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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일본의 탄압으로 북경으로 망명하여 중심으로 이회영(李會榮)·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정화암(鄭華巖)·신채호(申采浩) 등과 자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으며,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 1922년 일본의 탄압으로 북경으로 망명하여 중심으로 이회영(李會榮)·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정화암(鄭華巖)·신채호(申采浩) 등과 자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으며,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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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상해에서 5·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인 화남연맹과 더불어 노동자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 1925년 상해에서 5·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인 화남연맹과 더불어 노동자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
2021년 5월 27일 (목) 03:16 판
백정기(白貞基) | |
대표명칭 | 백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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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白貞基 |
생몰년 | 1896년-1934년 |
호 | 구파(鷗波) |
시대 | 근대 |
대표직함 | 의사 |
대표경력 |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대표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1963) |
능묘 | 효창공원 |
생가 | 구파 백정기의사 고택지(전라북도 기념물 제103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목차
정의
백정기(1896~1934)는 일제강점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대표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조직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펼쳤다.
업적 요약
1931년 한국·중국·일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산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B.T.P)을 편성하였다. 1932년 일본 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천진항에 입항한 日淸船에 폭탄을 던져 선체일부를 파괴하고 천진 일본 총영사관 관저에도 폭탄을 던졌으며, 1933년 상해 훙커우[虹口]에 있는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 아키라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내용
독립운동 전개
1919년 서울에 올라와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가 동지를 규합해 일제와의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8월에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폭로되어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을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가 1920년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노동자 운동 전개
1922년 일본의 탄압으로 북경으로 망명하여 중심으로 이회영(李會榮)·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정화암(鄭華巖)·신채호(申采浩) 등과 자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으며,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1924년 일본 동경에 밀입국하여 하야가와(早川)수력공사장에 은신하며 수력공사장·주요건물 등을 폭파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못해 북경으로 귀환하였으며, 상해로 가서 정화암 등과 함께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 제조기술을 익히면서 노동문제에 관한 이해가 깊어졌다.
1925년 상해에서 5·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인 화남연맹과 더불어 노동자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7년 복건성에서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의 자치조직을 통해 한중일 삼국동지 합작으로 일으켰다.
무정부주의 전개
1928년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하고,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결성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북만주에 있는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중훈련에 힘썼다.
흑색공포단 결성
1931년 9월 한국·중국·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하고, 이회영·정화암과 함께 이들을 규합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다. 또한 11월 일본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요인 사살·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비티피(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일본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천진항에 입항한 11,000톤급 日淸船에 폭탄을 던져 선체일부를 파괴하고, 이여산과 함께 천진 일본 총영사관 관저에도 폭탄을 던졌다.
육삼정 의거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상해 훙커우[虹口]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정객 참모부원들을 위시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키스트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밀고로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죽었다.
고택지와 추모
백정기의 고택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03호(구파 백정기의사 고택지)로 지정되어 있다.
백정기는 부안에서 태어나 1907년 이 곳(전라북도 정읍)으로 이주하여 1919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12년동안 생활하였다고 한다.
백정기는 일본의 장기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1934년 순국하였다. 1946년 일본에서 유해를 송환받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지식 관계망
노드
ID | Class | Label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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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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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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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고택지 (정읍관광, 정읍시) | |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의 백정기 묘 | |
정읍 백정기의사 기념관의 구파기념관 (구파백정기의사기념관, 정읍시) |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이현희, "백정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백정기 의사 기념관"
『정읍시 문화관광』online , 정읍시.
- 이현희, "백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