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선종에 취하여 -오교양종의일파, 조선불교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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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선종에 취하여 -오교양종의일파, 조선불교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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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曺溪禪宗에 就하야 - 五敎兩宗의 一派 , 朝鮮佛教의 根源-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9 발행기관
저자 김영수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8년07월
시작쪽 145쪽 종료쪽 175쪽 전체쪽 31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총론






































본문1-1: (1)서설


이 조계종은 조선불교에서 달마의 구산법손(九山法孫)으로 조직된 교단으로서 오교를 상대로 할 때에는 선계종이라 하고 천태종을 상대로 할 때에는 조계종이라고 부르던 종이다. 본지 제8권에서 오교양종(五教兩宗)이란 논제로써 신려(羅麗) 시대에 행하던 조선불교의 종파를 서술할 때에 오교와 양종 중 천태종만을 말하고 이 조계종은 남겨 두었던 것이다. 오교양종 중에 들어있는 이 조계종을 서술하려 하면서 문제를 달리하여 말하는 까닭은 전에 말한바 오교양종은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모두 법맥이 단절되어 버리고 그 종풍(宗風)을 후세에 전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 조계종은 신라 헌덕왕 이래로 고려와 이조를 거쳐서 금일까지 그 법맥을 유지 상속하여 현금 조선불교의 주인공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 오교양종을 고대불교라고 하면 이 조계종은 현대불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쪽수▶P145-1이 曹溪宗은 朝鮮佛敎에서 達磨의 九山法孫으로 組織된 敎團으로서 五敎를 相對로 할 때에는 禪 寂宗이라 하고 天台宗을 相對로 할 때에는 曹溪宗이라고 부르든 宗이다. 本誌 第八卷에서 五敎兩宗이란 論題로써 羅麗時代에 行하든 朝鮮佛敎의 宗派를 述할 때에 五敎와 兩宗中 天台宗만을 說하고 이 曹溪宗은 남기어 두었든 것이다. 五敎兩宗 中에 들어있는 이 曹溪宗을 述하랴 하면서 問題를 달리하야 說하는 所以는 前에 말한바 五敎兩宗은 李朝에 들어와서 모다 法脉이 斷絶되여 버리고 그 宗風을 後世에 傳하지 못한 것이지만은 이 曹溪宗은 新羅 憲德王 爾來로 高麗와 李朝를 거쳐서 今日까지 그 法脉을 維持相續하야 現今 朝鮮佛敎의 主人公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 前 五教兩宗을 古代佛敎라고 하면 이 雷溪宗은 現代佛敎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에 불교가 전입(傳入)된 뒤로 신라 제40대 애장왕 때까지는 화엄 법화사 소위 문자지묵경전(文字紙墨經典)으로써 소의(所依) 근거를 삼는 교종 각파만이 유전하였으므로 신라인은 아직 불교 중에 선법이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 다음 현덕왕 때에 도의선사(道儀禪師)란 이가 지나(支那)에 들어와 육조 혜능대사(惠能大師)의 법증손(法曾孫)이 되는 서당 지장선사(智藏禪師)에 참여하여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달마선법을 전수하여 가지고 귀국한 후 이것을 국내에 선전하여 보았다. 부자경전에 취한 신라 인민은 이것을 믿지 않고 도리어 허무맹랑설이라고 비방하였을 뿐이었다. 도의는 시기상조라는 탄사(嘆詞)를 남겨두고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에 숨어 40년 간 산문을 나가지 않고 일생을 마첬다고 한다. 그 다음 흥덕왕 때에 홍척대사(洪陟大師)란 이가 입당(入唐)하여 역시 서당 지장으로부터 달마의 선법을 받아 가지고 와서 남악(지리산) 실상사에 거주하더니 당시 임금 흥덕대왕과 재상 충공(즉 민애왕의 생부니 선강태자로서 선강태왕이라고 하는 이다)이 홍척의 일구 법문 하에 왕급(王及) 재상은 조범석성(朝凡夕聖)의 돈오를 얻었다. 여기서부터 신라 상하인민은 모두 선종의 기치 아래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쪽수▶P145-2朝鮮에 佛敎가 傳入된 뒤로 新羅 第四十代 哀莊王時까지는 華嚴 法華等 所謂文字紙墨經典으로써 所依根據를 삼는 敎宗各派만이 流傳하였음으로 新羅人은 아즉 佛敎中에 禪法이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 다음 憲德王時에 道儀禪師란 이가 支那에 入하야 六祖惠能大師의 法曾孫▶P146-1이 되는 西堂智藏禪師에 参하야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達磨禪法을 傳受하야 갖이고 歸國한 후 이것을 國內에 宣傳하야 보았다. 父子經典에 醉한 新羅人民은 이것을 信치 아니하고 도리어 虛無孟浪說이라고 誹謗하였을 뿐이었다. 道儀는 時機尙早라는 嘆詞를 남겨두고 江原道 雪岳山 陳田寺에 隱하야 四十年間 山門을 出치 아니하고 一生을 마첬다고 한다. 그 다음 興德王時에 洪陟大師란 이가 入唐하야 역시 西堂智藏으로부터 達磨의 禪法을 바다갖이고 와서 南岳(智異山) 實相寺에 住하더니 當時 임금 興德大王과 宰相忠恭(卽 閔哀王의 生父니 宣康太子로서 宣康太王이라고 하는 이다)이 洪陟의 一句法門 下에 王及宰相은 朝凡夕聖의 頓悟를 得하였다. 일로부터 新羅上下人民은 모다 禪宗의 旗幟下에로 몰려들기 始作하였다.
이와 같이 달마의 선종이 흥하게 된 이후로부터 조선승려로서 지나에 들어가 법을 구하여 온 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그 중에 혹은 당지(唐地)에서 영주불귀(永住不歸)한 이도 있고, 또는 귀국을 하였으나 문풍을 유지할 만한 법손을 얻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일개 교단의 조직을 보지 못하고 말았었다. 오직 전에 말한바 가지산(迦智山)의 도의와 실상사의 홍척 이외에 동리산(桐裏山)의 혜철과 봉림산(鳳林山)의 현욱과 성주산(聖住山)의 무염과 사자산(師子山)의 도윤과 의양산(義陽山)의 도현과 수미산(須彌山)의 이엄과 사굴산(闍崛山)의 범일 등 구산 조사(祖師)가 구법귀국한 후에 그 법을 대천하여 그 법손이 그 문풍을 유지 계속하여 교단의 체제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재래불교인 오교를 상대하여 구산선문이라 칭호하게 되고 다시 이것이 합하여 조계종이 된 것이다.
쪽수▶P146-2이와 같이 達磨의 禪宗이 興하게 된 以後로부터 朝鮮僧侶로서 支那에 入하야 法을 求하여 온 이가 헤알일 수 없을 만치 많었지만은 그 中에 或은 唐地에서 永住不歸한 이도 있고, 또는 歸國을 하였으나 門風을 維持할 만한 法孫을 얻지 못하였든 까닭으로 一個敎團의 組織을 보지 못하고 말았었다. 오즉 前에 말한바 迦智山의 道儀와 實相山의 洪陟 以外에 桐裏山의 惠澈과 鳳林山의 玄昱과 聖住山의 無染과 師子山의 道允과 義陽山의 道憲과 須彌山의 利嚴과 闍崛山의 梵日 等 九山祖師가 求法歸國한 후에 그 法을 大闡하야 그 法孫이 그 門風을 維持繼續하야 敎團의 體制를 成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在來佛敎인 五敎를 相對하야 九山禪門이라 稱呼하게 되고 다시 이것이 合하야 曹溪宗이 된 것이다.

































본문1-2: (2)종명


달마대사가 9년을 두고 면벽관심(面壁觀心)으로서 좌선행(坐禪行)을 선전한 후로부터 그 법을 전승한 이들에게 선사라는 명칭을 붙여 부르게 되어 가지고 선사 가풍이니 선사 가의 종풍이니 하는 명칭들이 따라 일어나게 되어 결국 선종이란 명칭이 출현함에 이르렀다. 전등록(傳燈錄) 제9권 대천복사홍편전(大薦福寺弘辨傳)에 보면 당 선종이 묻기를 “禪宗何有南北之名”이라 한 것이 있다. 이것이 문자 상에 처음으로 보이는 선종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선종이란 명칭은 달마의 좌선법을 사승(사승)한 승려들에 대사여 부르는 범칭이요 일 교단의 단체명으로 확정되기에는 이르지 못한 그대로 달마선법이 조선으로 전래하여 구산의 개입(開立)을 보게 되었다. 가지산이니 실상산이니 사굴산이니 하는 등 그것이 드디어 구산 선파의 아홉 개 교단의 종명이 되어 가지고 오교를 상대하게 되므로 당시 불교종파를 말할 때에 교(敎)로서는 화엄법상 등 오종이 있고 선(禪)으로서는 가지산 실상산 등 구종(九宗)이 있다고 할 뿐이요 선종이란 종명은 없었다. 혹 어떠한 때에 구산을 총칭하여 부르게 될 경우에 이르면 임시 임시로 선종이니 선적종이니 구산문이니 달마구산이니 하는 등 일정치 못한 명칭으로서 불러 오다가 고려 숙종 때에대각국사(大覺國師)의 천태종이 창립된 뒤에 이르러 구산을 총합하여 일종으로 취급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천태종을 북제혜문(北齊惠文)의 창립한 바로서 천태지자(天台智者)에 이르러 대성된 것이라 하여 천태종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산선문도 달마의 창(創)한 바로서 조계 보림사 혜능에 이르러 대성된 것이므로 조계종이란 종명을 확정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
쪽수▶P146-3達磨大師가 九年을 두고 面壁觀心으로써 坐禪行을 宣傳한 후로부터 그 法을 傳承한 이들에게 禪師라는 名稱을 부치어 부르게 되어 갖이고 禪師家風이니 禪師家의 宗風이니 하는 名稱들이 따라 이러나게 되야 結局 禪宗이란 名稱이 出現함에 이르렀다. 傳燈錄 第九卷 大薦福寺弘辨傳에 보면 唐宣宗이 뭇기를 『禪宗何有南北之名』▶P147-1라 한 것이 있다. 이것이 文字上에 처음으로 보이는 禪宗名이 않인가 생각한다. 그러나 이 禪宗이란 名稱은 達磨의 坐禪法을 嗣承한 僧侶들에 對하야 부르는 汎稱이요 一敎團의 團體名으로 確定되기에는 이르지 못한 그대로 達磨禪法이 朝鮮에로 傳來하야 九山의 開立을 보게 되였다. 迦智山이니 實相山이니 闍崛山이니 하는 等 그것이 드듸어 九山禪派의 九個敎團의 宗名이 되야 갖이고 五敎를 相對하게 됨으로 當時 佛敎宗派를 말할 때에 敎로서는 華嚴法相 等 五宗이 있고 禪으로서는 迦智山 實相山 等 九宗이 있다고 할 뿐이요 禪宗이란 宗名은 없었다. 或 어떠한 때에 九山을 總稱하야 부르게 될 境遇에 이르면 臨時臨時로 禪宗이니 禪寂宗이니 九山門이니 達磨九山이니 하는 等 一定치 못한 名稱으로써 불러 오다가 高麗 肅宗時 大覺國師의 天台宗이 創立된 뒤에 이르러 九山을 總合하야 一宗으로 取扱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였다. 天台宗을 北齊惠文의 創立한 바로서 天台智者에 이르러 大成된 것이라 하야 天台宗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九山禪門도 達磨의 創한 바로서 曹溪寶林寺 惠能에 至하야 大成된 것임으로 曹溪宗이란 宗名을 確定하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조계종이란 종명이 생긴 고려 숙종 때로부터 약 3백여 년을 지내어 이조 세종 6년에 이르러 화엄 자은 중신 시흥 등 사종을 합하여 교종을 삼고 조계 천태 총남 등 삼종을 합하여 선종을 삼는 바람에 조계종이란 종명은 없어지고 선종이란 종명으로서 행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에서 재정 정책으로 하여 종래 국가에서 불교단에 배급한 경비 즉 결수(당시 일결이란 토지에 대하여 매년 약 30두의 도조를 거두게 됨)를 절약하려면 먼저 결수의 배급을 받는 사찰 수를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고 사찰 수를 절약하려면 먼저 종파 수를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있었다. 이와 같이 종파 수를 줄이고 사찰 수를 줄인 결과로 남은 결수 토지는 당연히 정부의 소득이 되므로 종파 수를 절약하는 것은 즉 잉여 결수의 토지를 얻어 국가 재산으로 편입한 이후에는 불교 내에서야 폐합 종명인 선종으로 행하든지 또는 폐합 전 종명인 조계 천태 등 종으로 행하든지 여하간에 그것은 구태여 정부로서 간섭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므로 정부에서는 조계 천태 등의 종명 행사를 금한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종문제도를 변경한 세종 6년 이후에도 의연히 조계종의 종명으로서 칭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쪽수▶P147-2이 曹溪宗이란 宗名이 생기어진 高麗 肅宗時로부터 約 三百餘年을 지내여 李朝 世宗 六年에 이르러 華嚴 慈恩 中神 始興 等 四宗을 合하야 敎宗을 삼고 曹溪 天台 摠南 等 三宗을 合하야 禪宗을 삼는 바람에 曹溪宗이란 宗名은 없어지고 禪宗이란 宗名으로써 行世하게 되였다. 그러나 當時 政府에서 財政政策으로 하야 從來 國家에서 佛敎團에 配給한 經費 卽 結數(當時 一結이란 土地에 對하야 每年 約 三十斗의 稻租를 收하게 됨)를 節約하려면 먼첨 結數의 配給을 받는 寺刹 數를 節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寺刹 數를 節約하려면 먼첨 宗派 數를 節約치 아니하면 아니 되는 形便에 있었다. 이와 같이 宗派 數를 주리트리고 寺刹 數를 주리트린 結果로 剩餘한 結數上地는 當然히 政府의 所得이 됨으로 宗派 數를 節約하는 것은 卽 剩餘結數의 土地를 得하야 國家 財産으로 編入한 以後에는 佛敎 內에서야 廢合 宗名인 禪宗으로 行하든지 또는 廢合 前 宗名인 曹溪▶P148-1 天台 等 宗으로 行하든지 如何間에 그것은 구태여 政府로서 干涉할 必要가 없었든 것임으로 政府에서는 曹溪 天台 等의 宗名 行使를 禁한 일은 없었다. 그럼으로 宗門制度를 變更한 世宗 六年 以後에도 依然히 曹溪宗의 宗名으로써 稱하였든 것은 事實이다.
그러던 것이 서산대사(西山大師) 이후에 이르러는 재래에 전하여 오던 오교와 천태 총남 등 선종은 모두 멸망되고 오직 조계종 일파만이 지속 상전의 행운을 획득하여 현금 조선불교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현금에 있는 조선불교는 선종 중에서도 조계종이요 총남선종이나 천태선종은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조선불교의 종명은 조계선종이다. 이와 같이 최초에 오교와 대립할 때에는 구산선문이라 하였고 천태종과 상대할 때에는 조계종이라 하였고 선교양종 시대에는 선종이라 하였고, 현금실지(現今實地)에는 조계선종으로 되어 온 것이 즉 본종의 종명 변천이다.
쪽수▶P148-2그러든 것이 西山大師 以後에 이르러는 在來에 傳하여 오든 五敎와 天台 摠南 等 禪宗은 모다 滅亡되고 오즉 曹溪宗 一波만이 維持相傳의 幸運을 得하야 現今 朝鮮佛敎의 主人이 되였음으로 現今에 있는 朝鮮佛敎는 禪宗 中에서도 曹溪宗이요 摠南禪宗이나 天台禪宗은 아니다. 따라서 現 朝鮮佛敎의 宗名은 曹溪禪宗이다. 이와 같이 最初에 五敎와 對立할 때에는 九山禪門이라 하였고 天台宗과 相對할 때에는 曹溪宗이라 하였고 禪敎兩宗 時代에는 禪宗이라 하였고, 現今實地에는 曹溪禪宗으로 되야 온 것이 卽 本宗의 宗名 變遷이다.

































본문1-3: (3)종지


본종의 종지를 말할 때에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것을 표방한다. 이것을 약술하면 화엄종과 자은종 같은 교종은 화엄경이나 유가유식 등 문자 지묵으로 구성된 경론을 가져다가 소의 근거 성전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직 선종에서는 인인개개(人人個個)가 본래 구족하여 있는 자기 자심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시하여 견성성불하게 하기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소승불교를 제하고는 모두 성불로서 최극(最極) 목적을 삼는 것이므로 선종에서도 최후 목적은 역시 성불에 있다. 성불하려면 인인개개(人人個個)가 본자(本自) 구족한 자기 심성을 오득(悟得), 즉 견성을 하려면 좌선을 수행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첫째로 좌선을 권수(勸修)하는 것은 그 취지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쪽수▶P148-3本宗의 宗旨를 말할 때에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것을 標榜한다. 이것을 略述하면 華嚴宗과 慈恩宗 같은 敎宗들은 華嚴經이나 瑜伽唯識 等 文字紙墨으로 構成된 經論을 갖어다가 所依根據聖典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 普通이지만은 오즉 禪宗에서는 人人個個히 本來 具足하야 있는 自己自心을 單刀直入的으로 指示하야 見性成佛케 하기를 主張한다는 것이다. 佛敎에서 小乘佛敎를 除하고는 모다 成佛로써 最極目的을 삼는 것임으로 禪宗에서도 最後目的은 亦是 成佛에 있다. 成佛하랴면 人人個個히 本自具足한 自己心性을 悟得, 卽 見性을 하랴면 坐禪을 修行치 아니하고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禪宗에서 첫재로 坐禪을 勸修하는 것은 그 趣旨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불립문자 등 12자의 종지가 이와 같이 조리 있게 완성되기에는 지나 송조(宋朝)에 와서 비로소 된 것이다. 처음 달마대사 시절에는 그저 면벽관심으로서 좌선 수행하는 것을 지시할 뿐이요 문자경전을 의거하느니 의거하지 않으니 하는 말은 없었다. 오조 홍인선사의 다음에 이르러 신수 일파는 능가경이 달마 이래로 전래하는 소의 경전이라 하여 능가경 4권으로서 소의 근본을 삼아 가지고 종풍을 선양하였다. 혜능선사의 고제(高弟)인 신회(神會)는 금강반야경이 달마 이래로 전래한 것이라 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서 소의 성전을 삼아 가지고 가풍을 천양하였다. 이렇게 일파에서는 능가경으로서 달마의 소전(所傳)이라 하고 타 일파에서는 금강으로서 달마의 소전이라 하여 동시 문자경으로서 소의 근종지(根宗旨)를 삼으려고 노력한 것을 보면 그 때에 아직 달마 선종의 종지가 결정되지 못하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쪽수▶P148-4以上에서 말한 不立文字 等 十二字의 宗旨가 이와 같이 條理있게 完成되기는 支那宋朝에 와서 비로소 된 것이다. 처음 達磨大師 時節에는 그저 面壁觀心으로써 坐禪修行하는 것을 提示할 뿐이요 文字經典을 依據하느니 依據치 아니하느니 하는 말은 없었다. 五祖弘仁禪師의 後에 이르러 神秀一派는 楞伽經이 達磨爾來로 傳來하는 所依經典▶P149-1이라 하야 楞伽經 四卷으로써 所依根本을 삼아갖이고 宗風을 宣揚하였다。惠能禪師의 高弟인 神會는 金剛般若經이 達磨爾來로 傳來한 것이라 하야 金剛般若波羅密經으로써 所依聖典을 삼아갖이고 家風을 闡揚하였다. 이러케 一派에서는 楞伽經으로써 達磨의 所傳이라 하고 他 一派에서는 金剛으로써 達磨의 所傳이라 하야 同是文字經으로써 所依根宗旨를 사으랴고 努力한 것을 보면 그 때에 아즉 達磨禪宗의 宗旨가 決定되지 못하였든 것을 推測할수 있다.
그리고 마조와 석두가 즉심즉불의 원창자(元唱者)이지만 그의 설법 중에
쪽수▶P149-2그러고 馬祖와 石頭가 卽心即佛의 元唱者이지만은 그의 說法 中에

達磨大師 從西天竺國來 躬至中華 傅上乘一心之法 令汝等開悟 又引楞伽經文 以印業生心地

라는 것을 보면 마조 시대까지도 오히려 경전을 인(引)하여 자기 설법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쪽수▶P149-3

達磨大師 從西天竺國來 躬至中華 傅上乘一心之法 令汝等開悟 又引楞伽經文 以印業生心地

라는 것을 보면 마조 시대까지도 오히려 경전을 인(引)하여 자기 설법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쪽수▶P149-4라는 것을 보면 馬祖時代까지도 오히려 經典을 引하야 自己說法을 證明하랴고 하였다.
그러던 것이 마조의 제자 대주 혜해가 법명 율사를 향하여 설(說)하는 말 가운데에
쪽수▶P149-5그러든 것이 馬祖의 弟子 大珠慧海가 法明律師를 向하야 說하는 말 가운대에

經論是文字紙墨 紙墨文字 但是空設於聲教上 建立名 句等法 無非是空

쪽수▶P149-6

經論是文字紙墨 紙墨文字 但是空設於聲教上 建立名 句等法 無非是空

이란 것이 있고 고령 신찬의 설법 중에는
쪽수▶P149-7이란 것이 있고 古靈神贊의 說法 中에는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則如如佛

쪽수▶P149-8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則如如佛

이란 일절이 있다. 그리고 당 무종 때의 사람으로서 유명한 덕산 선감이란 이는 본시 강사(講師)로서 후에 용담선사의 전법을 받아 선사가 된 인데 그의 행장 중에
쪽수▶P149-9이란 一節이 있다. 그러고 唐武宗時의 人으로서 有名한 德山宣鑑이란 이는 本是 講師로서 後에 龍潭禪師의 傳法을 받어 禪師가 된 인데 그의 行狀 中에

聞南方禪席頗盛 師氣不平曰 出家兒 千劫學佛威儀 萬劫學佛細行 不得成佛南方魔子 敢言直指人心 見性成佛我當摟其窟穴 滅其種類 以報佛恩

쪽수▶P149-10

聞南方禪席頗盛 師氣不平曰 出家兒 千劫學佛威儀 萬劫學佛細行 不得成佛南方魔子 敢言直指人心 見性成佛我當摟其窟穴 滅其種類 以報佛恩

이란 말이 있다. 이것을 보면 마조 이후로 덕산 당시 즉 당 무종 시대에까지 이르는 동안에 있어서 선종 승려들이 “不立文字 即心即佛”의 표어를 선전하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종지를 선양할 때에 사용하는 그 어구가 단편적으로서 혹은 즉심즉불이다 혹은 불립문자 이심전심이라 혹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하는 등이 있을 뿐이요 아직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것과 같은 일정한 조직적 성어(成語)로는 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송조(宋朝) 설두 이후에 이르러 비로소 불립문자 등 12자의 종지가 완성된 것이다.
쪽수▶P149-11이란 말이 있다. 이것을 보면 馬祖以後로 德山當時 卽 唐武宗時代에까지 이르는 동안에 있어서 禪宗僧侶들이 『不立文字 即心即佛』의 標語를 宣傳하였든 것을 推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當時에는 아즉 宗旨를 宣揚할 際에 使用하는 그 語句가 短片的으로서 或은 即心即佛이다 或은 不立文字 以心傳心이라 或은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하는 等이 있을 뿐이요 아즉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것과 같은 一定한 組織的 成語로는 되지 못하였다. 그러든▶P150-1 것이 宋朝 雪竇 以後에 이르러 비로소 不立文字 等 十二字의 宗旨가 完成된 것이다.
조선 구산 선문 조사(祖師)들은 달마의 좌선법과 불립문자의 종지를 그대로 전래하여 종풍을 선양하였으므로 사자산 조사 도윤은 능가 금강이 선종의 종지가 아니란 것을 말하였고 성주산 조사 무염은 유설토(有說土)는 즉 시불(是佛)이니 이는 응기문(應機門)이요 무설토(불립문자)는 즉 시선(是禪)이니 이는 정전문(正傳門)이라 하였다. 사굴산 조사 범일은 석가 세존이 설산에서 성도한 후에 그 오도가 만점(滿点)이 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진귀조사(문수의 화신)란 이를 찾아 가서 교외별전의 조사 종지를 받았다고 한다. 중봉 조사 징관이란 이가 고려 광종이 선교 근원을 묻는 것을 대답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쪽수▶P150-2朝鮮 九山禪門祖師들은 達磨의 坐禪法과 不立文字의 宗旨를 그대로 傳來하야다가 宗風을 宣揚하였음으로 師子山 祖師道允은 楞伽 金剛이 禪宗의 宗旨가 아니란 것을 말하였고 聖住山 祖師無染은 有說土는 即是佛니 이는 應機門이요 無說土(不立文字)는 即 是禪이니 이는 正傳門이라 하였다. 闍崛山 祖師梵日은 釋迦世尊이 雪山에서 成道한 後에 그 悟道가 滿点이 되지 못한 것을 깨닫고 眞歸祖師(文殊의 化身)란 이를 차저가서 敎外別傳의 祖師宗旨를 受하였다고 한다. 重峯祖師澄觀이란 이가 高麗 光宗이 禪敎 根源을 묻는 것을 對答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此事 從釋迦以前 禪敎逈別矣 達磨大師 來唐土 親傳慧可而 觀之僧那禪師 不得祖宗法 以愚惑情 將欲破滅祖宗正法 故設方便 謂金剛楞伽 是我心要 付慧可兼傳之

쪽수▶P150-3

此事 從釋迦以前 禪敎逈別矣 達磨大師 來唐土 親傳慧可而 觀之僧那禪師 不得祖宗法 以愚惑情 將欲破滅祖宗正法 故設方便 謂金剛楞伽 是我心要 付慧可兼傳之

이상 몇몇 조사의 설법을 보면 달마의 구산선문이 처음 개립 이후에 있어서는 불립문자의 종지를 선포하여 문자경전을 여지없이 배척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고려 대각 당년에 이르러서는 선교 융화 사상이 일반 선교 학자 문(間)에 들기 시작하여 대각 자신은 화엄교로서 그 조계의 선학(禪學)을 융섭(融攝)하려는 것이 드디어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고, 그 후 보조국사는 조계선으로서 화엄 교리를 융섭하라는 뜻으로 돈오점수를 주장하여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착(著)하였는데, 그 원돈성불론 중에
쪽수▶P150-4以上 몇몇 祖師의 說法을 보면 達磨의 九山禪門이 처음 開立 以後에 있어서는 不立文字의 宗旨를 宣布하야 文字經典을 餘地없이 排斥하였든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든 것이 高麗 大覺當年에 이르러서는 禪敎融和思想이 一般 禪敎學子 間에 들기 시작하야 大覺 自身은 華嚴敎로써 그 曹溪의 禪學을 融攝하랴는 것이 드듸어 天台宗의 開立을 보게되였고, 그 후 普照國師는 曹溪禪으로써 華嚴敎理를 融攝하라는 뜻으로 頓悟漸修를 主張하야 圓頓成佛論을 著하였는데, 그 圓頓成佛論 中에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 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 故不立文字 以心傳心耳

쪽수▶P150-5

非謂華嚴敎門 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 義理分際 未能忘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 故不立文字 以心傳心耳

이란 일절이 있다. 이 글의 대의는 화엄교리 이외에 달마가 별다른 법을 경설(更說)한 것이 아니라 달마는 화엄교리의 실증자요 실행자다. 본래 화엄경을 말한 불타의 본의가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자심 하나를 오득(悟得)하게 하는데 있었건만 중생들이 그것을 각오(覺悟)하지 못하고 문자경전에만 집착하여 문자 그것이 불법인 줄로 인착(認着)하고 자기 자심을 깨달아 보자는 생각조차 아니하므로 부득이(不得己) 달마대사는 문자경전을 배척하는 방법을 세우게 된 것이라는 의미다. 그 다음에 다시
쪽수▶P150-6이란 一節이 있다. 이글의 大意는 華嚴敎理 以外에 達磨가 별다른 法을 更說한 것이 아니라 達磨는 華嚴敎理의 實證者요 實行者다. 本來 華嚴經을 說한 佛陀의 本意가 衆生으로 하여금 自己自心 하나를 悟得케 하는데 있었건만은 衆生들이 그것을 覺悟치 못하고 文字經典에만 執着하야 文字 그것이 佛法인 줄로 認着하고 自己自心을 悟하야 보자는 생각조차 아니함으로 不得己 達磨大師는 文字經典을 排斥하는 方法을 세우게 된 것이라는 意味다. 그 다▶P151-1음에 다시

但初心凡夫會緣 方了自心根本普光明智 非由漸修功至然後悟也 故理智雖現 而多生習氣 念念猶侵 有爲有作色心未殄 是爲十信凡夫解碍處也 然以悟自無明本眞 本神無功大用恒然之法故 自修十信中方便止觀 任運成功 定慧圓明 便名發心住 梵行品之初發心時 便成正覺者當此位也 入十住之後 以普先明智 恒處世間 隨棖普應 敎化衆生 而無染着 悲智漸明 功德漸證 畢意成普賢行圓滿果德 報得無量相好 無量莊嚴

쪽수▶P151-2

但初心凡夫會緣 方了自心根本普光明智 非由漸修功至然後悟也 故理智雖現 而多生習氣 念念猶侵 有爲有作色心未殄 是爲十信凡夫解碍處也 然以悟自無明本眞 本神無功大用恒然之法故 自修十信中方便止觀 任運成功 定慧圓明 便名發心住 梵行品之初發心時 便成正覺者當此位也 入十住之後 以普先明智 恒處世間 隨棖普應 敎化衆生 而無染着 悲智漸明 功德漸證 畢意成普賢行圓滿果德 報得無量相好 無量莊嚴

이란 일절이 있다. 위의 글의 대의는 초심범부가 기연(機緣)을 회우(會遇)하여 견성오도를 하면 그것이 곧 화엄경에서 말한 보광명지(普光明智)를 얻는 것이다. 이 보광명지의 이지(理智)가 나타나는 견성은 비록 하였지만은 무경겁래(無景刧來)로 오면서 적집(積集)하여 둔 무명습기(無明習氣)는 돈제되지 못하였으므로 이것이 침뇌를 하니, 이것이 곧 화엄경에서 말한 십개범부(十個凡夫의 해애처(解碍處)란 것이다. 그러나 무명즉시진여(無明即是眞如)라는 천진자성을 오득(悟得)한 보광명지의 대용세력(大用勢力)을 자(資)하하 자연히 지관(止觀)을 수습하여 정혜가 동명하니 이것이 곧 화엄경에서 말한 십주초위발심주(十住初位發心住)란 것이요, 또한 초발심시(初發心時)에 편성정각(便成正覺)이란 것이다. 발심주후(發心住後)에 항처세간(恒處世間)하여 교화중생(敎化衆生)하여 보현의 광대원행을 닦아 필경에 보현행의 소증(所證)인 원만과덕(圓滿果德)의 무량상호신(無量相好身)을 증득(證得)하게 된다는 것이다.
쪽수▶P151-3이란 一節이 있다. 右文의 大意는 初心凡夫가 機緣을 會遇하야 見性悟道를 하면 그것이 곧 華嚴經에서 說한 普光明智를 得한 것이다. 이 普光明智의 理智가 나타나는 見性은 비록 하였지만은 無景刧來로 오면서 積集하야 둔 無明習氣는 頓除되지 못하였음으로 이것이 侵惱를 하나니, 이것이 곧 華嚴經에서 말한 十個凡夫의 解碍處란 것이다. 그러나 無明即是眞如라는 天眞自性을 悟得한 普光明智의 大用勢力을 資하하 自然히 止觀을 修習하야 定慧가 同明하나니 이것이 곧 華嚴經에서 말한 十住初位發心住란 것이요, 또한 初發心時에 便成正覺이란 것이다. 發心住後에 恒處世間하야 敎化衆生하야 普賢의 廣大願行을 修하야 畢竟에 普賢行의 所證인 圓滿果德의 無量相好身을 證得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대의를 보면 불립문자 직지신심의 선지에 의하여 인인구족(人人具足)의 자기 자성을 돈오한 후에 십신위(十信位)로부터 삼현십지(三賢十地)의 계위차제(階位次第)에 의하여 보현의 광대원행을 점수(漸修)야 자기 자심에 본자구족(本自具足)한 무량상호의 공덕불신을 증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이름한 것이다.
쪽수▶P151-4以上의 大意를 보면 不立文字 直指人心의 禪旨에 依하야 人人具足의 自己自性을 頓悟한 後에 十信位로부터 三賢十地의 階位次第에 依하야 普賢의 廣大願行을 漸修야 自己自心에 本自具足한 無量相好의 功德佛身을 證得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簡單하게 하야 頓悟漸修라고 일홈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돈오점수의 조계 종지가 보조국사 시대로부터 완성된 후에 구산 선문이 차산 피산할 것 없이 다 이것을 사승(사승)하여 조선의 조계 종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쪽수▶P151-5이와 같이 頓悟漸修의 曹溪宗旨가 普照國師時代로부터 完成된 後에 九山禪門이 此山彼山할 것 없이 다 이것을 嗣承하야 朝鮮의 曹溪宗旨를 일우게 된 것이다.
이상 보조국사가 부른 조계 종지의 대의를 다시 한 번 간단히 말하면 고래의 선교양가에서는 너무나 일방으로 치우치는 감이 불무(不無)하여 선각자는 일향 천진자연(天眞自然)을 위주(爲主)하므로 수행을 힘쓰지 않고 교학자는 일향 점수성공(漸修成功)을 위주하므로 견성오도를 믿지 않은 것이다. 보조는 이것을 절충 조화하여 선가 조계종의 본지인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종지에 의하여 자기자신을 돈오하고 교가 화엄경의 교리인 지위차제(地攸次第)의 보현행을 점수하여 성불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돈오점수의 조계 종지다.
쪽수▶P151-6以上 普照國師의 唱한 曹溪宗旨의 大意를 다시 한번 簡單히 말하면 古來의 禪敎兩家에서는 너무나 一方으로 치우치는 感이 不無하야 禪學者는 一向天眞自然을 爲主함으로 修行을 힘쓰지 아니하고 敎學者는 一向 漸修成功을 爲主함으로 見性悟道를 믿지 아니하든 것이다. 普照는▶P152-1 이것을 折沖調和하야 禪家曹溪宗의 本旨인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 佛의 宗旨에 依하야 自己自性을 頓悟하고 敎家華嚴經의 敎理인 地攸次第의 普賢行을 漸修하야 成佛한다는 主張이다. 이것이 頓悟漸修의 曹溪宗旨다.
























본문2: 2.각론









































본문2-1: (1)실상산


실상사는 현재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입유리에 있는 실상사가 그것이다. 신라 제42대 흥덕왕 때에 개산조(개산조) 홍척국사의 개원한 바이다. 개산조 홍척은 홍직이라고도 하는데 시호를 증각선사라 하고 탑호를 응요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입당하여 마조의 고제(高弟) 서당 지장에게 참(參)하여 달마의 불립문자의 선종 심법을 받고 귀국하여 흥덕왕과 당시 상대 등에 있던 선강태자의 귀앙(歸仰)을 얻어 종풍을 대진하였다. 그 문하에 편운 수철 등 수백인의 제자가 출(出)하여 문풍을 유지 상속하였으므로 실상산문의 독립 일파를 성(成)하게 된 것이다. 편운 화상(和尙)은 그의 탑이 현재 실상사의 南便 조계 암구지(庵舊址)에 상존하였는데, 그 탑의 정면에
쪽수▶P152-2實相寺는 今 全羅北道 南原郡 山內面 立有里에 있는 實相寺가 그것이다. 新羅 第四十二代 興德王時에 開山祖洪陟國師의 開宗한 바이다. 開山祖洪陟은 洪直이라고도 하는데 謚號를 證覺禪師라 하고 塔號를 凝寥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入唐하야 馬祖의 高弟西常智藏에게 參하야 達磨의 不立文字의 禪宗心法을 受하고 歸國하야 興德王과 當時 上大 等에 있든 宣康太子의 歸仰을 得하야 宗風을 大振하였다. 그 門下에 片雲 秀徹 等 數百人의 弟子가 出하야 門風을 維持相續하였음으로 實相山門의 獨立一波를 成하게된 것이다. 片雲和尙은 그의 塔이 今 實相寺의 南便曹溪庵舊址에 尙存하였는데, 그 塔의 正面에

創祖洪陟弟子 安峯創祖片雲和尙浮屠 政開十年庚午歲立

쪽수▶P152-3

創祖洪陟弟子 安峯創祖片雲和尙浮屠 政開十年庚午歲立

이라고 명(銘)하였다. 이것을 보면 편운이란 이는 실상사의 창조(創祖)인 홍척국사의 제자인 동시에 안봉사의 개산조이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정개십년(政開十年)이란 연호는 후백제 왕 견훤의 연호로서 신라 효공왕 12년에 귀적하였던 것도 추측할 수 있다.
쪽수▶P152-4이라고 銘하였다. 이것을 보면 片雲이란 이는 實相寺의 創祖인 洪陟國師의 弟子인 同時에 安峯寺의 開山祖이든 것을 分明히 알 수 있다. 그러고 政開十年이란 年號는 後百濟王 甄萱의 年號로서 新羅 孝恭王 十二年에 歸寂하였든 것도 推測할 수 있다.
이 편운과 법형제되는 수철국사는 그의 속연(俗緣)과 법명은 비문의 결자(缺字)로 인하여 알아낼 도리가 없으나, 신라 경문왕 헌강왕의 양조(兩朝) 존숭을 받아 종풍을 선양하다가 진성여왕 6년에 이르러 향년 77세로서 귀적한 것은 분명하다. 귀적한 후 증호(證號)를 수철이라 하고 탑호를 능가보월이라 하여 그 탑비(塔碑)를 실상본산에 칙건(勅建)하면서 일찍이 취임하였던 사명(寺名)을 쓰느라고 비의 액제(額題)에는 “新羅國良州(오늘날 경상북도) 瑩厚寺 故國師秀徹和尙楞伽寶月靈塔碑銘”이라고 하였다.
쪽수▶P152-5이 片雲과 法兄弟되는 秀徹國師는 그의 俗緣과 法名은 碑文의 缺字로 因하야 알아낼 道理가 없으나, 新羅 景文王 憲康王의 兩朝尊崇을 바다 宗風을 宣揚하다가 眞聖女主 六年에 至하야 享年 七十七歲로써 歸寂한 것은 分明하다. 歸寂한 後 證號를 秀徹이라 하고 塔號를 楞伽寶月이라 하야 그 塔碑를 實相本山에 勅建하면서 曾히 就任하였든 寺名을 씨느라고 碑의 額題에는 『新羅國良州(今 慶尙北道) 瑩厚寺 故國師秀徹和尙楞伽寶月靈塔碑銘』이라고 하였다.
수철의 제자로서 음광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가 수철국사의 비명을 지은 것으로 보아 그가 문장으로 고명(高名)하던 것을 알 수 있으나 그의 역사(歷事)는 알 수가 없다.
쪽수▶P152-6秀徹의 弟子로서 飮光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가 透徹▶P153-1國師의 碑銘을 지은 것으로 보아 그가 文章으로 高名하든 것을 알 수 있으나 그의 歷事는 알 수가 없다.
































본문2-2: (2)동리산


동리산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에 있는 봉안사인데 신라 문성왕 때에 혜철국사의 개산조 혜철(惠徹)은 혹은 혜철(慧哲)이라 혹은 혜철(惠徹)이라고도 하는 이로서 속성은 김씨라고 한다. 신라 원성왕 원년에 태어나 부석사에 취하여 득도한 후 헌강왕 5년에 입당하여 역시 서당 지장에게 보알(普謁)하고 그의 인가를 받았다. 문성왕 원년에 귀국하여 동리산에 거주하여 종풍을 선양하다가 경문왕 8년에 귀적하니 적인이라고 시호를 증(贈)하였다. 그 문하에 도선 여대사 등 수백인의 제자가 있어서 현화를 조양함으로부터 동리산의 일파를 성(成)하게 되었다。도선은 혹 도승이라고도 한다. 그의 속성은 김씨요 영암인인데 신라 태종 무열왕의 서손이란 말도 있다. 15세 되던 해에 구례 화엄사에 가서 득도한 후 화엄경을 수업(受業)하다가 문성왕 8년에 동리산 혜철에게 취(就)하여 무설지설(無說之說)과 무법지법(無法之法)을 품수(禀受)하고 광양 백계산 옥룡사에 가서 거주하더니 신라 헌강왕께서 중편(中便)을 보내어 청하여 궁중으로 영입하여 현언묘도(玄言妙道)를 들으시고 군심(君心)이 개오(開悟)하였다고 한다. 그 뒤 다시 옥룡사에 돌아와서 거주하다가 효공왕 2년에 향년 72세로서 귀적하였다. 효공왕께서 요공선사라 증시(贈謚)하시고 증성혜등이라고 탑호를 지어주셨다. 본 비에 의하면 사(師)는 음양오행의 술(術)로서 고려 태조의 탄생할 것을 예언하였다 하여 그것이 기묘한 인연이 되어 고려 조(朝)에서는 대대로 사(師)를 추숭하게 되였다. 현종께서는 대선사를 추증하섰고 숙종께서는 왕사를 가증하시고 인종께서는 국사로 추대하셨고 의종께서는 건비기공(健碑記功)하였다고 한다.
쪽수▶P153-2桐裡山은 全羅南道 谷城郡 竹谷面에 있는 泰安寺인데 新羅 文聖王時에 惠徹國師의 開山祖惠徹은 혹은 慧哲이라 혹은 惠徹이라고도 하는 이로써 俗姓은 金氏라고 한다. 新羅 元聖王 元年에 生하야 浮石寺에 就하야 得度한 後 憲康王 五年에 入唐하야 亦是 西堂智藏의게 普謁하고 그의 印可를 受하였다。文聖王 元年에 歸國하야 桐裡山에 住하야 宗風을 宣揚하다가 景文王 八年에 歸寂하니 寂忍이라고 謚號를 贈하였다. 그 門下에 道詵如大師 等 數百人의 弟子가 있어서 玄化를 助揚함으로부터 桐裡山의 一派를 成하게 되였다。道詵은 或 道乘이라고도 한다. 그의 俗姓은 金氏요 靈岩人인데 新羅 太宗 武烈王 의 庶孫이란 말도 있다. 十五歲 되든 해에 求禮華嚴寺에 가서 得度한 後 華嚴經을 受業하다가 文聖王 八年에 桐裡山 惠徹에게 就하야 無說之說과 無法之法을 禀受하고 光陽 白鷄山 玉龍寺에 가서 住하더니 新羅 憲康王께서 中便를 보내어 請하야다가 宮中으로 迎入하야 玄言妙道를 들으시고 君心이 開悟하였다고 한다. 그 뒤 다시 玉龍寺에 도라와서 住하다가 孝恭王 二年에 享年 七十二歲로서 歸寂하였다. 孝恭王께서 了空禪師라 贈謚하시고 證聖慧燈이라고 塔號를 지어주셨다. 本碑에 依하면 師는 陰陽五行의 術로써 高麗 太祖의 誕生할 것을 預言하였다 하야 그것이 奇妙한 因緣이 되야 高麗朝에서는 代代로 師를 追崇하게 되였다. 顯宗께서는 大禪師를 追贈하섰고 肅宗께서는 王師를 加贈하시고 仁宗께서는 國師로 進封하셨고 毅宗께서는 健碑記功하였다고 한다.
도선의 문하에 기적 등 수백인 제자가 있었는데 통진대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통진이란 것은 시호요 그의 법휘는 경보요 속성은 김씨인데, 영암 구림인이라고 한다. 신라 경문왕 9년에 태어나 부인사에 가서 득도한 후 백계산 옥룡사 도승 즉 도선에게 취(就)하여 사법(嗣法)하였다. 사굴산의 범일과 성주산의 무염 등 대덕고승들을 역방하여 문법한 후 진성여왕 5년에 입당하여 광인선사의 인가를 받아가지고 와서 후백제 왕 견훤의 추앙을 받아 종풍을 대천하더니 말년에 다시 옥룡사에 돌아와 거주하다가 고려 정종 4년에 이르러 향년 80세로서 귀적함으로 시(謚)를 통진이라 탑(塔)을 보운이라 하였다. 이상 혜휘(惠徽) 도선 경보의 삼사(三師)는 모두 화엄종 사찰에서 득도한 이들로서 선종법을 사승하였으므로 후세에 이르러 동리선사와 화엄강사와는 서로 부즉불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게 되었었다.
쪽수▶P153-3道詵의 門下에 琪寂 等 數百人 弟子가 있었는데 洞眞大師도 그 가운대 한 사람이다. 洞眞이란 것은 謚號요 그의 法諱는 慶甫요 俗性은 金氏인데, 靈岩鳩林人이라고한다. 新羅 景文王 九年에 生하야 夫仁寺에 가서 得道한 後 白鷄山 玉龍寺 道乘即道詵에게 就하야 嗣法하였다. 闍崛出의 梵日과 聖住山의 無染 等 大德高僧들을 歷訪하야 問法한 後 眞聖女主 五年에 入唐하야 匡仁禪師의 印可를 받아가▶P154-1지고 와서 後百濟王 甄萱의 推仰을 받아 宗風을 大闡하더니 末年에 다시 玉龍寺에 도라와 住하다가 高麗 定宗 四年에 至하야 享年 八十歲로서 歸寂함으로 謚를 洞眞이라 塔을 寳雲이라 하였다. 以上 惠徽 道詵 慶甫의 三師는 모다 華嚴宗寺刹에서 得度한 이들로서 禪宗法을 嗣承하였음으로 後世에 이르러 桐裡禪寺와 華嚴講寺와는 서로 不卽不離의 關係를 가지고 있게 되였었다.
도선과 법형제로서 여대사란 이가 있었고 여대사의 문하에는 광자선사란 이가 있었다. 광자의 법명은 윤다라 하는 인데 경사인이라 하였다. 신라 경문왕 4년에 태어나 고려 정종 원년에 향년 83세로서 귀적하였다.
쪽수▶P154-2道詵과 法兄弟로서 如大師란 이가 있었고 如大師의 門下에는 廣慈禪師란 이가 있었다. 廣慈의 法名은 允多라 하는 인데 京師人이라 하였다. 新羅 景文王 四年에 生하야 高麗 定宗 元年에 享年 八十三歲로서 歸寂하였다.

































본문2-3: (3)봉림산


봉림사의 구지(舊址)는 오늘날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봉림리에 있으니 신라 효공왕 때에 개산한 바이다. 개산조의 법휘는 현욱인데 혹은 현육이라 또는 현욱(玄旭)이라고도 하였다. 양산사 지증비에 혜목육(惠目育)이란 이가 곧 이 대사님이다. 일찍이 입당하여 마조의 고족장경회운(高足章敬懷惲)에게 가서 심법을 받아가지고 귀국하여 광주에 있는 혜목산 고달원에 거주하여 현풍(玄風)을 대진하다가 경문왕 10년에 귀적하니 원감국사라고 증시하였다. 그의 법자(法子) 진경대사의 세상에 이르러 봉림산사 를 창(創)하고 종풍을 대천함으로부터 봉림산파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쪽수▶P154-3鳳林寺의 舊址는 今 慶尙南道 昌原郡 上南面 鳳林里에 있으니 新羅 孝恭王時에 開山한 바이다. 開山祖의 法諱는 玄昱인데 혹은 玄育이라 또는 玄旭이라고도 하였다. 陽山寺 智證碑에 惠目育이란 이가 곧 이 大師님이다. 일즉이 入唐하야 馬祖의 高足章敬懷惲에게 가서 心法을 받아가지고 歸國하야 廣州에 있는 惠目山 高達院에 住하야 玄風을 大振하다가 景文王 十年에 歸寂하니 圓鑑國師라고 贈謚하였다. 그의 法子 眞鏡大師의 世에 至하야 鳳林山寺 를 創하고 宗風을 大闡함으로부터 鳳林山派의 稱號를 얻게된 것이다.
진경의 법휘는 심희요 속성은 김씨인데 임나(任那) 왕족이다. 신라 문성왕 17년에 태어나 9세 되던 해에 혜목산에 가서 득도하고 경문왕 10년에 원감의 뒤를 이어 진성왕 효공왕 경문왕 삼조(三朝)의 귀의를 받아 종풍을 대양하다가 경명왕 7년에 이르러 향년 70세로서 귀적하니 경명왕께서는 시호를 진경이라 탑명을 보월이라 사(賜)하시고 친히 비명을 제(製)하여 성덕을 기록하였다.
쪽수▶P154-4眞鏡의 法諱는 審希요 俗姓은 金氏인데 任那王族이다. 新羅 文聖王 十七年에 生하야 九歲되든 해에 惠目山에 가서 得度하고 景文王 十年에 圓鑑의 後를 承하야 眞聖王 孝恭王 景文王 三朝의 歸依를 받아 宗風을 大揚하다가 景明王 七年에 이르러 享年 七十歲로서 歸寂하니 景明王께서는 謚號를 眞鏡이라 塔名을 寶月이라 賜하시고 親히 碑銘을 製하야 盛德을 記하였다.
이 진경과 법형제되는 이로서 강원도 양양 땅에 있는 소림사 홍각선사란 이가 있다. 이는 본시 화엄종에서 출산한 이로서 원감대사의 선문에 귀래하여 현풍을 조양한 대사님이거니와, 그의 사적(事蹟)은 잘 알 수 없다.
쪽수▶P154-5이 眞鏡과 法兄弟되는 이로서 江原道 襄陽地에 있는 沙林寺 弘覺禪師란 이가 있다. 이는 本是 華嚴宗에서 入山한 이로서 圓鑑大師의 禪門에 歸來하야 玄風을 助揚한 大師님이어니와, 그의 事蹟은 잘 알 수 없다.
진경대사의 제자 중에 경질 융제 등 오백여 인이 있었는데 경질이란 이는 진경대사가 경명왕의 청에 응하여 신라왕궁에 가서 법응대사라는 사호를 받을 때에 같이 따라 간 팔십문도(八十門徒) 중 한 사람이다.
쪽수▶P154-6眞鏡大師의 弟子 中에 景質 融諦 等 五百餘人이 있었는데 景質이란 이는 眞鏡大師가 景明王의 請에 應하야 新羅▶P155-1王宮에 가서 法膺大師라는 賜號를 받을 때에 같이 따라간 八十門徒 中 한 사람이다.
융제는 진경에게 사법한 후 상주 공산(오늘날 달성군 팔공산) 삼랑사에 거주하여 종풍을 선양하였다. 그 문하에 원종국사란 이가 있다. 원종의 법휘는 찬유요 자는 도광이요 속성은 김씨인데 계림 하남인이다. 경문왕 9년에 태어나 13세 되던 해에 출가하여 22세 되던 해에 구계를 받았다. 진성여왕 5년에 입당하여 석두의 법손 서주 적주산 대동 투자선사(投子禪師)에게 가서 인가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여 고려 태조를 위시하여 혜종 정종 광종의 추앙을 받아 종풍을 선포하다가 광종 9년에 이르러 향년 50세로서 혜목산에서 귀적할새 시(謚)를 원종이라 탑(塔)을 혜진이라고 사호하였다. 그 문하에 양가승(兩街僧) 총 삼중(三重) 대사 흔홍과 동광 행근 〿善 전인 금경 등 오백여인이 있어서 종풍은 조양하였다.
쪽수▶P155-2融諦는 眞鏡에게 嗣法한 後 尙州公山(今 達城郡 八公山) 三郞寺에 住하야 宗風을 宣揚하였다. 그 門下에 圓宗國師란 이가 있다. 圓宗의 法諱는 璨幽요 字는 道光이요 俗姓은 金氏인데 雞林河南人이다. 景文王 九年에 生하야 十三歲 되든 해에 出家하야 二十二歲 되든 해에 具戒를 受하였다. 眞聖女主 五年에 入唐하야 石頭의 法孫舒州寂住山大同投子禪師에게 가서 印可를 받아가지고 歸國하야 高麗 太祖를 爲始하야 惠宗 定宗 光宗의 推仰을 받아 宗風을 宣布하다가 光宗 九年에 至하야 享年 五十歲로써 惠目山에서 歸寂할새 謚를 元宗이라 塔을 惠眞이라고 賜號하였다. 그 門下에 兩街僧摠三重大師昕弘과 同光 幸近 〿善 傳印 金鏡 等 五百餘人이 있어서 宗風은 助揚하였다.
































본문2-4: (4)성주산


성주산은 오늘날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 옛터(舊址)가 이것이니, 신라 문성왕 17년에 개산한 것이다. 개산조는 광종대사 무염이라 하는 이다. 무염은 그의 법명이요 속성은 김씨인데 태종 무열왕의 8세손이다. 애장왕 원년에 탄생하여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투(投)하여 법성선사에게 득도하였다. 부석사 석증대덕(釋證大德)에 취(就)하여 화엄경을 수학하였다. 헌덕왕 13년에 입당하여 마조의 제자 마속보철(麻谷寶徹)에 참(叅)하여 조계 종지를 받고 문성왕 7년에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청에 의하여 남포 오합사에 거주하더니 문성왕께서 사액을 성주사라고 사(賜)하였다. 경문왕과 헌강왕과의 양조국사가 되야 무설토의 정전문법을 열어 종지를 선양하다가 진성여왕 2년에 향년 88세로서 귀적하니 시호를 대랑혜라 하고 탑호를 일월보광이라 하였다. 그 문하에 승랑 보신 순차 심광 등 삼천여인이 있어 종풍을 유지조양함으로부터 성주산문의 일단(一團)을 성(成)하게 된 것이다.
쪽수▶P155-3聖住山은 今 忠淸南道 保寧郡 嵋山面 聖住寺舊址가 이것이니, 新羅 文聖王 十七年에 開山한 것이다. 開山祖는 廣宗大師 無染이라 하는 이다. 無染은 그의 法名이요 俗姓은 金氏인데 太宗 武烈王의 八世孫이다. 哀莊王 元年에 誕生하야 雪岳山 五色石寺에 投하야 法性禪師에게 得度하였다. 浮石寺 釋證大德에 就하야 華嚴經을 受學하였다. 憲德王 十三年에 入唐하야 馬祖의 弟子 麻谷寶徹에 叅하야 曹溪宗旨를 受하고 文聖王 七年에 歸國하야 王子 昕의 請에 依하야 藍浦烏合寺에 住하더니 文聖王께서 寺額을 聖住寺라고 賜하였다. 景文王과 憲康王과의 兩朝國師가 되야 無舌土의 正傳門法을 開하야 宗旨를 宣揚하다가 眞聖女主 二年에 享年 八十八歲로써 歸寂하니 謚號를 大朗 慧라 하고 塔號를 白月葆光이라 하였다. 그 門下에 僧亮 普愼 詢叉 心光 等 二千餘人이 있어 宗風을 維持助揚함으로부터 聖住山門의 一團을 成하게 된 것이다.
심광이란 이는 혹 심광(深光)이라고도 썼다. 신라 진성여왕 때에 덕유산 영각사에 거주하여 성주 종풍을 선양하더니 그 문하에 대종사 한 분이 출세하였으니 이는 곧 충주 개천산 정토사 법경대사다. 법경은 남원군 이씨의 아들로서 법명을 현휘라고 한다. 신라 헌강왕 5년에 태어나 동으로 영각산사에 투(投)하여 출가하고 20세 되던 해에 가야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효공왕 9년에 입당하여 북봉산 도건에게 가서 심법을 받아가지고 경애왕 원년에 귀국하여 고려 태조의 신앙을 받아 종풍을 대진하다가 태조 24년에 향년 63세로서 귀적하니 그 문하에 출신 제자 수백인이 있어 문풍을 유지하였다.
쪽수▶P155-4心光이란 이는 或 深光이라고도 썼다. 新羅 眞聖女主時에 德裕山靈覺寺에 住하야 聖住宗風을 宣揚하더니 그 門下에 大宗師 한 분이 出世하였으니 이는 곧 忠州開天山 淨土寺 法鏡大師다. 法鏡은 南原郡 李氏의 아들로서 法名을 玄暉이라고 한다. 新羅 憲康王 五年에 生하야 東으로 靈▶P156-1覺山寺에 投하야 出家하고 二十歲되든 해에 伽耶山寺에서 具足戒를 受하였다. 孝恭王 九年에 入康하야 北峯山 道乾에게 가서 心法을 바다가지고 景哀王 元年에 歸國하야 高麗 太祖의 信仰을 바다 宗風을 大振하다가 太祖 二十四年에 享年 六十三歲로서 歸寂하니 그 門下에 出身 弟子 數百人이 有하야 門風을 維持하였다.
이 심광선사의 법형제되는 이로서 양평군 보리사에 거주하던 대경대사란 이가 있으니 이의 법명을 여엄이라고 한다. 이 대사는 수미산조 이엄과 사자산의 경유와 가지산의 형미와 한 가지 고려 태조의 사전이었으므로 당시에 해동사무외대사(●●●●●●●)라고 부르던 이다. 사의 속성은 계림 김씨니 9세 되던 해에 출가하여 무량수사 지주(持住) 주종에게 화엄경을 수학하고 숭암산 광종대사 무염에게 서래종지(西來宗旨)를 받았다. 무염이 귀적한 후 법형되는 영각사 심광대사를 의하여 조양하였다. 일찍이 입당하여 운거의 심인을 받아 가지고 효공왕 12년에 귀국하여 고려 태조의 귀의를 얻어 종풍을 대흥하다가 태조 12년에 향년 69세로 귀적하니 시(謚)를 대경이라 탑명을 현기라 증(贈)하였다. 그 문하에 융천 흔정 등 오백여인이 있어 가풍을 유지하였다.
쪽수▶P156-2이 心光禪師의 法兄弟되는 이로서 楊平郡 菩提寺에 住하든 大鏡大師란 이가 있으니 이의 法名을 麗嚴이라고 한다. 이 大師는 須彌山祖 利嚴과 師子山의 慶猷와 迦智山의 逈微와 한 가지 高麗 太祖의 師傳이였으므로 當時에 海東四無畏大師(●●●●●●●)라고 부르든 이다. 師의 俗姓은 雞林 金氏니 九歲되든 해에 出家하야 無量壽寺 持住住宗에게 華嚴經을 受學하고 崇岩山 廣宗大師 無染에게 西來宗旨를 受하였다. 無染이 歸寂한 後 法兄되는 靈覺寺 心光大師를 依하야 助揚하였다. 일즉이 入唐하야 雲居의 心印을 받아가지고 孝恭王 十一年에 歸國하야 高麗 太祖의 歸依를 得하야 宗風을 大興하다가 太祖 十二年에 享年 六十九歲로 歸寂하니 謚를 大鏡이라 塔名을 玄機라 贈하였다. 그 門下에 融闡 昕政 等 五百餘人이 있어 家風을 維持하였다.
이 여엄의 사적과 꼭 같이 무염의 제자로서 법형되는 심광의 교훈을 받은 이가 또 한 분 있으니 이는 곧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라 하는 이다. 사(師)의 법명은 대통이요 속성은 박씨라고 한다. 신라 문성왕 7년에 석린(石麟) 대덕에 취(就)하여 구계를 받고 같은 왕 18년에 입당하여 징허선사의 심인을 받아가지고 경문왕 6년에 귀국하여 월광사에 거주하다가 헌강왕 9년에 향년 68세로서 귀적하였다. 진성왕 때에 이르러 시호를 원랑이라 탑호를 대보선광이라 증(贈)하였다.
쪽수▶P156-3이 麗嚴의 事蹟과 꼭 같이 無染의 弟子로서 法兄되는 心光의 敎訓을 바든 이가 또 한 분 있으니 이는 곧 忠州 月光寺 圓朗禪師라 하는 이다. 師의 法名은 大通이요 俗姓은 朴氏라고 한다. 新羅 文聖王 七年에 石麟大德에 就하야 具戒를 受하고 同 十八年에 入唐하야 澄虛禪師의 心印을 바다가지고 景文王 六年에 歸國하야 月光寺에 住하다가 憲康王 九年에 享年 六十八歲로써 歸寂하였다. 眞聖主時에 至하야 謚號를 圓朗이라 塔號를 大寶禪光이라 贈하였다.

































본문2-5: (5)사자산


이 사자산은 오늘날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에 있는 흥녕사지가 이것이다. 개산조는 철감국사라 하는 인데 그의 제자 징효대사 때에 이르러 사자산파의 교단이 비로소 대성하였다. 철감의 법명은 도윤인데 혹은 도균이라 또는 도운이라고 한다. 양산사 지증비에 쌍봉운이라 한 것은 곧 이 개산조 도운이 능주 쌍봉사에 거주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師)의 속성은 박씨인데 한주 구림인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고씨니 이광이 만실함을 꿈꾸고 그대로 유신(有娠)하여 신라 원성왕 14년에 탄생하여 18세 되던 해에 황해도 귀신사에 투(投)하여 득도하고 헌덕왕 17년에 입당하여 남천보에게 법을 받아가지고 문성왕 9년에 귀국하여 쌍봉사에 거주하여 종풍을 선양하다가 경문왕 8년에 귀적하였다. 오색의 상광이 사(師)의 입으로부터 나와 하늘에 산만하는 단상(端祥)이 있었다 하여 상기만천(霜氣漫天) 철감국사라고 하였다.
쪽수▶P156-4이 師子山은 今 江原道 寧越郡 水周面에 있는 興寧寺址가 이것이다. 開山祖는 晢鑑國師라 하는 인데 그의 弟子 澄曉大師時에 이르러 師子山派의 敎團이 비로소 大成하였다. 晢鑑의 法名은 道允인데 或은 道均이라 또는 道雲이라고 한다. 陽山寺 智證碑에 雙峯雲이라 한 것은 곧 이 開山祖 道雲이 綾州雙峯寺에 住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師▶P157-1의 俗姓은 朴氏인데 漢州鳩林人이라고 한다. 母는 高氏니 異光이 滿室함을 夢하고 仍히 有娠하야 新羅 元聖王 十四年에 誕生하야 十八歲 되든 해에 黃海道 鬼神寺에 投하야 得度하고 憲德王十七年에 入唐하야 南泉普에게 을 받아가지고 文聖王九年에 入唐하야 南泉普願에게 法을 받아가지고 文聖王 九年에 歸國하야 雙峯寺에 住하야 宗風을 宣揚하다가 景文王 八年에 歸寂하였다. 五色의 霜光이 師의 口로부터 出하야 天에 散漫하는 端祥이 있었다 하야 霜氣漫天晢鑑國師라고 하였다.
이 산의 제2조인 징효선사는 법휘를 절중이라 한다. 이도 당초에 화엄경 대덕 오관산사 진전에 투(投)하여 득도한 이로서 차산문(此山門)에 귀래하였다. 철감으로부터 수법한 후 일장일발(一杖一鉢)로 정처 없이 행각하던 도중에 전국 통위공의 주청으로 송경 곡산사 주지에 추천되었으나 사(師)는 원래부터 번란한 도회 생활을 원하지 아니함으로 진산(晋山)하지 아니하고 말었다. 그 후에 전주 사자산 석운선사의 청으로 인하여 이 사자산에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내주(來住)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 헌강왕께서 봉필을 날리어 청하는 동시에 사자산 흥녕원을 중사성에 예속하여 주셨다. 그러나 사(師)의 발정(發程)을 보기 전에 홀연히 헌강왕께서 승하하셨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정강왕과 진성왕께서 선왕의 유지를 받아 사(師)의 도화를 조양하고자 하였으나 때는 마침 난세이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분령군의 동림사에 이주하다가 효공왕 3년에 이르러 향년 75세로서 귀적하고 그 문하에 여종 홍가 이정 지공 등 일천여인이 있어 유법을 조양함으로부터 사자산문의 명성이 반도에 대진하였다.
쪽수▶P157-2此山의 第二祖인 澄曉禪師는 法諱를 折中이라 한다. 이도 當初에 華嚴宗 大德五冠山寺 珍傳에 投하야 得度한 이로서 此山門에 歸來하였다. 晢鑑으로부터 受法한 後 一杖一鉢로 定處 없이 行脚하든 道中에 前國統威公의 奏請으로 松京谷山寺住持에 推薦되였으나 師는 元來부터 煩亂한 都會生活을 願치 아니함으로 晋山치 아니하고 말었다. 그 後에 前住師子山釋雲禪師의 請으로 因하야 이 師子山에 來住하게 되였다. 來住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야 新羅 憲康王께서 鳳筆을 날리어 請하는 同時에 師子山 興寧院을 中使省에 隸屬하야 주셨다. 그러나 師의 發程을 보기 前에 忽然히 憲康王께서 昇遐하시었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定康王과 眞聖主께서 先王의 遺志를 받어 師의 道化를 助揚코저 하였으나 때는 마침 亂世임으로 뜻을 일우지 못하고 말었다. 그 後 芬嶺郡의 桐林寺에 移住하다가 孝恭王 三年에 이르러 享年 七十五歲로서 歸寂하고 그 門下에 如宗 弘可 理靖 智空 等 一千餘人이 있어 遺法을 助揚함으로부터 師子山門의 名聲이 半島에 大振하였다.
차산파(此山派) 명장으로서 개성 용암산 오룡사에 법경대사란 이가 있으니 이는 형미 여엄 이엄과 한 가지 고려 태조의 사전인데, 당시에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는 별명을 받던 이다. 그의 법명은 경유요 속성은 장씨로서 남양인이라고 한다. 신라 경문왕 11년에 태어나 18세 되던 해에 통도사 영종율사에 취(就)하여 구계를 받았다. 후에 입당하여 운거도응의 심법을 받아가지고 효공왕 11년에 귀국하여 나주의 어느 산속에서 후백제 견훤의 난을 피하고 있던 중에 고려 태조의 내방을 얻은 후로 종풍을 선양하다가 려(麗) 태조 등극한 4년에 향년 51세로서 귀적함으로 시(謚)를 법경이라 탑(塔)을 보조혜광이라 사호하였다.
쪽수▶P157-3此山派 名匠으로서 開城 勇岩山 五龍寺에 法鏡大師란 이가 있으니 이는 逈微 麗嚴 利嚴과 한 가지 高麗 太祖의 師傳인데, 當時에 海東四無畏大師라는 別名을 받든 이다. 그의 法名은 慶猷요 俗姓은 張氏로서 南陽人이라고 한다. 新羅 景文王 十一年에 生하야 十八歲되든 해에 通度寺 靈宗律師에 就하야 具戒를 受하였다. 後에 入唐하여 雲居道膺의 心法을 바다가지고 孝恭王 十一年에 歸國하야 羅州의 어느 山谷에서 後百濟 甄萱의 亂을 避하고 있든 中에 高麗 太祖의 來訪을 得한 後로 宗風을 宣揚하다가 麗太祖登極한 四年에 享年 五十一歲로서 歸寂함으로 謚를 法鏡이라 塔을 普照慧光이라 賜號하였다.

































본문2-6: (6)수미산


이 수미산은 오늘날 황해도 해주군 수양산 내에 있는 수미산 광조사지가 이것이다. 이 산은 구산 중에서 최후에 개산된 산으로서 고려 태조 15년에 개산한 것이다. 개산조 이엄대사는 려(麗) 태조의 왕사로서 여엄 경유 형미와 한가지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는 칭호를 받던 이다. 이엄이란 것은 사(師)의 법명이요 진철은 그의 시호다. 속성은 김씨인데 신라 경문왕 10년에 탄생하였다. 12세 되던 해에 가야 갑사 덕랑대사에게 가서 득도하였다. 진성여왕 9년에 입당하여 동산양개(洞山良介)의 고제(高弟) 운거 도응에게 가서 6년 동안 불사노고(不辭勞苦)하고 법을 받았다. 효공왕 14년에 귀국하여 영동지 영각산에 잠주(暫住)하더니 고려 태조께서 시중환설(侍中懽說)과 태상박수문(太相朴守文)을 보내어 사나내원(舍那內院)에로 영입하여 우의의 예를 행하였다. 태조 15년에 하교하여 해주의 북 수미산 남에 광조사를 만들고 사(師)에게 주지하기를 청함으로 사(師)가 문도를 거느리고 진산(晋山)하여 동산의 종풍을 대천하였다. 태조 19년에 향년 67세로 귀적하니 보월승공이라고 탑호를 사(賜)하셨다. 그 문하에 현조 등 제자들이 있어 가풍을 유지 상전하여 수미산의 일파를 성(成)하였다.
쪽수▶P158-1이 須彌山은 今 黃海道 海州郡 首陽山 內에 있는 須彌山 廣照寺址가 이것이다. 이 山은 九山 中에서 最後에 開山된 山으로서 高麗 太祖 十五年에 開山한 것이다. 開山祖 利嚴大師는 麗太祖의 王師로서 麗嚴 慶猷 逈微와 한가지 海東四無畏大師라는 稱號를 받든 이다. 利嚴이란 것은 師의 法名이요 眞徹은 그의 謚號다. 俗姓은 金氏인데 新羅 景文王 十年에 誕生하였다. 十二歲 되든 해에 伽耶 岬寺 德良大師에게 가서 得度하였다. 眞聖女主 九年에 入唐하야 洞山良介의 高弟 雲居 道膺에게 가서 六年 동안 不辭勞苦하고 法을 받았다. 孝恭王 十四年에 歸國하야 永同地靈覺山에 暫住하더니 高麗 太祖께서 侍中懽說과 太相朴守文을 보내어 舍那內院에로 迎入하야 樞衣의 禮를 行하였다. 太祖 十五年에 下敎하야 海州의 北須彌山南에 廣照寺를 創하고 師에게 住持하기를 請함으로 師가 門徒를 領하고 晋山하야 洞山의 宗風을 大闡하였다. 太祖 十九年에 享年 六十七歲로 歸寂하니 寶月乘空이라고 塔號를 賜하셨다. 그 門下에 玄照 等 弟子들이 있어 家風을 維持相傳하야 須彌山의 一派를 成하였다.
이 수미산파는 후세에 법손 중 굴지할 만한 고승의 출세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또는 고승은 많이 출세하였지만 그들의 기적(奇蹟)을 전하여 줄 기록이 연멸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되 개산조 이엄 이후의 소식은 알 수가 없다. 고종 때의 문호 이규보 문집 중에 “談禪會 須彌山 𠫵學 等 謁祖師眞文”이 등재된 것을 보면 여하튼지 그의 법손이 고려 말까지 문풍을 유지하였던 것은 확실하다. 이 다 담선회란 것은 선종 대운을 보이던 전년에 구산문파에서 각기 자기 산문에 소속한 사찰 중 어느 사찰을 택정하여 담선법회를 열고 자기 산파 승려 중에 참학(대선입격하기 전 학생 신분에 있는 자를 참학이라 함) 승(僧)을 회집하여 놓고 대선에 응할 준비를 하는 법회다. 이 법회 중에는 자기 산파의 개산조 진영을 참알(𠫵謁)하는 의식이 거행된다. 고종 때에 이 수미산 참학들이 회집하여 담선법회를 거행하였으니 그때에 수미산파의 법승이 상당히 많아서 문풍을 유지하였던 것을 짐적(斟的)할 수 있다.
쪽수▶P158-2이 須彌山派는 後世에 法孫 中 掘指할 만한 高僧의 出世가 없어서 그러함인지 또는 高僧은 만히 出世하였지만은 그들의 奇蹟을 傳하야 줄 記錄이 煙滅되야 그러함인지는 알 수 없으되 開山祖 利嚴 以後의 消息은 알 수가 없다. 高宗時의 文豪 李奎報 文集 中에 『談禪會 須彌山 𠫵學 等 謁祖師眞文』이 登載된 것을 보면 如何튼지 그의 法孫이 高麗 末까지 門風을 維持하였든 것은 確實하다. 이 다 談禪會란 것은 禪宗 大運을 보이든 前年에 九山門派에서 각기 自己 山門에 所屬한 寺刹 中 어느 寺刹을 擇定하야 談禪法會를 開하고 自己 山派 僧侶 中에 𠫵學(大選入格하기 前 學生 身分에 있는 者를 𠫵學이라 함) 僧을 會集하야 놓고 大選에 應할 準備를 하는 法會다. 이 法會 中에는 自己 山波의 開山祖 眞影을 𠫵謁하는 儀式이 擧行된다. 高宗時에 이 須彌山 𠫵學들이 會集하야 談禪法會를 擧行하였으니 그때에 須彌山派의 法侶가 相當히 많아서 門風을 維持하였든 것을 斟的할 수 있다.


































본문2-7: (7)의양산


지산(址山)은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의양산 봉암사가 이것이다. 신라 헌강왕 7년에 도헌국사의 개산한 바이다. 도헌은 개산조의 법명이요 속성은 김씨인데 경사인이라고 한다. 시호는 지증국사라 하고 탑호는 매조라고 하는데 그의 비명은 신라 문인 최치원의 지은 바인데, 양산지증비라 하는 것은 곧 이 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師)가 헌덕왕 16년에 탄생하여 헌강왕 8년에 귀적하였으니 향년은 59세다. 처음 화엄종의 대덕인 부석사 범체에게 가서 득도하고 다음 혜은선사에 취(就)하여 법을 받았다. 후에 단도 침충의 시지(施地)인 의양산에 봉암사를 창(創)하고 종풍을 선양하였으니 이것이 양산문파의 근본 도장이다. 도헌이 귀적 후에 성견 민휴 양부 계미 등 수백인의 제자들이 있어 현화를 조양함으로부터 의양산의 일파를 성(成)하게된 것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말할 것은 도헌의 득법 인록(因綠)이다. 최치원이 찬(撰)한바 지증본비에 의하면 신라 명랑이란 이가 입당하여 사조 도신으로부터 선법을 받아가지고 와서 이것을 신행 준범 혜은의 삼세(三世)를 거처서 도헌에게 전하였다고 명기하였다. 또한 도헌의 법손되는 정진국사비에 의하면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가 입당하여 창주 신감으로부터 심법을 받아가지고 와서 이것을 도헌에게 전하여 양부선사를 경(經)하여 정진에게 전지(傳至)한 것이라고 역시 명기하였다. 사조 도신은 조계 혜능의 이상 조사(祖師)이므로 만일 지증본비에 쓰인 대로 의하면 양산문파가 조계종 구산에 참예(𠫵預)할 수도 없게 되고 정진비에 기록한 바와 같이 되어서 비로소 양산문파가 혜능의 법손으로 조계종 구산에 참예(𠫵列)하게 된다. 추상컨대 고려 나옹이 평산처림(平山處林)으로부터도 법을 받았고 또한 사천지공(西天指空)으로부터서도 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도헌도 혜은에게서도 법을 받았고 혜조로부터서도 법을 받았던 관계로서 이와 같이 양비(兩碑)에 서로 달리 말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도헌이 쌍계 진감 혜조로부터 선법을 받아가지고 양산문파의 개종조가 되었다 하면 쌍계 진감도 역시 양산파의 조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쪽수▶P159-1址山은 慶尙北道 聞慶郡 加恩面 義陽山 鳯岩寺가 이것이다. 新羅 憲康王 七年에 道憲國師의 開山한 바이다. 道憲은 開山祖의 法名이요 俗姓은 金氏인데 京師人이라고 한다. 謚號는 智證國師라 하고 塔號는 寐照라고 하는데 그의 碑銘은 新羅 文人 崔致遠의 지은 바인데, 陽山智證碑라 하는 것은 곧 이 碑를 가르키는 것이다. 師가 憲德王 十六年에 誕生하야 憲康王 八年에 歸寂하였으니 享年은 五十九歲다. 처음 華嚴宗의 大德인 浮石寺 梵體에게 가서 得度하고 다음 慧隱禪師에 就하야 法을 받었다. 後에 壇徒沈忠의 施地인 義陽山에 鳯岩寺를 創하고 宗風을 宣揚하였으니 이것이 陽山門派의 根本道場이다. 道憲이 歸寂 後에 性蠲 敏休 揚孚 繼微 等 數百人의 弟子들이 있어 玄化를 助揚함으로부터 義陽山의 一派를 成하게된 것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言할 것은 道憲의 得法因綠이다. 崔致遠의 撰한바 智證本碑에 依하면 新羅 明朗이란 이가 入唐하야 四祖道信으로부터 禪法을 바다가지고 와서 이것을 信行 遵範 慧隱의 三世를 거처서 道憲에게 傳하였다고 明記하였다. 또한 道憲의 法孫되는 靜眞國師碑에 依하면 智異山 雙溪寺 眞鑑禪師가 入唐하야 滄州 神鑑으로부터 心法을 바다가지고 와서 이것을 道憲에게 傳하야 楊孚禪師를 經하야 靜眞에게 傳至한 것이라고 亦是 明記하였다. 四祖 道信은 曹溪 惠能의 以上 祖師임으로 萬一 智證本碑에 씬대로 依하면 陽山門派가 曹溪宗 九山에 𠫵預할 수도 없게 되고 靜眞碑에 記錄한 바와 같이 되야서 비로소 陽山門派가 惠能의 法孫으로 曹溪宗 九山에 𠫵列하게 된다. 推想컨대 高麗 懶翁이 平山處林으로부터도 法을 受하였고 또한 西天指空으로부터서도 法을 受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道憲도 慧隱에게서도 法을 받았고 慧照로부터서도 法을 받았든 關係로서 이와 같이 兩碑에 서로 달리 말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道憲이 雙溪 眞鑑 慧照로부터 禪法을 바다가지고 陽山門派의 開宗祖가 되였다 하면 雙溪 眞鑑도 亦是 陽山派의 祖師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감의 법명은 혜조요 속성은 최씨인데 전주 금마인이라고 하였다. 혜공왕 10년에 태어나 32세 되는 해에 유생(儒生)의 몸으로서 세공사(歳貢使)를 따라서 입당하여 마조 도일의 제자 창주 신감에게 득도하고 드디어 그의 심법을 받아가지고 흥덕왕 5년에 귀국하여 흥덕왕의 귀의를 받아 상주 장백사(오늘날 상주 남장사)에 거주하다가 후에 하동 쌍계사로 이주하여 종풍을 대진하였다. 문성왕 12년에 향년 77세로서 귀적함으로 시(謚)를 진감선사라 하고 탑호를 대공영탑이라 하였다.
쪽수▶P159-2眞鑑의 法名은 慧照요 俗姓은 崔氏인데 全州 金馬人이▶P160-1라고 하였다. 惠恭王 十年에 生하야 三十二歲 되는 해에 儒生의 몸으로서 歳貢使를 따라서 入唐하야 馬祖道 一의 弟子 滄州 神鑑에게 得度하고 드디어 그의 心法을 받아가지고 興德王 五年에 歸國하야 興德王의 歸依를 得하야 尙州 長栢寺(今 尙州 南長寺)에 住하다가 後에 河東 雙溪寺에로 移住하야 宗風을 大振하였다. 文聖王 十二年에 享年 七十七歲로써 歸寂함으로 謚를 眞鑑禪師라 하고 塔號를 大空靈塔이라 하였다.
도헌의 상형 제자 양부선사의 문하에 정진대사라 하는 이는 법명을 긍양이라 하고 속성은 왕씨라고 하였다. 본래 공주인으로서 헌강왕 4년에 서혈원 여해라는 대덕에게 출가한 후 계룡산 보원정사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효공왕 4년에 입당하여 곡산 도연에게 참례(𠫵禮)하여 법을 받아 가지고 경문왕 원년에 귀국하여 강주 백암사에 거주하였다. 백암사는 서혈원 고사(故師) 양부의 개산한 바이다. 경애왕으로부터 봉종대사라는 법호를 받았다. 경순왕 8년에 봉암사 주지로 진산(晋山)하여 가람을 중수(重修)하고 종풍을 진흥하였다. 고려 광종 때에 이르러 사(師)를 사나원으로 청입(請人)하여 두고 왕께서 군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의양대사를 뵈오니 진시화신보살이다. 내 어찌 사자(師資)의 예를 행하지 아니하랴” 하시고 양가 도승 총 법흥 대덕과 내의영기인(內義令幾人)을 명(命)하여 자마납(紫磨衲) 가사(袈裟) 일령(一領)을 사(賜)한 후에 설공대사라는 법호를 증(贈)하시고 구의의 예를 행하였다. 광종 7년에 이르러 산문종사를 상족형초에 부촉(付嘱)하고 향년 79세로서 귀적하니 시(謚)를 정진이라 탑(塔)을 원오지탑이라 추증하였다.
쪽수▶P160-2道憲의 上兄弟子 楊孚禪師의 門下에 靜眞大師라 하는 이는 法名을 兢讓이라 하고 俗姓은 王氏라고 하였다. 本來 公州人으로서 憲康王 四年에 西穴院 如解라는 大德에게 出家한 後 鷄龍山 普 願精舍에 가서 具足戒를 受하였다. 孝恭王 四年에 入唐하야 谷山道緣에게 𠫵禮하야 法을 받아 가지고 景文王 元年에 歸國하야 康州 伯岩寺에 住하였다. 伯岩寺는 西穴院 故師 楊孚의 開山한 바이다. 景哀王으로부터 奉宗大師라는 法號를 受하였다. 敬順王 八年에 鳯岩寺 住持로 晋山하야 伽 藍을 重修하고 宗風을 振興하였다. 高麗 光宗時에 至하야 師를 舍那院으로 請人하야 두고 王께서 群臣에게 말삼하시기를 『今에 義陽大師를 뵈오니 眞是化身菩薩이다. 내 어찌 師資의 禮를 行치 아니하랴』 하시고 兩街都僧摠法興大德과 內義令幾人을 命하야 紫磨衲袈裟一領을 賜한 後에 證空大師라는 法號를 贈하시고 摳衣의 禮를 行하였다. 光宗 七年에 이르러 山門宗事를 上足逈超에 付嘱하고 享年 七十九歲로써 歸寂하니 謚를 靜眞이라 塔을 圓悟之塔이라 追贈하였다.
이 정진대사가 귀적한 후 약 이백여년을 경(經)하여 명종 때(時)에 이르러 이 양산에 동순선사란 이가 있였고 그의 상족제자로서 청하 보련사 원진국사란 이가 있었다. 원진의 법명은 승형이요 속성은 신씨인데 산낙산양인이라고 한다. 부모를 조실하고 숙부의 슬하에 생장하였다. 12세 되던 해에 의양산에서 득도하고 익년에 금산사 계단(戒壇)에 가서 구계를 받았다(受하였다). 명종 20년에 선종대선에 입격한 후에 조계산 보조(普照)에게 가서 법을 받았다(受하였다). 희종 4년에 칙명을 받아 금강산 유점사 주지로 진산(晋山)하였다. 이것을 보면 유점사도 의양산파에 속한 사찰이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 원년에 보경사 주지를 임명하는 동시에 대선사 법계에 승진하였다. 고종 7년에 태상왕께서 제4 왕자를 사(師)에게 부탁하여 낙발(落髪)하게 하였으니 이는 곧 후일 승적을 굴산에로 전하여 조계산 진명의 제자가 된 경지왕사란 이다. 고종 8년에 공산 염불암에서 향년 51세로서 귀적할 때 원진국사라 증시하였다.
쪽수▶P160-3이 靜眞大師가 歸寂한 後 約 二百餘年을 經하야 明宗時에 이르러 이 陽山에 洞純禪師란 이가 있였고 그의 上足弟子로서 淸河 寳鍊寺 圓眞國師란 이가 있었다. 圓眞의 法名은 承逈이요 俗姓은 申氏인데 上洛山陽人이라고 한다. 父母를 早失하고 叔父의 膝下에 生長하였다. 十二歲 되든 해에 義陽山에서 得度하고 翌年에 金山寺 戒壇에 가서 具戒를 受하였다. 明宗 二十年에 禪宗大選에 入格한 後에 曹溪山 普照에게 가서 法을 受하였다. 熙宗 四年에 勅命을 받아 金剛山 楡岾寺 住持로 晋山하였다. 이것을 보면 楡岾寺도 義陽山派에 屬한 寺刹이든 것을 알 수 있다. 高宗 元年에 寳鏡寺 住持를 任命하는 同時에 大禪師 法階에▶P161-1 昇進하였다. 高宗 七年에 太上王께서 第 四王子를 師에게 付托하야 落髪케 하였으니 이는 곧 後日 僧籍을 崛山에로 轉하야 曹溪山 眞明의 弟子가 된 鏡智王師란 이다. 高宗 八年에 公山 念佛庵에서 享年 五十一歲로써 歸寂할새 圓眞國師라 贈謚하였다.

































본문2-8: (8)사굴산


이 사굴산은 약칭하여 굴산이라 하고 또는 고산이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그 옛터가 오늘날 강릉군 구정면 계산리에 있다. 신라 문성왕 때에 출세한 범일국사의 개산한 바로서 구산 중에서 문풍이 제일 번창한 산문이다.
쪽수▶P161-2이 闍崛山은 略稱하야 崛山이라 하고 또는 孤山이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그 舊址가 今 江陵郡 邱井面 鷄山里에 있다. 新羅 文聖王時에 出世한 梵日國師의 開山한 바로서 九山 中에서 門風이 第一 繁昌한 山門이다.
개산조 범일은 품일이라고도 쓰는데 양산사 지증비에는 “孤山曰”이라고 하였다. 속성은 김씨인데 구림인이라고 하였다. 시호를 통효대사라 하고 탑호를 연휘라고 한다. 헌덕왕 2년 5월 10일에 탄생하였는데 불(佛)의 33상(相) 중에 있는 나계(螺髻)와 정주(頂珠)와의 특이한 상이 탄생하던 처음부터 있었다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 출가한 후 입당하여 염관 제안에게 가서 법을 받아가지고 당나라에 있는 명산 승경을 유력(遊歷)하는 도중에서 마침 당 무종의 사태난을 봉착하여 무수한 곤경도 당하였던 것이다. 문성왕 8년에 귀국하여 굴산사에 구주하여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의 3조(三朝)의 존숭을 받아 종풍을 대진하다가 진성여왕 3년에 이르러 향년 80세로서 귀적하였다. 그 문하에 개청 행적 등 소위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쪽수▶P161-3開山祖 梵日은 品日이라고도 쓰는데 陽山寺 智證碑에는 『孤山曰』이라고 하였다. 俗姓은 金氏인데 鳩林人이라고 하였다. 謚號를 通曉大師라 하고 塔號를 延徽라고 한다. 憲德王 二年 五月 十日에 誕生하였는데 佛의 三十二相 中에 있는 螺髻와 頂珠와의 特異한 相이 誕生하든 처음부터 있었다고 한다. 十五歲 되든 해에 出家한 後 入唐하야 鹽官齊安에게 가서 法을 바다가지고 唐地에 있는 名山勝境을 遊歷하는 途中에서 마침 唐 武宗의 沙汰亂을 逢着하야 無數한 困境도 當하였든 것이다. 文聖王 八年에 歸國하야 崛山寺에 久住하야 景文王 憲康王 定康王의 三朝의 尊崇을 받아 宗風을 大振하다가 眞聖女主 三年에 至하야 享年 八十歲로써 歸寂하였다. 그 門下에 開淸 行寂 等 所謂 名聲이 世上에 들어났다.
개청의 속성은 계림 김씨인데 신라 문성왕 16년에 태어나 화엄사 정행이란 이에게 득도한 후 화엄경을 학습하다가 오대산에 가서 굴산 통효대사를 참례하고 그의 법을 사승하였다. 경애왕의 추앙을 얻어 강릉 보현산에 구주하여 굴산의 문풍을 대진하다가 고려 태조 22년에 이르러 귀적함으로 시(謚)를 낭원이라 탑(塔)을 오진이라 증호하였다. 그 문하에 신경 총정 월정 환언 혜여 명연 홍림 등 수백인이 있어 문풍을 유지상전하였다.
쪽수▶P161-4開淸의 俗姓은 雞林 金氏인데 新羅 文聖王 十六年에 生하야 華嚴寺 正行이란 이에게 得度한 後 華嚴經을 學習하다가 五臺山에 가서 崛山 通曉大師를 𠫵禮하고 그의 法을 嗣承하였다. 景哀王의 推仰을 得하야 江陵 普賢山에 久住하야 崛山의 門風을 大振하다가 高麗 太祖 二十三年에 至하야 歸寂함으로 謚를 朗圓이라 塔을 悟眞이라 贈號하였다. 그 門下에 神鏡 聰靜 越晶 奐言 惠如 明然 弘琳 等 數百人이 有하야 門風을 維持相傳하였다.
행적의 속성은 최씨다. 흥덕왕 7년에 태어나 경문왕 10년에 입당하여 석상 경제에게 취(就)하여 법을 받고 굴지에 재류한 지 16년만인 헌강왕 10년에 귀국하여 범일의 뒤를 이어 법왕이 되어 가풍을 조양하다가 신덕왕 4년에 이르러 향년 85세로서 귀적하므로 시(謚)를 낭공이라 탑(塔)을 백월서운이라 하였다. 그 문하에 신종 주해 임엄 등 오백여인이 있어 문풍을 유지하였다. 사(師)의 귀적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신 경명왕께서는 곧 시호와 탑호를 내리시는 동시에 최인곤을 명하여 비명까지 찬(撰)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때 마침 국가에 다사 하던 때이므로 비(碑)와 탑(塔)을 수립하지 못하고 오다가 고려 광종 5년 7월에 이르러 사(師)의 상족제자 양경이 이것을 봉화지 태자산에 수립하였으니 이것이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김생 필(筆) 백월비라고 하는 것이다.
쪽수▶P161-5行寂의 俗姓은 崔氏다. 興德王 七年에 生하야 景文王 十年에 入唐하야 石霜慶諸에게 就하야 法을 받고 唐地에 在留한지 十六年만인 憲康王 十年에 歸國하야 梵日의▶P162-1 後를 이어 法王이 되야 家風을 助揚하다가 神德王 四年에 至하야 享年 八十五歲로써 歸寂함으로 謚을 朗空이라 塔을 白月栖雲이라 하였다. 그 門下에 信宗 周解 林儼 等 五百餘人이 有하야 門風을 維持하였다. 師의 歸寂하였다는 消息을 들으신 景明王께서는 곧 謚號와 塔號를 내리시는 同時에 崔仁滾을 命하야 碑銘까지 撰케하였든 것이다. 그때 마침 國家에 多事하든 때임으로 碑와 塔을 樹立하지 못하고 오다가 高麗 光宗 五年 七月에 이르러 師의 上足弟子 讓景이 이것을 奉化地 太子山에 樹立하였으니 이것이 곧 世上에 널리 알리어지게 된 金生 筆 白月碑라고 하는 것이다.
양경선사의 속성은 계림 김씨인데 신라 헌강왕의 외숙으로서 충효와 청렴으로 향간에 명성에 높았던 김애원의 손이다. 낭공의 뒤를 이어 건성원에 구주하여 종풍을 선양하였다. 이 양경이 태자산에 백월비를 세운 뒤 약 160여년을 경(經)하여 예종 때에 이르러 이 굴산문에서 유명한 종장 한 분이 출세하였으니 이는 곧 광명사에 거주하던 대선사 혜조국사라 하는 이다. 혜조는 혹은 혜조(慧昭)라고도 하는 이로서 법상종의 고승인 죽산 칠장사 혜조와는 본래부터 딴 사람이다. 이 대선사 혜조는 일찍 입송(入宋)하여 정인이라는 선사에게 가서 법을 받아가지고 귀국하여 예종의 신앙을 얻어 종풍을 선포하다가 말년에 순천 계족산에 가서 종노지계(終老之計)로서 정혜사를 만들고 거주하다가 귀적하였으므로 정혜사의 개산조라고 한다. 그의 문하에 지인 탄연 영보 이자현 등 수백인의 명장이 출하여 굴산의 문풍을 선전하였다.
쪽수▶P162-2讓景禪師의 俗姓은 雞林 金氏인데 新羅 憲康王의 外叔으로서 忠孝와 淸廉으로 鄕間에 名聲에 높았든 金藹元의 孫이다. 朗空의 後를 이어 乾聖院에 久住하야 宗風을 宣揚하였다. 이 讓景이 太子山에 白月碑를 立한 後 約 一百六十餘年을 經하야 睿宗時에 至하야 이 崛山門에서 有名한 宗匠 한 분이 出世하였으니 이는 곧 廣明寺에 住하든 大禪師 慧炤國師라 하는 이다. 慧炤는 或은 慧昭라고도 하는 이로서 法相宗의 高僧인 竹山 七長寺 慧炤와는 本來부터 딴 사람이다. 이 大禪師 慧炤는 일즉 入宋하야 淨因이라는 禪師에게 가서 法을 받아가지고 歸國하야 睿宗의 信仰을 得하야 宗風을 宣布하다가 末年에 順天 雞足山에 가서 終老之計로써 定惠寺를 創하고 住하다가 歸寂하였음으로 定惠寺의 開山祖라고 한다. 그의 門下에 之印 坦然 英甫 李資玄 等 數百人의 名匠이 出하야 崛山의 門風을 宣傳하였다.
지인이란 이는 고려 왕족으로서 존호를 광지선사라 하는 인데 숙종 7년에 태어나 9세 되는 해에 혜조에 취(就)하여 득도하고 15세 되던 해에 대선에 입격한 후 의종 2년에 대선사의 법계를 받고 군위 법주사 주지로 취임한 후 의종 12년에 이르러 향년 67세로서 귀적하였다.
쪽수▶P162-3之印이란 이는 高麗 王族으로서 尊號를 廣智禪師라 하는 인데 肅宗 七年에 生하야 九歲 되는 해에 慧炤에 就하야 得度하고 十五歲 되든 해에 大選에 入格한 後 毅宗 二年에 大禪師의 法階를 受하고 軍威 法住寺 住持로 就任한 後 毅宗 十二年에 이르러 享年 五十七歲로써 歸寂하였다.
탄연의 속성은 손씨이니 8, 9세 되던 때로부터 벌서 문장과 명필로서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천리경(千里駉)이라는 별명을 들었었다. 15, 6세 되던 해에 숙종께서 사(師)의 명성을 들으시고 궁중에 하여 두고 소입(召入)하여 두고 태자(즉예)를 시종하게 한 일도 있었다. 19세 되던 해에 궁중을 나와 경북산 안적사에 투(投)하여 득도한 후 곧 광명사에 가서 혜조를 참례하고 법을 받았다. 숙종 9년에 대선에 입격되야 의림사 개돈사 선암사 천화사 보리사 보제사 영원사 광명사에 역주하여 교화를 선포하고 최후로 진주 단속사 주지에 취(就)하여 있다가 의종 12년에 향년 90세로서 귀적함으로 시(謚)를 대감국사라 하였다.
쪽수▶P162-4坦然의 俗姓은 孫氏이니 八九歲 되든 때로부터 벌서 文章과 名筆로써 世人의 耳目을 놀내게 하였음으로 千里駉라는 別名을 들었었다. 十五, 六歲 되든 해에 肅宗께서 師의 名聲을 들으시고 宮中에 하야 두고 召入하야 두고 太子(卽▶P163-1睿)를 侍從케한 일도 있었다. 十九歲 되든 해에 宮中을 나와 京北山 安寂寺에 投하야 得度한 後 곧 廣明寺에 가서 慧炤를 𠫵禮하고 法을 받었다. 肅宗 九年에 大選에 入格되야 義林寺 開頓寺 禪岩寺 天和寺 菩提寺 普濟寺 瑩原寺 廣明寺에 歷住하야 敎化를 宣布하고 最後로 晋州 斷俗寺 住持에 就하야 있다가 毅宗 十二年에 享年 九十歲로써 歸寂함으로 謚를 大鑑國師라 하였다.
예천 용문사의 중(中) 창조 조응이란 이가 있으니 이는 즉 혜조의 문도인 영보의 제자다. 이는 해주인으로서 최정헌공의 8세손이라고 한다. 40세 되던 해에 득도하고 인종 5년에 조계 대선에 입격한 후 대선사에까지 승진되었다. 이는 7대 사찰을 역주하면서 혹은 가람을 중수(重修)하고 혹은 담선법회를 개설하고 혹은 흉년을 당하여 궁민을 구제하고 혹은 만승제를 설(設)하여 적난을 식정(息靜)시키는 등 그의 사업은 매거(枚擧)하기 불능할 만큼 많았다. 그의 제자로서 용문사 주지 자엄이란 이가 있어서 그의 유법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쪽수▶P163-2醴泉 龍門寺의 中 創祖 祖膺이란 이가 있으니 이는 卽 慧炤의 門徒인 英甫의 弟子다. 이는 海州人으로서 崔貞獻公의 八世孫이라고 한다. 十四歲 되든 해에 得度하고 仁宗 五年에 曹溪 大選에 人格한 後 大禪師에까지 昇進되였다. 이는 七大寺刹을 歷住하면서 或은 伽藍을 重修하고 或은 談禪法會를 開設하고 或은 凶年을 當하야 窮民을 救濟하고 或은 萬僧齊를 設하야 賊難을 息靜시키는 等 그의 事業은 枚擧하기 不能할 만치 많었다. 그의 弟子로써 龍門寺 住持 資嚴이란 이가 있어서 그의 遺法을 維持하였다고 한다.
이 혜조국사를 중심으로 한 일파가 지나간 후 곧 이어서 대종사 한 분이 출세하였으니 이는 즉 송광사 불일 보조라고 하는 이다. 이는 굴산 일문에만 광명을 비추었을 뿐 아니라. 실로 조계구산의 중흥조라는 추대를 받은 이다. 보조의 법휘는 지눌이요 속성은 정씨인데 황해도 서흥인으로서 별호를 목우자라고 한다. 의종 12년에 태어나 희종 6년에 귀국하였으니 향년이 52세다. 8세 되던 해에 범일의 원손(遠孫) 종휘선사에게 가서 득도하고 명종 12년에 보제사 담선법회에 부(赴)하였을 때에 동학 십여인으로 더불어 습정균혜(習定均慧)를 목표로 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하여서 조도를 재흥시키기를 약속하였었다. 같은 왕 20년 봄에 팔공산 거조암에서 결사문을 제(製)하여 정혜사를 창설하였다가 신종 3년에 이르러 정혜사를 송광산 길상사로 이치(移置)함과 공히 길상사를 정혜사라고 개칭하였다.
쪽수▶P163-3이 慧炤國師를 中心으로 한 一派가 지나간 後 곧 이어서 大宗師 한 분이 出世하였으니 이는 卽 松廣寺 佛日普照라고 하는 이다. 이는 崛山 一門에만 光明을 비추었을 뿐 아니라. 實로 曹溪九山의 中興祖라는 推戴를 받은 이다. 普照의 法諱는 知訥이요 俗姓은 鄭氏인데 黃海道 瑞興人으로서 別號를 牧牛子라고 한다. 毅宗 十二年에 生하야 熙宗 六年에 歸國하였으니 享年이 五十二歲다. 八歲되든 해에 梵日의 遠孫 宗暉禪師에게 가서 得度하고 明宗 十二年에 普濟寺 談禪法會에 赴하였을 때에 同學 十餘人으로 더부러 習定均慧를 目標로 한 定慧結社를 하여서 祖道를 再興시키기를 約束하였었다. 同 二十年 春에 八公山 居祖庵에서 結社文을 製하야 定慧社를 創設하였다가 神宗 三年에 이르러 定慧社를 松廣山 吉祥寺로 移置함과 共히 吉祥寺를 定慧社라고 改稱하였다.
희종 원년에 이르러 중창공사가 준공됨으로 120일의 경찬법회를 열었다. 이때에 조명을 봉하여 송광산 정혜사를 조계산 수선사라고 개칭하여 조계종 굴산파 제2 본산으로 되었었다. 보조의 귀적 후에 제자 진각국사란 이가 있어서 문풍을 유지 계속하였다.
쪽수▶P163-4熙宗 元年에 至하야 重創空事가 竣功됨으로 百二十日의 慶讃法會를 開하였다. 이때에 朝命을 奉하야 松廣山 定慧社를 曹溪山 修禪社라고 改稱하야 曹溪宗 崛山派 第二本山으로 되였었다. 普照의 歸寂 後에 弟子 眞覺國師란 이가 있어서 門風을 維持繼續하였다.
진각의 법명은 법명은 혜심이요 자호(自號)하기를 무의자라고 하는 이다. 속성은 최씨인데 화순인이라 한다. 명종 8년에 태어나 25세 되던 해에 조계산 보조에게 가서 득도하였다. 보조 귀적 후에 조륵(詔勒)을 봉하여 조계산 제2세 주지로 진산(晋山)하였다. 후에 강종께서 사(師)의 도덕을 흠양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만수가사 일령(一領)과 자마납가사 일령(一領) 다향보병 등 도구를 사(賜)하시고 설법을 청함으로 심요라는 저서를 상(上)하여 사은하였다고 한다. 고종 즉위 후에 선사와 대선사를 연(連)하여 제수(制授)하였는데 선시(選試)를 경(經)하지 않고 법계를 제투하기는 사(師)의 대(代)에 처음 일이라고 한다. 고종 21년에 향년 57세로서 귀적하거늘 시(謚)를 진각, 탑(塔)을 원조라고 제증하였다. 그의 문하에 청진 진명 원오 삼인의 고제(高弟)가 있어 차제(次第)로 주지하여 보조문풍을 선양하였고 이 밖에 다시 정혜사 주지 충경왕사란 이도 있었다.
쪽수▶P164-1眞覺의 法名은 法名은 慧諶이요 自號하기를 無衣子라고 하는 이다. 俗姓은 崔氏인데 和順人이라 한다. 明宗 八年에 生하야 二十五歲 되든 해에 曹溪山 普照에게 가서 得度하였다. 普照 歸寂 後에 詔勒을 奉하야 曺溪山 第二世住持로 晋山하였다. 後에 康宗께서 師의 道德을 欽仰하야 中使를 보내어 滿繍袈裟 一領과 紫磨衲袈裟 一領 茶香寶瓶 等 道具를 賜하시고 說法을 請함으로 心要라는 著書를 上하야 謝恩하였다고 한다. 高宗 卽位 後에 禪師와 大禪師를 連하야 制授하였는데 選試를 經치 않고 法階를 制投하기는 師의 代에 처음 일이라고 한다. 高宗 二十一年에 享年 五十七歲로써 歸寂하거늘 謚를 眞覺, 塔을 圓炤라고 制贈하였다. 그의 門下에 淸眞 眞明 圓悟 三人의 高弟가 있어 次第로 住持하야 普照門風을 宣揚하였고 이 밖에 다시 定慧寺 住持 沖鏡王師란 이도 있었다.
청진은 그의 시호요 법휘는 몽여라고 한다. 처음에 혜심의 뒤를 이어 정혜사 주지에 취(就)하였고 고종 21년에 조계산 제3세 주지로 진산(晋山)하였다가 같은 왕 39년에 귀적하였다.
쪽수▶P164-2淸眞은 그의 謚號요 法諱는 夢如라고 한다. 처음에 慧諶의 後를 이어 定慧寺 住持에 就하였고 高宗 二十一年에 曺溪山 第三世 住持로 晋山하였다가 同 三十九年에 歸寂하였다.
진명의 법휘는 혼원이요 속성은 이씨인데 수안인이라고 한다. 13세에 편산 장로 종헌에 취(就)하여 득도하고 그 다음 진각에게 취(就)하여 법을 받았다. 당시 재상 진양공 최우가 강화경에 선원사를 만들고 옮겨오기를 청하므로 고종 32년에 납자(衲子) 이백여인을 이끌고 진산(晋山)하였다. 이 때에 고종께서는 대선사에 승진시키었다. 고종 39년에 청진을 사승하여 조계산 제4세 주지로 진산(晋山)하였다가 고종 43년에 이르러 선원사 주천영을 불러서 산문종사를 전하고 자유자재한 운수객(雲水客)이 되었다. 같은 왕 46년에 왕사가 되어 단속사 작지(作持)에 취(就)하였고 원종 원년에 와룡사 주지로 진산(晋山)하였다가 같은 왕 11년에 향년 81세로서 귀적하였다. 그 문하에 단속사 주지 경지왕사란 이가 있으니 이는 곧 희종의 왕자요 원종의 외숙으로서 처음 양산파의 고승 원진국사에게 가서 득도하여 승적을 의양산에 두었더니 진명을 사사하기 위하여 조령(朝令)으로서 그 승적을 굴산에로 이전하여 단속사 주지에 취(就)하여 항상 진명을 내근(來勤)하였다고 한다.
쪽수▶P164-3眞明의 法諱는 混元이요 俗姓은 李氏인데 遂安人이라고 한다. 十三歲에 蝙山 長老 宗軒에 就하야 得度하고 그 다음 眞覺에게 就하야 法을 受하였다 當時 宰相晉陽公 崔堣가 江華京에 禪源寺를 創하고 來住하기를 請함으로 高宗 三十二年에 衲子 二百餘人을 率하고 晋山하였다. 이 때에 高宗께서는 大禪師에 昇進시키었다. 高宗 三十九에 淸眞을 嗣承하야 曹溪山 第四世 住持로 晋山하였다가 高宗 四十三年에 至하야 禪源社 主天英을 불러서 山門宗事를 傳하고 自由自在한 雲水客이 되였다. 同 四十六年에 王師가 되야 斷俗寺 作持에 就하였고 元宗 元年에 臥龍寺 住持로 晋山하였다가 同 十一年에 享年 八十一歲로써 歸寂하였다. 그 門下에 斷俗寺 住持 鏡智王師란 이가 있으니 이는 곧 熙宗의 王子요 元宗의 外叔으로서 처음 陽山派의 高僧 圓眞國師에게 가서 得度하야 僧籍을 義陽山에 두었더니 眞明을 師事하기 僞하야 朝令으로써 그 僧籍을 崛山에로 移轉하야 斷俗寺 住持에 就하야 恒常 眞明을 來勤하였다고 한다.
원오는 그 시호 자진원오를 약칭한 이름이다. 그의 법명은 천영이요 속성은 양씨인데 고종 2년에 태어나 15세 되던 해에 진각에게 득도하고 22세 되던 해에 선종대선에 입격하였다. 청진과 진명의 훈도를 받은 후로부터 도예가 널리 알려짐으로 진양공 최우의 경중한바 되어 삼중대사를 주수(奏授)하고 36세 되던 해에 고종께서 선원사 주지를 명하였고 43세 되던 해에 직명의 추양(推讓)을 받아 조계산 제5세 주지로 임명하는 동시에 대선사의 법계를 제수하였다. 고종께서 사(師)를 금중(禁中)으로 청입(請入)하여 어수(御手)로 친히 찬효를 공(供)하면서 우대를 가한 후 중사 한영을 명하여 호행(護行)하게 하였다. 9월 19일에 조계산에 들어가 30년 간 종풍을 대양하다가 충렬왕 12년 2월에 고흥군 불대사의 청을 받아 갔더니 그 절 주지를 불러 말하기를 “노한은 귀(歸)하고자 하니 여등은 호주(好住)하여라”하고 지필(紙筆)을 가져오라 하여 충렬왕께 상(上)하는 사직서를 써놓고 그만 귀적하였으니 향년은 72세라고 한다.
쪽수▶P164-4圓悟는 그 諡號 慈眞圓悟를 略稱한 이름이다. 그의 法▶P165-1名은 天英이요 俗姓은 梁氏인데 高宗 二年에 生하야 十五歲 되든 해에 眞覺에게 得度하고 二十二歲 되든 해에 禪宗大選에 入格하였다. 淸眞과 眞明의 訓導를 받은 後로부터 道譽가 널리 알려짐으로 晋陽公 崔瑀의 敬重한바 되야 三重大師를 奏授하고 三十六歲 되든 해에 高宗께서 禪源寺 住持를 命하였고 四十二歲 되든 해에 直明의 推讓을 바다 曺溪山 第五世 住持로 任命하는 同時에 大禪師의 法階를 除授하얐다. 高宗께서 師를 禁中으로 請入하야 御手로 親히 饌餚를 供하면서 優待를 加한 後 中使韓瑛을 命하야 護行케 하얏다. 九月十九日에 曹溪山에 入하야 三十年間 宗風을 大揚하다가 忠烈王 十二年 二月에 高興郡 佛臺寺의 請을 바다 갓더니 그 절 住持를 불러 말하기를 『老漢은 歸코저 하니 汝等은 好住하여라』하고 紙筆을 가저오라 하야 忠烈王께 上하는 辭職書를 써노코 그만 歸寂하얐으니 享年은 七十二歲라고 한다.
충렬왕께서는 이것을 들으시고 통사사 인강취를 보내어 조간(吊間)하는 동시에 시(謚)를 자진원오라 하고 탑을 정조라고 사(賜)하였다. 그 문하에 원감 혜감 각엄 등 여러 국사들이 출(出)하여 차제로 조계산 문풍을 유지 상계하였다.
쪽수▶P165-2忠烈王께서는 이것을 드르시고 通事舍 人姜就를 보내어 吊間하는 同時에 謚을 慈眞圓悟라 하고 塔을 靜照라고 賜하얐다. 그 門下에 圓鑑 慧監 覺嚴 等 여러 國師들이 出하야 次第로 曺溪山 門風을 維持相繼하였다.
원감의 법명은 법환이니 자호 왈(曰) 복암이라고 하며 속성은 위씨, 정안인이라고 한다. 사(師)는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었다. 19세 되는 해에 장원급제한 후 일본에 봉사(奉使)하여 국미(國美)를 이방에 나타낸 일까지 있었다. 원오국사를 선원사로 찾아가 득도한 후 책장남유(策杖南遊)하여 제방 고덕들을 참방(𠫵訪)함으로부터 도예는 높아졌다. 충렬왕 12년에 원오의 뒤를 승(承)하여 조계산 제6세 주지로 진산(晋山)하여 조계산 문풍을 발양하였다. 원국황제가 사(師)의 도명을 듣고 견사청입하여 빈주의 예로써 우대하고 금난가사와 벽수장삼과 자불자 일쌍(一雙)을 사(賜)한 일도 있었다. 충렬왕 18년 8월에 향년 76세로서 귀적하매 원감국사 보명지탑이라고 사(賜)하였다.
쪽수▶P165-3圓鑑의 法名은 法桓이니 自號 曰宓庵이라고 하며 俗姓은 魏氏, 定安人이라고 한다. 師는 어려서부터 才名이 있었고, 文章으로 名聲이 높았었다. 十九歲 되는 해에 壯元及第한 後 日本에 奉使하야 國美를 異邦에 나타낸 일까지 있었다. 圓悟國社를 禪源社로 차저가 得度한 後 策杖南遊하야 諸方高德들을 𠫵訪함으로부터 道譽는 높아젔다. 忠烈王 十二年에 圓悟의 後를 承하야 曹溪山 第六世 住持로 晋山하야 曹溪山 門風을 發揚하얐다. 元國皇帝가 師의 道名을 聞하고 遣使請入하야 賓主의 禮로써 優待하고 金蘭袈裟와 碧繍長衫과 自拂子一雙을 賜한 일도 있었다. 忠烈王 十八年 八月에 享年 六十七歲로써 歸寂하매 圓監國師 寳明之塔이라고 賜하였다.
혜람은 조계산 제10세 주지로서 휘는 만항이요 속성은 박씨인데 공주인이라고 한다. 충숙왕 6년에 향년 71세로서 귀적할새 혜감국사 광조지탑이라고 시호와 탑호를 증(贈)하였다. 각엄은 조계산 제13세 주지요 공민왕의 왕사로서 법명은 복구요 고성인인데 판밀직 우상시 이존비의 아들이라고 한다. 10세 되는 해에 원오에 투(投)하여 출가하고 대선사 도영과 국사 자각의 지도를 받았다. 불갑사와 월남사를 역주하고 최후로 백암산(오늘날 백양산) 정토사에 이주하다가 공민왕 4年에 향년 86세로서 귀적함으로 시(謚)를 각진이라 탑(塔)을 자운이라 하였고 각엄존자란 것은 생후에 공민왕께서 주신 법호다. 이 각엄존자가 주지 대수(代數)로는 조계 13세에 해당하지만은 전등 대수로는 보조의 4세 법손이다.
쪽수▶P165-4慧藍은 曺溪山 第十世 住持로서 諱는 萬恒이요 俗姓은 朴氏인데 公州人이라고 한다. 忠肅王 六年에 享年 七十一歲로써 歸寂할새 慧監國師 廣照之塔이라고 諡號와 塔號를 贈하얐다. 覺嚴은 曹溪山 第十三歲 住持요 恭愍王의 王師로서 法名은 復丘요 固城人인데 判密直 右常侍 李尊庇▶P166-1의 아들이라고 한다. 十歲 되는 해에 圓悟에 投하야 出家하고 大禪師 道英과 國師慈覺의 指導를 바닸다. 佛岬寺와 月南寺를 歷住하고 最後로 白岩山 (今 白羊山) 淨土寺에 移住하다가 恭愍王 四年에 享年 八十六歲로써 歸寂함으로 謚를 覺眞이라 塔을 慈雲이라 하였고 覺嚴尊者란 것은 生前에 恭愍王께서 주신 法號다. 이 覺嚴尊者가 住持 代數로는 曺溪 十三世에 該當하지만은 傳燈 代數로는 普照의 四世法孫이다.
각엄존자의 문인으로서 남원 승련사 주지 대선사 연온이란 이가 있다. 연온의 속성은 류씨인데 문정공경의 증손이요 각엄존자의 생질이다. 사선에 규(赳)하여 갑과에 입격한 후 명산 대찰을 역주하여 도예가 고현한 이다. 현금 조선 승려의 선조인 구곡 각운의 외숙이며 또한 득도사이다. 구곡선사가 사법사 전등으로는 태고 보우 화상의 손이지만은 득도사 즉 그 당시의 정사승 전등으로는 조계산 보조의 6세법손이다.
쪽수▶P166-2覺嚴尊者의 門人으로서 南原 勝蓮寺 住持 大禪師 衍昷이란 이가 있다. 衍昷의 俗姓은 柳氏인데 文正公璥의 曾孫이요 覺嚴尊者의 甥侄이다. 四選에 赳하야 甲科에 入格한 後 名山大刹을 歷住하야 道譽가 高顯한 이다. 現今 朝鮮 僧侶의 先祖인 龜谷覺雲의 外叔이며 또한 得度師이다. 龜谷禪師가 嗣法師 傳燈으로는 太古普 愚和尙의 孫이지만은 得度師 即 그 當時의 正師僧 傳燈으로는 曹溪山 普照의 六世法孫이다.
이 각엄존자와 동시인으로서 보광사 주지 대선사 원명국사이란 이가 있다. 사(師)의 법명은 충감이요 속성은 김씨인데 선원사 자오국사에게 투(投)하여 득도하고 19세 되는 해에 구산대선에 합격하였다. 후에 선원사 주지에 취(就)하여 15년 동안 조계산 문풍을 대진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세상의 영화(榮華)를 사절하고 산수간에서 소요자재한 생활을 취해보려고 했더니 당시 고려 임금과 재상장향이 상서 전충용을 시켜 보광사에 만류하게 하였다. 사방으로부터 회집한 제자가 삼백여명이나 되는 바람에 거처의 섬착(陝窄)을 느끼게 되자 양광도 안렴사 최현우가 그 관속들로 더불어 설계(設計)하여 오백여간의 건물을 증축하여 드리고 사(師)의 백씨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 영인(永仁)과 신씨대광평양군(伸氏大匡平陽郡) 영순(永純)은 노비 100구와 토지 100경을 시(施)하여 상주에 충용하게 하였다. 공민왕 7년에 향년 65세로서 귀적하였다. 그 문하에 선원사 주지 굉연이란 이가 있다.
쪽수▶P166-3이 覺嚴尊者와 同時人으로서 普光寺 住持 大禪師 圓明國師이란 이가 있다. 師의 法名은 冲監이요 俗姓은 金氏인데 禪源寺 慈悟國師의게 投하야 得度하고 十九歲 되는 해에 九山大選에 合格하았다. 後에 禪源寺 住持에 就하야 十五年 동안 曹溪山 門風을 大振하였다. 末年에 이르러 世上의 榮華를 謝絕하고 山水間에서 逍遙自在한 生活를 取해보랴고 했드니 當時 高麗 님금과 宰相張沆이 尙書田冲用을 식키어 普光寺에 挽留케 하았다。四方으로부터 會集한 弟子가 三百餘名이나 되는 바람에 居處의 陝窄을 感하게 되자 楊廣道 按廉使 崔玄佑가 그 官屬들로 더부러 設計하야 五百餘間의 建物을 增築하야 되리고 師의 伯氏 判典客寺事永仁과 伸氏大匡平陽郡永純은 奴婢 百口와 土地 百頃을 施하야 常住에 充用케 하았다. 恭愍王 七年에 享年 六十五歲로써 歸寂하았다. 그 門下에 禪源寺 住持 宏演이란 이가 있다.
이 원명국사보다 좀 뒤져서 공민왕의 왕사로서 우임 3년에 귀적한 나옹 화상이란 이가 있으니 이는 지금도 누구든지 잘 아는 바이다. 조계산 보조와 전등 상 관계가 있는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지 굴산 범일의 법손인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사(師)의 법명은 법명이요 속성은 아씨인데 법호가 나옹이다. 15세 되는 해에 인우(隣友)의 요망하는 것을 보고 세간의 무상한 것을 느껴 공덕산 요연에게 가서 득도하였다 한다. 29세에 원나라에 가서 첫째로 사천지공이란 이를 참견하고 그 다음 평산처림이란 이를 진알하았다. 셋째로 복룡산 천암이란 이를 만나보고 많은 법어를 득문(得聞)하였다. 37세 때에 원제의 조칙을 봉하여 연경 광제사에서 개당하였다. 이때에 원 황제는 금난가사와 폐백을 사(賜)하시고 황태자는 금난가사와 상아불자를 증(贈)하여 우대하였다. 39세 되는 공민왕 7년에 귀국하여 오대산에 가서 거주(住)하더니 공민왕께서는 내사를 보내어 궁중으로 영인하여 심요법을 들으시고 만수가사와 수정불자를 사(賜)하시고 해주 신광사에 거주하게(住케) 하였다. 공민왕 20년에는 사(師)를 광명사로 소인하여 오교양종 제산수자(諸山袖子)를 회집하고 선교 대선과를 보이는데 사(師)로 하여금 주맹(主盟)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공부선(功夫選)이란 것이다. 익년에 왕사로 봉하고 대 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라는 법호를 주시고 조계산 송광사에 거주하게 하였다. 그 후에 양주 회암사로 이주하게 하였더니 간관이 주달하기를 회암사는 도성에서 불원한 사찰이므로 사녀들의 내왕이 주야로 연락(聯絡)하여 경업(慶業)할 지경이오니 왕사를 원지로 이주하게 하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밀양군 자씨산 영원사 주지로 칙명한 바 되어야 우왕 2년 5월에 회암사를 떠나서 영원사에 향하는 도중에서 병으로 인하여 여주 신륵사에 들어가 잠주하다가 15일에 이르러 향년 57세로서 귀적하였다. 시(謚)를 선각왕사라 하였다. 그 문하에 송광사 주지 환암 이수와 회암사 주지 국일부 대선사 승모와 대선사 지연 등 수백인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66-4이 圓明國師보다 좀 뒤저서 恭愍王의 王師로서 禑壬 三年에 歸寂한 懶翁 和尙이란 이가 있으니 이는 지금도 누구든지 잘 아는 바이다. 曺溪山 普照와 傳燈上 關係가 있는 與否는 알 수 없으나 如何튼지 崛山 梵日의 法孫인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師의 法名은 惠勤이요 俗姓은 牙氏인데▶P167-1 法號가 懶翁이다. 十五歲 되는 해에 隣友의 夭亡하는 것을 보고 世間의 無常한 것을 感하야 功德山 了然에게 가서 得度하였다 한다. 二十九歲에 元나라에 가서 첫째로 四天指空이란 이를 𠫵見하고 그 다음 平山處林이란 이를 晋謁하았다. 셋재로 伏龍山 千岩이란 이를 맛나보고 만흔 法語를 得聞하았다. 三十七歲 時에 元帝의 詔勅을 奉하야 燕京 廣濟寺에서 開堂하았다. 이때에 元皇帝는 金蘭袈裟와 幣帛을 賜하시고 皇太子는 金欄袈裟와 象牙拂子를 贈하야 優待하았다. 三十九歲 되는 恭愍王 七年에 歸國하야 五臺山에 가서 住하더니 恭愍王께서는 內使를 보내어 宮中으로 迎人하야 心要法을 드르시고 滿繡袈裟와 水精拂子를 賜하시고 海州 神光寺에 住케 하았다. 恭愍王 二十年에는 師를 廣明寺로 召人하야 五敎兩宗 諸山袖子를 會集하고 禪敎 大選科를 보이는데 師로 하여금 主盟케 하았으니 이것이 所謂 功夫選이란 것이다. 翌年에 王師로 封하고 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勒修本智重興祖道福國祐世普濟尊者라는 法號를 주시고 曹溪山 松廣寺에 住케 하았다. 그 後에 楊州 繪岩寺로 移住케 하얏더니 諫官이 奏達하기를 檜岩寺는 都城에서 不遠한 寺刹임으로 士女들의 來往이 晝夜로 聯絡하야 慶業할 地境이오니 王師를 遠地로 移住케 하시라고 하얐다. 그럼으로 密陽郡 慈氏山 榮原寺 住持로 勅命한바되야 禑王 二年 五月에 檜岩寺를 떠나서 榮原寺에 向하는 途中에서 病으로 因하야 驪州 神勒寺에 入하야 暫住하다가 十五日에 至하야 享年 五十七歲로써 歸寂하얐다. 謚을 禪覺王師라 하얐다. 그 門下에 松廣寺 住持 幻庵 泥脩와 檜岩寺 住持 國一部 大禪師 昇某와 大禪師 智淵 等 數百人이 있었든 것이다.
이 나옹을 중심으로 한 굴산파의 승려들이 고려말 조선초에 상당히 많았던 모양이나 금일에 있어서는 그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태조의 왕사로서 무학 자초란 이도 이 나옹에게 법을 받았고 의발(衣鉢)까지 받은 일이 있으나 무학이 굴산파의 승려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여기에서 그의 행상을 서술할 수 없기에 그만두기로 하고 따라서 그의 제자로서 조선불교에서 유명한 함허 득통이라 하는 내력도 다음에서 서술하지 않고 그만두기로 한다.
쪽수▶P167-2이 懶翁을 中心으로 한 崛山派의 僧侶들이 麗末鮮初에 相當히 만었든 모양이나 今日에 있어서는 그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러고 李太祖의 王師로서 無學 自超란 이도 이 懶翁에게 法을 받았고 衣鉢까지 받은 일이 있으나 無學이 崛山派의 僧侶인지 아닌지는 아즉 確實한 根據가 없음으로 여기에서 그의 行狀을 叙述할 수 없기에 그만두기로 하고 따라서 그의 弟子로서 朝鮮佛敎에서 有名한 涵虛 得通이라 하는 來歷도 此에서 叙述하지 안코 그만두기로 한다.
























본문2-9: (9)가지산


가지산은 오늘날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란 절이다. 개산조는 여러 번 되풀이한 바와 같이 최초 선법 전래자인 도의선사다. 도의는 혹 도의(道義)라고도 쓰고 속성은 왕씨인데 북한산인이라고 한다. 그 부친의 꿈에는 백홍이 입실함을 느끼고 그 모친의 꿈에는 성승(聖僧)과 동좌하는 것을 얻어가지고 드디어 유신(有娠)하여 39개월만에 분만을 얻었다 한다. 후에 출가하여 법명을 명적이라고 하였다. 신라 선덕왕 5년에 입당하여 광주 보단사에서 구계를 받고 조계산에 이르러 육조 영상을 예알(禮謁)하려 할 즈음에 영당문선이 홀연 자개하는 이서(異瑞)를 느꼈다고 한다. 그 다음 서당지장에 참례하여 달마의 서래종지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여 선법을 고국에 선포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안심 입명을 얻게 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신라 인민은 이것을 믿지 아니하므로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에 숨어 불출산문 40년이란 이야깃거리를 남기어 두고 귀적하였다. 그의 부법제자 염거선사를 거쳐서 보조체증선사에 이르렀다.
쪽수▶P168-1迦智山은 今 全羅南道 長興都 有治面에 있는 迦智山 寳林寺란 절이다. 開山祖는 여러 번 되푸리한 바와 같이 最初 禪法 傳來者인 道儀禪師다. 道儀는 或 道義라고도 쓰고 俗姓은 王氏인데 北漢山人이라고 한다. 그父親의 夢에는 白虹이 入室함을 感하고 그 母親의 夢에는 聖僧과 同坐하는 것을 얻어가지고 드디어 有娠하야 三十九個月만에 分娩을 得하였다 한다. 後에 出家하야 法名을 明寂이라고 하였다. 新羅 宣德王 五年에 入唐하야 廣州 寳壇寺에서 具戒를 受하고 曺溪山에 至하야 六祖影像을 禮謁하랴 할 지음에 影堂門扇이 忽然自開하는 異瑞를 感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西堂智藏에 𠫵禮하야 達磨의 西來宗旨를 받아가지고 歸國하야 禪法을 故國에 宣布하야 人民으로 하여금 安心立命을 얻게 하랴고 하였으나 當時 新羅 人民은 이것을 信치 아니함으로 江原道 雪岳山 陳田寺에 隱하야 不出山門 四十年이란 이야기꺼리를 남기어두고 歸寂하였다. 그의 傅法弟子 廉居禪師를 거처서 普照體證禪師에 至하였다.
보조체증의 속성은 김씨이니 웅진인이다. 그의 가문은 효의로서 향리정표된 명문 거족이다. 화산 (의시 인각사) 권법사란 이에게 가서 득도하고 가량협산 보원사에 가서 구계를 받고 설악산 억성사에 가서 강거선사를 참(𠫵)하여 도의의 선법을 받았다. 다시 입당하여 수 삼인의 선지식들을 역참(歷𠫵)하던 도중에서 종자를 위왈(頠曰) 여러 지식을 참견(𠫵見)하였으나 우리 도의조사의 종지보다 우승할 것은 없다 하고 드디어 회정하여 귀국한 후 무주 황견 난암에 가서 주석하려니 당시 신라 임금인 헌안왕께서 그 도풍을 포문(鮑聞)하고 장사현(長沙縣) 부수 김언경을 보내어 청하였더니 때가 결제 시절이란 것과 몸이 병상에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고사하므로 헌안왕께서는 다시 영암군 승정운훈을 시키어 조칙을 전하여 가지산에로 이주하게 하시고 산의 사면에는 장생표(소위 경계표)를 세우게 하였다. 부수 김언경은 자기의 봉급을 할하여 상주에 충용하게 하고 철 2500근을 매시(買施)하여 빈 사나상 일구(一軀)를 전하여 가람을 장엄하였다. 헌안왕께서는 망수(望水) 이남 등 집과 금 160분과 조 1천곡을 사(賜)하여 가람 건설에 충용하게 하였다. 헌강왕 6년에 향년 77세로서 귀적함으로 시(謚)를 보조라 탑(塔)을 억성이라 하고 사액은 보림사라고 시(賜)하였다. 문하에 영혜 청환 등 팔백여 인이 있어 종풍을 선양하고 법등을 상속 유지함으로부터 가지산문이란 일교단을 성(成)하게 되었다.
쪽수▶P168-2普照體證의 俗姓은 金氏이니 熊津人이다. 그의 家門은 孝義로써 鄕里旌表된 名門 巨族이다. 華山 (疑是 麟角寺) 勸法師란 이에게 가서 得度하고 加良峽山 普願寺에 가서 具戒를 受하고 雪岳山 憶聖寺에 가서 康居禪師를 𠫵하야 道儀의 禪法을 받었다. 다시 入唐하야 數三人의 善知識들을 歷 𠫵하든 途中에서 從者를 頠曰 여러 知識을 𠫵見하였으나 우리 道儀祖師의 宗旨보다 優勝할 것은 없다 하고 드디어 廻程하야 歸國한 後 武州 黄堅 蘭岩에 가서 住錫하러니 當時 新羅 님금인 憲安王께서 그 道風을 鮑聞하고 長沙縣副守金彥卿을 보내어 請하였더니 때가 結制 時節이란 것과 몸이 病床에 있다는 것을 理由로하야 固辭함으로 憲安王께서는 다시 靈岩郡 僧正運訓을 시키어 詔勅을 傳하야 迦智山에로 移住케 하시고 山의 四面에는 長生標(所有境界標)를 立케하였다. 副守 金彦卿은 自己의 俸給을 割하야 常住에 充用케 하고 鐵 二千五百斤을 買施하야 虛舍那 像一軀를 鐫하야 伽藍을 莊嚴하였다. 憲安王께서는 望水里南 等 宅과 金 一百六十分과 租 二千斛을 賜하야 伽藍建設에 充用케하였다. 憲康王 六年에 享年 七十▶P169-1七歲로써 歸寂함으로 謚를 普照라 塔을 億聖이라 하고 寺額은 寳林寺라고 賜하였다. 門下에 英惠 清奐 等 八百餘人이 有하야 宗風을 宣揚하고 法燈을 相續維持함으로부터 迦智山門이란 一敎團을 成하게 되였다.
보조의 문도 중 한 사람으로서 강진 무위사에서 귀적한 선각대사란 이가있다. 사(師)는 무주인인데 속성이 최씨라고 한다. 휘(諱)는 적미요 시호가 선각이다. 경문왕 4년에 태어나 보림사 보조에게 출가한 후 입당하여 운거 도응의 인가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여 무위사에 거주하더니 때는 마침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친정(親征)하기 위하여 대군을 통솔하고 나주에 주둔하던 판이다. 반수(班帥)의 제(際)에 동귀(同歸)하자는 태조의 청에 의하여 송경으로 옮겨와서 선화하다가 귀적하였다.
쪽수▶P169-2普照의 門徒 中 한 사람으로서 康津 無爲寺에서 歸寂한 先覺大師란 이가있다. 師는 武州人인데 俗姓이 崔氏라고 한다. 諱는 適微요 謚號가 先覺이다. 景文王 四年에 生하야 寳林寺 普照에게 出家한 後 入唐하야 雲居道膺의 印可를 바다가지고 歸國하야 無爲寺에 住하더니 때는 마침 高麗 太祖가 後百濟를 親征하기 爲하야 大軍을 統率하고 羅州에 駐屯하든 판이다. 班帥의 際에 同歸하자는 太祖의 請에 依하야 松京으로 來住하야 宣化하다가 歸寂하였다.
이 선각과 동시인으로 오늘날 영주군 풍기면 외로암에 탑이 있는 진공대사란 이가 있다. 사(師)의 비에 보면 진전사에 가서 도의의 영탑을 참배하고 제자의 예를 전하였다 하였으니 진공이 도의의 제자인 것 같이 보이나 그런 것은 아니고 생각건대 진공은 도의의 법손인 선융에게 득도하여 가지산파의 문도가 되었으므로 자기 산문 조사인 도의의 탑에 가서 제자의 예를 전하였다는 것일 것이다. 진공은 계림 김씨인데 고려 태조의 총애를 몽(蒙)하여 종풍을 포게(布揭)하던 이다. 신라 문성왕 17년에 태어나 고려 정종 3년에 향년 93세로서 귀적하였다.
쪽수▶P169-3이 先覺과 同時人으로 今 榮州郡 豐基面 畏盧庵에 塔이 있는 眞空大師란 이가 있다. 師의 碑에보면 陳田寺에 가서 道儀의 靈塔을 𠫵拜하고 弟子의 禮를 展하였다 하였으니 眞空이 道儀의 弟子인 것 같이 보이나 그런 것은 아니고 생각컨대 眞空은 道儀의 法孫인 善融에게 得度하야 迦智山派의 門徒가 되었음으로 自己 山門 祖師인 道儀의 塔에 가서 弟子의 禮를 展하얐다는 것일 것이다. 眞空은 雞林 金氏인데 高麗 太祖의 寵愛를 蒙하여 宗風을 布揭하든 이다. 新羅 文聖王 十七年에 生하야 高麗 定宗 三年에 享年 九十三歲로써 歸寂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선각과 진공이 귀적한 후 약 150년을 경(經)하여 고려 대각 당년에 이르러 가지산문에 거벽으로서 운문사 원응국사라 하는 이가 있다. 사(師)는 문종 6년에 태어나 8세 되던 해에 가지산파 고승 진장에 취(就)하여 득도하고 13세 되던 해에 구계를 받고 선종 2년 광명사 대선에 가서 상상과에 입격한 후 숙종 예종 인종 삼조(三朝)의 신앙을 받아 교리를 선포하다가 인종 22년에 향년 93세로서 귀적하였다. 이때는 대각국사가 천태 교관을 개강할 적에 그 학자를 구산선문에서 모집을 하던 때다. 그러므로 구산문에서 누구라고 굴지할 만한 덕인 익종 등 수십인 이 각기 문도 수백인을 이끌고 그 모집에 응하여 천태종 학도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므로 구산선문은 흡사히 폭풍우나 지나간 듯이 아주 소조(蕭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는 판에 대각국사는 사람을 시키어 사(師)에 대하여 천태종에 들어오기를 간청한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렇지만 사(師)는 개연 독립하여 쇠패한 구산 선풍을 재흥하기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師)의 덕택으로 조계 구산의 혜명(慧命)은 얼마 만큼 진흥(振興)되었던 것이다.
쪽수▶P169-4以上에서 말한 先覺과 眞空이 歸寂한 後 約 一百五十年을 經하야 高麗 大覺 當年에 至하야 迦智山門에 巨擘으로서 雲門寺 圓應國師라 하는 이가 있다. 師는 文宗 六年에 生하야 八歲 되든 해에 迦智山派 高僧眞藏에 就하야 得度하고 十三歲 되든 해에 具戒를 受하고 宣宗 二年 廣明寺 大選에 가서 上々科에 入格한 後 肅宗 睿宗 仁宗 三朝의 信仰을 바다 敎理를 宣布하다가 仁宗 二十二年에 享年 九十三歲로써 歸寂하였다. 이때는 大覺國師가 天台敎觀을 開講할 적에 그 學者를 九山禪門에서 募集을 하든 때다. 그럼으로 九山門에서 누구라고 掘指할 만한 德仁 翼宗 等 數十人 이 각기 門徒 數百人을 率하고 그 募集에 應하야 天台宗 學徒가 되야버리고 말었음으로 九山禪門은 恰似히 暴風雨나 지나간 듯이 아주 蕭條하게 되었든 것이다. 그러는 판▶P170-1에 大覺國師는 사람을 시키어 師에 對하야 天台宗에 來入하기를 懇請한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그러지만 師는 介然獨立하야 衰敗한 九山 禪風을 再興하기에 努力하였다. 이러한 師의 德澤으로 曹溪 九山의 慧命은 얼마큼 振興되었든 것이다.
이 원응이 귀적한 후 약 80여년을 지내어 고종 40년 구산대선에서 상상과로 출세한 대사 한 분이 있다. 이는 즉 삼국유사 저작자인 의흥 인각사 보각국존 일연이라 하는 이다. 희종 2년에 태어나 14세 되던 해에 진전사 대웅장로에게 가서 득도하고 신종 4년에 이르러 산월사에서 요사 목우하여 개당하였다고 하였다. 이 목우란 것은 즉 송광 보조의 별호이므로 혹은 생각하기를 일연도 사굴산파인 보조의 계통에 속한 사람이라고 오인할 수 있으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일연의 득도사는 가지산파의 대웅장로요 사법사는 조계산의 보조국로인데 그 당시의 전등 상융은 득도사를 정사승으로 하여 혜명을 상전하는 때이므로 비(碑)의 전액(篆額)에는 “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이라 하였고 삼국유사 제5권 저자명에는 “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이라 하여 보각국존 일연이가 가지산 도의의 법손인 것을 명확하게 쓴 것이다. 사(師)는 충렬왕 15년에 귀적하고 그의 제자로서 보감국존 혼구란 이가 있다.
쪽수▶P170-2이 圓應이 歸寂한 後 約 八十餘年을 지내여 高宗 十四年 九山大選에서 上々科로 出世한 大師 한 분이 있다. 이는 卽 三國遺事 著作者인 義興 麟角寺 普覺國尊 一然이라 하는 이다. 熙宗 二年에 生하야 十四歲 되든 해에 陳田寺 大雄長老에게 가서 得度하고 神宗 四年에 至하야 禪月社에서 遙嗣牧牛하야 開堂하였다고 하였다. 이 牧牛란 것은 卽 松廣普照의 別號임으로 或은 생각하기를 一然도 闍崛山派인 普照의 係統에 屬한 사람이라고 誤認할 수 있으나 그런 것은 아니다. 一然의 得度師는 迦智山派의 大雄長老요 嗣法師는 曹溪山의 普照國老인데 그當時의 傳燈相絨은 得度師를 正師僧으로 하야 慧命을 相傳하는 때임으로 碑의 篆額에는 『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이라 하였고 三國遺事 第五卷 著者名에는 『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이라 하야 普覺國尊 一然이가 迦智山 道儀의 法孫인 것을 明確하게 書한 것이다. 師는 忠烈王 十五年에 歸寂하고 그의 弟子로써 普鑑國尊 混丘란 이가 있다.
혼구의 속성은 김씨인데 고종 38년에 태어나 10세 되던 해에 무위사 선사 천경에게 득도하고 구산 대선에 합격한 후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삼조(三朝)의 추앙을 얻어 종지를 선양하다가 충숙왕 9년에 이르러 귀적하였다.
쪽수▶P170-3混丘의 俗姓은 金氏인데 高宗 三十八年에 生하야 十歲 되든 해에 無爲寺 禪師 天鏡에게 得度하고 九山 大選에 合格한 後 忠烈王 忠宣王 忠肅王 三朝의 推仰을 得하야 宗旨를 宣揚하다가 忠肅王 九年에 至하야 歸寂하였다.
이 가지산 고승 혼구와 동시인으로서 국통 혼기와 국통 정우란 이들이 있었다. 이 삼인의 고승은 본래부터 딴 사람들로서 이기(泥其)는 즉 천태종 승무외국통(僧無畏國統)이요 정오는 전라남도 순창 출생으로서 이가 국통되는 바람에 순창이 승현위군하는 특전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여 혹은 혼구를 혼기와 혼동하여 무외국통의 명이라 한 사람도 있고 근일에 발행된 조선인 명사전에서는 백판(白判)으로 정오를 무외국통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 상고(詳考)가 잘 되지 못한 착오일 것이다.
쪽수▶P170-4이 迦智山 高僧 混丘와 同時人으로서 國統混其와 國統丁牛란 이들이 있었다. 이 三人의 高僧은 本來부터 딴 사람들로서 泥其는 卽 天台宗 僧無畏國統이요 丁午는 全羅南道 淳昌 出生으로서 이가 國統되는 바람에 淳昌이 陞縣爲郡하는 特典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을 잘 區別치 못하야 或 은 混丘를 混其와 混同하야 無畏國統의 名이라 한 사람도 있고 近日에 發行된 朝鮮人 名辭典에서는 白判으로 丁午를 無畏國統의 名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 詳考가 잘 되지 못한 錯誤일 것이다.
고려 말에 이르러 차산파(此山派)의 인물로서 도(都) 대선사 서공이란 이와 선사 문장로란 이가 있었으나 그들의 내력은 잘 알 수 없다.
쪽수▶P170-5高麗末에 至하야 此山派의 人物로서 都 大禪師 諝公이▶P171-1란 이와 禪師 文長老란 이가 있었으나 그들의 來歷은 잘 알 수 없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대종장 한 분이 출세하였으니 이는 곧 차산파의 명장로 광지선사의 법사(法嗣)로서 현금 조선 승려의 종조되는 태고 보우화상이란 이다. 태고화상 이후의 역사는 다음 장에서 서술하려고 한다.
쪽수▶P171-2恭愍王時에 至하야 大宗匠 한 분이 出世하였으니 이는 곧 此山派의 名長老 廣智禪師의 法嗣로서 現今 朝鮮 僧侶의 宗祖되는 太古普愚和尙이란 이다. 太古和尙 以後의 歷事는 다음 章에서 叙述하랴고 한다.
이상 여러 고승들의 주지 피임(被任)된 사찰을 보면 가지산 보림사를 필두로 하여 설악 진전사 억성사 운문사 인각사 군위 법주사 구산사 안화사 경암사 지곡사 해양 무량사 불일사 무위사 개성 송림사 등 사찰이 다 이 가지산문에 소속이 든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쪽수▶P171-3以上 여러 高僧들의 住持被任된 寺刹을 보면 迦智山 寳林寺를 筆頭로 하야 雪岳 陳田寺 憶聖寺 雲門寺 麟角寺 軍威 法住寺 龜山寺 安和寺 瓊岩寺 池谷寺 海陽 無量寺 佛日寺 無爲寺 開城 松林寺 等 寺刹이 다 이 迦智山門에 所屬이든 것을 推測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2-10: (10)태고 이후


이상에서 서술한바 신라 이래로 상전하여 오던 구산선종은 여말이초(麗末李初)에 이르러 그 종세가 극도로 쇠약해져서 필경 그 문풍을 유지할 수 없이 멸망의 비운에 봉착하고 말았다. 조계 구산에서 오직 가지산 일파가 태고화상의 덕택으로 그 문풍을 유지 상전하여 현금 조선불교의 주인공을 짓게 된 것이다. 이제 태고화상의 법손만이 남아 있어서 조계종의 선풍이 오늘날까지 오히려 조선반도에 불게 된 그 경과를 서술하면 이러하다.
쪽수▶P171-4以上에서 叙述한바 新羅 爾來로 相傳하야 오든 九山禪宗은 麗末李初에 이르러 그 宗勢가 極度로 衰弱하야저서 畢竟 그 門風을 維持할 수 없이 滅亡의 悲運에 逢着하고 말았다. 曹溪 九山에서 오즉 迦智山 一派가 太古和尙의 德澤으로 그 門風을 維持相傳하야 現今 朝鮮佛敎의 主人公을 짓게된 것이다. 이제 太古和尙의 法孫만이 남아 있어서 曺溪宗의 禪風이 오늘날까지 오히려 朝鮮半島에 불게 된 그 經過를 叙述하면 이러하다.
전에도 여러 차례 말하였지만은 화엄종 자은종 중도종 시흥종 남산종을 오교라하고 조계종 천태종을 양종이라 하여 오교양종이라고 하는 그것이 고려 말년에 이르러 실지에 있어서 사교이종으로 되고 말았다. 오교 중의 하나인 남산종이 무슨 사정으로 그랬던지 선종에 부전(附傳)하여 오던 총지종과 서로 합하여 총남종으로 되어 선종으로 행세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교종에서는 1종이 멸수되어 화엄 자은 중신(중도종과 신인종의 합종) 시흥의 종으로 되고 선종에서는 1종이 증가되어 조계 천태 총지의 삼종으로 되었다. 그러나 오교양종이란 명칭만은 고려 숙종 이래로 수백년을 두고 불러 행습(行習)된 숙어이므로 실지에 있어서 사교삼종으로 된 이후에 와서도 의연히 오교양종이란 그 이름으로 불려오는 것이다.
쪽수▶P171-5前에도 여러 차례 말하였지만은 華嚴宗 慈恩宗 中道宗 始興宗 南山宗을 五敎라하고 曹溪宗 天台宗을 兩宗이라 하야 五敎兩宗이라고 하는 그것이 高麗 末年에 至하야 實地에 있어서 四敎三宗으로 되고 말았다. 五敎 中의 하나인 南山宗이 무슨 事情으로 그랬든지 禪宗에 附傳하야 오든 摠持宗과 서로 合하야 摠南宗으로 되여 禪宗으로 行世하게 되였다. 그리하야 敎宗에서는 一宗이 滅數되야 華嚴 慈恩 中神(中道宗과 神印宗의 合宗) 始興의 宗으로 되고 禪宗에서는 一宗이 增加되야 曹溪 天台 摠持의 三宗으로 되였다. 그러나 五敎兩宗이란 名稱만은 高麗 肅宗 爾來로 數百年을 두고 불러 行習된 熟語임으로 實地에 있어서 四敎三宗으로 된 以後에 와서도 依然히 五敎兩宗이 란 그 일홈으로 불러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교양종이 실지에 있어서 사교삼종이 된 그것이 이조 세종 6년에 이르러서 화엄 자은 중신 시흥의 사종은 교종으로 되고 조계 천태 총남의 삼종은 선종으로 되어 소위 선교양종이란 명칭이 새로 세상에 출현되었다. 이 사교삼종을 합하여 선교양종으로 만들거나 말거나 그것이 종세를 쇠약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세종 6년 합종 후에도 사치삼종 즉 칠종 불교는 그대로 유지하였지만은 이 칠종 불교가 멸망하게 된 치명상을 당한 것은 성종 때의 소망 ‘사태불교’란 것이다. 이 사태불교의 경과를 잠깐 부연하면 이러하다. 성종 22년 10월 23일에 사헌부로부터 상계하기를
쪽수▶P171-6이와 같이 五敎兩宗이 實地에 있어서 四教三宗이 된 그것이 李朝 世宗 六年에 이르러서 華嚴 慈恩 中神 始興의▶P172-1 四宗은 敎宗으로 되고 曹溪 天台 摠南의 三宗은 禪宗으로 되여 所謂 禪敎兩宗이란 名稱이 새로 世上에 出現되였다. 이 四教三宗을 合하야 禪敎兩宗으로 맨들거나 말거나 그것이 宗勢를 衰弱케 할 수는 없었다. 그럼으로 世宗 六年 合宗 後에도 四致三宗 卽 七宗 佛敎는 그대로 維持하였지만은 이 七宗 佛敎가 滅亡하게 된 致命傷을 當한 것은 成宗時의 所望 『沙汰佛敎』란 것이다. 이 沙汰佛敎의 經過를 暫間 附演하면 이러하다. 成宗 二十三年 十月 二十三日에 司憲府로부터 上啓하기를

近者 雖不許度僧 民困於土木之役 相繼爲僧 請令所在守令 推刷定役 里正及本寺維那不告者 井罪之 謀避軍役爲僧者 勿棟赦前 罪家長 僧人本無定居 雖檢覈定役 旋卽逃避 自今 僧人逃匿山寺者 其寺居僧 幷充軍 以此張榜曉諭中外

쪽수▶P172-2

近者 雖不許度僧 民困於土木之役 相繼爲僧 請令所在守令 推刷定役 里正及本寺維那不告者 井罪之 謀避軍役爲僧者 勿棟赦前 罪家長 僧人本無定居 雖檢覈定役 旋卽逃避 自今 僧人逃匿山寺者 其寺居僧 幷充軍 以此張榜曉諭中外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계문은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은 전통적으로 나다라 오는 유생들의 의사도 성종께서는 일향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결국 이것을 종허하여 아래와 같은 능목(楞目)을 내걸게 되었다.
쪽수▶P172-3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啓文은 無理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은 傳統的으로 나다라오는 儒生들의 意思도 成宗께서는 一向히 無視할 수가 없어서 結局 이것을 從許하야 아래와 같은 楞目을 내걸게 되였다.

一. 違法爲僧者 令各里色掌 及維那僧 現告隨即定役 如有隱匿不告者 其維那僧勿問度牒有無 一皆定役 色掌以制書有違律論
二. 近來雖不許度僧 然奸詐之徒 利於避役 多令子弟剃髮 今後家長 勿揀赦前以制書有違律論 其隣保並抵罪 一人有潜剃者 其師僧勿論度牒有無 科罪定役
三. 官吏不得上寺推刷故 無度牒者 多隱於寺 今後 其主寺僧 勿問度牒有無充軍
四. 違法爲僧者 雖捕得定役 旋卽逃避 其許接寺僧 勿問度牒有無充軍 許接家長及隣保 論以制書有違律

쪽수▶P172-4

一. 違法爲僧者 令各里色掌 及維那僧 現告隨即定役 如有隱匿不告者 其維那僧勿問度牒有無 一皆定役 色掌以制書有違律論
二. 近來雖不許度僧 然奸詐之徒 利於避役 多令子弟剃髮 今後家長 勿揀赦前以制書有違律論 其隣保並抵罪 一人有潜剃者 其師僧勿論度牒有無 科罪定役
三. 官吏不得上寺推刷故 無度牒者 多隱於寺 今後 其主寺僧 勿問度牒有無充軍
四. 違法爲僧者 雖捕得定役 旋卽逃避 其許接寺僧 勿問度牒有無充軍 許接家長及隣保 論以制書有違律

이때까지는 아직 관리나 이정들이 사찰 내에 함부로 들어가서 수색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방목 중에는 관리나 색장이나 인보까지라도 사찰 내에 마음대로 들어가서 수색 고발하는 자유를 줄 뿐 아니라 만일 수색 고발하지 아니하면 오히려 죄를 주게 되고 무도첩자를 거접시킨 사승이나 기사 주지나 기사 유나승까지는 도첩이 있는 진승이거나 아니거나 불문하고 무도첩자 은비하였다는 죄명으로 포착하여 군역을 정해 맡기게 되었다. 이때에 사찰의 내용에 있어서는 무도첩자 없는 사찰이 없었고 따라서 무도첩자 은〿이란 죄명에 걸려들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만큼 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 방목에 한번 괘장(掛張)된 이후에는 무도첩자나 무도첩자를 거접시킨 사승이나 기사 주지나 유나들은 죄에 걸리어 퇴속을 당하고 그 옆에 있는 다른 승려들은 자기 스스로 창피스러워서 퇴속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분한지심을 이기지 못하여 퇴속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는 바람에 선교 양종 각 사찰은 추풍낙엽을 당한 적막공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쪽수▶P172-5이때까지는 아즉 官吏나 里正들이 寺刹 內에 함부로 들어가서 搜索을 하지 못하였든 것이다. 그런데 이 膀目 中에는 官吏나 色掌이나 隣保까지라도 寺刹 內에 마음대로 들어가서 搜索告發하는 自由를 줄 뿐 않이라 만일 搜索告發치 않이하면 오히려 罪를 주게 되고 無度牒者를 居接시킨 師僧이나 其寺 住持나 其寺 維那僧까지는 度牒이 있는 眞僧이거나 않이거나 不問하고 無度牒者 隱芾하였다는 罪名으로 捕捉하야 軍役을 定해 맛기게 되였다. 이때에 寺▶P173-1刹의 內容에 있어서는 無度牒者 없는 寺刹이 없었고 따라서 無度牒者 隱〿이란 罪名에 걸려들지 않이할 사람이 없을 만치 되야 있는 形便이다. 이 榜目에 한번 掛張된 以後에는 無度牒者나 無度牒者를 居接시킨 師僧이나 其寺 住持나 維那들은 罪에 걸리어 退俗을 當하고 그 옆에 있는 다른 僧侶들은 自己 스스로 창피스러워서 退俗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忿恨之心을 이기지 못하야 退俗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는 바람에 禪敎 兩宗 各寺刹은 秋風落葉을 當한 寂寞空山이 되야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지나에서 말하는 소위 불문삼무화라는 것보다도 몇 10배나 가혹하고도 잔인한 성종 때의 사태불교 정책이 덕종 비(妃)와 예종 비(妃)와의 양 대비께서 올린 간곡한 언문상서 일상으로 인하여 다소 완화는 되었다 하더라도 그 완화된 것은 “무도첩자 검거를 빙적하여 유도첩자 구집하는 것을 금지”할 뿐이요 이미 유도첩자로서 억울하게 퇴속당한 승려를 다시 입산시키는 법도 없었고 또는 새로 위승자를 허락하는 법도 없었다. 그러므로 각종 불교의 종세가 전일과 같이 유지하기는 벌써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
쪽수▶P173-2이와 같이 支那에서 말하는 所謂 佛門三武禍라는 것보다도 몇 十倍나 苛酷하고도 殘忍한 成宗時의 沙汰佛敎 政策이 德宗妃와 睿宗妃와의 兩大妃께서 올닌 懇曲한 諺文上書一狀으로 因하야 多少 緩和는 되였다 하드라도 그 緩和된 것은 『無度牒者 檢擧를 憑籍하야 有度牒者 拘執하는 것을 禁止』할 뿐이요 이미 有度牒者로서 억울하게 退俗當한 僧侶를 다시 入山시키는 法도 없었고 또는 새로 爲僧者를 許諾하는 法도 없었다. 그럼으로 各宗佛敎의 宗勢가 前日과 같이 維持하야기는 벌서 바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난리를 치른 후에 요행히도 야인 토벌에 성공하고 투잠(投簪) 낙발한 벽송 지엄이라 하는 대사 한 분이 출세하여 성종 때의 사태를 피하여 영동 황악산 깊은 골자기에 가서 장발 축처자하고 있는 태고 4세 법손인 벽계 정심선사로부터 간신히 조계 선법을 받아가지고 이것을 부용 영관선사에 전하여 주었다. 영관의 좌하(座下)에서 청허 부휴의 양대법장이 출(出)하여 종풍을 선양함으로부터 법손이 점점 번성하여 마침내 금일의 조선불교를 성(成)하게 된 것이다.
쪽수▶P173-3이러한 亂離를 치른 後에 僥倖이도 野人討伐에 成功하고 投簪落髮한 碧松智嚴이라 하는 大師 한 분이 出世하야 成宗時의 沙汰를 避하야 永同 黃岳山 깊은 골작우니에 가서 長髮 畜妻子하고 있는 太古 四世 法孫인 碧溪 正心禪師로부터 간신히 曹溪禪法을 받아갖이고 이것을 芙蓉 靈觀禪師에 傳하야 주었다. 靈觀의 座下에서 淸虛 浮休의 兩大法將이 出하야 宗風을 宣揚함으로부터 法孫이 漸漸繁盛하야 마침내 今日의 朝鮮佛敎를 成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태고의 조계종만이라도 근근 유지상부하게 된 것이다.
쪽수▶P173-4이와 같은 事情으로 因하야 太古의 曹溪宗만이라도 僅僅 維持相傳하게 된 것이다.
태고화상의 법위는 보우요 속성은 홍씨인데, 충청남도 홍주인이다. 충렬왕 27년에 태어나(生하여) 십삼세 되던 해에 양주 회암사에 가서 가지산의 원손 광지선사에게 득도한 후 만법귀일화를 참구하기 시작하여 수년을 계속하였다. 충숙왕 2년에 개성 감로사에 가서 우거(寓居)하더니 일일에 의단이 박락(剝落)함을 보고 송 일률을 지었으니 “佛祖與山河 無口悉吞却”이라 한 것이 그 결구라고 한다. 충혜왕 후 2년에 삼각산 중흥사의 동쪽에 일암을 탁건하고 태고암이란 액제(額題)를 붙인 후 태고암가 일편을 지었으니 태고의 평생 소득처는 이 일편가 중에 여유없이 발포되어 있다. 46세 되던 해에 원국에 들어와 호주 하무산 석옥청공에 취(就)하여 자기의 오득처를 구진하여 인가를 구하였다. 석옥은 이것을 만구 허락한 후 가사 일령(一領)과 주장자 한개(一領)를 증(贈)하여 전법의 믿음을 표하였다. 사(師)는 석옥의 인가를 얻어 가지고 연경에 회지하여 원천자의 조칙으로서 영녕사에서 개당하였다. 이때에 황제는 금난가사 일궤(一饋)와 침향불자 일수(一手)를 사(賜)하였다. 충목왕 4년에 귀국하여 소설산에 거주(住)하더니 공민왕 5년에 이르러 공민왕께서 사(師)를 봉은사에로 청하여 설법함을 들으시고 만수가사 일령(一領)과 수정염주 일건(一件)을 사(賜)하섰다. 기년(其年) 4월에 왕사로 봉하고 원융부를 세워 구산을 통합하여 일가를 성(成)하게 하였다. 후에 양산사 가지사 주지에 차제로 취(就)하여 거주하다가 같은 왕 17년에 이르러 신돈의 참소에 인하여 속리산에 금고되었다가 익년 3월에 공민왕께서 회오하여 소설산에 귀환하게 되었다. 같은 왕 20년에 이르러 국사로 진봉하여 밀양 형원사에 주지가 되었다. 우왕 7년에 국사로 재봉되어 양산사에 다시 머물다가 같은 왕 8년에 소설산에로 귀환하여 12월 24일에 귀적함으로 시(謚)을 원증이라 탑(塔)을 보월승공이라 호하였다. 그 문하에 혼수 찬영 조이 원유 등 수십인의 상수제자가 있었으니 이들은 다 국사 왕사 들이다.
쪽수▶P173-5太古和尙의 法韋는 普愚요 俗姓은 洪氏인데, 忠淸南道 洪州人이다. 忠烈王 二十七年에 生하야 十三歲 되든 해에 楊州 檜岩寺에가서 迦智山의 遠孫 廣智禪師에게 得度한 後 萬法歸一話를 參究하기 시작하야 數年을 繼續하였다. 忠肅王 二年에 開城 甘露寺에 가서 寓居하더니 一日에 疑團이剝落함을 보고 頌一律를 지었으니 『佛祖與山河 無口悉吞却』이라 한 것이 그 結句라고 한다. 忠惠王 後 二▶P174-1年에 三角山 重興寺의 東에 一庵을 卓建하고 太古庵이란 額題를 부친 後 太古庵歌 一篇을 지었으니 太古의 平生 所得處는 이 一篇歌 中에 餘遺없이 發布되야 있다. 四十六歲 되든 해에 元國에 入하야 湖州 霞務山 石屋淸珙에 就하야 自己의 悟得處를 具陳하야 印可를 求하였다. 石屋은 이것을 滿口許諾한 後 袈裟 一領과 柱杖子 一個를 贈하야 傳法의 信을 表하였다. 師는 石屋의 印可를 得하야 갖이고 燕京에 廻至하야 元天子의 詔勅으로써 永寧寺에서 開堂하였다. 이때에 皇帝는 金蘭袈裟 一饋과 沈香拂子 一手를 賜하였다. 忠穆王 四年에 歸國하야 小雪山에 住하더니 恭愍王 五年에 至하야 恭愍王께서 師를 奉恩寺에로 請하야 說法함을 드르시고 滿繡袈裟 一領과 水晶念珠 一件을 賜하섰다. 其年 四月에 王師로 封하고 圓融府를 立하야 九山을 統合하야 一家를 成케 하였다. 後에 陽山寺 迦智寺 住持에 次第로 就하야 住하다가 同 十七年에 至하야 辛旽의 讒訴 에 因하야 俗離山에 禁固되였다가 翌年 三月에 恭愍王께서 悔悟하야 小雪山에 歸還케 되얐다. 同二十年에 至하야 國師로 進封하야 密陽 瑩原寺에 住持케 되얐다. 禑王 七年에 國師로 再封되야 陽山寺에 再住하다가 同八年에 小雪山에로 歸還하야 十二月 二十四日에 歸寂함으로 謚을 圓證이라 塔을 寳月昇空이라 號하였다 그 門下에 混脩 粲英 祖異 元琟 等 數十人의 上首弟子가 있었으니 이들은 다 國師 王師 들이다.
혼수라 하는 이는 국사 지웅존자 환암이라고 하는 인데 본시 도차산에서 출신하여 태고화상에게 와서 사법하였다. 이 환암의 문하에 〿谷覺堂이란 이가 있으니 이는 굴산 보조의 6세 법손으로서 환암에게 와서 사법한 이다. 이 〿谷覺雲의 법을 사(嗣)하여 벽송 지엄에게 전한 이가 곧 성종 때의 사태(沙汰)로 인하여 황악산에 숨어(隱하여) 장발 축처자하고 일생을 마친 벽계 정심선사라 하는 이다. 이상 서술로써 이 문제를 그만 마치려고 한다.
쪽수▶P174-2混脩라 하는 이는 國師 智雄尊者 幻庵이라고 하는 인데 本是 闍嵯山에서 出身하야 太古和尙에게 와서 嗣法하였다. 이幻庵의 門下에 〿谷覺堂이란 이가 있으니 이는 崛山 普照의 六世 法孫으로서 幻庵에게 와서 嗣法한이다. 이 〿谷覺雲의 法을 嗣하야 碧松智嚴에게 傳한 이가 곧 成宗時의 沙汰로 因하야 黃岳山에 隱하야 長髮 畜妻子하고 一生을 맞친 碧溪正心禪師라 하는 이다. 以上 叙述로써 이 問題를 그만 맟이랴고 한다.
조계선종의 연원도
曹溪禪宗의 淵源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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