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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 - 김해



작성자: 인문정보학 이효림





연구목적 및 필요성

우리 6조는 군자의 나라, 조선. 임진왜란 등 조선의 국난에 군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안동 광산김씨 예안파, 특히 김해를 중심으로 보는 진정한 군자의 삶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김해는 어찌 보면 불운한 삶을 살았으나, 나라를 위한 삶을 산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있다. 벼슬에 나아갔으나 일년도 안되어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전쟁 중 병에 걸려 30대 후반이라는 젋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였다.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진중일기 『향병일기(鄕兵日記)』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行軍須知)』를 저술하였고, 이를 통해 우리는 임진왜란 시의 전투 상황과 의병 활동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김해가 지휘한 대규모 의병부대인 안동열읍향병은 당교를 집중공격하여 일본군을 철수시킨 성과가 있다. 이는 안동열읍향병이 명망 사족들의 연합부대 성격을 지닌 덕분에 관군 지휘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관군이 지닌 병력과 무기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1]

이처럼 김해를 중심으로 향병일기, 행군수지 등 임진왜란 당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있는 다양한 문헌과 예안의병 및 안동열읍향병을 기반으로 경북지역의 의병사를 연구할 수 있어 김해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연구 대상

김해의 생애

김해(金垓,1555∼1593)는 오천칠군자[2] 중 하나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의 아들로,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1589년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고, 11월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3]

고향에서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란 초기부터 안동 예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경상북도 북부지역 대다수의 군현을 포괄한 대단위 부대, 안동열읍향병이 결성된 이후에는 안동열읍향병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593년 안동열읍향병은 관군과 힘을 합하여 일본군의 핵심주둔지인 당교를 집중공격하여 일본군을 철수시켰고[4], 김해는 계속 적을 추격하다가 밀양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경주로 이동한 후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해가 남긴 것

김해는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들은 날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전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향병일기』[5]와 부대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를 저술하였다. 이는 임란사 및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외에는 문집으로 『근시재집(近始齋集)』(4권)이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입향조인 김효로(金孝盧, 1445∼1534)를 모시는 광산김씨 사당에 김해도 함께 모셔지고 있다. 김해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금학산(金鶴山)에 있으며, 1893년 이조판서에 추증[6]되었다.


김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난중잡록(亂中雜錄)[7]에는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고,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썼다고 되어있다.[8]


김해는 어떤 마음으로 의병활동을 했을까?

안동 출신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1592년 5월에 경상우도로 내려갔다. 그는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격문을 써서 여러 지방으로 보냈으며, 이에 감동한 여러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동 역시 이 격문에 많은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고, 김해는 김성일의 격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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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막혀 오랑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병화(兵火)에 휩싸이고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지가 오래입니다. 누추하고 협소한 지방이라서 예전에도 이 지역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만을 숭상했을 뿐 무예를 익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의병을 불러 모으니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활을 잡아 본 사람은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아 떨쳐 일어나 진격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만, 요해처에 복병을 설치할 수는 있으니, 격분한 마음을 떨쳐 임금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군대는 근본이 갖춰지지 않았고, 통솔하는 자의 재주가 부족하여 병세(兵勢)가 열악합니다. 게다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병기는 탕진되어 모두가 나무를 잘라 만든 병기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거사를 한다면 뜻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으로부터 나오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대략이나마 익혔습니다. 불끈 마음을 먹고 저 더러운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며, 하늘에 맹세컨대 이 도적들과는 세상을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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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근시재집>



이 답장을 통해 여러 군사적 환경이 심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적에 대한 분개심으로 일어났고, 김해 또한 같은 마음으로 다짐하며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9]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





연구결과

김해는 오천칠군자인 김부의의 아들이다. 그는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그 후에 동료가 사초를 불태운 것에 연루되어 면직 당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김해는 안동 예안의 의병장, 안동열읍향병의 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안동열읍향병은 1593년 3월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해는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향병일기와 행군수지를 썼다. 임진왜란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김성일의 격문에 영향을 받아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김성일의 격문에 대한 김해의 답장을 통해 당시 의병의 열악한 환경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김해의 문집으로는 근시재집이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기록인 난중잡록에도 김해에 대하여 적혀있다.

김해의 묘는 안동의 금학산에 있으며, 김해는 안동 관산김씨의 입향조인 김효로와 함께 광산김씨 재사에 제향되어 있다.


김해에 대한 시맨틱데이터를 구축하면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김해가 도대장으로 지휘한 안동열읍향병이 일본군의 주둔지인 당교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철수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데이터로 표현할 지였다. 시맨틱데이터는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김해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노드인 안동열읍향병를 김해와 연결하였다. 이 둘의 관계의 attribute에 도대장이라는 것을 표현하니 관계가 좀더 명확화되었다. 그리고 안동열읍향병이 당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철수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이 관계성을 나타내는 데에 이루다가 아닌 ‘이끌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많이 고민하였는데, 이끈다는 관계어를 사용하면 의병-김해 및 안동열읍향병-김해, 안동열읍향병-왜군 격파의 관계들이 모두 이끈다는 관계어로 표현 가능하게 되므로 도리어 관계가 불분명해진다고 생각되어 관계어를 두가지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그러나 많은 고민 끝에 당교라는 지역을 노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당교라는 지역 노드가 다른 노드와는 연결되기 어려웠고 더 나아가 당교 외 다른 지역명 노드가 발생되기도 어려웠으며, 또한 당교의 왜군 격파 및 철수 노드에 remark를 통해 당교가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였음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589년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과 그 다음 달에 일어난 사초를 불태운 일 사이의 연관관계를 끝내 알아낼 수 없어서, 이 두 노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오랜시간 고민하였다. 그러나 시맨틱데이터는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정설로 여겨지는 사항이나 학설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사실이 아닌 나의 단순한 추측은 데이터로 만들 수 없었다. 이에 객관적 사실인 이 두 사건의 선-후 관계만 기재하였다. 데이터를 다 만들고 시맨틱 네트워크 그래프로 결과물을 보니까, 영향을 주었다, 혹은 이유와 결과라는 등의 관계를 기재하지 않음으로써 이 두 사건의 연관관계를 학술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형태가 되어서 도리어 내가 사용한 선-후 관계어가 이 두 노드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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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문헌



신문기사 및 사이트



주석

  1. 이욱,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국학연구 no.30, 2016, pp. 55-92.
  2. 오천의 덕망 높은 일곱 선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해"
  4. 이욱, "광산김씨의 임란 의병활동과 의의", 국학연구 no.30, 2016, pp. 55-92.
  5.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향병일기"
  6. 사망 후 품계 또는 직급을 높이거나 관직을 내리는 것
  7. 임진왜란 시 남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이 쓴 야사집으로 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의 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8. 亂中雜錄[二] 壬辰下
  9. 스토리테마파크 "임진왜란을 맞아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