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North Korea Humanities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김나연(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이인성(李仁星)
이인성2.jpg
출처 :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한글명 이인성 한자명 李仁星 영문명 Lee In-sung 가나명 이칭 아소(我笑)
성별 남성 생년 1912년 몰년 1950년 출신지 대구 전공 서양화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이인성(李仁星, 1912년~1950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서양화가이다.[1]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천재성을 바탕으로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이라 함)에 최연소로 입선하고, 24세에는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정점에 올랐다.[2] 대표작으로는「가을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등이 있으며,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및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3]


생애


출생과 성장 (1912~1930)

이인성은 1912년 8월 18일 대구시 태평로3가 57번지에서 태어났다.[4] 수창공립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고,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하였다.[5] 좋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으나, 서동진인물이 운영하던 디자인 인쇄 사무실인 '대구미술사기관'에서 일하며 수채화의 세계에 입문하였다.[6] 1929년 18세의 나이로 스승 서동진과 함께 <선전>에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하였다.[7] 당시 입선작은 수채화 「그늘」작품이었다.[8]


일본 유학 시절과 전성기 (1931~1935)

1931년 수채화 「세모가경」작품으로 또 한 번 선전에서 특선에 올랐고, 이로 인해 일본인 교장 시라카 주키치인물의 후원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9] 유학 초기에는 '오사마 상회기관'라는 크레용 회사에서 일하며 고학했으나, 곧 크레용 회사 사장의 지원을 받아 태평양미술학교기관에 입학해 미술 수업을 받았다.[10] 도쿄에 있는 4년 동안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 서구의 화풍을 섭렵하고 실험하면서 기량을 급격히 발전시켰다.[11] 1932년부터 1935년 사이 <선전> 특선은 물론 <제전>, <광풍회전>, <전일본수채화전> 등에도 연이어 입상하며 명성을 펼쳤다.[12] 특히 1934년에는 「가을 어느 날작품로 <선전> 특선을, 1935년에는 「경주의 산곡에서」작품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24세의 나이에 조선 화단의 정점에 섰다.[13]


대구에서의 활동 (1936~1944)

1935년 도쿄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결혼을 하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미술운동을 전개했다.[14] 귀국 후 1937년, <선전>에서 추천작가에 선정되었다.[15] 1938년에는 대구 남산병원 3층에 '이인성 양화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39년에는 대구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에 '아르스(ARS)'라는 다방을 얻어 예술가들의 문화사랑방으로 운영하였다.[16] 한때 다방에 걸려있던 작품이 상을 받지 못했다고 오해한 팬에 의해 작품이 훼손되는 사건도 발생했다.[17][18]


해방 이후와 최후 (1945~1950)

1945년 해방 후 서울 아현동으로 거처를 옮겨 이화여자고등학교기관 미술교사 및 이화여자대학교기관 서양화부 강사로 출강하면서, 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기관를 세워 '이인성 양화전'을 개최하기도 했다.[19] 1949년 창설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축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도중이던 1950년 11월 4일,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에 경찰과 언쟁이 생겨 경찰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20] 공포탄으로 쏜 게 실탄이 들어 있어 오발 사고가 났다.[21] 죽음 이후 '이인성문화재단'이 설립되고, '이인성 미술상'이 제정되는 등의 방식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22]





연구


서양 화풍의 수용과 독자적 양식

이인성은 일본 유학 시절 인상파, 후기 인상파, 야수파 등 서구의 다양한 근대 미술 양식을 섭렵하고 실험하였다.[23] 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을 넘어서, 화사한 색채와 자유로운 선을 사용하여 현실 너머의 아름다운 '별세계'를 연출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24] 유화와 수채화 모두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25]


'향토색'의 구현과 한국적 서정

이인성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향토색(鄕土色)'이다.[26] 그는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27] 특히 대표작인 「가을 어느 날」작품과 「경주의 산곡에서」작품는 낭만과 허무가 공존하는 조선의 자연과 풍토를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28] 또한 1934년작 「아리랑 고개」작품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대한 오마주로서, 식민지 조선인의 울분을 풍경 속에 녹여낸 작품이다.[29]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화면 구성을 넘어 원초적인 생명성을 추구하였으며, 단순한 인상적 풍경이 아닌 민족의 삶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구상화하였다.[30]


한국 근대미술사에서의 위상

이인성은 1930년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세 명의 인물로 거론될 만큼 명성이 높았다.[31]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을 처음 제시한 것으로써 높이 평가되고 있다.[32] 그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위주로 활동했다는 비판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으나, 이는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화가가 생존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33] 오늘날에는 그를 기리는 '이인성 미술상'이 제정되는 등 한국 근대미술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화가로 기억되고 있다.[34]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수창공립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인성 Person: 서동진 A hasMaster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대구미술사 A worksAt B
Person: 이인성 Work: 그늘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Work: 세모가경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Person: 시라카 주키치 A hasMaster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오사마 상회 A worksAt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태평양미술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인성 Work: 가을 어느 날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Work: 경주의 산곡에서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이화여자고등학교 A worksAt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이화여자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이인성 Work: 아리랑 고개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주석


  1.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3.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4.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6.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7.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8.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9.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0.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1.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2.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3.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14.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5.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16.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7.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8. 이인성이 <선전>에서 수상소식을 전해 주지 않자 활약이 부진한 것으로 오해하고 작업을 독려하고자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인성은 <선전>의 추천작가에 올라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상황이었다.
  19.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0.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1.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22.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3.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4.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25.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27.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8.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29.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30.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31.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32.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3.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34.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