밭임」의 전반적으로 전자형 사분파의 평면을 이루는 의사는 이 제1부류에 속하는 기타 석탑들과는 공통성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제2부류의 전형적 탑파류들과 공통되는 것, 또 초층옥신 판석으로 구성하면서 우주 및 중간주의 형식을 편의적인 부조법에 의하였을 뿐더러 상하의 태세 변화, 즉 '엔터시스'의 정신이 없는 것─이러한 짤막한 양식적으로도 확실히 제2부류 하에 속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환언하면 이러한 이유에서 이 왕궁평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과 같이 양식적으로 제1부류 즉 시원부류에 유사시킬 수 없는 동시에 시대적으로도 그러한 유류들과 함께 신라 통일 이전, 즉 삼국기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 통일 후 즉 저 전형적 탑파들이라 지칭한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들과 함께 유사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문제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형적 탑파들은 이미 전절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초층옥신들의 구조수법에 있어 사개우주가 이미 「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별개의 장석으로써 독립되게 구성되고, 그리고 벽면의 면석만은 또다시 다른 석편으로써 구성하고 있음에서(단 나원리탑만은 각 면 일매판석으로써 성립시키고 일우일주를 모각하게 됨) 그 사실적 진실미를 갖고 있는 터인데, 왕궁평탑에는 이러한 진실미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초층옥신벽면에 한 간주를 나타낸 것도 혹시 저 정림탑·중앙탑 등의 초층옥신에서 볼 수 있는 이간구분 재현을 위해 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그러한 의사에서의 표현 양식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우졸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영니산 하오중탑이 이층 이상의 곡신부터 이간벽을 나타낸 무의미성보다도 더 심한 무의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무의미성의 졸렬한 실례는 성주읍동 의공사(일운 동방사)지에도 일기(현존 팔중)가 있지만, 시대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여하간, 이상의 이유에서 왕궁평탑을 양식사적 견지에서는 제1기의 시원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고, 제2기의 전형적 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초층옥신만은 후대의 수보였다면 나머지 상층 부분은 제2기의 유형 속에 편입시켜도 좋을 가능성이 많으나, 그렇지 않고 이 초층옥신이 원상대로라 하면 이 탑은 여전히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2기의 부류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탑파 자신의 이러한 양식적 문제를 떠나서 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한 개의 참고자료로서의 와당 같은 것을 부차적으로 상고한다면, 그 와당문양은 이미 관계야 박사도 지칭한 바와 같이 신라 통일 초의 것이라는 것과 공통되는 특질을 가졌고, 또 나의 소견으로는 충주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와당과도 공통되는 시대성을 보이는 점이 있음에서, 이 와당을 통하여 볼 때 저 중앙탑이라는 것과 이 왕궁평탑이라는 것과가 위치적으로 공통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이러한 점을 통해서나 왕궁평탑이 겨우 제2기의 탑파부류들에 끼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뿐, 양식적으로는 위태위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제1기 석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삼기에 한정되고 만다. 즉 그 삼기만이 통일 이전의 작품인 것이다. 미륵탑은 손상이 심한 것이지만 정림탑, 영니산하탑은 당풍이 아직 보이지 않은 즉 육조 기풍이 명백히 보이는 탑이라 하겠다. 적어도 수풍까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51우리는 石造 塔婆의 第一節 第一項에서 益山郡 龍華山 下 彌勒寺址에 있는 多層石塔 朝鮮石塔婆로서의 最初의 始源形式을 이룬 唯一한 遺構로써 說明하였고 同地 王宮面 王宮里 俗稱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 저 彌勒塔의 模倣的 再現 形式의 遺構로서 建築的 構造特質보다도 彫刻的 凝集 結態로서의 過渡 傾向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說明하였으며, 扶餘邑 推定 定林寺址에 있는 五重塔 (俗稱 平濟塔)은 彌勒塔의 建築的 精神을 그대로 繼承하야 보다 더 完成態로의 發展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直接 係聯關係는 如何間에 樣式的으론 다른 始源的인 一例가 義城郡 盈尼山 下 逸名寺址에 五重塔 一基가 있어 이것들이 慶州 感恩寺址의 三重塔 兩基, 高仙寺址의 三重塔, 羅原里 逸名寺址의 五重塔, 忠州 可金面塔亭▶P52里 逸名寺址의 七重塔(俗稱 中央塔) 等에서 綜合 聚成되야 그곳에 朝鮮石塔으로서의 最初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이 있었다는 것을 第二項에서 說明하였고 그리고 第三項에서 이 兩大部類의 世代觀을 말하야 彌勒塔·王宮坪塔·定林塔·盈尼山下塔 統一以前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을 統一 以後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後─ 筆者의 反省과 追究는 以上 論考 中 한 개의 矛盾을 發見케 되었으니 即 그것은 王宮坪塔에 대한 意見이다. 무엇이냐 하면 王宮坪塔은 外樣으로선 第一部類 即 始源的 樣式部類에 類聚될 수 있는 樣式 感情을 充分히 가졌고 또 一部 屋蓋의 構造法같은데 定林塔과의 類似點이 있지만 屋裏層段形「밭임」의 全般的으로 田字形四分派의 平面을 이루는 意思는 이 第一部類에 屬하는 諸他石塔에는 共通性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第二部類의 典型的 塔婆類들에 共通되는 것, 또 初層屋身 板石으로써 構成하면서 隅柱及 中間柱의 形式을 便宜的인 浮彫法에 依하였을 뿐더러 上下의 太細의 變化, 即「엔터시스」의 精神이 없는 것─이러한 짧은 樣式的으로도 確實히 第二部類의 下에 屬할 것임을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換言하면 이러한 理由에서 이 王宮坪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等과 같이 樣式的으로 第一部類 即 始源部類에 類聚시킬 수 없는 同時에 時代的으로도 그러한 類들과 함께 新羅統一 以前, 即 三國期에 둘 수 없는 것이다.그러면 新羅統一後 即 저 典型的 塔婆들이라 指稱한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들과 함께 類聚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問題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典型的 塔婆들은 이▶P53미 前節에서도 說明한 바와 같이 그 初層屋身들의 構造手法에 있어 四個隅柱가 이미「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別個의 長石으로써 獨立되히 構成되고 그리고 壁面의 面石만은 또 다시 다른 石片으토써 構成하고 있음에서(但羅源里塔만은各面一枚板石으로써 成立시키고 一隅一柱를 模刻하게됨) 그 寫實的 眞實味를 갖고 있는 터인데, 王宮坪에는 이러한 眞實珠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初層屋身壁面에 한 間柱를 나타낸 것도 或欺 저 定林塔·中央塔 等의 初層屋身에서 볼 수 있는 二間區分 再現키 爲한 것이였었는지 알 수 없지만 萬一 그러한 意思에서의 表現 樣式이였다면 그것은 너무나 愚拙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盈尼山 下五重塔이 二層 以上의 屈身부터 二間壁을 나타낸 無意味性보다도 더 甚한 無意味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無意味性의 拙劣한 實例는 원문주1▶星州邑東 醫公寺(一云 東方寺)址에도 一基(現存 八重)가[1] 있지만 時代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何如間, 以上 理由에서 王宮坪塔을 樣式史的 見地에선 第一期의 始源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킬 수 없고 第二期의 典型的 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키기 困難한 것이다. 차라리 初層屋身만은 後代의 修補였다면 나머지 上層 部分은 第二期의 類型 속에 編시켜도 좋을 可能性이 많은데 그렇지 않고 이 初層屋身이 原狀대로라 하면 이 塔은 依然히 救할 수 없는 것이다. 即 第二期의 部類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못 塔婆 自身의 이러한 樣式的 問題를 떠나서 그 附近에서 發見되었다는 한 개의 參考資料로서의 瓦當같은 것을 副次的으로 商量한다면 그 瓦當紋儀는 이미 關野貞 博士도 指稱한 바와 같이 新羅統一初의 것이라는 것과 共通되는 特質을 가졌고 또 나의 所見으로선 忠州 中央塔附近에서 ▶P54-1發見되었다는 瓦當과도 共通되는 時代性을 보이는 點이 있음에서 이 瓦當을 通하야 볼제는 저 中央塔이란 것과 이 王宮坪塔이란 것과가 位次的으로 共通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即 이러한 點을 하여서나 $宮坪堵이 겨우 第二期의 堵婆部類들에 끼워질수 있는 可能性이 생기게될뿐, 樣式的론 危殆危殆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朝鮮의 第一期石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三基에 限定되고 만다. 即 其三基만이 統一 以前의 作品인 것이다. 彌勒塔은 損傷이 甚한 것이지만 定林塔, 盈尼山下塔 唐風이 아직 보이지 않은 即 六朝 氣風이 明白히 보이는 塔이라 하겠다. 적어도 隨風까지는 充分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전절 제2항에서는 전형적 탑파로서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을 열거하여 양식사적 순차를 정해 보았으나 확실한 단안을 내리지 못한 점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양식적으로 그 사탑이 거의 동일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 후의 상고에 의하면, 위은탑을 제1위, 고선탑을 제2위, 중앙탑을 제3위, 나원리탑을 제4위에 둘까 한다. 그 이유로선 우선 고선탑이 양식적으로 감은탑과 전혀 동일하나 옥개 기타에 다소 축소된 의사와 기단상 대복석에 다소 간소화된 수법과 초층탑신에 수식 의사의 가미 등이 있어 이러한 점에서 이것을 감은탑 다음에 두겠고, 중앙탑은 부분적으로는 고의(古意)를 다소 남긴 점도 있으나, 다시 또 부분적으로 신의(新意)에 속하는 것도 있어(예를 들어,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 점은 신의라 할 수 있다) 고의는 옛것 외 잔재로 볼 수 있어 하한이 미정되는 것이나, 신의는 그 상한에 제한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점에서 고선탑 하위에 둘 수 있겠고, 나원리탑은 초층옥신에 벌써 사매판석으로써 결구하는 동시에 그 일우에 우주를 표현하려는 의사와 제3층 이상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제2층, 제1층 옥개는 옥개와 옥개밭임이 별석이다) 의사가 있어 이러한 점에서 최하위에 두는 바이다. 시대로 말하면 이 유형의 양식 상안을 감은탑에 두었으므로 이 유형은 모두 문무왕대 이후가 된다. 연대로 말하면 문무왕 8년(즉 신라 통일 원년 서기 668년) 이후이나 각 탑파의 개별적 건립 연수란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필자는 이 사탑을 조선 석탑의 전형적 탑파라 지칭하는 동시에 조선 석탑파사상 제2기에 속하는 것이요, 신라 역사상 중대 전기에 속하는 탑파라 간주한다. 중대 전기라는 것은 정치사적으로 말한다면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신라사의 세대 구분에 있어 《신라본기》가 말하는 진덕왕까지의 성골 시대를 고기라 하고, 무열왕 이후 경순왕까지 진골 시대 중 혜공왕대까지를 중대라 한 구분법에 의하여,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중대 일대, 필자는 또다시 성덕왕대까지 구분하여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중대 전기, 효성왕부터 혜공왕대까지를 중대 후기라 함에 의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전에 말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들의 통일 이전의 작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신라 중대 전기란 것과 시대적으로는 상호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사실 말이지, 무열왕 일대는 물론이요 문무왕 8년까지도 통일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즉 삼국기의 잔존이 여전히 계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삼국 말기의 작품이라 할 때 신라사적으로는 여전히 그것이 신라 중대에도 걸쳐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미륵탑·정림탑은 백제 복멸 이전에 속할 것임으로 그 하한이 서기 661년 전까지 되나, 이것도 신라사적으로 보면 신라 중대에 걸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신라 영역 내에 있어 세년이 불확실한 채 저 미륵탑·정림탑 간에 개재할 수 있는 영니산하탑이 시대적으로 이 신라 중대에 속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 점에서 미륵탑·정림탑은 별 문제로 하더라도(백제탑이니), 영니산하탑만 신라사적으로 보아 신라 중대에 편입시킬 수도 있다. 즉 무열왕 이후이다. 그러나 확실히 저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구별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들을 통일 이후 작이라면, 영니산하탑은 통일 이전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감은탑의 상한이 반드시 문무왕 8, 9년 즉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대, 실제 연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문무왕 8, 9년 이후까지도, 즉 감은탑의 상한이 내려가는 대로 그 하한이 따라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충분히 신라 중기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일 이전에 간단히 두어버린 것은 감은탑 이하 제탑과 명료한 구획을 보이기 위한 한 양식사적 처분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이곳에 제1기(시원양식들) 작품이란 것이 신라사적 견지에 있어서는 실제 연대적으로는 중대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동시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감은탑 이하 제탑과 실제 연대로서 중복되는 것이 아니요, 여전히 구분되면서 중대라는데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양식사적 세대라는 것과 역사에서 말하는 실제 세대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다소 의미가 다른 세대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원적 양식이라는 제1기의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이 전형적 탑파라 할 제2기의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함께 세대적으로는 신라 중대 전기에 합쳐질 수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매우 논술에 있어 혼란될 혐의가 있음으로, 편의적 도식적으로나마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을 통일 이전의 제1기의 탑파라 하고, 감은탑 이하 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 등을 제2기 탑파─세대적으로는 중대 전기의 탑파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이 이러한 세대 문제를 내거는 것은 탑파의 세대적 동향이란 것을 살피기 위한 것임이 주견의 하나인 까닭이다.
쪽수▶P54-2다시 前節 第二項에서는 典型的 塔婆로서 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을 列舉하야 樣式史的 順次를 定해 보았으나 確實한 斷案을 내리지 못한 點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樣式的으로 그 四塔이 거의 等一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後의 商考에 依하면, 威恩塔을 第一位, 高仙塔을 第二位, 中央塔을 第三位, 羅原里塔을 第四位에 둘까한다. 그 理由로선 爲先 高仙塔이 樣式的으로 感恩塔과 全혀 同一하나 屋蓋 其他에 多少 疑縮된 意思와 基壇上 臺覆石에 多少 簡化된 手法과 初層塔身에 修飾 意思의 加味 等이 있어 이러한 點에서 이것을 感恩塔 다음에 두겠고 中央塔은 部分的으론 古意를 多少 남긴 點도 있으나 다시 또 部分的으로 新意에 屬하는 것도 있어(例如, 屋蓋와 屋蓋「밭임」과가 一石으로 되는 點은 新意라 할 수 있다) 古意는 옛것 외 殘滓로 볼 수 있어 下限이 未定되는 것이나 新意는 그 上限에 制限이 있는 것인즉 이러한 點에서 高仙▶P55塔 下位에 둘 수 있겠고 羅原里塔 初層屋身에 벌써 四枚板石으로써 結構하는 同時에 그 一隅에 隅柱를 表現하려는 意思와 第三層 以上 屋蓋와 屋蓋「밭임」이 一石으로 되는(第二, 第一 屋蓋는 屋蓋와 屋蓋밭임이 別石이다) 意思가 있어 이러한 點에서 最下位에 두는 바이다. 時代로 말하면 이 類型의 樣式 上眼을 感恩塔에 두었은즉 이 類型은 모두 文武王代 以後가 된다. 年代로 말하면 文武王 8年(即 新羅 통統一年 西紀 668年)以後이나 各其 塔婆의 個別的 建立 年數란 勿論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筆者는 이 四塔을 朝鮮 石塔의 典型的 塔婆라 指稱하는 同時에 朝鮮 石塔婆史上 第二期에 屬하는 것이요 新羅 歷史上 中代前期에 屬하는 塔婆라 看做한다. 中代前期라는 것은 政治史的으로 말한다면 武烈王代부러 聖德王代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新羅史의 世代區分에 있어 新羅本紀가 말하는 眞德王까지의 聖骨 時代를 古期라 하고 武烈王 以後 敬順王까지 眞骨 時代 中 惠恭王代까지를 中代라한 區分法에 依하야 武烈王부터 惠恭王까지의 中代一代 筆者는 또다시 聖德王代까지 區分하야 武烈王代부터 聖德王代까지를 中代前期, 孝成王부터 惠恭王代까지를 中代後期 라 함에 依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前에 말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들의 統一 以前의 作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新羅 中代 前期란 것과 時代的으론 相覆되는 部分이 생긴다. 事實말이지 武烈王 一代는 勿論이요 文武王 8年까지도 統一은 完成된 것이 아니다. 即 三國期의 殘存이 依然히 繼續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을 三國末期의 作品이라할 때 新羅史的으론 依然히 그것이 新羅中代에도 걸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못 彌勒塔·定林塔은 百濟 覆滅 以前에 屬할 것임으로 그 下限▶P56이 西紀 661年 前까지 되나 이것도 新羅史的으로 보면 新羅 中代에 걸칠 可能性도 있는 것이다. 况新羅 領域 內에 있어 歲年이 不確實한채 저 彌勒塔·定林塔 間에 介在할 수 있는 盈尼山下塔이 時代的으로 이 新羅 中代에 屬하지말란 法이 없다. 이 點에서 彌勒塔·定林塔은 別 問題로 하더라도(百濟塔이니) 盈尼山下塔만 新羅史的으로 보아 新羅中代에 編入시킬 수도 있다. 即 武烈王 以後이다. 그러나 確實히 저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區別을 세우기 爲하야 그것들을 統一 以後 作이라면 盈尼山下塔 統一以前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感恩塔의 上限이 반드시 文武王 8, 9年 即後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댄 實際 年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文武王 8, 9年 以後까지도 即 感恩塔의 上限이 내려가는대로 그下限이 쫓아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야 時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充分히 新羅中期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 統一以前에 簡便히 두어버린 것은 感恩塔 以下 〿 諸塔과 明瞭한 區劃을 보이기 爲한 한 樣式史的 處分手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第一期(始原樣式들) 作品이란 것이 新羅史的 見地에 있어선 實際 年代的으론 中代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同時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感恩塔 以下 諸塔과 實際 年代로선 重覆되는 것이 아니요 依然히 區分되면서 中代라는데 包含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樣式史的 世代라는 것과 歷史에서 말하는 實際 世代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多少 意味가 다른 世代라는 것이 成立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始源的 樣式이라는 第一期의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이 典型的 塔婆라 할 第二期의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함끠 世代的으론 新羅 中代 前期에 合쳐질 수도 있는 것인 ▶P57-1이렇게 되면 매우 論述에 있어 混亂될 嫌이 있음으로 해서 便宜的 圖式的이나마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 統一 以前의 第一期의 塔婆라 하고 感恩塔 以下 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 等율 第二期 塔婆─ 世代的으론 中代前期의 塔婆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하여 이러한 世代 問題를 내거는 것은 塔婆糾 世代的 動向이란 것을 살피기 爲한 것임이 主見의 하나인 까닭이다.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 등 전형적 탑파라 말하고 조선석탑파사상 제2기를 형성하는 탑파라 말하며, 세대적으로는 문무왕 때부터 성덕왕대까지의 중대 전기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탑이 전고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일, 기단이 중층기단으로서 하층은 저평광대하고 상층은 고대포후하되 상대복석에는 초층옥신을 받기 위한 '괴임'이 중단으로 되어 있고, 상대복석에는 상대중석을 받기 위한 방각과 반호형 '몰딩'이 있으며, 중대석에는 상대에 일면사개의 영주, 하대중석에는 일면오개의 영주가 있으며
이일, 초층옥신은 사개우주가 별석이며 사개벽면석이 별석이며(나원리탑은 이미 과도성을 보임)
삼일, 옥석헌미는 수평이요 상부 낙수면은 아무런 층절이 없는 경사면이요 사주형옥면의 사우간각면엔 우동 형식의 조의도 없고, 상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옥상에 상단의 「괴임」이 있고 옥리에는 하등 조각이 없을 뿐더러 옥석 「밭임」이란 것이 정연히 오층단형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중대 전기에 한정시킨 것은 이미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양식적 상안 이를 감은탑이 문무왕대로 비롯하여 신문왕 초년까지에 완성된 사실에서 시작하여 고선·중앙·나원리 등 제탑이 양식적으로 거의 동류된 데서 같은 세대에 둔 것이지만, 그 하한을 하필 성덕왕대까지 결정한 것은 사료적으로는 확실한 근거가 없으되, 이 사탑은 기풍상 성당의 기풍이 농후할 뿐더러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된 와당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이 중대 전기로서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양식의 일단 저하된 제작들이 대개는 차대 즉 중대 후기(효성왕대부터 혜공왕대까지)에 많이 귀속되어지는 점에서 한 개의 도식적 분류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중대 후기에 귀속되는 조선석탑으로서의 제3기에 속할 양식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쪽수▶P57-2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 等 典型的 塔婆라 말하고 朝鮮石塔婆史 上 第二期를 形成하는 塔婆라 말하고 世代的으론 文武王때부터 聖德王代까지의 中代前期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塔이 前稿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一日, 基壇이 重層基壇으로서 下層은 底平廣大하고 上層은 高大鋪厚하되 上臺覆石에는 初層屋身을 받기 爲한「괴임」이 重段으로 되어있고 上臺覆石에는 上臺中石을 받기 爲한 方角과 半弧形 「몰딩」이 있으며 中臺石에는 上臺에 一面四個 檸柱, 下臺中石에는 一面五個의 檸柱가 있으며
二日, 初層屋身은 四個隅柱가 別石이며 四個壁面石이 別石이며(羅原里塔은 이미 過渡性을 보임)
三日, 屋石軒尾는 水平이요 上部 落水面은 아무런 層節이 없는 傾斜面이요 四注形屋面의 四隅桿角面엔 隅棟 形式의 彫意도 없고 上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屋上에 上段의「괴임」이 있고 屋裏에는 何等 彫刻이 없을 뿐더러 屋石「밭임」이란 것이 整然히 五層段形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點

等에서 共通性을 갖고있다. 이것을 中代前期에 限定시킨 것은 이미 前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樣式的 ▶P58上眼 이를 感恩塔이 文武王代로 비롯하여 神文王 初年까지에 完成된 史實에서 시작하여 高仙·中央·羅原里 等 諸塔이 樣式的으로 거의 等類된 데서 같은 世代에 둔 것이지만 그 下限을 何必 聖德王代까지 決定한 것은 史料的으론 確實한 憑據가 없으되 이 四塔은 氣風上 盛唐의 氣風이 濃厚할 뿐더러 中央塔附近에서 發見된 瓦當같은 것이 一般히 이 中代前期로서의 特色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樣式의 一段 低下된 諸作들이 대개는 次代 即 中代後期(孝成王代부터 惠恭王代까지)에 많이 歸屬되어지는 點에서 한 개의 圖式的 分類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中代 後期에 歸屬되는 朝鮮石塔으로서의 第三期에 所屬될 樣式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본문1-1: 2-1. 第三期的作品들


제 3기의 작품들이란 양식적으론 제 2기의 작품들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즉 기단 중, 하대중석면의 탱주가 일반적으로 5개에서 4개로 왜축되었고 옥신과 옥석이 모두 일석(一石)으로 응정되었고 일반히 규모가 줄어든 것 뿐이다. 지금 그 알려져 있는 실례를 들면 이와 같다.

경주군 양북면 장항리일명사지 오중탑쌍기(서탑 재건)
②동 내동면 불국사 석가삼중탑
③동 장수사지 삼중탑
④동 황복사지 삼중탑
⑤동 남산리일명사지 삼중탑쌍기(도파)
⑥동 천군리일명사지 삼중탑쌍기(재건)
⑦동 남산리옥정곡사지 삼중탑(도파)
⑧동 경주면 삼중탑쌍기(도파)
⑨동 외동면 원원사지 삼중탑쌍기(재건)
⑩동 서면 명장리일명사지 삼중탑
⑪창녕군창녕면 술정리동부일명사지 삼중탑
⑫금천군남면 폐갈항사 삼중탑쌍기(금재경성)

쪽수▶P58-2第三期的 作品들이란 樣式的으론 第二期的 作品들과 大同小異한 것이다. 即 基壇 中, 下臺中石面의 撑柱가 一般的으로 五個에서 四個로 矮縮되었고 屋身과 屋石이 모두 一石으로 凝精되었고 一般히 規模가 矮少된 것뿐이다. 지금 그 알려져 있는 實例를 들면 如左하다.

①慶州郡陽北面 獐項里逸名寺址 五重塔雙基(西塔再建)
②同 內東面 佛國寺 釋迦三重塔
③同 長壽寺址 三重塔
④同 皇福寺址 三重塔
▶P59-1⑤同 南山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倒破)
⑥同 千軍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再建)
⑦同 南山里玉井谷寺址 三重塔(倒破)
⑧同 慶州面 三重塔雙基(倒破)
⑨同 外東面 遠願寺址 三重塔雙基(再建)
⑩同 西面 明莊里逸名寺址 三重塔
⑪昌寧郡昌寧面 述亭里東部逸名寺址 三重塔
⑫金泉郡南面 廢葛項寺 三重塔雙基(今在京城)

이상, 여러 탑 이름 외면의 조식 유무, 오중삼중의 차별, 기세의 강약의 차도 등을 별문제로 하면, 탑파로서의 양식은 전혀 한 개의 유형을 이루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여러 탑에서 무엇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느냐 하면, 첫째, 그 유형들이 지방적으로 경상도 일대에만 한정되어 있고, 특히 또 경주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한 의미를 느낀다. 즉, 제2기의 탑파가 역시 그러하여 사탑 중 삼탑이 경주를 중심으로 있었고, 일탑만이 중원경 충주에 있었다. 제1기의 탑은 두 기가 외성, 즉 백제 국경 내에 있었고, 한 기만이 신라 국령 내에 있으나 도심을 떠난 의성군에 가 있었다. 의성에서 어찌하여 고고한 최초의 한 석탑 양식이 이와 같이 발생되었는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외부에서 발생된 한 양식이 제2기로 들면서 신라 통일 후 신라의 도심 지대로 집중되어, 제3기의 양식까지 저와 같이 경도 중심으로 발전된 것임을 볼 때, 당대의 문화가 또한 이 제2기, 제3기를 중심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익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3기 작품에 이르러 벌써 석탑이 건축으로서의 활발한 건축적 정신보다도 수식적인 것으로의 급격한 변천을 보인다. 즉, 현대문주10▶ 장항리 일명사지[a 1]의 오중탑에는 초층 옥신 각 면에 문비 모양이 모각되었을 뿐더러, 우주와 문선 사이에 추경한 인왕 양상이 연화좌 위에 활약적인 태세로 부각되어 있다. 초층 옥신에 이와 같이 사방 문호를 만드는 것은 본디 목조 탑의 의사로서, 그것은 내부 실내에 통하는 의사였다. 저 분황사의 탑에서도 그 퇴화된 형식이나마 사방 감실의 경영이 있음을 보았고, 제1기 석탑의 미륵탑에서도 그 의사를 보았으며, 영니산 하탑, 안동 법림사지, 법흥사지, 일직면 일명사지 등의 모전탑·박탑 등에서도 그 일면적인 감실 경영을 보았고, 제2기에 들어서 고선탑 같은 곳에서도 사방의 문호 양식의 모각이 있음을 본 바이다. 고선탑에서의 문호 양식의 모각은 특히 우수한 것이어서 문주, 문미, 문한, 각치의 표현은 물론이요, 문선의 수문포수의 모각도 화려하며, 문선에는 부석금초를 박았던 공혈까지 남아 있다. 또 문호 양측에 인왕상을 돌각한 예도 일찍이 분황탑에서 그 예를 본 바이다. 다만 후대까지도 인왕상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모두 자연 암석 위에 질타노호의 형상을 하고 있는 표현을 취하고 있는데, 유독 장항리탑에서는 인왕상을 연화좌 위에 올려 앉혀 있다. 이것은 특수한 예이니 지도론에는 「以蓮華軟淨 欲現神力能坐其上 令不壞故 又以莊嚴妙法坐故 又以諸華皆小無如此華羽 梵天王坐蓮(○○○○○) ▶P61華上是故(●●●●)諸佛隨世俗故(●●●●●●) 於寶華上結跏趺坐(●●●●●●●●) 운운이라 있고 대일경소에는 云云이라 있고 大日經疏에는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 等異也 若是佛興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令花開也 石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法念太子者的 T梵王金剛者開口執 士者閉口常或坐俱勿頭華葉上 若淨居諸一 至初禪梵天 等 世間立號爲梵者皆坐赤蓮華中」「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力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等異也 若是佛(○○○) 謂當作八葉芬陀利(○○○○○○○) 白蓮華也(○○○○) 其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 令花半敷(○○○○) 勿令極開也(○○○○○) 若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 或坐俱勿頭華葉上(○○○○○○○○)(乃至) 若淨居諸天乃至初禪梵天等(○○○○○○○○○) 世間立號為梵者皆坐赤蓮華中(○○○○○○○○○○)이라 있어 인왕도 본래는 보살 마하살이니까 연화좌에 올림이 당연할 것 같으되, 그것은 본신의 보살상을 갖추고 있을 때면 모르되 이미 변신하여불법 수호의 일신장(兄之法意太子者後爲金剛力士密跡弟之法念太子看後爲梵王金剛者開口執獨股金剛杵或云不可超而閉口常示强力或云相向而開口暴拳)의 형상으로 표현되었을 적엔 일반적으로 반석 거암에 올리는 것이 통식이다. 즉, 장항리탑에서의 예는 한 개의 특수한 실례인데, 어느 사이엔가 일반적인 제2기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삼왕 조각이 초층 탑신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또 이 장항탑과 함께 제3기 작품 중에 유취되어 있는 원원사지 삼중탑 쌍기에는 초층 옥신 사면에 장구형 방곽을 만들고서 그 안에 사천왕(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서방 광목천, 북방 다문천)을 부각하고, 기단 상층 중대석 면석부에는 연화좌에 십이지상을 부각하였다. 사천왕은 제석천의 외장이며, 십이지상은 약사불의 십이신장과 배합되는 것들이다. 사천왕은 순전히 중국식으로 말하면 사방신이요, 십이지는 십이시신인 동시에 방위신인 것이다. 즉, 중국적 사상으로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의 비호 관념의 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설에 의한 사천왕은 육욕천(첫째 사왕천, 둘째 도리천, 셋째 야마천, 넷째 도솔천, 다섯째 낙변화천, 여섯째 타화자재천) 중 첫 번째 하늘인 사천왕에 속하는 천왕들이요, 제석천은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일명 삼십삼천)을 주재하는 천제로서, 도리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세계이며, 사왕천은 수미산 중턱에 있는 세계로서, 다 같이 제석이 영도하고 있는 지거천의 세계이다. 이 이상, 세 번째 하늘부터 여섯 번째 하늘까지는 공거천으로서 지거천과 구별되는 세계이니 문제 밖이며, 삼십삼천에 군림한 석가모니의 천제석은 저 사면의 사천왕을 영솔하고 있는데, 이 사천왕은 다시 또 각각 팔대천왕을 영솔하고 있다. 동시에 사천왕은 팔부귀중을 영솔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천왕의 영도 아래 삼보옹호의 수호장령으로 이용되는 것은 이 팔부귀중들이다. 다음에 말할 제4기 작품들 이하, 시대적으로는 신라 하대에서부터, 조형적으로는 이 팔부중이 나타나 있는 것인데, 팔부중의 표현 의지만은 제3기 작품인 불국사 석가삼중탑에서부터 벌써 나타나 있다고 하여도 가하다. 즉, 탑파 그 자체에는 아무런 표현이 없지만, 탑파 외위를 둘러 여덟 개의 연화좌가 있는 방구결계가 그것이다. 여덟 개의 연화좌에 관하여는 믿을 만한 사료가 없으나, 불국사 역대기 (혹은 불국사 고금창기)에 보면, 동쪽 다보탑, 서쪽 석가탑(일명 무영탑)이란 다음에 ‘팔방금강좌’란 것이 있어, 이 ‘팔방금강좌’라는 것이 혹 이 팔방연화좌를 두고 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인데 대저 금강좌라는 것은 지도론에 「地皆是衆生虛証業因緣報告有 是故不能舉菩薩 欲成佛時實相知彗身 是時坐處變爲金剛 有人言 土在金輪上 金輪在金剛王 從金剛際出如蓮華臺 直上持菩薩坐 處分不陷沒 以是故此道場坐處名爲金剛」 운운이라 있어, 보살 좌처이니만큼 불국사 삼중탑에서의 연화팔좌를 곧 팔부중의 좌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이 특별한 팔방금강좌의 경영은 곧 탑파에 팔부중을 표현하는 의사의 선구가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즉, 불국사 삼중탑에서의 이 팔좌는 실제로도 팔부보살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던 것인지, 또는 좌석만 만들고 상의적으로 그곳에 팔부보살이 공양하며 좌한 의사를 담았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현대문주2▶어쨌든 탑파 그것 이외에 수호의 보살 내지 천왕신장들을 이와 같이 첨부시키려는 의사가 일반적으로 구체화했던 사실만은 알 수 있다. [a 2] 저 안동 법흥사지 칠중박탑의 기단면에도 부장좌상이 부각되어 있는 예를 말한 적이 있다. 그 세대는 물론 이 중대에 속하는 것이나, 제2기 작품들과 같이 전기에 귀속시킬 것인지(그 편의 가능성이 많다고 필자는 생각하지만), 또는 후기, 즉 이 제3기와 등대에 둘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곳에도 이미 신장을 탑파 기단에 표현시켰다. 다만 그것은 퇴화가 심하여 본래 몇 개의 신장을 표현한 것인지(현재는 매우 산란되어 있음), 따라서 신장의 성질도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그러한 것을 표현하려는 의사가 이 중대 후기를 중심하여 그 전후에 현저해진 특색만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팔부중에 대하여는 다시 후에 말하기로 하고, 앞서 서술한 사천왕은 물론 중국식 사방신에 통하는 의사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불교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형상 그 자체가 벌써 보여주는 바이다. 그러나 십이지상이 십이수신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에서는 불교적인 것보다도 중국적인 시신관념에 더 큰 영향을 받은 듯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당대에 있어서는 이 수신관념은 본디 중국적인 순수한 관념에서보다는 일반적으로 불교적인 것과 혼합되었던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다. 이는 단순히 당대로부터 현저히 농후해진 동양의 풍수관념이란 것이 전설이 전하는 바와 같이 도선선사(통일 후 161년생, 향년 72세)로 말미암아 일행선사(개원 15년 입멸, 통일 후 61년) 법이 유전된 것이라 함에서뿐만 아니라, 십이지 초상의 표현이 신라에서 조형적으로 유행된 것이 단순히 분묘 관계에서뿐 아니라 불찰 관계에서도 유행되기 시작한 점에서 곧 불가적 해석과의 혼합을 생각하게 하는 바라고 하겠다. 십이지 초상이 분묘 관계에 표현되기는 신라의 전칭 성덕왕릉(전칭 모모 왕릉 내지 묘로 지칭되는 것은 실제 그들의 능묘라고 곧 인정할 근거들이 충분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현대문주3▶고증이 필요한 것이요 [a 3] 지금은 다만 일시적 가칭호로서 거용할 따름이다.)의 병석외호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사지의 예로는 황복사지, 내동면 배반리 일명사지, 외동면 말방리 동곡사지 및 구례 화엄사 오중탑에서 발견된 예가 있으며, 불등에는 경주 읍내 최영진 씨 사저 내에 있는 석등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어, 일반적으로 불교 관계에도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뜻에서 필자는 신라 능묘에서의 십이지상은 단순히 중국적인 풍수관념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며 현대문주2▶거기에는 약사불에 대한 두터운 신앙과의 혼여가 가장 힘차게 있었다고 보는 바이다. [a 4] 경덕왕 14년 을미(통일 후 89년), 분황사의 삼십만 육천칠백 근 약사상의 주조는 가장 유명한 사실이지만, 현재 신라불로서 우수한 작품 중에 이 약사상이 많음을 볼 때, 약사 신앙이 신라에, 특히 이 중대에 얼마나 성했는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인연한 십이지상의 표현 욕구의 발달에 대하여는 각별한 관심이 가는 것이다. 전칭 성덕왕릉의 십이지상이 신라 능묘에 나타난 십이지상 중에서 가장 최초의 것에 속하는데, 그것이 전칭대로 실제 성덕왕릉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인 조성은 성덕왕이 훙서한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이렇게 본다면 십이지상의 표현은 저 탑파에서의 일례와 같이 일반적으로 중대 후기의 한 특색이다. 십이지상이 있는 능묘 중 전칭 진덕왕릉, 문무왕릉(괘릉), 김유신묘라는 것들이 조형 양식상 모두 각각 당대의 것이 될 수 없고, 중대 이후에 속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현대문주3▶학자 간의 정견[a 5]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탑파에도 한 개의 중대의 특색이란 것이 이런 곳에 하나 있음이 강조되어지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59-2以上, 諸塔名 外面의 彫飾有無, 五重三重의 差別, 氣勢의 强弱의 差度 等을 別 問題로 하면 塔婆로서의 樣式은 全혀 한 개의 類型을 이루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諸塔에서 무엇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느냐 하면 一曰 그 類型들이 地方的으로 慶尙道一帶에만 限해있고 特히 또 慶州가 中心되어 있다는 곳에 커다란 한 意義를 느낀다. 即 第二期의 塔婆가 亦然하야 四塔 中 三塔이 慶州를 中心하여 있었고 一塔만이 中原京 忠州에 있었다. 第一期의 塔은 二基가 外城 即 百濟 國境 內에 있었고 一基만 이 新羅 國領 內에 있으나 都心을 떠난 義城郡에 가 있었다. 義城에 어찌하야 高古한 最初의 한 石塔樣式이 이와 같이 發祥되었는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外部에서 發生된 한 樣式이 第二期로 들면서▶P60 新羅統一 後 新羅의 都心地帶로 集中되어 第三期의 樣式까지 저와 같이 京都中心으로 發展된 것임을 볼 때 當代의 文化가 또한 이 第二期 第三期를 中心하야 慶州를 中心으로 익(熟)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三期 作品에 이르러 벌써 石塔이 建築으로서의 勃勃한 建築的 精神보다도 修飾인 것으로의 急據한 變遷을 본다. 即 원문주10▶獐項里逸名寺址[2]의 五重塔에는 初層屋身 各面에 門扉模樣이 模刻되었을 뿐더러 隅柱와 門扇間에 遒勁한 仁王兩像이 蓮花座 위에 活躍的 態勢로써 浮刻되여있다. 初層屋身에 이와 같이 四方門戶를 만드는 것은 본디 木造 塔의 意思로서 그것은 內部室內에 通하는 意思였다. 저 芬皇寺의 塔에서도 그 頹化된 形式이나마 四方龕室의 經營이 있음을 보았고 第一期 石塔의 彌勒塔에서도 그 意思를 보았고 盈尼山下塔, 安東法林寺址, 法興寺址, 一直面逸名寺址 等의 模塼塔·博塔 等에서도 그 一面的인 龕室經營을 보았고 第二期에 들어서 高仙塔 같은 데서도 四方의 門戶 樣式의 模刻이 있음을 본 바이다. 高仙塔에서의 門戶樣式의 模刻은 特히 優秀한 것이어서 門柱, 門楣, 門限, 閣峙의 表現은 勿論이요 門扇의 獸吻鋪首의 模刻도 塊麗하고 門扇에는 浮錫金釗을 박았던 孔穴까지 남아있다. 또 門戶兩側에 仁王像 凸刻한 例도 일찍이 芬皇塔에서 그 例를 본 바이다. 다만 後代까지도 仁王像을 表現함에 있어서는 모두 自然岩石 위에 叱咤怒呼의 形像을 하고 있는 表現을 取하고 있는데 唯獨 獐項里塔에서는 仁王像을 蓮花座 위에 올려 앉혀있다. 이것은 特殊한 例이니 智道論에는 「以蓮華軟淨 欲現神力能坐其上 令不壞故 又以莊嚴妙法坐故 又以諸華皆小無如此華羽 梵天王坐蓮(○○○○○) ▶P61華上是故(●●●●)諸佛隨世俗故(●●●●●●) 於寶華上結跏趺坐(●●●●●●●●)云云이라 있고 大日經疏에는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 等異也 若是佛興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令花開也 石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法念太子者的 T梵王金剛者開口執 士者閉口常或坐俱勿頭華葉上 若淨居諸一 至初禪梵天 等 世間立號爲梵者皆坐赤蓮華中」「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力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等異也 若是佛(○○○) 謂當作八葉芬陀利(○○○○○○○) 白蓮華也(○○○○) 其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 令花半敷(○○○○) 勿令極開也(○○○○○) 若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 或坐俱勿頭華葉上(○○○○○○○○)(乃至) 若淨居諸天乃至初禪梵天等(○○○○○○○○○) 世間立號為梵者皆坐赤蓮華中(○○○○○○○○○○)이라 있어 仁王도 번대는 菩薩 摩訶薩이니까 蓮華座에 올림이 當然할 것 같으되 그것은 本身의 菩薩像을 갖추고 있을 때면 모르되 이미 變身하야 佛法守護의 一神將(兄之法意太子者後爲金剛力士密跡弟之法念太子看後爲梵王金剛者開口執獨股金剛杵或云不可超而閉口常示强力或云相向而開口暴拳)의 形像으로 表現되었을 적엔 一般이 盤石 巨岩에 올리는 것이 通式이다. 即 獐項里塔에서의 例는 한 개의 特殊한 實例인데 何如間에 一般이 第二期 作品에선 볼 수 없는 三王彫刻이 初層塔身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또 이 〿項塔과 함끠 第三期 作品 中에 類聚되어있는 遠願寺址 三重塔 雙基에는 初層屋身 四面에 長矩形方廓을 만들고서 그 안에 四天王(東方持國天 南方增長天 南方廣目天 北方多開天)을 浮刻하고 基壇 上層中臺石面石部에는 蓮花座에 十二支像을 浮刻하였다. 四天王은 帝釋天의 外將이며 十二支像은 藥師佛의 十二神將과 配合되는 것들이다. 四天王은 純支那式으로 말하면 四方神이요 十二支는 十二時神인 同時에 方位神인 것이다. 即 支那的 思想으로서만 解釋한다면 그것은 空間과 時間과를 通해서의 庇護觀念의 現示라 할 수 있다. 그러나 佛說에 依한 四天王은 六欲天(一曰四王天, 二曰忉利天, 三曰夜摩天, 四曰 兜率歌, 五曰 樂變化天, 六曰 他化自在天)中 第一天인 四天王에▶P62 屬하는 天王들이요 帝釋天은 第二天인 忉利天(一曰 三十三天)을 主宰하는 天帝로서 忉利天은 須彌山頂에 있는 世界이요 四王天은 須彌山中復에 있는 世界로서 다같이 帝釋이 領導하고 있는 地居天의 世界이다. 이 以上 第三天으로부터 第六天까지는 空居天으로서 地居天과 區別되는 世界이니 問題外이고 三一三天에 君臨한 釋迦能의 天帝釋은 저 四面의 四天王을 領牟하고 있는데 이 四天王은 다시 또 各其八大天王을 領率하고있다. 同時에 四天王은 八部鬼衆을 領率하고 있는데 一般이 四天王의 領導아래 三寶擁護의 守護將令으로 利用되기는 이 八部鬼衆들이라. 다음에 말할 第四期作品들 以下 時代的으론 新羅下代에서부터 造形的으론 이 八部衆이 나타나 있는 것인데 八部衆의 表現意思만은 第三期作品인 佛國寺 釋迦三重塔에서부터 벌써 나타나 있는 것이라 하여도 可하다 即, 塔婆 그自身엔 아무런 表現이 없지만 塔婆 外圍를 돌려 八個의 蓮花座가있는 方區結界가 그것이다. 八個蓮花座에 關하여는 何等 信憑할 史料가 없으나 佛國寺 歷代記 (或云佛國寺古今創記)에 보면 東多寶塔 西釋迦塔 一名無影塔이란 다음에 八方金剛座란 것이 있어 이 八方金剛碎란것이 或歟이 八方蓮花座를 두고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인데 대저 金剛座라는 것은 智度論에「地皆是衆生虛証業因緣報告有 是故不能舉菩薩 欲成佛時實相知彗身 是時坐處變爲金剛 有人言 土在金輪上 金輪在金剛王 從金剛際出如蓮華臺 直上持菩薩坐 處分不陷沒 以是故此道場坐處名爲金剛」云云이라 있어 菩薩坐處이니만치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蓮華八座를 곧 八部衆의 坐處로는 是認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 特別한 八方金剛座의 經營은 ▶P63곧 塔婆에 八部衆을 表現하는 意思의 先軀가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即,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이 八座는 實際에 있어서도 八部菩薩 造成하야 奉安하였던 것인지 또는 座石만 만들고 想意的으로 그곳에 八部菩薩이 供養而坐한 意思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원문주2▶어쨌든 塔婆 그것 以外에 守護의 菩薩 乃至 天王神將들을 이와 같이 添付시키려는 意思가 一般的으로 具體化했든 事實만은 알 수 있다.[3] 저 安東 法興寺址 七重博塔의 基壇面에도 部將坐像이 浮刻되어 있는 例를 말한 적이 있다. 그 世代는 勿論 이 中代에 屬하는 것이나 第二期作品들과 같이 前期에 歸屬시킬 것인지 (그 便의 可能性이 많다고 筆者는 생각하지만) 또는 後期 即 이 第三期와 等代에 둘 것인지 確實치 못하지만 何如間 그곳에도 이미 神將을 塔婆基壇에 表現시켰다. 다만 그것은 頹壞가 甚하야 본래 몇 개의 神將을 表現한 것인지(現今은 매우 散亂되었음) 따라서 神將의 性質도 不分明하지만 何如間 그러한 것을 表現하려는 意思가 이 中代後期를 中心하여 그 前後에 現著해진 特色만은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 八部衆에 대하여는 다시 後에 말하기로 하고 前述한 四天王은 勿論 支那式四方神에 通하는 意思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佛敎的인 것이었을 것은 形像 그自身이 벌써 보이는 바이지만 十二支像이 十二獸神으로 表現돼있는 點엔 佛敎的인 것보다도 支那的인 時神觀念에 더 큰 影響이 있는 듯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當代에 있어서는 이 獸神觀念은 본디 支那的인 純粹한 觀念에서보다도 一般이 佛敎的인 것과 混與되었던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이는 한갓 當代로부터 現著히 濃厚해진 東洋의 風水觀念이란 것이 傳說이 傳하는 바와 같이 道詵禪師(統一後 161年生享年72)▶P64로 말미암아 一行禪師(開元15年 入滅統一後 61年也)의 法이 流轉된 것이라 함에서 뿐 아니라 十二支肖像의 表現이 新羅에서 造型的으로 流行됨이 한갓 墳柒關係에서 뿐 아니라 佛刹關係 엣것에도 流行되기 시작함이 곧 佛家的 解釋과의 混與를 생각케 하는 바라 하겠다. 十二支肖像이 墳墓關係에 表現되기는 新羅의 傳稱聖德王陵(傳稱某某王陵乃至墓로써 指稱되는 것은 實際 그들의 陵墓라고 곧 認定할 根〿들이 充分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원문주3▶考證이 必要한 것이요 [4] 지금은 다만 一時的假稱號로서 擧用할 따름이다)의 屛石外護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寺址의 例론 皇福寺址, 內東面排盤里逸名寺址, 外東面末方里洞鵠寺址 及求禮 華嚴寺五重塔에서 發見된 例가 있고 佛燈에는 慶州邑內 崔泳鎭 氏 私邸 內에 있는 石燈 같은 데도 있어 一般이 佛敎關係에도 盛行되었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에서 筆者는 新羅陵墓에서의 十二支像은 한갓 支那的인 風水觀念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요 원문주2▶ 거기에는 藥師佛에 대한 두터운 信仰과의 混與가 가장 힘차게 있었다고 보는 바이다. [5] 景德王十四年乙未(統一後89年), 芬皇寺의 三十萬六千七百斤 藥師像의 鑄造란 가장 有名한 事實이지만 現在 新羅佛로서 優秀한 作品에 이 藥師像이 많음을 볼 때 藥師의 信仰이 新羅에, 特히 이 中代에 얼마나 盛했든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因緣한 十二支像의 表現欲의 發達이란 것에 대하여는 格別한 關心이 가지는 것이다. 傳聖德王陵의 十二支像이 新羅 陵墓에 나타난 十二支像 中엔 가장 最初의 것에 屬하는 것인데 그것이 傳稱대로 事實 聖德王陵이라 한 데도 實際造成은 聖德王 薨御 後에 있었을 것이니까 이렇게 본다면 十二支像의 表現은 저 塔婆에서의 一例와 같이 一般이 中代後期의 한 特色이다. 十二支像이 있는 陵墓中 傳稱 眞德王陵, 文武王陵(掛陵) 金庾信墓라는 것들이 造▶P65-1型樣式 上 모두 各其 當代의 것이 될 수 없고 中代 以後에 屬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원문주3▶學者間의 定見 [6]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塔婆에도 한 개의 中代의 特色이란 것이 이런 곳에 하나 있음이 強調되여지지 아니할 수 없다.
제3기 탑파에 있어서, 앞서 서술한 조각적 수식 의욕의 발달과 함께 또 하나의 특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현대문주11▶별개의 장식물의 첨부이다.[a 6] 그 현저한 예는 김천군 남면 오봉리 갈항사지에 있던 삼중탑(현재 경성 경복궁 내)에 볼 수 있는 특색이니, 그것은 초층 옥신 면석 각 면에 사천왕 입상이 있었던 듯한 요철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며, 또한 사우의 주형 측우에는 일례로 다섯 개의 정혈이 있고, 주형 내연에는 두 열로 각각 일곱 개의 정혈이 있으며, 면석 상하 좌우에는 네 개의 정혈이 있다. 또한 제1층 옥개에는 현첨 일면에 각 여섯 개의 정혈이 있고, 낙수면에도 정혈이 산재해 있으며, 제2층 및 제3층 옥개 현첨면에도 동일한 정혈이 각 면에 다섯 개씩 있고, 낙수면에도 전과 같이 산재해 있으며, 옥신 주형 내에도 각각 네 개의 정혈이 있다. 이러한 정혈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탑신 전체를 조각 장식이 있는 금동판으로 덮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당대 이른바 '퇴제' 상이라 하여 금동판을 양각의 모형상에 대고 두들겨 물상을 압출해내는 기법이 유행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이러한 퇴제 사천왕상을 초층 옥신에 정식하고, 다른 부분에도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여러 물상의 퇴제품을 덮어 장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저 고선사탑이 초층 옥신의 문호 형식에 가장하였던 부석유금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수식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제3기 작품부터는 일반적으로 옥개 전각 양면에, 또는 전각 저면에 정혈이 나타나니, 이것은 소위 결색(예를 들어 보은 법주사 팔상전 상륜부 사천 결색)과 또는 풍령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 갈항사탑에 대하여, 특히 신라 하대 일반 부도(승려 묘탑)의 옥개에서 볼 수 있는 앙화 형식의 칙금 장식까지 연상하라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후대의 예로서 너무 빨리 고대까지 소급시킨 연상이라 할 수 있겠고, 또한 현첨 저면에는 벌써 요곡된 층절면까지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을 적에, 현대문주4▶함통 7년, 명랑 신인조에 「師挺生新羅 入唐學道 將還因海龍之請 入龍宮傳秘法 施黃金千兩(一云千斤)濟行地下 湧出本宅井底乃捨爲寺 以龍王所施黃金飾塔像 光曜特殊 因名金光焉」[a 7]운운한 기록이 있는데,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했다’는 구절을 불상, 불서, 나아가 불구류에 황금으로 장식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갈항사에서의 실례는 실제로 불탑에 황금 수식이 있었음을 이해하게 한다. (단, 금광사의 유탑은 오층석탑이었으나 파손이 심하고, 또한 양식적으로는 제4기에 속하는 듯하다. 이것은 후에 다시 서술하겠음.)
쪽수▶P65-2第三期塔婆에 있어서 上述한 彫刻的 修飾意欲의 發達과 함끠 또 하나 特色으로 들 것은 원문주11▶ 別個 裝飾物의 添付이다.[7] 그 現著한 例는 金泉郡 南面 梧鳳里 葛項寺址에 있든 三重塔(今在京城 景福宮內)에서 볼 수 있는 特色이니 그것은 初層屋身面石에 各面에 四天王立像이 있었는 듯한 凹凸의 痕跡이 그윽이 보이고 또 四隅의 柱形側隅에는 一例五個의 釘穴이 있고 柱形內緣에는 二列各七個의 釘穴이 있고 面石上下 左右에는 四個의 釘穴이 있다. 또 第一 層屋替에는 軒簷 一面에 各 六個 釘穴이 있고 落水面에도 釘穴이 散在해있고 第二層 第三層 屋蓋 軒簷面에도 同樣의 釘穴이 各面 五個式있고 落水面에도 如前散在해 있고 屋身柱形 內에도 各 四個 釘穴이 있다. 이러한 釘穴들은 곳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塔身 全部를 곳 彫刻裝飾이 있는 金銅板으로써 덮었던 것을 보힘이니 當代 所謂 「褪製」 像이라하야 金銅板을 陽刻의 模型像에 대고 뚜들겨 物像을 押出해내인 手法의 것이 流行되었든 것이니 말하자면 한편으론 이러한 槌製四天王像 初層屋身에 釘飾하고 다른 部分에도 또한 想像할 수 없는 여러 物像의 槌製品을 덮어 裝飾하얏든 것이다. 이것은 저 高仙寺塔이 初層屋身의 門戶形式에 加裝하얏든 浮錫鏂金釘과는 比較할 수 없는 燦爛한 修飾이였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第三期 作品부터서는 一般的으로 屋蓋轉角兩面에, 또▶P66-1는 轉角底面에 釘穴이 나타나나니 이것은 所謂 結索(例如報恩法住寺捌相殿相輪部四田結索)과 또는 風鈴이 달렸든 것으로 解釋된다. 또 葛項寺塔에 대하얀 特히 新羅 下代 一般浮圖(僧侶墓塔)의 屋蓋에서 볼 수 있는 仰花形式의 飭金裝飾까지 聯想하라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後代의 例로써 너머 빨리 古代까지 溯及시킨 聯想이라 할 수 있겠고 또 軒簷底面에는 벌써 凹曲된 層節面까지 表現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三國遺事를 읽을 적에 원문주4▶ 咸通第七, 明朗神印條에 「師挺生新羅 入唐學道 將還因海龍之請 入龍宮傳秘法 施黃金千兩(一云千斤)濟行地下 湧出本宅井底乃捨爲寺 以龍王所施黃金飾塔像 光曜特殊 因名金光焉」[8]云云이란 것에 黃金飾塔像 云云한 것이 佛像, 佛書, 乃至 佛具類에나 黃金으로 裝飾했든 것으로도 理解함즉 하지만 葛項寺에서의 實例는 實際佛塔에 黃金修飾이 있었음을 理解케 한다(但 金光寺의 遺塔은 五層石塔이였으나 被指이 甚하고 또 樣式的으론 第四期에 있는 듯하다. 이것은 後에 다시 敍述하겠음)
이상, 제3기 탑파에 이르러 조선의 석탑이 구조적으로 매우 통일된 정제성을 형성하고(즉 기단은 기단대로, 옥신은 옥신대로, 옥개는 옥개대로 단순히 통일되며, 옥개의 오층단 ‘받임’, 이층단 ‘괴임’의 정제, 상층 기단 사개탱주, 하층단 기단의 사개탱주 등 이미 서술) 동시에 수식장각의 급속한 발전을 보는 바이다. 이러한 뜻은 전형적인 양식 탑파에서만 발휘된 뜻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특수한 별개 양식의 발생을 촉진시킨 특별한 의미도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사정을 다음에 서술할까 하는데, 그보다도 이 제3기란 세대적으로 어떠한 범위에 속하는 것인가 그 규정의 내역을 이곳에서 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듯하다.
쪽수▶P66-2 以上 第三期 塔婆에 이르러서 朝鮮의 石塔이 構造的으론 매우 統一된 整齊性을 形成하고 即基壇基은 基壞대로 屋身은 屋身대로 屋蓋는 屋蓋대로 單純히 統一되며, 屋蓋의五層段 「밭임」, 二層段「괴임」의 整齊, 上層基壇 四介撑柱, 下層段基壇의 四介撑柱 等 已述) 同時에 修飾裝刻의 急速한 發展을 보는 바이다. 이러한 意思는 典型的인 樣式塔婆에서만 發揮된 意思가 아니라 그와 同時에 特殊한 別個 樣式의 發生을 促進시킨 特別한 意味도 있는 것이다. 이제 이 事情을 다음에 叙述할가 하는데 그보다도 이 第三期란 世代的으론 어떠한 範圍에 屬하는 것인가 그 規定의 內譯을 이곳에 말치 아니하면 아니 될 듯하다.

































본문1-2: 2-2. 第三期作品의 世代論


우리는 제3기 작품과 제2기 작품을 구별할 때, 첫째 조건으로 그 기단 양식에서 중층이면서 상층 기단 중대석의 탱주가 한 면 네 개임을 공통적인 요소로 하고, 하층 기단 중대석의 탱주가 한 면 다섯 개인 것을 제2기, 네 개인 것을 제3기 작품이라 구분한다. 동시에 탑신에 있어서 제2기 작품이나 제3기 작품이 옥석 ‘받임’은 최종까지 정연한 오층단이로되, 옥석과 옥신 등의 경영이 단일하게 통제되지 않고 여러 편석으로 구성된 것을 제2기라 하고, 단일하게 통제된 것을 제3기라 하여, 제2기 작품으로는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세대를 신라 중대 전기, 즉 정치사적으로 말하면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 통일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통일 이후 70년간의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므로 양식사적으로 이 제2기의 차위에 속하는 제3기의 작품이란, 물론 세대로 논한다 하더라도 차기에 속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양식사적 순위를 시대사적 순위로 번역할 때는, 시대사적 순열이 일직선 계열을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일직선적인 순열을 이룰 수 없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양식사적 순위란 오히려 차원을 달리한 층위적 순위 계열을 이루는 것이어서, 제3기의 상한이 시간적으로는 제2기의 하한과 겹쳐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양식 발생과 양식 발전 그 자체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예컨대, 한 양식이 완전히 발전되고 소멸된 후에야 다른 신양식이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한 양식이 발생된 후 그것이 발전되는 동안에도 그 중에서 또 다른 한 양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생명이 다한 후에 아들의 새 생명이 출생하여 직선적인 승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생존하는 동안 아들의 새 생명이 탄생하고, 또 그 속에서 손자의 새 생명이 나와 층위적으로 계열이 전개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양식 발전이란 차원을 달리해 가면서 층위적으로 전개되는 만큼, 이것을 평면적으로 일련의 계열을 지어 앞뒤를 재단한다는 것은 무리한 편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탑파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도, 양식 발전에서 이러한 중복은 불가피한 것이며, 우리가 제2기와 제3기를 양식적으로 구별하고, 다시 시간적으로 그것을 전후에 배당할 때 이러한 시간적 중복은 사실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는 두 양식의 하한과 상한 사이의 문제일 뿐,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가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고, 그 간의 성질상 다른 점을 살피는 것이 역사적 이해의 한 방법이므로, 이를 위한 구분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를 중요시하는 나머지 앞서 말한 하한과 상한 간의 실제적 중복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한 가지 예로 설명하면, 제2기 탑파와 제3기 탑파의 구별을 손쉽게 짓는다면, 기단 중대석의撑주가 상층에서는 네 개, 하층에서는 다섯 개이면 제2기, 네 개이면 제3기라 하였다. 그런데 이대로 하면,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 일명사지에 있는 삼중탑도 제2기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적으로도 제2기와 같은 신라 중대 전기에 두겠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것이니, 이는 탑신 그 자체가 모전탑이라 하여 특수한 별개의 양식을 이루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이 삼중탑은 후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저 영니산 하탑의 외양을 모방한 탑신 형식을 갖춘 것이다.), 초층 옥신을 받는 ‘괴임’ 양식이 왜축된 점이라든지, 옥개석 ‘받임’이 4단으로 왜축된 점 등─ 이러한 점은 일반적으로 제3기적 작품과도 떨어져 일종의 과도적 형식을 이루고 있다. 즉, 기단만 보면 대체로 제3기 작품보다는 고양식에 속하는 점이 있으나, 옥석 경영에서는 제3기 작품보다도 뒤처지는 새로운 요소가 그곳에 있다. 이 탑 자체는 물론 이 전형적인 양식 속에 포함되지 않는 별개의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어, 이 점에서 달리 논의될 특질을 지니고 있지만, 양식적 측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중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필자가 제2기 탑파를 시간적으로 신라 중대 전기에 배속시키고, 제3기 작품을 중대 후기에 배속시킨다고 해서, 양식적으로 제2기와 제3기로 구별되는 것이 모두 전적으로 완전히 시간적으로도 중대 전기와 중대 후기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이 아니며, 실제 연대적으로는 제2기 하의 작품이 중대 후기 초까지도 이어질 수 있으며, 제3기 작품이 중대 전기 말까지도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대 전기와 중대 후기라고 하여 그에 배속시키는 것은 대체적인 큰 흐름을 말한 것일 뿐이며, 개별 작품에 관하여는 시간적으로 다소의 출입이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쪽수▶P67우리는 第三期作品 第一期作品에서 區別할제 첫째 條件은 그 基壇 樣式에 있어 重層이면서 上層基壇中臺石의 撑柱가 一面四個임을 共通的 要素로 하고 下層基壇中臺石의 擇柱가 一面五個인 것을 第二期, 四個인 것을 第三期作이라 區分한 同時에 塔身에 있어서 第二期 作品이나 第三期 作品이 屋石「밭임」은 最終까지 整然한 五層段이로되 屋石, 屋身 等의 經營이 單一되게 統制 안 된 것을 即 여러 片石으로써 結構된 것을 第二期라 하고 單一되게 統制된 것을 第三期라 하야 第二期作으로서는 感恩塔·高仙塔· 中央塔·羅原里塔 等을 드러 그 世代를 新羅 中代 前期 即 政治史的으로 말한다면 武烈王代부터 聖德王代까지, 統一을 中心하야 생각한다면 統一 以後 七十年間 것이라 말하얏다. 그러므로 樣式史的으로 이 第二期의 次位에 屬하는 이 第三期의 作品이란 勿論 世代로 論한다 하더라도 次期에 屬할 것은 當然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樣式史的 順位를 時代史的 順位로 翻譯할 때는 時代史的 順列이 一直線系列을 이룸과 같이 그렇게 載然히 一直線的 順列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임을 注意할 必要가 있다. 即 樣式史的 順位란 오히려 次元을 달리한 層位的 順位系列을 이루는 것이여서 第三期 上限이란 것이 時間的으론 第二期 下限과 겹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何必 時間的 問題에서 뿐 아니라 樣式發生과 樣式發展의 그 自體에서도 그러한 것이니 例컨댄 한 樣式이 完全히 發展되고 消失된 後에라야 다른 新樣式이 비로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한 樣式이 發生된 後, 그것이 發展되는 동안에 於中에서 다른 한 樣式이 또 나▶P68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맛치 父의 生命이 方終한 後에 子의 新生命이 出生하야 直線的 承繼를 이룸이 아니요 父의 存命中 子의 新生命은 生產되고 또 그속에서 孫의 新生命이 나와 層位的으로 系列이 展開됨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樣式 發展이란 次元을 달리해가면서 層位的으로 展開되는이 만치 이것을 平面的으로 一系列을 지워 前後를 裁斷한다는 것은 無理한 便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塔婆의 歷史를 말함에 있어서도 樣式 發展에 이러한 重復은 不可避의 것이라 우리가 第二期 第三期를 樣式的으로 區別하고 다시 時間的으로 그것을 前後에 配當시킬제 이러한 時間的 重複은 事實로써 免치 못할 것이지만 이것은 兩樣式의 下限과 上限과 서의 問題일 뿐 中心과 中心과의 距離가 또한 없지 못할 것이니 이 中心과 中心과의 距離를 차고 그간의 性質上 殊別된 것을 차짐이 歷史的 理解의 한 方法인즉 이것을 爲한 區分은 누구나 理解하겠지만 이것을 重要視하는 남어지 前에 말한 下限과 上限과의 實際的 重複 事實을 이저서는 아니된다. 이제 一例로써 說明하면 第二期 塔婆와 第三期 塔婆와의 區別을 손쉽게 짓는다면 其壇中臺石의 撑柱가 上層에선 四個, 下層에선 五個를 第二期, 四個를 第三期라 한다 하얏는데 이대로 하면 善山郡 海平面 洛山洞逸名寺址에 있는 三重塔도 第二期 分類에 든다. 그렇다고 해서 時代的으로도 第二期와 等代인 中代前期에 두겠느냐 하면 그렇치 못한 것이니 그것은 塔身 그 自體가 模塼塔이라 하야 特殊한 別個 樣式을 이룸에서 그러함이 아니라(이 三重塔은 後에 다시 說明하겠지만 저盈尼山 下塔의 外樣을 模한 塔身形式을 갖춘 것이다.) 初層屋身을 받는 「괴임」 樣式의 矮縮된 點이라든지 屋蓋石 「밭임」이 四段으로 矮縮된 點等─이러한 點은 ▶P69-1一般이 第三期的 作品과도 떠러저 一種의 過渡的 形式을 이루고 있다. 即 基壇만에는 大體에 있어 第三期 作品보다는 古樣式에 屬하는 點이 있으나 屋石經營에는 第三期 作品보다도 뒤지는 新要素가 그곳에 있다.이 塔 自體는 勿論 이 典型的 樣式 속에 類聚되지 아니하는 殊別된 別個樣式을 갖고 있어 이 點에서 달리 論해질 特質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樣式 一面에 있어서는 上述한 於中的 意味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곳에 筆者가 第二期 塔婆를 時間的으로 中代前期에 配屬시키고 第三期 作品을 中代後期에 配屬시킨다고 하야 樣式的으로 第二期 第三期로 區別되는 것이 모두 全體로 完全히 時間的으로도 中代前期와 中代後期에 完屬되는 것이 아니요 實際 年代的으론 第二期 下의 作品이 中代後期 初까지도 거칠 수 있는 것이요 第三期 作品이 中代前期 末까지도 거칠 수 있는 것임을 아러야 할 것이다. 이곳에 中代前期요 中代後期라하야 그곳에 配屬시켜지는 것은 大體의 大勢를 말한 것뿐이요 個個 作品에 關하얀 時間的으로 多少의 出入이 있을 것을 斟酌하여야 한다.
이제 필자가 제3기 작품으로 유취시킨 유형의 양식적 공식을 든다면, 기단이 중단이 되되 하단 중대석의 각 면 장주가 네 개, 갑석(석복) 상부 즉 상단 중대석을 받는 절충 부분에 사분일 호형 각형단의 '몰딩'이 있는 것, 상층 기지 중대석에撑주가 역시 네 개, 상단 갑석(석복) 부분의 각형 부연과 상부 초층 옥신을 받는 부분의 중단형 '괴임', 탑신의 각 옥신은 단일석이며, 우주 형식이 모각되어 있고(이 옥신도 실은 전체로 상부가 하부보다 폭이 약간 좁혀져 있다), 옥석에는 몇 층이든 간에 오단 '받임'이 정연하며, 상부 옥신을 받는 부분에는 정연한 중단 '괴임'이 있으며, 옥개의 첨단은 저면이 수평 직선이고, 노반에도 신부에는 주형이 없으나 상부 갑석에는 부연이 달린 정연한 갑석으로 되어 있다(상륜부는 모두 일락되어 불분명하지만) 지금 이러한 양식의 대표작은 전에도 실례를 열거하였지만, 불국사 석가 삼중탑이 보편적이니만큼 그것을 대표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실제 연대를 논함에 있어 유일한 좋은 예는 김천 폐갈항사 삼중탑 쌍기가 있을 뿐이다. 즉, 그 탑의 동탑 상층 기단 중대석 면에 다음과 같은 각명이 있다. 라는 것이다. 신라 탑으로서 글자가 새겨진 유일한 사례인데 이것의 자세한 해석은 따로 역사학자와 고어(古語)학자들의 업적에 바랄 것이지만 대략의 의미는 천보 무술년, 즉 신라 통일 후 92년인 경덕왕 17년에 영묘사의 언적 법사와 조문 황태후 군예와 경신대왕비의 삼남매의 공덕으로 세워진 탑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의해 제5 선두골조에 의하면 갈항사는 승선의 창건으로 되어 있는데(통일 초 때인 듯) 탑은 이와 같이 경덕왕 17년에 영묘사의 언적 법사 및 조문 황태후(원성왕의 어머니) 군예, 경신대왕(원성왕) 비의 세 사람 덕업으로 된 것이다. 기명은 물론 원성왕 대의 추각이나 탑의 건립이 경덕왕 17년, 통일 후 92년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불국사 삼층탑은 『삼국유사』 효선 제9 대성효 이세부모조에 있는 바와 같이 경덕왕 10년(통일 후 85년)으로부터 대력 9년 갑인, 즉 혜공왕 10년(통일 후 108년)에 김대성이 죽은 뒤 국가가 불국사 창건 공사를 마쳤다고 하니 탑의 건립도 그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국사 삼층탑은 양식적으로 보아 폐갈항사 탑보다 훨씬 앞서므로 오히려 경덕왕 10년 이전에 올리고 싶으나 그 이전 얼마나 더 올려야 할 사료가 다시 없는 이상 우선 경덕왕 10년에 잠정적으로 둘 수 있고, 또 같은 유형 중 장수사지 삼층탑은 전하기를 역시 김대성의 창건 사찰로 말하나 확실한 졸년이 혜공왕 10년이니 그 이전까지로 둘 수 있다. 그런데 비교적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든 세 가지 뿐이요 그 다음은 사료가 없어 불명한데, 다만 원원사(遠願寺)와 황복사에 관해서는 얼마간의 설명을 얻을 수가 있다. 즉, 원원사는 『삼국유사』 신주 제6 명랑신인조에 「又新羅京城東南二十餘里有遠源寺 諺傳 安惠等四大德 與金庾信金義元 金述宗等 同願所創也」 운운이라 있다. 원원사란 동경잡기에 「遠願寺在府東鳳棲山麓 未知某年所創 而崇禎庚午(仁祖 八年)重修 丙申災 旋卽重建」이란 소견인데 삼국유사의 원원(遠源)이 곧 이 원원(遠願)일 것임은 문제가 없으나 그 창건은 안혜, 김수신, 김의원, 김술종 등이 살아있을 때 소규모로 창건한 것일 것이니 다른 사람들의 졸년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김수신만은 문무왕 13년(통일 후 5년)에 죽었으므로 원원사는 적어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석탑 두 기는 양식상 도저히 당시의 것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불국사 삼층탑과 전후할 것처럼 보인다. 황룡사에 관해서는 별도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없으며(황룡사(皇龍寺)를 황룡사(黃龍寺)라고도 쓰나 이것은 월성동 즉 내동면 구황리에 있는 것이며 이곳에 동서 두 석탑이 있는 황룡사(皇龍寺)란 내동면 황룡리에 있는 것으로 별개의 사찰이다. 삼국유사 흥법 제3, 황룡사(皇龍寺)장6조에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統一前一一五年)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乃改置爲佛寺」 운운이라 있어 皇龍寺와 黃龍寺의 혼동이 첫 줄부터 있어 이 갈피는 상당히 차려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본 皇龍寺의 黃龍寺와, 지금의 黃龍寺와도 〿동서 30리 거리의 차가 있다) 황룡사에 과ㄴ해서는 삼국유사 의해 제5 의상부교조에 「湘住皇福寺時 與徒衆繞塔 每歩虚而上 不以階升 故其塔不設梯磴 其徒離階三尺 履空而旋」 운운이란 것이 있어 일견 현존한 석탑이 이 역사적인 석탑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황복사는 진덕여왕 7년 의상이 29세(의상은 진평왕 47년 생) 때에 머리를 깎던 곳이요 의상의 속년이 78으로 성덕왕 원년 임인(통일 후 35년)에 입적하였으니 이 탑이 적어도 효소왕 때까지는 있었던 것인 듯하되 양식적으로는 오히려 불국사탑에 전후할 것 같다. 즉 그 순후한 편은 일견 저 제 2기에 속하던 나원리탑(羅原里塔)과도 통하는 점이 있는 듯하되 일반적으로 의축된 기풍이 불국사 삼중탑에 따르지 못하는 점도 있다. 지금 불국사삼중탑을 표준한다면 저 장항리(소자탑정리)일명사지 오중탑 쌍기가 선행할 수 있고 천군리 일명사지 삼중탑 쌍기[a 8] 병행될 수 있겠고 창녕술정리 동부 일명사지탑이[a 9] 불국사삼중탑과 폐갈항사삼중탑과 사이에 있을 수 있을 듯하고 명장리 일명사지 삼중탑[a 10] 은 폐갈항사탑이나 장수사지 삼중탑보다 섬약(纖弱)한 듯하다. 이리하여 대체적으로 이 제3기의 중요한 작품들이 중대 후기의 경덕왕 대를 중심으로 그 전후에 소속될 것이 추정되는 바이다. 즉 3기작품의(○○○○○) 세대는(○○○) 중대(○○) 후기(○○) (효성왕부터 혜공왕)에(○○○○○ ○○○○) 대체로(○○○) 설정되는(○○○○) 이유이다.(○○○○)
쪽수▶P69-2이제 筆者가 第三期 作品으로 類聚시킨 類型의 樣式的 公式을 든다면 基壇이 重段이되 下壇中臺石의 各面掌柱가 四個, 甲石(石覆)上部 即 上壇中臺石을 받는 折衷部分에 四分一弧形 角形段의 「몰딩」이 있는 것, 上層基地中臺石에 撑柱가 亦四個, 上壇甲石(石覆) 部分의 角形副緣과 上部初層屋身을 받는 部分의 重段形 「괴임」 塔身의 各屋身은 單一石이요 隅柱形式이 模刻되어 있고(이 屋身도 實은 全體로 上部가 下部보다 幅이 畧干 좁혀저 있다) 屋石에는 몇 層이든 間에 五段「밭임」이 整然하고 上部屋身을 받는 部分에는 整然한 重段「괴임」이 있고 屋蓋의 簷▶P70-1端은 底面이 水平直線이요 露盤에도 身部에는 柱形이 없으나 上部甲石에는 副緣이 달린 整然한 甲石로 되여있다(相輪部는 擧皆 佚落되여 不分明하지만) 지금 이러한 樣式의 代表作은 前에도 實例를 列擧하얏지만 佛國寺 釋迦 三重塔이 普遍되니 만치 그것을 代表 例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實際 年代를 論함에 있어 唯一한 好例는 金泉廢葛項寺 三重塔雙基가 있을 뿐이다. 即 그 塔의 東塔上層基壇中臺石面 左와 같은 刻銘이 있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 零妙寺言寂法師在旀
姉者 照文皇太后君妳在旀
妹者 敬信太王妳在也

란 것이다. 新羅塔婆로서 記刻이 있는 唯一한 例인데 이것의 詳細한 解釋은 달리 史學家 古語學者들의 業績에 바랄 것이지만 대체의 意義는 天寶戊戌年 卽 新羅統一 後 九十二年 景德王 十七年에 零妙寺言 寂法師와 照文皇太后 君妳와 敬信大王妳의 三男妹의 業으로 建立된 탑임을 알 수 있다. 三國遺事義解 第五㬺 詮髑髏條에 依하면 葛項寺는 勝詮의 開創으로 되어있는데(統初때인 듯) 塔은 이와 같이 景德王 十七年에 零妙寺言 寂法師及照文皇太后(元聖王母)君妳, 敬信大王(元聖王)妳의 三人德業으로 된 것이다. 記銘은 勿論 元▶P71聖王代의 追刻이나 塔의 建立이 景德王十七年 統一後九十二年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佛國寺三重塔은 三國遺事孝善第九大城孝二世父母條에 있는 바와 같이 景德王十年(統一後八十五年)으로부터 大曆九年甲寅 即 惠恭王十年(統一後一○八年) 金大城이 卒後國家가 佛國寺創功을 罼成시켰다하니 塔의 建立도 그 사이에 있을 것이로되 이 佛國寺三重塔은 樣式的으로 보아 廢葛項寺塔보다 멀리 先行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景德王十年以前에 올리고 싶으나 그 以前 얼마나 더 올려야 할 史料가 다시 없는 以上 爲先 景德王十年에 暫定的으로 둘 수 있고 또 같은 類型中 長壽寺址三重塔은 傳에 이 亦 大城의 創建寺刹로 말하나 意識的 卒年이 惠恭王 十年이니 그 以前까지 둘 수 있다. 그런데 比較的 年代를 推定할 수 있는 것은 上記 三種뿐이요 之次는 史料가 없어 不明한데 다 못 遠顧寺及皇福寺에 關하여는 얼마마한 설명을 얻을 수가 있다. 即 遠願寺는 三國遺事神咒 第六, 明郞神印條에 「又新羅京城東南二十餘里有遠源寺 諺傳 安惠等四大德 與金庾信金義元 金述宗等 同願所創也」 云云이라 있다. 遠願寺란 東京雜記에 「遠願寺在府東鳳棲山麓 未知某年所創 而崇禎庚午(仁祖 八年)重修 丙申災 旋卽重建」이란 所見인데 三國遺事의 遠願이 即 이 遠願일 것임은 無妨하나 그 創建은 安惠 金廋信 金義元 金術宗 等 生存時小創일 것인즉 다른 사람들의 卒年은 未審이나 金廋信만은 文武王 十三年 (統一後五年)에 卒했은즉 遠願寺는 적어도 그 以前에 創建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殘存해있는 石塔兩基는 樣式上 到底히 當代의 것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佛國寺三 ▶P72重塔과 前後할 것인 듯하며 皇龍寺에 關하연 別로히 歷史的 史實을 알 수 없으며 (皇龍寺를 黃龍寺라고도 쓰나 이것은 月城東 即 內東面 九黃里에 있는 것이며 이곳에 東西 兩 石塔이 있는 皇龍寺란 內東面 黃龍里에 있는 것으로 別介의 寺刹이다. 三國遺事 興法第三, 皇龍寺 丈六條에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統一前一一五年)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乃改置爲佛寺」 云云이라 있어 皇龍寺와 黃龍寺의 混同이 일줄부터 있어 이 갈피는 相當히 차려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本 皇龍寺의 黃龍寺와, 지금의 黃龍寺와도 〿東西三十里 距離의 差가 있다) 皇福寺에 關하얀 三國遺事義解 第五 義湘傅敎條에 「湘住皇福寺時 與徒衆繞塔 每歩虚而上 不以階升 故其塔不設梯磴 其徒離階三尺 履空而旋」 云云이란 것이 있어 一見 現存한 石塔이 이 歷史的인 石塔이 아닐가 생각함즉 하지만 皇福寺는 眞德女王 七年 義湘이 二十九歲(義湘은 眞平王 四十七年生) 때에 落髮하던 곳이요 義湘의 俗年七十八로 聖德王 元年 壬寅(統一後三五年)에 入寂하였으니 이 塔이 적어도 孝昭王때까지는 있었던 것인 듯하되 樣式的으론 오히려 佛國寺塔에 前後할 것 같다. 即 그 純厚한편은 一見 저 第二期에 屬하든 羅原里塔과도 통하는 點이 있는 듯하되 一般히 疑縮된 氣風이 佛國寺三重塔에 따르지 못하는 點도 있다. 지금 佛國寺三重塔을 標準한다면 저 獐項里(小字塔亭里)逸名寺址 五重塔 雙機가 先行할 수 있고 千軍里 逸名寺址 三重塔 雙機 [9] 並行될 수 있겠고 昌寧術亭里 東部 逸名寺址塔이[10] 佛國寺三重塔과 廢葛項寺三重塔과 사이에 있을 수 있을 듯하고 明莊里 逸名寺址 三重塔 [11] 廢葛項寺塔이나 長壽寺址 三重塔보다 纖弱한 듯하다. 이리하야 大體에 있어 이 第三期의 重要한 作品들이 中代後期의 景德王代를 中心하고서 그 前後에 所屬될 것이 推定되는 바이다. 即 三期作品의(○○○○○) 世代는(○○○) 中代後期(自孝成王至惠恭王)에(○○○○○○○○○○○○○○) 大體로(○○○) 設定되는(○○○○) 所以然이다.(○○○○○)


































본문1-3: 2-3. 中代後期의 一般石塔界動向─特히 特株樣式들의 發生傾向의 發芽


전술한 바와 같이 제 3기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건축적 결구(結構) 의사가 단일된 조각적인 의사에도 농후히 기울어져 들어가는 동시에 탑파 그 자신에 농후한 장식 의사가 가미되어 들어가 이곳에서 전대에서 볼 수 없는 비건축적인 장식적 탑파의 유행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제 3기 탑파의 이러한 동향은 한갓 탑파에서뿐 아니요 일반이 신라 중대 후기의 문화 동향이기도 한 것이다. 즉 경덕왕 대를 중심으로 한 제반경영의 조식적 의사를 회고할 때 이 특색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영해(領解)할 수 있는 점이다. 이리하여 탑파에 대한 장식의사는 한갓 재래 전형적 탑파 외부에 가식하려는 의사에 그치지 않고 탑파 그 자신의 외양에까지 특별한 외양의 것을 내려 한 것이다. 이곳에 비로소 전형적 양식 외에 특수 양식의 발생을 보게 된 것이니 그 좋은 예가 불국사 다보탑이라든지 선산 기타에 보이는 모전탑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대가 내려올수록 여러가지 유형의 발생을 보게 된 것이며 동시에 전형적 탑파 그 자신에도 여러가지 변천을 보게 된 것이니 이러한 사정을 시대의 구분과 유형의 유취를 호상관련시켜가며 서술코자 하는 바이지만, 이곳에는 우선 중대 후기에 해당해 저 제 3기 양식들이란 것과 층위적으로 등위에 있을 것을 설명해볼까 한다.
쪽수▶P73-1前述한 바와 같이 第三機의 作品은 全般적으로 建築的 結構 意思가 單一된 彫刻的 意思에도 濃厚히 傾하여 들어가는 同時에 塔婆 그 自身에 濃厚한 裝飾 意思가 加味되어 들어가 이곳에 前代에서 볼 수 없는 非建築的인 裝飾的 塔婆의 流行을 보게 된 것이다. 卽 第三期 塔婆의 이러한 動向은 僅 탑파에서뿐 아니요 一般이 新羅 中代 後期의 文化 動向이기도 한 것이다. 卽 景德王代를 中心한 諸般經營의 條飾的 意思를 回顧할 때 이 特色은 誰나 容易하게 點頭할 수 있고 領解할 수 있는 點이다. 이리하야 塔婆에 對한 裝飾 意思는 한갓 在來 典型的 塔婆 外部에 加飾하려는 意思에 끄치지 않고 塔婆 그 自身의 外樣에까지 特別한 外樣의 것을 내려 한 것이다. 이곳에 비로소 典型的 樣式 外에 特殊 樣式의 發生을 보게 된 것이니 그 좋은 例가 佛國寺 多寶塔이라든지 善山 其他에 보이는 模塼塔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야 代가 내릴사록 여러가지 類型의 發生을 보게 된 것이며 同時에 典型的 塔婆 그 自身에도 여러가지 變遷을 보게 된 것이니 이러한 事情을 時代의 區分과 類型의 類聚를 互相關聯시켜가며 叙述코자 하는 바이지만 이곳에는 爲先 中代 後期에 該當하여 저 第三期 樣式들이란 것과 層位的으로 等位에 있을 것을 說明해볼가 한다.
① 경주 토함산 화엄 불국사 다보석탑
경주 토함산의 불국사는 원래 화엄불국사로 혹칭 화엄불류사라고도 하였다 한다(불국사고금 창기). 즉 신라 화엄종찰의 하나로서 특히 그 가람경영에 있어 평면 배치의 만차나(曼茶羅)적 전개라든지 입체 취적(聚積)에 있어 환상적 가구 결책은 한갓 해동계림의 명찰일 뿐더러 동양의 명가람이요 우내의 화엄정사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 대웅금당보전 전에 동서로 석탑 쌍기가 있으니 현대문주5▶서쪽에 있는 삼중석탑이 즉 기술한 석가탑 내지 무영탑 [a 11]이란 것이요 동쪽에 있는 것이 다보여래상주 설명의 탑 즉 다보탑이란 것이다. 묘법연화경견빈탑품 중에

云云爾時佛前有七寶塔 高五百由旬 縱廣二百五十由旬 從地踊出 空中住在(乃至) 爾時寶塔中出 大音聲歎言 善哉善哉 釋迦牟尼世尊 能以平等大慧教菩薩法佛所護念 妙法華經爲大衆說 如是如是 釋迦牟尼世尊 如所說者皆是眞實 (乃至) 爾時 佛告大樂設菩薩 此寶塔中有如來全身 乃往過去 東方無量千萬億阿僧祇世界國名寶淨 彼中有佛 號曰多寶. 其佛行菩薩道時作大誓願 我若成佛滅度之後 於十方國土 有說法華經處 我之塔廟爲聽是經故涌現其前為作證明 讚言善哉 云云

라 있는 바와 같이 법화경유설처(法華經有說處)면 다보불(多寶佛)의 탑묘가 그것을 들며 그것이 곧 진리임을 설명키 위하여 용현한다는 데에서 다보불상주설명(多寶佛常住說明)의 보탑이라 하는 바인데 이것은 그 명칭에 대한 자유 설명이요 법화경에는 다시 경보탑품 중에

云云爾時 多寶佛 於寶塔中分半座與釋迦牟尼佛而作是言 釋迦牟尼佛可就此座 即時釋迦牟尼佛入其塔中 坐其半座結趺跌坐 云云

이란 것이 있어 이로써 보면 다보탑 안에 이미 칭가모니불이 분좌하여 있는 이만치 따로 칭가탑이란 것이 필요치 않을 성싶은데 이곳에 칭가탑이 다시 또 경영되어 있는 것은 칭가탑을 칭가여래 상좌설법의 빈소라 해석하는 이만치 시간적으로 말하면 저 다빈탑이 용형되기 전, 즉 칭가설법이 선행되는 데서 그 의미에서 경영되어있는 것 같다. 즉 칭가설법과 다보불설명이란 시간적으로 계기될 수 있는 선후의 관계 하에 있는 것이지만 그 시간 관계를 공간적으로 전개시키자니까 이곳에 이러한 비논리적 전개가 성립된 것이다. 물론 칭가불이 불설을 연법할제 그것을 듣고 그것을 설명키 위하여 다보탑이 용현되는 것이니까 그곳에 공간적으로 공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적 선후관계를 공간적 공간 형식으로 전개시킨 결과는 의연히 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니 이곳에 시간적 선후 관계를 공간적 공재 형식으로 표현하는 원시예술의 일반의사(일본의 회권물(繪券物)라는 것은 늘 이 형식을 밟고 나간 것이요 근대 서양 예술에 있어서 미래파의 의도도 이러한 것이지만)가, 그곳에 작용하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문제지만 당시 예술의사의 일단을 규지할 수 있는 한 자료일까 한다.
쪽수▶P73-2① 慶州 吐含山 華嚴 佛國寺 多寶石塔
▶P74慶州 吐含山의 佛國寺는 元히 華嚴佛國寺로 或稱 華嚴佛類寺라고도 하얏다 한다(佛國寺古今 創記). 卽 新羅 華嚴宗刹의 하나로서 特히 그 伽籃經營에 있어 平面 配置의 曼茶羅的 展開이라든지 立體聚積에 있어 幻想的 架構結策은 한갓 海東鷄林의 名刹일 뿐더러 東洋의 名伽藍이요 宇內의 華嚴精舍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 大雄金堂寶殿 前에 東西로 石塔 雙基가 있으니 원문주5▶西에 있는 三重石塔이 卽 記述한 釋迦塔 乃至 無影塔[12]이란 것이요 東에 있는 것이 多寶如來常住 說明의 塔 卽 多寶塔이란 것이다. 妙法蓮華經見賓塔品 中에

云云爾時佛前有七寶塔 高五百由旬 縱廣二百五十由旬 從地踊出 空中住在(乃至) 爾時寶塔中出 大音聲歎言 善哉善哉 釋迦牟尼世尊 能以平等大慧教菩薩法佛所護念 妙法華經爲大衆說 如是如是 釋迦牟尼世尊 如所說者皆是眞實 (乃至) 爾時 佛告大樂設菩薩 此寶塔中有如來全身 乃往過去 東方無量千萬億阿僧祇世界國名寶淨 彼中有佛 號曰多寶. 其佛行菩薩道時作大誓願 我若成佛滅度之後 於十方國土 有說法華經處 我之塔廟爲聽是經故涌現其前為作證明 讚言善哉 云云

라 있는 바와 같이 法華經有說處면 多寶佛의 塔廟가 그것을 들며 그것이 곧 眞理임을 說明키 爲하여 湧現한다는 데서 多寶佛常住說明의 寶塔이라 하는 바인데 이것은 그 名稱의 대한 自由說明이요 法華經에는 다시 經寶塔品 中에

云云爾時 多寶佛 於寶塔中分半座與釋迦牟尼佛而作是言 釋迦牟尼佛可就此座 即時釋迦牟尼佛入其塔中 坐其半座結趺跌坐 云云

▶P75이란 것이 있어 이로써 보면 多寶塔 안에 이미 釋迦牟尼佛이 分座하여있는 이만치 따로히 釋迦塔이란 것이 必要치 않을 성싶은데 이곳에 釋迦塔이 다시 또 經營되어 있는 것은 釋迦塔을 釋迦如來 座上說法의 賓所라 解釋하는 이만치 時間的으로 말하면 저 多寶塔이 湧現되기 前, 卽 釋迦說法이 先行되는 데서 그 意味에서 經營되어있는 것 같다. 卽 釋迦說法과 多寶佛說明이란 時間的으로 契機될 수 있는 先後의 關係 下에 있는 것이지만 그 時間 關係를 空間的으로 展開시키자니까 이곳에 이러한 非論理的 展開가 成立된 것이다. 勿論 釋迦佛이 佛說을 演法할 제 그것을 듣고 그것을 說明키 爲하여 多寶塔이 湧現되는 것이니까 그곳에 空間的으로 共在할 수 있는 可能性이 全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時間的 先後關係를 空間的 空間 形式으로 展開시킨 結果는 依然히 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니 이곳에 時間的 先後關係를 空間的 共在形式으로 表現하는 原始藝術의 一般意思(日本의 繪券物라는 것은 늘 이 形式을 밟고 나간 것이요 近代 西洋 藝術에 있어서 未來派의 意圖도 이러한 것이지만)가, 그곳에 作用하고 있음을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것은 餘外의 問題지만 當時 藝術의 意思의 一端을 窺知할 수 있는 한 資料일까 한다.
이는 여하간에 다보탑의 유래는 위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다보탑의 저러한 특별한 양식에 관해서는 그러한 양식이 아니면 아니 될 하등의 규정도 법화경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같은 데에 보이는 약왕보살소비공양탑(藥王菩薩燒身供養塔)의 설화에 의하여 구체화엄사(具體華嚴寺)의 사자좌삼중석탑(獅子座三重石塔), 평창월정사팔각구층석탑, 강릉 신복사지삼중석탑 등과 같이 전혀 별개의 이양탑파들로서도 그 앞에 약왕보살을 앉혀 그것이 다보탑임을 현시한 예도 있는 것이다. 혹은 중국의 용문·대동·운강·돈황 등 제지석굴벽에는 흔히 보는 보통 방형의 층탑 속에 이불병좌의 형상을 조각하여 그것이 다보·칭가 양불입좌의 뜻임을 현사함으로써 다보탑임을 보인 예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보탑의 조성에 있어 양식적으로 하등의 규정이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어떠한 양식을 표현하든지 관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양식이 나오든지간에 관계치는 않지만 한 양식이 나올 때면 그곳에 반드시 어느 턱어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완전히 독립된 무에서 유로의 창안이란 인간 세계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 경주 불국사에서 보는 다보탑의 양식은 어디다 그 턱어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그 외양은 실로 불교권 내 제국에서 볼 수 없는 특출한 외양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도 어떠한 턱어리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턱어리는 무엇이었을까. 이곳에 필자는 필자 자신의 의견이 있는 바이다.
쪽수▶P75-2이는 如何間에 多寶塔의 由來는 如常한 것이라 하드라도 多寶塔의 저러한 特別한 樣式에 關하여는 그러한 樣式이 아니면 아니될 下等의 規定도 法華經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或, 藥王菩薩本事品 같은데 보이는 藥王菩薩燒身供養塔의 說話에 依하여 具體 華嚴寺의 獅子座三重石塔, 平昌 月精寺八角九層石塔, 江陵 神福寺址三重石塔 등과 같이 全혀 別個의 異樣塔婆들로서도 그 앞에 藥王菩薩을 앉혀 그▶P76-1것이 多寶塔임을 現示한 例도 있는 것이다. 或은 中國의 龍門·大同·雲岡·敦煌 등 諸地石窟壁에는 흔히 보는 普通 方形의 層塔 속에 二佛並坐의 形相을 彫刻하야 그것이 多寶·釋迦 兩佛立坐의 뜻임을 現示함으로써 多寶塔임을 보힌 例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多寶塔의 造成에 있어 樣式的으로 下等의 規定이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어떠한 樣式을 表現하든지 關係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樣式이 나오든지間에 關係치는 않지만 한 樣式이 나올 때면 그곳에 반드시 어느 턱어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全然 獨立된 無에서 有로의 創案이란 人間世界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 慶州 佛國寺에서 보는 多寶塔의 樣式은 어데다 그 턱-어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그 外樣은 實로 佛敎圈 內 諸國에서 볼 수 없는 特出한 外樣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도 어떠한 턱어리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턱어리는 무엇이었을가. 이곳에 筆者는 筆者 自身의 意見이 있는 바이다.
우선 외양에 있어 복잡한 듯한 이 불국다보탑을 요소적인 근본 형태로 환원시킨다면 기단 위에 방각(네모난 누각)이 있고 방각 위에 팔각원형의 보식부(보장식 부분)가 있고 그 위에 빈개(덮개) 상륜이 있는 양식이다. 이 중에서 팔각은 곧 원형을 뜻하는 것이므로 해서 결국은 방각 위에 원형탑이 있고 그 위에 상륜이 있는 품이 된다. 이러한 뜻의 공통된 양식을 찾자면 우리는 지금 조선 내에서는 예를 들 수 없고 현대문주6▶일본 시가현(滋賀縣) 석산사, 와카야마현(和歌山縣) 고야산(高野山) 금강삼매원(金剛三昧院)의 다빈탑 양식을 [a 12]들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방각 위에 원구형 탑신이 나오고 그 위에 다시 원구 탑신이 또 하나 있어 보개가 그것을 덮고 그 위에 상륜이 있는 것으로 세부의 표면적 수법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양식의 공통된 것임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석산사 금강원 등의 다보탑형을 다시 해석한다면, 결국 방단 위에 원구탑신이 이중으로 놓이고 그 위에 보개가 덮인 탑파로서, 이 하층 원구 탑신에 방각의 부계(副階)를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탑파를 우리는 조선에 갖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교토 다이고사(醍醐寺) 목조오중탑파의 중심찰주판화(中心擦柱板畫)라든지 고야산의 유기탑(瑜祇塔)이란 데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이 유기탑에 관하여는 현대문주7▶후지와라 요시카즈(藤原義一) 씨 [a 13], 현대문주8▶아마누마 슌이치(天沼俊一) 공학박사 [a 14] 등이 논한 바 있고, 그들은 그 원형 출처를 인도 불타가야(佛陀伽倻) 등의 복발식(覆鉢式) 대탑으로 돌렸다. 이는 물론 하필 이 형식의 탑파뿐이 아니요 동양의 불탑은 그것이 불탑인 이상 무엇이든 간에 그 근원을 소구한다면 인도의 복발 형식 원탑에 회귀되지 아니할 것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근원적인 것으로 일원적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면 결국 그것은 보편적 일반적인 의미는 해결되겠지만 그러한 원형에서 저러한 차별상이 어찌하여 발생되었는가 하는 특수 설명은 미결되고 만다. 즉 일률로 이러한 탑상을 원래 하나밖에 없는 인도식 탑계로 소원 회귀시킬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어디로부터 그러한 수이상(殊異相)이 나왔는가 함으로 해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때 필자는 필자 자신의 뜻으로 이 양식이 나온 동기는 저 마하승기율(摩訶僧祗律)에 나타난 조탑파설에 귀인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왈

作塔法 下基四方 周厄欄楯 圓起二重 方牙四出 上盤蓋 施長表相輪

이란 것이 그것이니, 이는 곧 불국사 다보탑을 해명키 위한 특제(特製)의 구절인 듯도 하여 그 형식을 설명함에 실로 여운 없는 것이라 하겠다. 보계가 사출한 방단 위에 난순의 흔적이 명료히 잔존하여 있으니 이 곧 「下基四方周匝欄楯」이며 방각사주의 옥첨이 표표한데 그 위의 방형 난간이 있어, 그 속에 다시 팔각형 난순을 장각기대가 떠받들고 있는 죽절형 위주 사이에 팔각원형의 탑신이 있으니 이 곧 제 1층의 원기요, 이 위에 연화보다 위에 다시 팔각원형의 탑신이 있으니 이 제이층 '원기'(圓起)와 양자 합하여 원기 이중(圓起 二重)에 해당하는 것이며 초층의 방각은 결국 초층 원기에 부상으로 이것이 이른바 방아사출(方牙四出)이며 이중 원기 위에 팔각형 반개가 있음은 그 소위 '상반개'(上盤蓋)란 것이며 그 위에 노반복발의 구륜이 장표되어 있으니 이것이 이른 '시장표상륜'(施長表相輪)이라, 승기율의 작탑규범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법화경 자체에는 조탑 양식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경설의 해석 여하에 따라 탑중이불의 병좌 형각만 가지고도 다보탑을 상징시킬 수 있었으며, 혹은 또 약왕보살의 소비공양상으로써 다보탑을 상징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동방무량천만억 아승지보부세계의 다보불상주증명의 빈탑을(이 뜻에서 다보탑을 또한 동쪽에 앉힌 듯) 표현키 위하여는 재래의 단순한 방합 층루의 전설적 양식을 벗어나서 저 승기율에 규정된 양식에 좇아 세부에 자유로운 환상을 활약시켜서 조성한 것이 곧 이 불국사 다보탑이요, 저 일본의 제(諸) 다보탑의 양식도 이러한데 그 발족이 있었던 것이요, 겸하여 그 양식적 원류도 중국에 있었을 법하되 지금 중국의 유구에선 그 예를 찾을 수 없고 오직 계림과 부상 양지에만 남은 듯하다. 그러나 불국사의 이 다빈탑 같이 환상적이요 기교적인 것은 다시 없는 모양이다. 현존한 일본의 다빈탑으로 가장 고고한 유구는 전에 들었던 석산사탑으로서 고토바(後鳥羽) 천황 겐큐(建久) 원년에서 9년까지(고려 통일 후 525–533년, 고려 개국 후 273–281년)의 작품이요, 현대문주9▶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은 고야산 유기탑(세이와(淸和) 천황 정관 2년, 신라 통일 후 124년), 같은 고야산 대탑(광효(光孝)천황 인화 2년, 신라 통일 후 221년) [a 15] 등인데, 불국사의 다보탑은 전에 석가 삼중석탑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덕왕 10년(신라 통일 후 85-) 이후로 되어 있다. 경덕왕 십칠년 무술세작이란 기록이 있는 폐갈항사탑보다 석가삼중탑이 매우 고고하고 우수한 편에 있어 그 간의 7년 차이쯤은 인정할 수 없고, 연대적으로 좀 더 오래일 것 같지만 다른 의지할 사료가 없어 경덕왕 10년에 두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고고한 유기탑이란 것보다 백여 년 이전에 이만한 우수한 경영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76-2于先 外樣에 있어 複雜한 듯한 이 佛國多寶塔을 要素的 根本形態로 還元시킨다면 基壇 위에 方閣이 있고 方閣 위에 八角圓形의 寶飾部가 있고 그 위에 賓蓋 相輪이 있는 形式이다. 이 中에서 八角은 곧 圓形을 뜻하는 것이므로 해서 結局은 方閣 우에 圓形塔이 있고 그 우에 相論이 있는 품이 된다. 이러한 意思의 共通된 樣式을 찻자면 우리는 지금 朝鮮 內에서는 例擧할 수 없고 원문주6▶日本 滋賀縣 石山寺, 和歌山縣 高野山 金剛三昧院의 多賓塔様을 [13] 들 수 있을 것이다. 即 그것은 方閣 우에 圓球形塔身이 나오고 그 우에 다시 圓球塔身이 또 하나 있어 寶蓋가 그것을 덮고 그 우에 相輪이 있는것으로, 細部의 表面的 手法은 달다▶P77-1하드래도 根本樣式의 共通된 것임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石山寺 金剛院 等의 多寶塔形을 다시 解釋한다면 結局 方壇 우에 圓球塔身이 二重으로 노히고 그 우에 寶蓋가 덮인 塔婆로서 이 下層圓球 塔身에 方閣의 副階를 붓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樣式의 塔婆를 우리는 朝鮮에 갓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京都 醍醐寺 木造五重塔婆의 中心擦柱板畫라든지 高野山의 瑜祇塔이란 데서 그 形態를 볼 수 있다. 이 瑜祗塔에 關하얀 원문주7▶藤原義一氏 [14](각주 7) 원문주8▶天沼俊一工學博士 [15](각주 8) 等이 論한 바 있고 그들은 그 原形 出處를 印度佛陀伽倻 等의 覆鉢式 大塔으로 돌렸다. 이는 勿論 何必 이 形式의 塔婆뿐이 아니요 東洋의 佛塔은 그것이 佛塔인 以上 무엇이고간에 그 根源을 溯究한다면 印度의 覆鉢形式原塔에 回歸되지 아니할 것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根源的인 것으로 一元的으로 還元지켜 버린다면 結局 그것은 普遍的 一般的인 意味는 解決되겠지만 그러한 原形에서 저러한 差別相이 엇지하야 發生되였는가 하는 特殊 說明은 未決되고 만다. 即一律로 이러한 塔相들을 元來 하나밖에 없는 印度 式塔系로 溯源 回歸시킬 것이 아니라 어찌하야 어디로부터 그러한 殊異相이 나왔는가 함으로 解答치 않으면 아니된다. 이때 筆者는 筆者 自身의 意思것, 이 樣式이 나온 動機는 저 摩訶僧祗律에 나타난 造塔婆說에 歸因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曰

作塔法 下基四方 周厄欄楯 圓起二重 方牙四出 上盤蓋 施長表相輪

이란 것이 그것이니, 이는 곧 佛國寺 多寶塔을 解明키 爲한 特製의 句인 듯도 하야 그 形式을 說明함에▶P78 實로 餘蘊 없는 것이라 하겠다. 步階가 四出한 方壇 우에 欄楯의 痕跡이 明瞭히 殘存하야 있으니 이 곧 「下基四方周匝欄楯」이며 方閣四注의 屋簷이 飄飄한대 그 우의 方形 欄干이 있어, 그 속에 다시 八角形 欄楯을 長脚基臺가 떠받들고 있는 竹節形圍柱 사이에 八角圓形의 塔身이 있으니 이 곧 第一層의 圓起이요 이 우에 蓮華寶臺 우에 다시 八角圓形의 塔身이 있으니 이 第二層 「圓起」와 兩者 合하야 「圓起 二重」에 該合하는 것이며 初層의 方閣은 決局 初層 圓起에 副廂으로 이것이 이른바 「方牙四出」이며 二重 圓起 우에 八角形 盤蓋가 있음은 그所謂「上盤蓋」란 것이며 그 우에 露盤覆鉢의 九輪이 長表되여 있으니 이것이 이론 「施長表相輪」이라, 僧祗律의 作塔規範은 少毫도 어긋남이 없다. 前에도 말한 바와 같이 法華經自體에는 造塔 樣式이 規定되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經說의 解釋 如何에 따라 塔中二佛의 並坐 形刻만 가지고도 多寶塔을 象徵시킬 수 있었으며 或은 또 藥王菩薩의 燒臂供養相으로써 多寶塔을 象徵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東方無量千萬億 阿僧祗寶浮世界의 多寶佛常住證明의 賓塔을(이 뜻에서 多寶塔을 또한 東便에 안친 듯) 表現키 爲하야는 在來의 單純한 方閤 層樓의 傳說的 樣式을 벗어나서 저 僧祗律에 規定된 樣式에 좇어 細部에 自由러운 幻想을 活躍시켜서 造成한 것이 곧 이 佛國寺 多寶塔이요 저 日本의 諸多賽塔의 樣式도 이러한데 그 發足이 있었던 것이요 兼하야 그 樣式的 源流도 中國에 있었을 법하되 지금 中國의 遺構에선 그 例를 찾을 수 없고 오즉 鷄林과 扶桑 兩地에만 남은 듯하다. 그러나 佛國寺의 이 多賓塔 같이 幻想的이요 奇巧的인 것은 다시 없는 모양이다. 現存한 日本의 多賓塔으로 가장 高古쪽수▶P79-1한 遺構는 前擧한 石山寺塔으로서 後鳥羽天皇 建久 元年에서 九年까지 (高麗 統一 後 五二五–五三三年 高麗開國後 二七三–二八一年)의 作이요 文獻的으로 오랜 것은 高野山 瑜祗塔(淸和天皇貞觀二年 新羅 統一 後 一九四年) 원문주9▶同高野山大塔(光孝天皇 仁和二年 新羅 統一 後 二二一年) [16] 等인데 佛國寺의 多寶塔은 前에 釋迦 三重石塔에서 說明한 바와 같이 景德王 十年(新羅統一後 八五-) 以後로 되여있다. 景德王 十七年 戊戌歲作이란 記錄이 있는 廢葛項寺塔보다 釋迦三重塔이 매우 高古 優秀한 便에 있어 그 간의 七年 差異쯤은 認定할 수 없고 年代的으로 좀 더 오래일 것 같으되 다른 憑徵할 史料가 없어 景德王 十年에 두거니와 그러타 하드라도 日本의 高古한 瑜祗塔이란 것보다 百餘年 以前에 이만한 優秀한 經營이 있었든 것이다.
조선에서 이 탑은 고립적인 존재로서 전무후무한 작품이다. 조선에 기형탑파가 있다면 대개 한 번 이상 모방적인 작품들이 나온다. 예컨대 미륵탑에 대한 왕궁평탑(王宮坪塔)·정림탑(定林塔)에 대한 서천비인탑(叙川庇仁塔)·영니산하탑(盈尼山下塔)에 대한 빙산사지탑(冰山寺址塔)·및 죽장사탑(竹杖寺塔)에 대한 낙산동탑(洛山洞塔), 화엄사사자단탑(華嚴寺獅子壇塔)에 대한 제천사자빈신사지탑(堤川獅子頻迅寺址塔), 개풍폐경천사탑(開豊廢敬天寺塔)에 대한 경성 원각사지탑, 기타 적지 않은 예를 들 수 있으나 마땅히 모방함직한 이 보탑은 그것을 모방한 것이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실로 수준이 높아 다시 나올 수 없는 걸작(曲高絶唱恪)이니 영원히 독창적인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혹시 부분적인 유사함을 찾는다면 팔각원형이 후대에 유행된 팔각원당식 묘탑과도 통함이 있고 팔각원형의 층탑에도 통하는 바 있다 하겠지만, 이것은 그런 것들과 더불어 감히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환상적인 조형이요, 우주의 좌두형식에서, 옥개석 광활한 형식에서, 옥판석의 엇맞춤 수법에서 후에 말할 옥산 정혜사지 십삼층탑과 함께 백제의 유구인 정림탑의 조형의사와 일맥 통하는 점이 없지도 않으니, 즉 백제의 여운이 그윽히 숨어 있다고도 할 만한 것이다. 백제의 복멸이 백 년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이곳 탑파 조성에 무영애화(無影哀話)가 남아 있음도(비록 석가탑에 대해서이지만) 당장에 얽힌 설화라 함보다 차라리 백제 유장(遺匠)이라도 남아 있어 그곳에 무영애정(無影哀情)이 남겨진 것이 아닌가.
쪽수▶P79-2朝鮮서 이 塔은 孤立的인 存在로서 前無後無한 作品이다. 朝鮮에 奇形塔婆가 있다면 大概 一次 以上의 模倣的 作品들이 나온다. 例컨대 彌勒塔에 對한 王宮坪塔·定林塔에 對한 叙川庇仁塔·盈尼山下塔에 對한 冰山寺址塔·及竹杖寺塔塔에 對한 洛山洞塔, 華嚴寺獅子壇塔에 對한 堤川獅子頻迅寺址塔, 開豊廢敬天寺塔에 對한 京城 圓覺寺址塔, 其他 적지 않은 例를 들 수 있으나 宜當 模倣함즉한 이 寶塔은 그것을 模倣한 것이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實로 曲高絶唱恪이니 永世의 獨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혹시 部分의 類似를 찾는다면 八角圓形이 後代에 流行된 八角圓堂式 墓塔과도 通함이 있고 八角圓形의 層塔에도 通하는 바 있다 하겠지만 이것은 그런 것들과 더부러 可히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엄청난 幻想的인 造形이요 隅柱의 坐斗形式에서 屋蓋石廣闊한 形式에서 屋板石의 얻맛침 手法에서 後▶P80-1에 말할 玉山 淨惠寺址十三層塔과 함끠 百濟의 遺構인 定林塔의 造型意思와 一脈 通하는點이 없지도 않으니 即 百濟의 餘韻이 그윽히 숨여저 있다고도 할 만한 것이다. 百濟의 覆滅이 百年 未及이라 이곳 塔婆造成에 無影哀話가 남어있음도(비록 釋迦塔에 對해서이지만) 唐匠에 얽힌 說話라 함보다 차라리 百濟 遺匠이라도 남어있어 그곳에 無影哀情이 남겨진 것이 아닌가.
부론 1. 본지 이 탑 층계 및 기단에 난순(欄楯)이 있었던 것은 현재 잔존된 난간주석에서도 알 수 있는 점이며, 또 극락전 앞에 옮겨져 있는 석사자(石獅子)가 이 탑에 있던 것으로서 본래 네 기였으나 모두 도실(盜失)되고 한 자리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탑 기단 네 모서리에 석사자가 놓였을 것은 분황사탑, 의성군 단촌면 관덕동사 평삼중탑, 구례화엄사 사자좌삼중탑, 광양군 옥룡면 중흥사지 삼중석탑 등의 예에서도 짐작되는 바이다.
쪽수▶P80-2 附論一. 본지 이 塔層階及基壇에 欄楯이 있었든 것은 現在 殘存된 欄干柱石에서도 알 수 있는 點이며 또 極樂殿前에 옴겨저 있는 石獅子가 이 塔에 잇든 것으로써 본지 四基이였으나 모다 盜失되고 一座만이 남어있다 한다. 塔基壇四隅에 石獅子가 노혔을 것은 芬皇寺塔, 義城郡 丹村面 觀德洞寺 坪三重塔, 求禮華嚴寺 獅子座三重塔, 光陽郡 玉龍面 中興寺址三重石塔 等의 例에서도 斟酌되는 바이다.
부론 2. 『고고학』 제11권 제3호(쇼와 15년 3월)에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 씨의 「불국사 다보탑의 비례 구성에 대하여」라는 한 글이 있다. 그 요령을 들면 이러하다.
불국사 금당을 중심으로 한 한 구역의 지구 분할 단위(43 당척)의 3분의 1이 다보탑과 석가탑의 지대석의 폭장과 근사치를 가지고 있고, 이 지대석의 전폭이 단위가 되어 초층 옥개의 전폭과 지면으로부터 초층 옥개 아래까지의 높이를 이루어 이 한 부분이 말하자면 14척 6 당척(곡척으로 14척 3치 1푼)을 한 변으로 한 정방형 규규에 완전 포함되고, 그 대각선의 교차점이 곧 초층 옥신의 저변이 된다. 이 지대지의 2분의 1(즉 7척 3 당척)이 제 2층 방란의 내측 폭이요, 제 3층 팔각 난백의 외측 폭으로 이 폭을 대변 간격으로 한 정팔각형의 한 변 길이가 제 2층 및 제삼층의 탑신 폭과 근사치를 이루고, 이 변장으로써 정방형을 그린 그 대각선의 반(오척일칠 당척)이 제일층 첨아 아래로부터 제삼층 대석 윗면에 이르는 총고(오척이일 당척)의 근사치를 가졌다. 다시 지대석의 4분의 1(삼척육오 당척)은 제삼층 옥신고와 제사층 대석고와의 합계치(삼척육사 당척)에 근사하고, 또 지대석 폭의 4분의 1치를 한 변으로 한 정팔각형을 그리면 그것이 곧 최종 팔각형 옥개와 동일한 면이 된다. 또 그 팔각형의 한 변을 대각선으로 한 정방형의 한 변 길이(일척오팔당척)가 첨아 아래까지의 높이 및 옥신 폭에 일치한다. 즉 지대석의 4분의 1이 최종 옥개 팔각 한 변 길이에 일치하고, 그 반이 다시 상륜부의 폭에 일치하며, 이리하여 지대 폭을 한 변으로 한 팔각형을 그리면 그 폭이 탑의 총고와 근사해진다. 이것을 간단히 말한다면, 불국사 본당 한 구역을 구성한 지할 단위(사삼 당척)의 3분의 1이 탑파의 기준이 될 지대 폭을 이루어 가지고 그것의 팔〿〿〿 단위가 되며, 폭과 높이들이 하부로부터 상부에 이르기까지 팔분팔, 팔분사, 팔분이, 팔분일의 비로 된 것이니, 이 정수의 등비급수가 곧 이 탑파의 동적인 균제성을 구성한 것이라 한다.
이상은 탑파 내지 가람의 구성에 있어서 산수적 엄정률이 지배하고 있는, 따라서 그곳에 고전적 미를 느끼는 이유를 설명한 흥미로운 연구이나, 그러면 어찌하여 이러한 분수율을 사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근본 동기에 대한 이유 설명은 없다. 이들의 연구 방법도 결국엔 이러한 근본 문제까지 이르지 아니하면, 결국 그것은 우연 대 우연의 설명에 불과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산수의 놀이에만 떨어지기 쉬운 것이니, 이 문제를 어떻게 전개시키는가는 앞날의 기대할 바일까 한다.
쪽수▶P80-3附論二. 考古學 第十一卷 第三號(昭和十五年 三月)에 米田美代治氏의 「佛國寺多寶塔の比例構成に就いて」라는 一文이 있다. 그 要領을 드르면 이러하다.
佛國寺 金堂을 中心으로 한 一廓의 地區分割單位(四三唐尺)의 三分一이 多寶塔과 釋迦塔의 地臺石의 幅長과 近似値를 가지고 잇고 이 地臺石의 全幅이 單位가 되여 初層屋蓋의 全幅과 地面으로부터 初層屋蓋下面까지의 高를 이루어 이 한 部分이 말하자면 十四尺六唐尺(曲尺으로 十四尺 三一)을 一邊으로 한 正方形 矩規에 完全包含되고 그 對角線의 交叉點이 곧 初層屋身의 底邊이 된다. 이 地臺輜의 二分一(即七尺三唐尺)이 第二層 方欄의 內側幅이요 第三層 八角欄栢의 外側幅으로 이 幅을 對邊 間隔으로 한 正八角形의 一邊長이 第▶P81二層 及 第三層의 塔身幅과 近似値를 이르고 이 邊長으로써 正方形을 그린 그 對角線의 半(五尺一七唐尺)이 第一層簷牙下로부터 第三層 臺石上面에 이르는 總高(五尺二一唐尺)의 近似値를 가젓다. 다시 地臺石의 四分一(三尺六五唐尺)은 第三層屋身高와 第四層臺石高와의 合計値(三尺六四唐尺)에 近似하고 또 地臺石幅의 四分一値를 一邊으로 한 正八角形을 그리면 그것이 곳 最終八角形 屋蓋와 同一한 面이된다. 또 그 八角形의 一邊을 對角線으로한 正方形의 一邊長(一尺五八唐尺)이 簷牙 下까지의 高及屋身幅에 一致한다. 即 地臺石의 四分一이 最終屋蓋 八角一邊長에 一致하고 그 半이 다시 相論部의 幅에 一致하며 이리하야 地臺幅을 一邊으로 한 八角形을 그리면 그 幅이 塔의 總高와 近似해진다. 이것을 簡單히 말한다면 佛國寺 本堂一廓을 構成한 地割單位(四三唐尺)의 三分一이 塔婆의 基準이 될 地臺幅을 이루어가지고 그것의 八〿〿〿 單位가 되며 幅과 高들이 下部로부터 上部에 이르히 八分八, 八分四, 八分二, 八分一의 比로 된 것이니 이 整數의 等比級數가 곧 이 塔婆의 動的 均齊性을 構成한 것이라 한다.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필자가 제2기 탑파의 유형을 유취(類聚)시킬 때 그 요건의 하나로 중층기단을 형성한 탑파로서 상단중대에는 탱주(撑柱) 4개가 중대석 한 면을 세 구역으로 나누고, 하단중대에서는 탱주 5개가 중대 한 면을 네 구역으로 나누며, 탑신 구성에 있어 옥신은 옥신대로 우주와 벽석이 아직 별석으로 구별되어 있고, 옥개와 옥석 ‘받침’이 별석으로 되어 있으되 옥석 ‘받침’은 정제된 오계단 형식임을 말하고, 제3기 유형에 있어서는 같은 중층기단이로되, 상단중대의 탱주 네 개는 제2기 유형과 같으나, 하단중대의 탱주가 네 개로 감수된 것, 옥신은 우주와 면벽이 합일되어 전부 한 돌로 된 것, 옥개와 옥개 ‘받침’이 또한 한 돌로 통일되는 것 등을 들어 구별하였다. 지금 이 기단 형식만을 가지고 제2기 유형과 제3기 유형을 구별한다고 치면 제2기 유형에 속할 것으로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善山郡 海平面 洛山洞)(소자 대문동, 小字大門洞) 일명사지(逸名寺址)에 있는 삼중석탑 한 기가 또한 그 유례(類例)로 거론될 수 있겠고, 제3기 유형으로는 별개로 다소의 이례(異例)도 또 있으나, 우선 유형 유취를 중심으로 하고서 낙산동 일명사지탑과 유사한 선산읍 비봉산 죽장사지 오중탑(善山邑 飛鳳山 竹杖寺址 五重塔)을 들 수 있다. 즉 전자는 기단이 제2기 유형들의 기단과 동일한 양식을 완전히 갖고 있고 후자는 제3기 유형들의 기단과 유사한 양식을 갖고 있다. 이들이 다만 제2기 내지 제3기의 전형적 탑파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탑신 경영에 있어 각 층 옥신엔 우주 형식의 모각(模刻)이 없는 소면벽(素面壁)의 경영 형식이며, 초층 옥신에는 감실(龕室)을 경영하였으며, 옥개에 있어 상부 낙수면까지도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상(階段狀) ‘괴임’을 이루고 있는 데서, 즉 이것을 간단히 말한다면 제1기의 저 영니산하탑(盈尼山下塔)과 동류의 탑신(그것은 우주 형식을 남겼으나 이것들은 그것이 없다)을 경영하고 있는 데서 일반적으로 통속적으로 모전탑이라 하여 저 전형적인 탑파들과 양식적으로 구별하여 보고 있는 점인데, 이러한 모전탑의 양식이 발생된 시초는 이미 말한 바 제1기의 영니산하탑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유행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 선산군 내의 양탑의 성생 이후라 할 만하여서, 이 양탑의 양식사적 지위와 세대사적 지위를 어떻게 결정시키느냐에 따라 한 시대의 경향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쪽수▶P82② 模塼塔의 發生
屢述한 바와 같이 筆者가 第二期 塔婆의 類型을 類聚시킬 때 그 要件의 하나로 重層基壇을 形成한 塔婆로서 上壇中臺에는 撑柱 四個가 中臺石 一面을 三區토 分하고 下壇中臺에서는 撑柱 五個가 中臺 一面을 四區로 分하며 塔身 構成에 있어 屋身은 屋身대로 隅柱와 壁石이 아즉 別石으로 區別되여 있고 屋蓋와 屋石「밭임」이 別石으로 되여 있으되 屋石「밭임」은 整齊한 五階段 形式임을 말하고, 第三期 類型에 있어선 같은 重層基壇이로되 上壇中臺의 撑柱 四個는 第二期 類型과 같으나 下壇中臺의 撑柱가 四個로 減數된 것, 屋身은 隅柱와 面壁이 合一되여 全部 一石으로 된 것, 屋葢와 屋葢「밭임」이 亦 一石으로 統一되는 것 等을 드러 區別하얏다. 지금 이 基壇 形式만을 가지고 第二期 類型과 第三期 類型을 區別한다고 치면 第二期 類型에 屬할 것으로 善山郡 海平面 洛山洞(小字大門洞) 逸名寺址에 있는 三重石塔 一基가 또한 그 類例로 舉論될 수 있겠고 第三期 類型으론 別로히 多少의 異例도 또 있으나 爲先 類型類聚를 中心으로 하고서 洛山洞 逸名寺址塔과 類似한 善山邑 飛鳳山 竹杖寺址 五重塔을 들 수 있다. 即 前者는 基壇이 第二期 類型들의 基壇과 同一한 樣式을 完全히 갖고 있고 後者는 第三期 類型들의 基壇과 類似한 樣式을 갖고 있다. 이들이 다못 第二期 乃至 第三期의 典型的 塔婆로부터 區別되는 것은 塔身 經營에 있어 各層 屋身엔 隅柱 形式의 模刻이 없는 素面壁의 經營 形式이며 初層 屋身에는 龕室을 經營하였으며 屋蓋에 있어 上部 落水面까지도 塼塔에서와 같이 階段狀「괴임」을 이루고 있는 데서 即 이것을 簡單히 말한▶P83-1다면 第一期의 저 盈尼山下塔과 同類의 塔身(그것은 隅柱 形式을남기였으나 이것들은 그것이 없다)을 經營코 있는 데서 一般히 通俗的으로 模博塔이라하야 저 典型的 塔婆들과 樣式的으로 分別하야 보고 있는 點인데 이러한 模塼塔의 樣式이 發生된 始初는 이미 말한 바 第一期의 盈尼山下塔에서 始初된 것이였지만 그것이 一時의 流行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 善山郡內의 兩塔의 成生 以後라 할 만하여서 이 兩塔의 樣式史的 地位와 世代史的 地位를 如何히 決定시키느냐는데 따라 한 개의 時代의 傾向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낙산동 일명사지의 삼중탑을 보면 그 기단만으로 설명하자면 제2기의 저 전형적인 탑파들과 동일한 양식을 갖고 있다 하겠다. 다만 상층기단의 상대복석의 상부—즉 초층 옥신을 받기 위한 부분의 계단 형식은 매우 퇴화된 것이어서 이 점에서 제2기 작품들과 동위에 둘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제3층 옥개에 있어 옥개 ‘받침’이 4단까지여서 이러한 약화 의사는 제3기 작품으로 열거한 전형적인 탑파에서도 볼 수 없는 유화적 수법이라 하겠다. 즉 기단 형식만은 대체로 제2기 작의 의사를 남기고 있으나, 탑신에서는 제3기 이후의 의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즉 고식(古式)과 신식의 혼재라는 의미) 이것은 하나의 과도기적 작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죽장사지(竹杖寺址) 오중탑은 우선 기단이 제3기 작품과 공동되는 형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기단은 탱주(撑柱)의 수효만에서 그러한 것이며, 전체적으로는 특수한 기단이니 하대 복석이 일반 제2기나 제3기의 작품들의 그것과 같이 평박광활한 것이 아니라 상부 경사가 촉념한, 따라서 외모적으로는 옥개와도 유사한 것으로 되어 있고, 또 일반 하대복석에서와 같이 모서리와 4분의 1호의 ‘몰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단(重段)의 계단이 있고 그 네 모서리에 원주 구멍(孔穴)이 있어 상대 복석과 사이에 중대석과는 따로 원주가 네 모서리에 경영되었던 것이 되며, 중대석 그것은 전부 허물어져 원상 불명이나 낙산동탑에 견주어 중대석은 그것과 같이 각 면 네 개 탱주(撑柱) 조각식의 것이었음이 추측되는 바이다. 이 기단 네 모서리의 네 개 원주가 섰던 양식은 쉽게 그 유례를 가져온다면 저 경주 석굴암 중앙본존대좌석(中央本尊臺座石)의 양식과 유사한 것이라 하겠으니 그것은 상단중대석이 팔각원형을 이루고 그 밖에 다시 오각형 보주가 경영된 의사와 의사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석탑파 기단에 있어서의 이러한 경영은 현재 이 탑만에서 상정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은 특수한 기단이라 할 수 있다. 또 초층 옥신을 받는 ‘괴임’도 낙산동탑보다는 엄연한 것이며 다른 탑신의 경영은 유사하나 옥개 경영에 있어 낙산동탑은 석편 조합이 매우 불규칙한데 죽장사지탑은 규칙적으로 되어 있다. 다만 삼층까지의 옥석 ‘받침’ 수는 동일하나 제4층 이상 제5층까지의 옥개 ‘받침’이 3단으로 간화되어 있다. 즉 양식만을 비교하면 낙산동탑이 대체로 고의(古意)를 많이 남기고, 죽장사지탑은 신의(新意)를 많이 가진 듯하다. 다만 실지에 가서 양 탑을 비교하면 감정적으로는 낙산동탑이 죽장사지탑을 모방하여 간략화시킨 것인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양식상 서로의 출입이 있는 점에서 세대적으로는 동대(等代)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그 세대는 어느 때일까.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낙산동탑의 기단은 제2기 작품의 것과 유사하나 옥개 수법이 제3기 이후에 들 것이라 하였고, 죽장사지탑은 기단이 제3기 작품들과 공통성을 가졌으나 옥개 수법이 역시 제3기 이후에 들 것 같다. 제3기 이후의 것이라면 그것은 물론 제4기 탑파를 의미하는 것이 되는데, 그 상세는 다음 원고에 미루거니와 우선 이곳에서 필요한 정도의 설명을 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제3기 탑파와 유사한 것이로되, 다만 기단에 있어 상대중석의 탱주가 세 개로 중대석 각 면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있고, 하대중석의 탱주는 다섯 개 내지 네 개로서 중대석 각 면을 네 구역 내지 세 구역으로 구분하고, 옥개석의 옥석 ‘받침’이 5단계에서 4단계로 오가는 것을 기준으로 할 수 있다. 즉 경주에서의 예를 들자면 창림사지탑, 지금 일컫는(今稱) 남산사지 서삼중탑 등을 그 대표작으로 들 수 있다. 세대로 말하자면 신라 하대(선덕왕부터 민애왕까지)에 속하는 것으로, 그 세분은 다시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죽장사지탑, 낙산동탑 등은 () 제4기에(○○○○) 이를(○○) () 있는(○○) 어중(於中)된(○○○○○) 작품(○○) () 제3기와(○○○○) 제4기와(○○○○) 간의(○○) 과도적(○○○)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세대로 말하자면 통일 후 백년대를 중심한 전후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언하면 신라 중대 후기와 신라 하대 전기 사이에 위치할 수 있다. 이것은 현재 남산사지(南山寺址)로 일컫는 경주 내동면 남산리 일명사지에 쌍탑이 있어, 그 서탑은 앞서 언급한 제4기 유형의 대표작인 삼중석탑인데 그 동탑은 역시 이 낙산동탑(洛山洞塔)·죽장사지탑(竹杖寺址塔) 등과 동류인 모전탑으로서 다만 그 양식 수법에 있어 이 두 탑보다는 매우 편화되고 양식화된 데에서 이 두 탑이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 동탑보다 양식사적 순위는 물론이고 세대까지도 선행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데, 현대문주10B▶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 박사에 따르면 [a 16], 이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 서탑이란 것이 멸축도(滅縮度)에 있어 장수사지 삼중석탑과 유사한 점이 있을 뿐더러, 그 부근 남산리에 또다시 있는 도괴(倒壞)된 삼중탑 쌍기와도 형식에 있어 유사한데, 이 쌍탑이란 것은 이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 서탑보다 웅대한 것은 사실이나, 우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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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3-2지금, 洛山洞 逸名寺址의 三重塔을 보면 그 基壇만으로써 說明하라면 第二期의 저 典型的 塔婆라는 것들과 同一한 樣式을 갖고 있다 하겠다. 다만 上層基壇의 上臺覆石의 上部─即 初層屋身을 받기 爲한 部分의 階段 形式은 매우 頹化된 것이여서 이 點에서 第二期 作品들과 同位에 둘 수 없다. 뿐만 아니라 第三層 屋蓋에 있어 屋葢 「밭임」이 四段까지여서 이러한 略化 意思는 第三期 作品으로써 列擧한 典型的 塔婆에서도 볼 수 없는 類化的 手法이라 하겠다. 即 基壇 形式만은 大體에 있어 第二期作 意思를 남기고 있으나 塔身에서는 第三期 以後의 意思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意味에서(即 古式과 新式의 混在라는 意味) 이것은 한 개의 過渡期的 作品이라 하겠다. 그런데 竹杖寺址 五重塔은 爲先 基壇이 第三期 作品과 共同되는 形式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基壇은 撑柱의 數爻만에서 그러한 것이요 全體론 特殊한 基壇이니 下臺 覆石이 一般, 第二期나 第三期의 作品들의 그것과 같이 平薄廣濶한 것이 아니라 上部 傾斜가 促念한, 따라서 外貌的으론 屋蓋와도 近似한 것으로 되여 있고, 또 一般 下臺覆石에서와 같이 角과 四分一弧의 「몰▶P84딩」이 있는 것이 아니라 重段의 階段이 있고 그 四隅에 圓柱 孔穴이 있어 上臺 覆石과 사이에 中臺石과는 따로히 圓柱가 四隅에 經營되였든 것이 되며 中臺石 그것은 全部 허러저 原狀 不明이나 洛山洞塔에 견주어 中臺石은 그것과 같이 各面 四個 撑柱 彫刻式의 것이였음이 推測되는 바이다. 이 基壇四隅의 四個 圓柱가 섯든 樣式은 쉬웁게 그 類例를 가저온다면 저 慶州 石窟庵 中央本尊臺座石의 樣式과 類似한 것이라 하겠으니 그것은 上壇中臺石이 八角圓形을 이르고 그밖에 다시 五角形補柱가 經營된 意思와 意思가 同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石塔婆基壇에 있어서의 이러한 經營은 現今 이 塔만에서 想定되여 있는 것으로 이것은 特殊한 基壇이라 할 수 있다. 또 初層屋身을 받는 「괴임」도 洛山洞塔보다는 嚴然한 것이요 다른 塔身의 經營은 近似하나 屋蓋 經營에 있어 洛山洞塔은 石片調合이 매우 不規則한데 竹杖寺址塔은 規則的으로 되여있다. 다만 三層까지의 屋石「밭임」 數는 同一하나 第四層 以上 第五層까지의 屋葢 「밭임」이 三段으로 簡化되여 잇다. 即 樣式만을 比較하면 洛山洞塔이 大體에 있어 古意를 많이 남기고 竹杖寺址塔은 新意를 많이 가진 듯하다. 다만 實地에 가서 兩塔을 比較하면 感情的으론 洛山洞塔이 竹杖寺址塔을 模하야 略化시킨 것인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模式上 서로의 出入이 있는 點에서 世代的으론 等代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그 世代는 어느 때 있을가. 이미 說明한 바와 같이 洛山洞塔의 基壇은 第二期 作品의 것과 類似하나 屋蓋 手法이 第三期 以後에 들 것이라 하얏고 竹杖寺址塔은 基壇이 第三期 作品들과 共通性을 가졌으나 屋蓋手法이 亦是 第三期 以後에 들 것 같다. 이〿쪽수▶P85第三期 以後의 것이라면 그것은 勿論 第四期 塔婆를 意味하는 것이 되는데 그 詳細는 次稿에 밀거니와 爲先 이곳에서 必要한 程度의 說明을 한다면 그것은 大體에 있어 第三期 塔婆와 類似한 것이로되 다만 基壇에 있어 上臺中石의 撑柱가 三個로 中臺石 各面 兩區로 分하야 있고 下臺中石의 撑柱는 五個 乃至 四個로서 中臺石各面을 四區 乃至 三區로 區分하고 屋蓋石의 屋石「밭임」이 五段階에서 四階段으로 來往되는 것을 標準으로 할 수 있다. 即 慶州에서의 例를 들라면 昌林寺址塔, 今稱 南山寺址西三重塔 等을 그 代表作으로 들 수 있다. 世代로 말하야 新羅 下代(自 宣德王 至 閔哀王)에 屬하는 것으로 그 細分은 다시 詳述하겠지만 竹杖寺址塔, 洛山洞塔 等은 () 第四期에(○○○○) 이를(○○) () 있는(○○) 於中된(○○○) 作品(○○) () 第三期와(○○○○) 第四期와(○○○○) 간의(○○) 過渡的(○○○) 作品으로(○○○○)看做할 수 있다. 即 世代토 말하야 統一 後 百年代를 中心한 前後期의것으로 볼 수 있다. 換言하면 新羅 中代 後期와 新羅 下代 前期 間에 處할 수 있다. 이것은 現在 南山寺址로써 일컷는 慶州 內東面 南山里 逸名寺址에 雙塔이 있어 그 西塔은 前擧한 第四期 類型의 代表作인 三重石塔인데 그 東塔은 亦是 이 洛山洞塔·竹杖寺址塔 等과 同類인 模博塔으로서 다만 그 樣式手法에 있어 이 兩塔보다는 매우 便化되고 樣式化된 데서 이 兩塔이 今稱 南山寺址東塔보다 樣式史的 順位는 勿論이요 世代까지도 先行하는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데 원문주10B▶藤島亥亥郞 博士에 依하면 [17] 이 今稱 南山寺址 西塔이란 것이 滅縮度에 있어 長壽寺址 三重石塔과 類似한 點이 있을 뿐더러 그 附近 南山里에 또다시 있는 倒壞된 三重塔雙基와도 形式에 있어 類似한데 이 雙塔이란 것은 이 今稱 南山寺址 西塔보다 雄大는 하지만 優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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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 같다.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 쌍탑이 세대적으로 확실히 신라 하대 전기에 속할 것이냐는 문제는 제4기 탑파를 논함에 있어 문제가 될 것이지만, 그 동탑을 볼 때 대개는 무방할 것인 듯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우선 죽장사지탑·낙산동탑을 세대적으로도 신라 중대 후기와 하대 전기 사이에 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라 중대 후기에 저 화려(華褥)해진 탑파 수식(修飾)의 의욕과 함께 이양의 양식까지도 새로 만들어 보려던 일반적인 의사와 순응하여 나타난 별개의 하나의 결과물로 보는 바이다. 이리하여 나타난 이 모전탑은 저 영니산하탑이 전탑의 양식과 목탑의 양식에서 하나의 새로운 양식으로 탈태를 목표로 하고 나온 것임에 반하여, 이것들은 전형적인 양식들의 전습적(傳習的) 번복(翻覆) 의사에서 다시 한 번 전환되어, 그때 이미 다시 이양의 것으로 회고된 영니산하탑의 양식이 새로운 의미를 갖고 복고된 것이라 하겠다. 이리하여 이것은 이 시기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유행 양식을 이루게 되었다. 이곳에 속칭 모전탑이라 하는 일반적인 양식적 유형이 성립되었으니, 각 개별적으로 개별적인 건립 연대는 물론 있는 것이지만, 이 연대나 세대 문제를 무시하고 양식적 유형을 유취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선산군 선산면 죽장동 죽장사지 오중탑
② 동 군 해평면 낙산동(소자 대문동) 일명사지 삼중탑
③ 안동군 풍산면 하리동 일명사지 삼중탑
④ 의성군 춘산면 빙계동(소자 서원동) 빙산사지 오중탑
⑤ 경주군 군내동면 남산리 지금칭 남산사지 동삼중탑
⑥ 동 군 경주면 서악리 산작지북 일명사지 삼중탑
⑦ 동 군 내남면 농장계 기팔 일명사지 삼중탑(도)
⑧ 봉성군 다탑봉 운주사 현재 사중탑
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 삼중탑

쪽수▶P87 을 것 같다. 今稱 南山寺址 雙堵이 世代的으로 確實히 新羅 下代 前期에 屬할 것이냐는 問題는 第四期 塔婆를 論함에 있어 問題될 것이지만 그 東塔을 볼제 大概는 無妨할 것인든하다. 그러므로 筆者는 爲先 竹杖寺址塔·洛山洞 塔을 世代的으로도 新羅 中代 後期와 下代 前期와 사이에 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新羅 中代 後期에 저 華褥된 塔婆 修飾의 意欲과 함께 異樣의 樣式까지도 새로 만들어보려던 一般的 意思와 順應하야 나타난 別個의 한 果實로 보는 바이다. 이리하야 나타난 이 模塼塔은 저 盈尼山下塔이 塼塔의 樣式과 木塔의 樣式에서 한 개의 새로운 樣式으로 脫胎를 目標로 하고 나온 것임에 反하야 이것들은 典型的 樣式들의 傳習的 翻覆意思에서 更히 一轉하야 때에 이미 다시 異樣의 것으로 回顧된 盈尼山下塔의 樣式이 새로운 意味를 갖고 復古된 것이라 하겠다. 이리하야 이것은 이따에 있어서 한 개의 새로운 流行 樣式을 이루게 되엿다. 이곳에 俗稱 模搏塔이라 하는 一般의 樣式的 類型이 成立되였으니 各個에 個別的 建立 年代란 勿論 있는 것이지만 이 年代나 世代 問題를 無視하고 樣式的 類型을 類聚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善山郡 善山面 竹杖洞 竹杖寺址 五重塔
② 同 郡 海平面 洛山洞(小字大門洞) 逸名寺址 三重塔
③ 安東郡 豊山面下里洞 逸名寺址 三重塔
④ 義城郡 春山面 冰溪洞(小字 書院洞) 冰山寺址 五重塔
▶P88-1⑤ 慶州郡 郡內東面南山里 今稱南山寺址東三重塔
⑥ 同 郡 慶州面西岳里 山雀趾北逸名寺址三重塔
⑦ 同 郡 內南面茸長溪 其八逸名寺址 三重塔(倒)
⑧ 耪城郡多塔峯 雲住寺 現在四重塔
⑨ 康津郡城田面月南里 月南寺址 三重塔

이상, 모전탑이란 것은 전조선적으로 알려진 것이 비교적 적은 편이어서 이외에 영니산하탑과 분황사의 모전석탑 및 황룡사지 동방 일명사지(내동면 구황리)의 모전탑파재 등을 종합하여 아직까지 열두 기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열두 기 중 빙산사지 오중탑은 영니산하탑을 그대로 모방하려 한 탑으로서 형식이 같은 것이며, 이미 서술한 선산의 양탑은 양탑대로 또 형식이 같으며 황룡사지 동방 일명사지탑이란 것은 분황사탑과 파재가 같기 때문에 동일 형식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며(본 연구 제2절 벽탑조에 기술), 경주의 삼탑은 삼탑대로 형식이 같은 것이며 안동의 한 탑 운주사(雲住寺)의 한 탑은 각각 또 다르다. 즉 경주의 삼탑은 탑신의 경영들은 거의 동일한 형식으로 다만 서악리 산작지북탑의 것에는 초층 옥신 정면에 문형이 모각되어 있고 그 양협에 이왕상이 부조됨이 상이할 뿐, 기단은 기단대로 무장식의 거의 정방형의 고대로 되어 있는 품이 같고, 안동의 한 탑은 기단이 단성이었을 것이되 대복석 한 매가 잔존했을 뿐 중대석이 상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고 운주사 탑이란 것은 기단이 없이 세로로 긴 초층 옥신이 지대석 위에 그저 올려져 있다.
쪽수▶P88-2 以上, 模塼塔이란 것은 全鮮的으로 알려있는 것이 比較的 적은 便이여서 以外에 盈尼山下塔과 芬皇寺의 模塼石塔 及 皇龍寺址東方逸名寺址(內東面 九黃里)의 模塼塔婆材 等을 綜合하야 아즉것 十二基가 알려있을 뿐이다. 이 十二基 中 冰山寺址五重塔은 盈尼山下塔을 고대로 摸하려한 塔으로서 形式이 같은 것이며, 己述한 善山의 兩塔은 兩塔대로 또 形式이 같으며 皇龍寺址 東方逸名寺址塔이란 것은 芬皇寺塔과 破材가 같음으로 하야 同一 形式의 것으로 推定되는 것이며(本 研究 第二節 甓塔條 己述) 慶州의 三塔은 三塔대로 形式이 같은 것이며 安東의 一塔, 雲住寺의 一塔은 各其 또 다르다 即, 慶州의 三塔은 塔身의 經營들은 거의 同一한 形式으로 다못 西岳里 山雀趾北塔의 것엔 初層屋身正面에 戶形이 模刻되여 있고 그 兩狹에 二王像이 浮彫됨이 相異할 뿐 基壇은 基壇대로 無裝飾의 거의 正方形의 高臺로 되여 있는 品이 같고 安東 一塔은 基壇이 單成이였을 것이되 臺覆石 一枚가 殘存했을 뿐 中臺石이 喪失되여 原形을 알 수 없고 雲住寺 塔이란 것은 基壇이 없이 細長한 初層屋身 이 地臺石 우에 그저 올려있다.
이제 이 탑에 대한 세대를 대개 상정한다면 우선 의성의 빙산사지탑이 일견 외모가 영니산하탑과 유사함으로 해서 동시대의 것으로 보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그러나 빙산사지탑은 기단 경영이 매우 편습적일 뿐더러 장주의 경영이 또한 그러하고 뿐만 아니라 그 수효가 일면 세 개로 왜축되어 있고 옥개의 '받침'이 통상 네 단으로 감소되어 있어 이러한 점이 총체적으로 일반 석탑으로 두고 말하면 신라 하대 하기의 경향과 통하는 점이 있다. 현대문주14▶후지시마(藤島) 박사의 기록에 따르면 [a 17], 탑 앞에 석상이 있는데 그 중대 전후면에 두 구역의 안상, 좌우면에 한 구역의 안상이 있어 그 속에 '고사리손 모양'(蕨手樣) 조각이 있다 하였다. 안상 속에 이 '고사리손 모양' 조각이 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려조 이후의 경향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탑은 고려조 이후로 든다. 물론 석탑 앞에 따로 경영된 이 석상이란 석탑과 다른 세대에 조성되어 놓일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방존적(●●●) 유물의 세대로써 탑파 그 자신의 세대까지 결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대체로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이 석상의 양식이 본탑의 수법과 거의 승리될 물건이 아닐 듯싶다. 이 점에서 이 석상은 이 석탑의 세대를 가급적 정도에서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곳에 고려조라 했으나, 그 개국 상한은 신라의 하대 하기와 어느 정도 층위적으로 중복되어 있는 세대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즉 서력으로 900년대 전반이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반드시 이곳에 두고 싶지 않다. 좀 더 내려보아도 가하지 않을까 하는 바이다.
쪽수▶P89-1 이제 이 塔에 대한 世代를 大蓋 想定한다면 爲先 義城의 冰山寺址塔이 一見 外貌가 盈尼山下塔과 類似함으로 해서 同時代의 것으로 보는 사람이 없지 않어 있으나 그러나 冰山寺址塔은 基壇 經營이 매우 便習的일 뿐더러 掌柱의 經營이 亦 그러하고 뿐만 아니라 그 數爻가 一面三個토 矮縮되여 있고 屋葢의 「밭임」이 通히 四段으로 減縮되여 있어 이러한 點이 總히 一般 石塔으로 두고 말하면 新羅 下代 下期의 傾向과 通하는 點이 있다. 원문주14▶藤島 博士의 記錄에 依하면[18] 塔前에 石床이 있는데 그 中臺 前後面에 二區의 眼象, 左右面에 一區의 眼象이 있어 그 속에 「蕨手樣」 彫刻이 있다 하였다. 眼象 속에 이 「蕨手樣」 彫刻이 드는 것은 一般이 高麗朝 以後의 傾向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標準한다면 이 塔은 高麗朝 以後로 든다. 勿論 石塔 前에 따로히 經營된 이 石床이란 石塔과 달른 世代에 造成하야 노흘 수 있는 것임으로 이 傍存的(●●●) 遺物의 世代로써 塔婆 그 自身의 世代까지 決定지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大體로 이번 境遇에 있어서는 이 石床의 樣式이 本塔의 手法과 거의 乘離될 物件이 아닐 듯싶다. 이 點에서 이 石床은 이 石塔의 世代를 可及的 程度에서 現示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곳에 高麗朝라 했으나 그 開國上限은 新羅의 下代 下期와 어느 程度 層位的으로 重復되여있는 世代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即 西歷으로 九百年代 前半이 그것이다. 그러나 筆者는 반드시 이곳에 두고 싶지 않다. 좀더 나려보아도 可하지 아니할가 하는 바이다.
운주사의 모전탑은 그곳 여러 탑들과 달리 서술할 것이나 고려 이후의 것임은 확실한 것이며, 안동탑은 탑신 옥개 ‘받침’의 수효가 농장계팔호사지(茸長溪八號寺址)의 탑이란 것과 유사한 것이다. 현대문주15▶후지시마(藤島) 박사는 안동탑을 "중기로부터 말기까지 사이의 것이리라" [a 18]하였는데 매우 모호한 말로 신라대를 뜻함인지 고려대를 뜻함인지도 불명하지만 신라대를 뜻한 것이라면 필자가 말하는 신라 하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더 자세히 말한다면 신라 하대 하기가 아닐까 한다. 경주 서악리 산작지북탑이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 동탑과 옥개석 ‘받침’의 경영법은 유사하다. 다만 서악리탑(西岳里塔)의 소재지를 속칭 영경사지라 말했던 모양이나 현대문주4▶오사카 씨(大阪氏)도 말한 바와 같이 [a 19] 영경사는 무열왕릉 남쪽에 있을 것이므로 현재 무열왕릉 동북에 있는 이곳을 영경사지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탑과 소속 사지명은 불명한 것이라 이 점에서 역사적 참고 자료는 없는 것이요, 다만 양자를 양식적으로 비교하여 산작지탑이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 동탑보다 확실히 연대적으로도 뒤질 것이나, 다시 구체적 사료가 없는 이상 양자를 합하여 신라 하대 전기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즉 선덕왕대부터 애왕대까지이다. 혹은 지금 일컫는 남산사지 동탑이란 것만이 이때 해당하고 산작지북탑은 신라 하대 하기에 농장계사지탑과 안동탑이란 것은 고려 이후로 떨어뜨려도 가능할는지 모르겠다. (월남사지탑은 고려)
쪽수▶P89-2雲住寺의 摸塼塔은 그곳 諸塔과 달리 叙述할 것이나 高麗 以後의 것이 確實한 것이며 安東塔은 塔身 ▶P90-1屋葢 「밭임」의 數爻가 茸長溪八號寺址의 塔이란 것과 類似한 것이다. 원문주15▶藤島 博士는 安東塔을 「中期로 부터 末期까지 사이의 것이리라」[19] 하였는데 매우 模糊한 말로 新羅代를 뜻함인지 高麗代를 뜻함인지도 不明이지만 新羅代를 뜻한 것이라면 筆者가 말하는 新羅 下代를 意味하는 것 같다. 그러나 더 仔細히 말한다면 新羅 下代 下期가 아닐가 한다. 慶州 西岳里 山雀趾北塔이 今稱 南山寺址東塔과 屋蓋石「밭임」의 經營法은 類似하다. 다만 西岳里塔의 所在地를 俗稱 永敬寺址라 말했든 모양이나 원문주4▶大阪氏도 말한 바와 같이 [20] 永敬寺는 武烈王陵南에 있을 것이므로 現在 武烈王陵 東北에 있는 이곳을 永敬寺址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今稱 南山寺址塔과 所屬寺址名은 不明한 것이라 이 點에서 歷史的 參考 資料는 없는 것이요 다못 兩者를 樣式的으로 比較하야 山雀趾塔이 今稱 南山寺址東塔보담은 確實히 年代的으토도 뒤질 것이나 다시 具體的史料가 없는 以上 兩者를 合하야 新羅 下代 前期에 둘 수 있을 것이다. 即 宣德王代부터 哀王代까지이다. 或은 今稱 南山寺址東塔이란 것만이 이때 該當하고 山雀趾北塔은 新羅 下代 下期에 茸長溪寺址塔과 安東塔이란 것은 高麗 以後로 떠러트려도 可할른지 모르겠다.(月南寺址塔은 高麗)
끝으로 이곳에 하나 덧붙여둘 것은 신라 불법의 초전 창교(初傳創敎)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승려 아도(阿度)가 내주하였다는 선산군 해평면 송곡동(松谷洞) 냉산도리사(冷山桃李寺) 경내에 있는 화엄석탑이란 것이니, 전부 오층 단형으로 된 방형탑이나 제1층은 고 4척 4촌대의 장판석을 세워 방 9척 7촌 내지 9척 9촌의 방형단을 만들었고, 2층과 3층 방단은 장광 불일(長廣不一)의 대소판석을 횡축하여 탑신을 조성하였고 옥개가 될 부분도 커다란 대복 한 단이 놓이고서 그 위에 층단형으로 2층 내지 3층의 축석이 있어 마치 옥신 ‘괴임’과 전탑 옥개의 층단 낙수면의 양식을 겸한 듯하고, 제4층 제5층은 조그만 방석으로써 중첩하여 그 위에 노반 및 보주 형식을 간단히 만들었다. 총 높이는 14척 7촌이라 하는데 대체의 의사는 요원탑(撓垣塔)에서 딴 듯하나, 그러나 또 기단만이 중첩된 탑인 듯이도 보이는 특수한 탑이다. 사전(寺傳)에 이것을 화엄석탑이라 하고 소지왕(炤智王) 5년 아도의 창립이라 한다. 하지만 물론 문제가 되지 아니하며 현대문주16▶이마사키 류(今西龍) 박사는 혹 왕씨 고려시대의 것이 아닐까 하였으나 [a 20] 이 또한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신라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쪽수▶P90-2끝으로 이곳에 하나 붓처둘 것은 新羅 佛法의 初傳創敎의 傳說을 가지고 있는 僧 阿度가 來住하얏다는 善山郡 海平面 松谷洞 冷山桃李寺 境內에 있는 華嚴石塔이란 것이니 全部 五層 段形으로 된 方形塔이나 第一層은 高四尺四寸大의 長板石을 세워 方九尺七寸 乃至 九尺九寸의 方形壇을 만드럿고 二層과 三層 方壇은 長廣不一의 大小板石을 橫築하야 塔身을 造成하였고 屋蓋가 될 部分도 커다란 臺覆 一段이 노▶P91-1히고서 그 우에 層段形으로 二層 乃至 三層의 築石이 있어 맛치 屋身「괴임」과 塼塔屋蓋의 層段落水面의 樣式을 兼한 듯하고 四層 五層은 조그만 方石으로써 重疊하야 그 우에 露盤 及 寶珠形式을 簡單히 만드렀다. 總高 十四尺七寸이라 하는데 大體의 意思는 撓垣塔에서 딴 듯하나 그러나 또 基壇만이 重疊된 塔인 듯이도 보이는 特殊한 塔이다.寺傳에 이것을 華嚴石塔이라하고 炤智王 五年 阿度의 創立이라 한다 하지만 勿論 問題도 되지 아니하며 원문주16▶今西龍 博士는 或 王氏 高麗時代의 것이 아닐가 하였으나 [21] 이 亦 根據없는 推測일 뿐이다. 新羅가 아닌 것만은 確實하다.
이상 이 모전탑이란 한 개의 유형은 본래 영니산하탑에서 출발했던 것이나 그때 그것은 한 개의 창안적인 의사의 산물로서 조선에 석탑 정형이 결정되기 전에 한 개의 시원적인 것으로 발족하였으나 신라의 정치적 통일과 함께 백제의 사실적인 옥면의 수법과 합쳐진 박탑 양식의 옥석 ‘괴임’의 수법은 감은탑 이하 제2기 탑파에서 보편적 정형 양식으로 결정되었고, 그 후 잠시 이 양식이 잊혀졌다가 제3기에 이르러 정형적인 탑파가 발달될 대로 발달되는 한편, 새로운 장식적인 조형의 양식이 추구되는 동향에 좇아, 일찍이 시원적이었던 저 영니산하탑의 양식이 다시 회고적으로 복고되어 이곳에 다시 이 양식의 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앞에 열거한 것과 같이 이 양식의 탑파는 전남의 두 예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상북도 일대에 한정되어 집성되어 있고, 특히 의성에서 시작되었던 이 양식이 한 번 전환되어 선산에 이르러 특수화되고 다시 전환되어 경주에 이르러 다시 특수화되고 그러한 후 안동에 한 예가 생기고 시대가 아주 뒤떨어져 전남까지 두 예가 생기게 된 것이다. 모전탑의 이러한 분포 상황은 저 전탑 그 자체의 분포 상황과 좋은 비교를 보이는 것이니 지난 회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확실히 신라의 전탑이라 할 것은 안동에 으뜸되게 집결되어 있고 경주의 분황탑·황룡사지탑 등은 재료는 다르다 하더라도 역시 전탑 수법 그대로 따른 것이요, 청도 운문작합사(雲門鵲岬寺)의 잔탑재(殘塔材), 칠곡 송림사의 오중탑 등 확실히 당대의 박탑이며 현대문주17▶/ 울산군 농소면 불운사의 잔탑 파재(佛雲寺殘塔破材), 경주 삼랑사지(三郞寺址)에서 발견된 박재, 같은 곡면 금장리에서 발견된 박재, 월성지에서 발견된 박재 등은[a 21] 혹 탑재였을 것인지 건축물 벽재였을 것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신라 시대에 있어 전탑 양식에 대한 의식이 이와 같이 경주를 중심으로 칠곡, 안동, 의성, 선산, 청도, 울산으로 얽혀 있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하나의 지방적 특질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북방문화 즉 고구려를 통하여 이 위승으로 말미암아 전교된 신라 불교 경로를 생각할 때 이러한 양식에 대한 애호가 단순히 즉흥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양식의 이러한 분포는 소위 백제식이라는 일련의 유형이 백제 고지에서만 반복되어 있는 것과 좋은 대조거리로, 이 문제는 다시 그 항에서 재술함으로써 어떤 설명을 다시 꾀해볼까 한다. (미완)
쪽수▶P91-2以上, 이 摸塼塔이란 한 개의 類型은 번대 盈尼山下塔에서 出發했든 것이나 그때 그것은 한개의 創案的인 意思의 產物로서 朝鮮에 石塔 定形이 決定되기 前, 한 개의 始源的인 것으로 發足하였으나 新羅의 政治的 統一과 함께 百濟의 寫實的 屋面의 手法과 合처진 博塔 樣式의 屋石「괴임」의 手法은 感恩塔 以下 第二期 塔婆에서 普邏的 定形 樣式으로 決定되였고 그후 暫時 이 樣式 이저젓다가 第三期에 드러 定形的 塔婆가 發達될대로 發達되는 한편 새로운 裝飾的인 造型의 樣式이 追求되는 動向에 좇아 일즉이 始源的이였든 저 盈尼山下塔의 樣式이 다시 回顧的으로 復古되여 이곳에 다시 이 樣式의 流行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前에 列擧한 것과 같이 이 樣式의 塔婆는 全南의 二例를 除하고서는 모다 慶尙北道 一帶에 限하야 聚成되여 있고 特히 義城에서 시작되었든 이 樣式이 一轉하야 善山에 드러와 特殊化되고 再轉하야 慶州에 드러와 다시 特殊化되고 그러한 後 安東에 一例가 생기고 時代가 아조 뒤떠▶P92러저 全南까지 二例가 생기게 된 것이다. 摸博塔의 이러한 分布 狀況은 저 塼塔 그 自體의 分布 狀況과 좋은 比照를 보히는 것이니 前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確實히 新羅의 塼塔이라 할 것은 安東에 읏듬되히 聚集되여있고 慶州의 芬皇塔皇龍寺址塔 等은 材料는 달다 하드라도 亦 塼塔手法 고대로 依한 것이요 원문주17▶淸道 雲門鵲岬寺의 殘塔材 漆谷松林寺의 五重塔 等 確實히 當代의 博塔이며 蔚山郡 農所面 佛雲寺殘塔破材, 慶州 三郞寺址 發見 博材, 同見 谷面 金丈里 發見 博材, 月城址 發見 博材 等은 [22] 或 塔材이였을 것인지 建築物 壁材이였을 것인지 斷言키 困難하지만 新羅 代에있어 塼塔 樣式에 대한 意識이 이와 같이 慶州를 中心해서 漆谷, 安東, 義城, 善山, 淸道, 蔚山으로 엉켜있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선 한 地方的 特質이라 할른지 모르지만 北方文化 即 高句麗를 通하야 此 魏僧으로 말미암아 傳敎된 新羅 佛敎 經路를 생각할 때 이러한 樣式에 대한 愛好가 單純히 即興的인 것만은 아니였든 듯하다 樣式의 이러한 分布는 所謂 百濟式이란 一聯의 類型이 百濟 故地에서만 翻覆되여 있는 것과 좋은 對照거리로 이 問題는 다시 그 項에서 再述함으로써 엇더한 說明을 다시 꾀해볼가 한다.(未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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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1) 大正六年 度古蹟調査報告 四九七葉本文及寫眞一五七號
  2. (10) 建築雜誌 箅四四輯 第五三三號 (昭和五年 五月號) 膽島亥治郎 「朝鮓建築史論」 其ノ三
  3. (2) 能勢丑三氏 「遠願寺の塔遠願寺の塔と十二 支神像について」 (朝鮮 昭和 六年 十月號) 能勢氏에 依하면 이 十二支像信仰은 藥師曼茶羅에 依한 것으로 一種의 方位神을 信仰의 對象으로 하는 文豆婁宗(神印宗=中神宗)의 流行으로 된 것이라 하였다. 即 文武王代 盛行된 明郎法師의 秘密神呪敎에서 發足된 것이다. 그런데 陵墓에 있어서의 一例이지만 九政用方形墳의 十二支像같은 것은 亥子丑이 北邊, 寅卯辰이 東邊, 己午未가 南邊, 申酉戌이 西邊에 配置되여 그곳에 漢代 以來의 式占天地盤에 符合되는 配置가 있어 이 支那 古來의 方位精神과 佛教的 曼茶羅的 展開와의 合作을 筆者는 보는 바이다. 여기에 勿論 文豆要宗에서의 方位精神이란 것과 漢代 己來의 方位神의 觀念과의 關係를 다시 더 찾을 必要가 있으되 本 問題와는 乖離되는 것이므로 더 迫究치 않지만 何如間 王陵에서의 十二支 經營에 이만한 解釋은 갖고 볼 必要가 있다. 能鄭 氏는 墳墓 關係의 十二支像을 支那에서의 例로는 唐代부터 드렀으나 이것은 좀더 追究하여야 할 것으로 鄭德坤 沈維鈞 合著 中國明器(燕京學報 專號 之一)에는 山東 圖書館에 建安 年號가 있는 十二支肖像의 〿磚이 있음을 말한 배 있다. 勿論 얼마나 信憑할만한 것인지는 疑問이나 十二支像을 墳墓 關係에 使用한 것은 唐代 以前에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支那에서는 墳隴外護에 經營하는 것이 있었든지 疑問이다. 內藤 虎南같은 이는(讀史叢錄) 支那에도 있었던 것이나 現存치 아니할 뿐이라 하는 意見을 말한 모양이나 이러한 論은 輪으로서 설 수 없다. 그러므로 墳隴外護에서의 이러한 經營은 아즉것 하여서는 新羅의 獨創이라 하는 수밖에 없다.
    또 能勢 氏는 佛國寺塔의 八葉蓮座 經營이 遠覇者塔의 十二支像 經營과 함께 塔을 〿茶羅 같이 생각한 所以로서 이것은 新羅 時代에 流行한 神呪를 目的한 雜部密敎의 天等都信仰의 所敢라 하였다 傾聽할 一說일까 한다. (春秋 第二卷 二號 拙稿 「藥〿樂師 郁信仰과 新羅美術」 참조)
  4. (3) 有光敎一 「十二子生肖の石彫を繞らした新羅の墳墓」(靑丘學叢 第二十五號) 齊藤忠 「新羅王陵傳稱名に關する一考察」(考古學論叢 第十四輯) 今西龍 博士 「慶州に於ける新羅墳〿及ひ其遺物に就て」 (新羅史硏究) 이제 新羅陵基 中 十二支肖像이 있는 것을 들면

    傳稱 眞德王陵 慶州郡見谷面五柳里
    傳稱 聖德王陵 同 內東面朝陽里
    傳稱 景德王陵 同 內東面 德泉里 鳧池里 間界
    傳稱 〿德王陵 同 川北面東川里
    傳稱 興德王陵 同 江西面 六通里
    俗稱 掛陵 同 外東面掛陵里
    傳稱 金庾信墓 同 慶州邑忠孝里
    九政里方形境 同 外東面九政里

  5. (2) (2) 能勢丑三氏 「遠願寺の塔遠願寺の塔と十二 支神像について」 (朝鮮 昭和 六年 十月號) 能勢氏에 依하면 이 十二支像信仰은 藥師曼茶羅에 依한 것으로 一種의 方位神을 信仰의 對象으로 하는 文豆婁宗(神印宗=中神宗)의 流行으로 된 것이라 하였다. 即 文武王代 盛行된 明郎法師의 秘密神呪敎에서 發足된 것이다. 그런데 陵墓에 있어서의 一例이지만 九政用方形墳의 十二支像같은 것은 亥子丑이 北邊, 寅卯辰이 東邊, 己午未가 南邊, 申酉戌이 西邊에 配置되여 그곳에 漢代 以來의 式占天地盤에 符合되는 配置가 있어 이 支那 古來의 方位精神과 佛教的 曼茶羅的 展開와의 合作을 筆者는 보는 바이다. 여기에 勿論 文豆要宗에서의 方位精神이란 것과 漢代 己來의 方位神의 觀念과의 關係를 다시 더 찾을 必要가 있으되 本 問題와는 乖離되는 것이므로 더 迫究치 않지만 何如間 王陵에서의 十二支 經營에 이만한 解釋은 갖고 볼 必要가 있다. 能鄭 氏는 墳墓 關係의 十二支像을 支那에서의 例로는 唐代부터 드렀으나 이것은 좀더 追究하여야 할 것으로 鄭德坤 沈維鈞 合著 中國明器(燕京學報 專號 之一)에는 山東 圖書館에 建安 年號가 있는 十二支肖像의 〿磚이 있음을 말한 배 있다. 勿論 얼마나 信憑할만한 것인지는 疑問이나 十二支像을 墳墓 關係에 使用한 것은 唐代 以前에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支那에서는 墳隴外護에 經營하는 것이 있었든지 疑問이다. 內藤 虎南같은 이는(讀史叢錄) 支那에도 있었던 것이나 現存치 아니할 뿐이라 하는 意見을 말한 모양이나 이러한 論은 輪으로서 설 수 없다. 그러므로 墳隴外護에서의 이러한 經營은 아즉것 하여서는 新羅의 獨創이라 하는 수밖에 없다.
    또 能勢 氏는 佛國寺塔의 八葉蓮座 經營이 遠覇者塔의 十二支像 經營과 함께 塔을 〿茶羅 같이 생각한 所以로서 이것은 新羅 時代에 流行한 神呪를 目的한 雜部密敎의 天等都信仰의 所敢라 하였다 傾聽할 一說일까 한다. (春秋 第二卷 二號 拙稿 「藥〿 樂師 郁信仰과 新羅美術」 參照)
  6. (3) 有光敎一 「十二子生肖の石彫を繞らした新羅の墳墓」(靑丘學叢 第二十五號) 齊藤忠 「新羅王陵傳稱名に關する一考察」(考古學論叢 第十四輯) 今西龍 博士 「慶州に於ける新羅墳〿及ひ其遺物に就て」 (新羅史硏究) 이제 新羅陵基 中 十二支肖像이 있는 것을 들면

    傳稱 眞德王陵 慶州郡見谷面五柳里
    傳稱 聖德王陵 同 內東面朝陽里
    傳稱 景德王陵 同 內東面 德泉里 鳧池里 間界
    傳稱 〿德王陵 同 川北面東川里
    傳稱 興德王陵 同 江西面 六通里
    俗稱 掛陵 同 外東面掛陵里
    傳稱 金庾信墓 同 慶州邑忠孝里
    九政里方形境 同 外東面九政里

  7. (11) 建篓學會論文集 第九號(昭和 十三年 四月號) 杉山信三氏「葛項寺三層石塔婆の形の解析」
  8. (4) 大坂金太郎 氏 「慶州に於ける新羅廢寺址の寺名推定に就て」 (朝鮮 昭和六年 十月號) 中에 金光寺의 遺址推定에 內南面塔里 金崗에 있다 하고 附近 地名을 金光堤라 稱함에서 金光寺址로 稱한다 하였는데 저 金崗은 金光과는 同一視할 수 없는 일흠이다. 三國遺事에는(感通 第七) 善律還生條에 金剛寺란 것이 따로 있는데 大坂 氏는 이 金剛寺를 考證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金光寺 址로 推定한 것이 或 이 金剛寺址일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그가 推定한 金光寺址란 一段 疑心이 不無해지는 바이다. 金光堤의 일홈만은 東京雜記에 依하면 府北十五里見谷에도 金光內堤란 것이 있고 全光外提란 것이 있고 府南南面月南里에도 金光堤가 있고 金光堤의 일홈만 가지고는 金光寺址를 곧 말할 수 없지 아니할가 金剛寺는 金剛山에 있었을 법하되 金光寺는 金光堤이 일홈만으로써는 府南面에 있는 것을 곧 指稱할 수 없는 것이 아닐가 하는 바이다.
  9. (12) 建築學會論文集第十七號(昭和十五年四月) 米田美代治氏「千軍里雙塔の意匠計劃について」並 昭和十三年度古蹟調查報 告本稿詁10 A, 藤島博士 朝鮮建築史論 其三
  10. (13) 大正六年度 古蹟調查報告 本文四〇八業 及 寫眞 其第一二五號
  11. (B) 같은 잡지 제47집 제579호 (쇼와 8년 12월호) 후지시마 가이지로 (藤島亥治郎)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및 변형 삼층석탑론」
  12. (5) 佛國古今創記, 西釋迦塔注에 一名無影塔, 諺傳, 創寺時匠工 自唐來人, 有一妹名阿闍女, 要訪朝到, 通來則大功未完, 不可以陋身許納, 明且坤方十里許, 自有天然之澤, 臨彼則, 庶可見矣, 斯女依從, 往見則, 果鑑面, 無塔影, 故名이라 있다. 이 塔影에 關하얀 朝鮮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中國에도 日本에도 있는 것으로 그 科學的 證明는 足立康 博士의 「史跡と美術」 第三三號(昭和 八年)에 있다. 따라 이 影塔 傳說에 唐人 云云에 執着하야 唐人의 所作이라 곧 말함은 너무나 批判的 精神이 없는 俗人的 見解라 하겠다.
  13. (6) 平凡社本 世界美術全集 第十三卷 一二七頁 及 三八頁
  14. (7) 夢殿 第十冊
  15. (8) 「史跡と美術」 第四十五號 昭和九年 八月號
  16. (9) 飛鳥園發行 「日本美術史資料」 第六輯 中村達太郎 著 「日本建築辭集」 附錄年 表中
  17. (B) 同 第四七輯 第五七九號 (昭和八年 十二月號) 藤島 亥治郎 「慶州を中心とせる新羅時代 一般形及ひ變形三層石塔論」
  18. (14) 建築雜誌 第四八輯 第五八一號 (昭和九年 二月號)
    이 寺址는 일즉이 廢한 바 되여 그 寺名이 不確實하나 永溪洞이란 洞名과 寺後主山이 氷山인 點에서 藤島博士는 氷山寺址로 推定한 모양이다 이곳 永山寺는 永穴로써 有名하고 氷穴傍엔 太一殿이 있어 降香致祭하였던 것은 舆地勝覽에 보히는 바이다. 三國遺事 卷三 前後所將舍利條에 「云云 又至庚午出都之亂, 顚沛之甚過於壬辰, 十員, 殿監主禪師心鑑亡身佩持, 獲免於賊難, 達於大內, 大賞其功, 移授名刹, 今住氷山寺, 是亦親聞於彼」 云云이라 있는 永山寺란 것이 곧 이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19. (15) 建築雜誌, 第四八輯 第五八七號 昭和九年 七月號
    茸長溪寺址埢에 關하얀 同 建婆雜誌 第四七輯 第五七九號 (昭和八年 十二月號)의 藤島博士 文과 朝觧總督府 發行 「慶州南山の佛跡」(五六頁 五七頁) 參照件
  20. (4) 大坂金太郎 氏 「慶州に於ける新羅廢寺址の寺名推定に就て」 (朝鮮 昭和六年 十月號) 中에 金光寺의 遺址推定에 內南面塔里 金崗에 있다 하고 附近 地名을 金光堤라 稱함에서 金光寺址로 稱한다 하였는데 저 金崗은 金光과는 同一視할 수 없는 일흠이다. 三國遺事에는(感通 第七) 善律還生條에 金剛寺란 것이 따로 있는데 大坂 氏는 이 金剛寺를 考證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金光寺址로 推定한 것이 或 이 金剛寺址일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그가 推定한 金光寺址란 一段 疑心이 不無해지는 바이다. 金光堤의 일홈만은 東京雜記에 依하면 府北十五里見谷에도 金光內堤란 것이 있고 全光外提란 것이 있고 府南南面月南里에도 金光堤가 있고 金光堤의 일홈만 가지고는 金光寺址를 곧 말할 수 없지 아니할가 金剛寺는 金剛山에 있었을 법하되 金光寺는 金光堤이 일홈만으로써는 府南面에 있는 것을 곧 指稱할 수 없는 것이 아닐가 하는 바이다.
  21. (16) 大正六年度 古蹟調查報告 本文 一四二頁 寫眞三六號
  22. (17) 新羅古瓦の研究(京都帝大 考古學研究報告 第十三册)






현대문주


  1. 건축잡지 제44집 제533호 (소화 5년 5월호) 담도해치로(膽島亥治郎) 「조선건축사론」 제3편
  2. (2) 노세 우시조(能勢丑三) 씨의 「원원사의 탑과 십이지 신상에 대하여」(『조선』 쇼와 6년 10월호)에 따르면, 이 십이지상 신앙은 약사 만다라에 근거한 것으로 일종의 방위신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문두루종(文豆婁宗)(신인종神印宗=중신종中神宗)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즉 문무왕 시대에 성행한 명랑법사(明郎法師)의 비밀 신주교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능묘에서의 일례이지만, 구정용 방형분(아홉 개의 정방형 무덤)의 십이지상 같은 것은 해·자·축이 북쪽, 인·묘·진이 동쪽, 사·오·미가 남쪽, 신·유·술이 서쪽에 배치되어 그곳에 한나라 대 이래의 옛식(式占) 천지반(하늘과 땅의 방향을 점치는 판, 天地盤)에 부합하는 배치가 있어 이 중국 고래(古來)의 방위 정신과 불교적 만다라 전개와의 합작을 필자는 보는 바이다. 여기에 물론 문두루종에서의 방위 정신과 한나라 이후의 방위신 개념과의 관계를 더 살펴볼 필요는 있으되 본 문제와는 괴리되는 것이므로 더 깊이 파고들지는(迫究) 않지만, 하여간 왕릉에서의 십이지상 경영에 이만한 해석은 갖고 볼 필요가 있다. 노세 씨는 분묘 관계의 십이지상을 지나(중국)에서의 예로는 당대(唐代)부터 들었으나 이것은 좀 더 추구하여야 할 것으로 정덕곤(鄭德坤) 심유균(沈維鈞) 합저 『중국명기(中國明器)』(연경학보 전호(專號)의 하나)에는 산동 도서관에 건안(建安) 연호가 있는 십이지초상(十二支肖像)의 벽전(磚)이 있음을 말한 바 있다. 물론 얼마나 신빙할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나 십이지상을 분묘 관계에 사용한 것은 당대(唐代)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분릉외호(墳隴外護)에 경영하는 것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나이토 코난(內藤 虎南) 같은 이는(『독사총록(讀史叢錄)』) 중국에도 있었던 것이나 현존치 아니할 뿐이라는 의견을 말한 모양이나 이러한 논의는 근거로서 설 수 없다. 그러므로 분릉외호(墳隴外護)에서의 이러한 경영은 아직껏 하여서는 신라의 독창(獨創)이라 하는 수밖에 없다. 또 노세 씨는 불국사탑의 팔엽연좌(八葉蓮座) 경영이 원패자탑(遠覇者塔)의 십이지상 경영과 함께 탑을 만다라 같이 생각한 까닭으로서 이것은 신라 시대에 유행한 신주를 목적으로 한 잡부밀교(雜部密敎)의 천등도신앙(天等都信仰)의 소산(所産)이라 하였다. 경청할 일설(一說)일까 한다. (『춘추(春秋)』 제2권 제2호 졸고 「약사(藥師) 악사(樂師) 욱신앙(郁信仰)과 신라미술(新羅美術)」 참조)
  3. (3)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십이지 생초의 석조를 둘러놓은 신라의 분묘」(청구학총 제25호) 사이토 다다시(齊藤忠) 「신라 왕릉 전칭명에 관한 일고찰」(고고학논총 제14집) 이마니시 류(今西龍) 박사 「경주에 있어서의 신라 분묘 및 그 유물에 대하여」(신라사연구) 이제 신라 능기 중 십이지 초상이 있는 것을 들면

    전칭 진덕왕릉 경주군 견곡면 오류리
    전칭 성덕왕릉 같은 군 내동면 조양리
    전칭 경덕왕릉 같은 군 내동면 덕천리, 부지리 경계
    전칭 문덕왕릉 같은 군 천북면 동천리
    전칭 흥덕왕릉 같은 군 강서면 육통리
    속칭 괘릉 같은 군 외동면 괘릉리
    전칭 김유신묘 같은 군 경주읍 충효리
    구정리 방형경 같은 군 외동면 구정리

  4. (2) 노세 우시조(能勢丑三) 씨의 「원원사의 탑과 십이지 신상에 대하여」(『조선』 쇼와 6년 10월호)에 따르면, 이 십이지상 신앙은 약사 만다라에 근거한 것으로 일종의 방위신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문두루종(文豆婁宗)(신인종神印宗=중신종中神宗)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즉 문무왕 시대에 성행한 명랑법사(明郎法師)의 비밀 신주교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능묘에서의 일례이지만, 구정용 방형분(아홉 개의 정방형 무덤)의 십이지상 같은 것은 해·자·축이 북쪽, 인·묘·진이 동쪽, 사·오·미가 남쪽, 신·유·술이 서쪽에 배치되어 그곳에 한나라 대 이래의 옛식(式占) 천지반(하늘과 땅의 방향을 점치는 판, 天地盤)에 부합하는 배치가 있어 이 중국 고래(古來)의 방위 정신과 불교적 만다라 전개와의 합작을 필자는 보는 바이다. 여기에 물론 문두루종에서의 방위 정신과 한나라 이후의 방위신 개념과의 관계를 더 살펴볼 필요는 있으되 본 문제와는 괴리되는 것이므로 더 깊이 파고들지는(迫究) 않지만, 하여간 왕릉에서의 십이지상 경영에 이만한 해석은 갖고 볼 필요가 있다. 노세 씨는 분묘 관계의 십이지상을 지나(중국)에서의 예로는 당대(唐代)부터 들었으나 이것은 좀 더 추구하여야 할 것으로 정덕곤(鄭德坤) 심유균(沈維鈞) 합저 『중국명기(中國明器)』(연경학보 전호(專號)의 하나)에는 산동 도서관에 건안(建安) 연호가 있는 십이지초상(十二支肖像)의 벽전(磚)이 있음을 말한 바 있다. 물론 얼마나 신빙할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나 십이지상을 분묘 관계에 사용한 것은 당대(唐代)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분릉외호(墳隴外護)에 경영하는 것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나이토 코난(內藤 虎南) 같은 이는(『독사총록(讀史叢錄)』) 중국에도 있었던 것이나 현존치 아니할 뿐이라는 의견을 말한 모양이나 이러한 논의는 근거로서 설 수 없다. 그러므로 분릉외호(墳隴外護)에서의 이러한 경영은 아직껏 하여서는 신라의 독창(獨創)이라 하는 수밖에 없다. 또 노세 씨는 불국사탑의 팔엽연좌(八葉蓮座) 경영이 원패자탑(遠覇者塔)의 십이지상 경영과 함께 탑을 만다라 같이 생각한 까닭으로서 이것은 신라 시대에 유행한 신주를 목적으로 한 잡부밀교(雜部密敎)의 천등도신앙(天等都信仰)의 소산(所産)이라 하였다. 경청할 일설(一說)일까 한다. (『춘추(春秋)』 제2권 제2호 졸고 「약사(藥師) 악사(樂師) 욱신앙(郁信仰)과 신라미술(新羅美術)」 참조)
  5. (3)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십이지 생초의 석조를 둘러놓은 신라의 분묘」(청구학총 제25호) 사이토 다다시(齊藤忠) 「신라 왕릉 전칭명에 관한 일고찰」(고고학논총 제14집) 이마니시 류(今西龍) 박사 「경주에 있어서의 신라 분묘 및 그 유물에 대하여」(신라사연구) 이제 신라 능기 중 십이지 초상이 있는 것을 들면

    전칭 진덕왕릉 경주군 견곡면 오류리
    전칭 성덕왕릉 같은 군 내동면 조양리
    전칭 경덕왕릉 같은 군 내동면 덕천리, 부지리 경계
    전칭 문덕왕릉 같은 군 천북면 동천리
    전칭 흥덕왕릉 같은 군 강서면 육통리
    속칭 괘릉 같은 군 외동면 괘릉리
    전칭 김유신묘 같은 군 경주읍 충효리
    구정리 방형경 같은 군 외동면 구정리

  6. (11) 건축학회 논문집 제9호(쇼와 13년 4월호) 스기야마 신조(杉山信三) 씨 「갈항사 삼층석탑의 형태 분석」
  7. (4) 오사카 킨타로(大坂金太郎) 씨 「경주에 있어서의 신라 폐사지의 사명 추정에 대하여」(『조선』 쇼와 6년 10월호) 중에 금광사(金光寺)의 유적 추정을 내남면 탑리 금강(金崗)에 있다고 하고, 부근 지명을 금광제(金光堤)라 칭함에서 금광사지(金光寺址)로 부른다고 하였는데, 저 금강(金崗)은 금광(金光)과는 동일시할 수 없는 이름이다. 『삼국유사』(감통 제7) 선율환생조에는 금강사란 것이 따로 있는데, 오사카 씨는 이 금강사(金剛寺)를 고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금광사지(金光寺址)로 추정한 것이 혹 이 금강사지(金剛寺址)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그가 추정한 금광사지란 한층 의심이 없지 않은 바이다. 금광제(金光堤)라는 이름만으로는 『동경잡기』에 따르면 부북 15리 견곡에도 금광내제(金光內堤)란 것이 있고 전광외제(全光外提)란 것이 있으며, 부남 내남면 월남리에도 금광제가 있고 금광제라는 이름만 가지고는 금광사지를 곧바로 말할 수 없지 아니할까. 금강사는 금강산에 있었을 법하되 금광사는 금광제라는 이름만으로는 부남면에 있는 것을 곧 지칭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바이다.
  8. (12) 건축학회 논문집 제17호(쇼와 15년 4월)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 씨의 「천군리 쌍탑의 디자인 계획에 대하여」, 쇼와 13년도 고적 조사 보고서 본고 해설 10-A, 후지시마(藤島) 박사의 「조선건축사론」 제3
  9. (13) 다이쇼 6년도 고적 조사 보고서 본문 408쪽 및 사진 제125호
  10. (B) 같은 잡지 제47집 제579호 (쇼와 8년 12월호) 후지시마 가이지로 (藤島亥治郎)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및 변형 삼층석탑론」
  11. (5) 불국고금창기, 서석가탑주에 "일명 무영탑(無影塔)은, 속설에 의하면, 창사(절을 창건할 때) 당시 장공(장인)이 당(唐)에서 온 사람이고, 그에게 아자녀(阿闍女)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조선을 방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래하게 되면 대공(큰 공사)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천한 몸을 허락하여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밝고 곤방(남서쪽)으로 십 리쯤 되는 곳에 천연의 못이 있어, 그곳에 임하면 아마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인이 그 말을 따라 가서 보니, 과연 거울 같은 물면에 탑영(塔影)이 없었으므로 무영탑이라 이름하였다"라 있다. 이 탑영에 관해서는 조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중국에도 일본에도 있는 것으로 그 과학적 증명은 아다치 야스시(足立康) 박사의 『사적과 미술』 제33호(쇼와 8년)에 있다. 따라서 이 탑영 전설에 대해 ‘당인 운운’에 집착하여 당인의 소작이라 곧 단정하는 것은 너무나 비판적 정신이 없는 속인의 견해라 하겠다.
  12. (6) 헤이본샤본(平凡社本) 세계미술전집 제13권 127쪽 및 38쪽
  13. (7) 몽전 제10책
  14. (8) 『사적과 미술』 제45호, 쇼와 9년 8월호
  15. (9) 아스카엔(飛鳥園) 발행 『일본미술사자료(日本美術史資料)』 제6집, 나카무라 다츠타로(中村達太郎) 저 『일본건축사전(日本建築辭集)』 부록 연표 중
  16. (B) 같은 잡지 제47집 제579호 (쇼와 8년 12월호) 후지시마 가이지로 (藤島亥治郎)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및 변형 삼층석탑론」
  17. (14) 『건축잡지』 제48집 제581호(쇼와 9년 2월호)
    이 사지(절터)는 오래전에 폐사된 바 있어 사명이 확실하지 않으나 ‘영계동’이라는 동명과 절 뒤의 주산(主山)이 ‘영산(永山)’이라는 점에서 후지시마 박사는 이를 영산사지로 추정한 듯하다. 이곳 영산사(永山寺)는 ‘영혈(永穴)’로 유명하며 영혈(永穴) 옆에는 태일전(太一殿)이 있어 향을 피우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여지승람』에 보인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에는 "云云 又至庚午出都之亂, 顚沛之甚過於壬辰, 十員, 殿監主禪師心鑑亡身佩持, 獲免於賊難, 達於大內, 大賞其功, 移授名刹, 今住氷山寺, 是亦親聞於彼" 라고 되어 있어 이 영산사란 것이 곧 이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18. (15) 建築雜誌, 第四八輯 第五八七號 昭和九年 七月號
    茸長溪寺址埢에 關하얀 同 建婆雜誌 第四七輯 第五七九號 (昭和八年 十二月號)의 藤島博士 文과 朝觧總督府 發行 「慶州南山の佛跡」(五六頁 五七頁) 參照件
  19. (4) 오사카 킨타로(大坂金太郎) 씨 「경주에 있어서의 신라 폐사지의 사명 추정에 대하여」(『조선』 쇼와 6년 10월호) 중에 금광사(金光寺)의 유적 추정을 내남면 탑리 금강(金崗)에 있다고 하고, 부근 지명을 금광제(金光堤)라 칭함에서 금광사지(金光寺址)로 부른다고 하였는데, 저 금강(金崗)은 금광(金光)과는 동일시할 수 없는 이름이다. 『삼국유사』(감통 제7) 선율환생조에는 금강사란 것이 따로 있는데, 오사카 씨는 이 금강사(金剛寺)를 고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금광사지(金光寺址)로 추정한 것이 혹 이 금강사지(金剛寺址)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그가 추정한 금광사지란 한층 의심이 없지 않은 바이다. 금광제(金光堤)라는 이름만으로는 『동경잡기』에 따르면 부북 15리 견곡에도 금광내제(金光內堤)란 것이 있고 전광외제(全光外提)란 것이 있으며, 부남 내남면 월남리에도 금광제가 있고 금광제라는 이름만 가지고는 금광사지를 곧바로 말할 수 없지 아니할까. 금강사는 금강산에 있었을 법하되 금광사는 금광제라는 이름만으로는 부남면에 있는 것을 곧 지칭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바이다.
  20. (16) 다이쇼 6년도 고적 조사 보고서 본문 142쪽 및 사진 제36호
  21. (17) 『신라 고와(古瓦)의 연구』(교토제국대학 고고학 연구보고 제13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