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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1589년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11월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096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해"]</ref> | ||
고향에서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란 초기부터 안동 예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대다수의 군현을 포괄한 대단위 부대, 안동열읍향병이 결성된 이후에는 안동열읍향병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 고향에서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란 초기부터 안동 예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대다수의 군현을 포괄한 대단위 부대, 안동열읍향병이 결성된 이후에는 안동열읍향병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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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향병일기|『향병일기』]]<ref>[http://aks.ai/GC02401098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ref>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임란사 및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외에는 문집으로 『근시재집(近始齋集)』(4권)이 있다. | 김해는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향병일기|『향병일기』]]<ref>[http://aks.ai/GC02401098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ref>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임란사 및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외에는 문집으로 『근시재집(近始齋集)』(4권)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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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6일 (화) 21:28 판
| 6조 인물 정보 | |
|---|---|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 |
| 이름 | 김해(金垓) |
| 생년 | 1555년 |
| 몰년 | 1593년 |
| 시대 | 조선 |
| 국적 | 조선 |
| 자 | 달원(達遠) |
| 호 | 근시재(近始齋) |
| 유형 | 문신, 의병장 |
연구목적 및 필요성
우리 6조는 군자의 나라, 조선. 임진왜란 등 조선의 국난에 군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안동 광산김씨 예안파, 특히 김해를 중심으로 보는 진정한 군자의 삶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김해는 어찌 보면 불운한 삶을 살았으나, 나라를 위한 삶을 산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있다. 벼슬에 나아갔으나 일년도 안되어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전쟁 중 병에 걸려 30대 후반이라는 젋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였다.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 『향병일기(鄕兵日記)』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行軍須知)』를 저술하였고, 이를 통해 우리는 임진왜란 시의 전투 상황과 의병 활동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김해가 지휘한 대규모 의병부대인 안동열읍향병은 당교를 집중공격하여 일본군을 철수시킨 성과가 있다. 이는 안동열읍향병이 명망 사족들의 연합부대 성격을 지닌 덕분에 관군 지휘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관군이 지닌 병력과 무기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1]
이처럼 김해를 중심으로 향병일기, 행군수지 등 임진왜란 당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있는 다양한 문헌과 예안의병 및 안동열읍향병을 기반으로 경북지역의 의병사를 연구할 수 있어 김해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연구 대상
김해의 생애
김해(金垓,1555∼1593)는 오천칠군자[2] 중 하나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의 아들로, 33세에 김성일, 류성룡과 함께 퇴계문집 편수에 참여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김해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1589년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11월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3]
고향에서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란 초기부터 안동 예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대다수의 군현을 포괄한 대단위 부대, 안동열읍향병이 결성된 이후에는 안동열읍향병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593년 안동열읍향병은 관군과 힘을 합하여 일본군의 핵심주둔지인 당교를 집중공격하여 일본군을 철수시켰고[4], 김해는 계속 적을 추격하다가 밀양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경주로 이동한 후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해가 남긴 것
김해는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향병일기』[5]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임란사 및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외에는 문집으로 『근시재집(近始齋集)』(4권)이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입향조인 김효로(金孝盧, 1445∼1534)를 모시는 광산김씨 사당에 김해도 함께 모셔지고 있다. 김해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금학산(金鶴山)에 있으며, 1893년 이조판서에 추증[6]되었다.
김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난중잡록(亂中雜錄)[7]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8]
김해는 어떤 마음으로 의병활동을 했을까?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동 역시 이 격문에 많은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고,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이 답장을 통해 여러 군사적 환경이 심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적에 대한 분개심으로 일어났고, 김해 또한 같은 마음으로 다짐하며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9]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 시맨틱 데이터 구축 및 디지털 큐레이션을 하면서 도출한 사항을 기술
- 사실적인 관계와 사실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추정 등
- 시맨틱 데이터 구축 시 중점적으로 고려한 사항 등
참고 자료
이미지
- 난중잡록에 쓰인 김해 - 출처: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일 문집인 『학봉집』제3권 초유문[招諭文]의 격문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김해 문집인 『근시재집』제3권에 실린 김성일 격문에 답하는 편지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논문 및 문헌
신문기사 및 사이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해"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김해"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
-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
- 경북일보, "조선충절실록) 13. 안동열읍향병대장 김해"(2023-10-10, 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주석
- ↑ 이욱,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국학연구 no.30, 2016, pp. 55-92.
- ↑ 오천의 덕망 높은 일곱 선비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해"
- ↑ 이욱,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국학연구 no.30, 2016, pp. 55-92.
-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
- ↑ 사망 후 품계 또는 직급을 높이거나 관직을 내리는 것
- ↑ 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 ↑ 亂中雜錄[二] 壬辰下
- ↑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