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용 자기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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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자기 가마터: 관요 설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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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지리지」에는 1432년 이전의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가 군현 별로 기록되어 있다. 「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는 자기를 생산하고 공납하는 의무를 지닌 곳으로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관요가 설치되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어용을 비롯한 왕실용과 국정 운영에 필요한 자기의 진헌⦁공헌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왕실자기 가마터: 관요 설립 이후


토산품으로 공납되었던 백자는 1467년경 궁중 주방인 사옹원의 분원 가마가 광주에 설치되면서 관영수공업체제를 갖추고 직접 생산, 조달하게 되었다. 분원에서는 전국에서 차출되어 부역을 하던 1140명의 사기장沙器匠이 380명씩 3개조로 나뉘어 돌아가며 일했고, 사옹원에서 파견된 감관(낭청)이 봄, 가을로 제작된 그릇을 배에 실어 한양으로 수송했다. 약 10년을 주기로 수목(땔감)이 무성한 곳을 찾아 옮겨 다녔던 분원가마는 1752년(영조 28년),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물자를 수송하기에 유리한 분원리에 정착하여 이후 130여년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현재까지 광주시 전역에는 340여개소에 이르는 분원가마터 유적이 고스라니 남아있다. 그 가운데 약 22개소의 분원 가마터가 여러 기관에 의해 발굴조사보고·연구되어 조선전기에서 후기까지 시대에 따라 발전된 제작기술과 도자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1467년경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고 왕실과 관청에 소용되는 백자를 직접 조달하게 되면서 광주 백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분원설립 이후, 우산리, 도마리, 번천리, 관음리를 중심으로 화원이 그린 기품있는 청화백자와 함꼐 '천 지 현 황', '좌 우 별'명문을 새긴 고품격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는 17세기에는 철화백자가 등장하는 동시에 진상백자에 간지를 새겨 관리 효율을 높였으며,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정지리, 탄벌동, 학동리, 상림리, 선동리, 송정동, 유사리, 신대리, 지월리 순으로 가마가 약 10년 주기로 이동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오향리, 금사리 등지에서 활동하던 분원가마는 한강을 지나던 선박에 세금을 거둬 땔나무를 구입하면서 더 이상 이전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분원리에 정착하여 130여 년간 운영하였다.

광주 목현동 요지
조선 15세기


목현동은 목감동木甘洞과 초현동草峴洞을 병합해서 목현리라고 했다. 초현은 목현동에서 오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광주 남쪽의 초현草峴일 가능성이 있다. <중정남한지>(1847)에는 "초현점은 부에서 동남으로 20리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새오개 다음에는 두새오개가 있는데, 1872년 지방지도 중 <광주전도>를 보면 새오개의 위치를 초현이라 했고 두 새오개의 위치는 재再초현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광주 우산리 요지
조선 15-16세기


(1) 광주 우산리 요지에서는 박건의 부인최씨 묘지편과 정옥현의 부인김씨 묘지편 그리고 '가정 계사년(1533)'이 새겨진 묘지편을 수습하여 중종시대(1506-1544)에 운영되었음을 확실해졌다. 김영훈선생
(2) 우산리 요지에서 수집한 유물을 살펴보면, 크게 백자, 청자(백태청유자), 요도구로 나눌 수 있다. 기종은 그릇 안바닥에 내저원각이 있는 발, 잔, 접시 등 일상기종과 호, 병, 향로, 화분, 제기, 장군 등 특수기종 같은 다양한 기명이 제작되었다. 발이나 병, 항아리 등 넓은 기면 위주로 모란, 당초, 물고기, 나무, 초화, 구름 등의 문양을 흑상감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적인데, 백자뿐만 아니라 청자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그릇 안바닥이나 굽 안바닥에는 드물게 왕실이나 관사의 소용처를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왕, 사, 태일전, 전, 사 등 음각명문이 있으며, 사의 경우 인각한 예이다. 요도구의 양상을 통해 볼 때, 양질백자는 통형 갑발과 삿갓형 갑발뚜껑, 원반형 도지미를 사용하여 별도로 제작하였으며 조질백자는 원반형, 원주형, 폐자기활용 등 도지미에 올려놓고 태토빚음을 받쳐 여러 점을 포개구웠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기

광주 무갑리 요지
조선 15-16세기
무갑리는 토속명으로 '무래비'라고 하며 마을 뒤에 무갑산이 있어 무갑리라고 했다. 이곳 역시 우산리와 마찬가지로 마을전체가 유적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일찍이 개간되어 유적의 전체적인 규모가 파악되지 않았다. 상감백자와 함께 '지, 현, 능'명 백자, '가정27(1548)'의 년기가 있는 묘지명이 수습되어 무갑리의 운영시기 추정이 가능해졌다.

광주 도마리 요지
조선 15-16세기
(1)상번천리에서 도마치倒馬峙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도마리는 원래 도마동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도자기를 만드는 도막陶幕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도마道馬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마리 요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64년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가마가 이미 훼손된 상태라 교란된 퇴적층만 조사하였다. 을축팔월명乙丑八月 사각봉의 연대가 1505년으로 추정되어 도마리 요지의 운영시기를 15세기에서 16세기 초반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김영훈
(2) 도마리 수집유물은 가는모래를 받쳐구운 역삼각형굽의 양질백자와 함께 죽절굽의 조질백자가 소량 확인된다. 기종은 내저원각이 넓고 구연이 외반된 발, 잔, 접시 등 일상기종 뿐만 아니라 전접시와 '丁'자형의

광주 번천리 요지
조선 15-16세기
(1) 번천리는 토속어로 '벌대'라고 한다. 원래는 초월에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내곡, 관청수, 송현을 상번천리라 하고, 음곡, 양지촌은 하번천이라 하여 중부면에 예속시켰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번천리를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광주 동쪽의 '벌을천 상품자기소'가 있던 곳이라 하였다. 조선조 사옹원 관요로써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번천리 요지는 15세기 전반부터 16세기의 다양한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다.
(2) 번천리는 145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분원가마가 설치되기 이전 이미 상품자기소가 있었다고 기록된 곳으로 현재 분청사기가마터를 비롯한 백자가마터 22개소가 분포되어 있다. 죽절굽에 태토빚음을 받쳐 여러 점을 포개구운 조질백자를 중심으로 생산했으며 인근 폐기물퇴적에서 다량의 갑발과 ‘天’, ‘地’, ‘玄’ 명문백자가 발견되어 양질백자를 생산했던 갑번가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15~16세기의 분원가마터에는 양질백자가마와 조질백자가마가 서로 약 2~10m정도 거리를 두고 2~3기가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시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무갑리, 도마리 등 조선전기 여러 가마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발견된다.

광주 탄벌동 요지
조선 17세기
탄벌리는 원래 숯가마골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서 숯을 구웠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가마터는 탄벌리 마을 최상단부에 있는 '사기막골'에 모두 5-6개소가 있다. 탄벌동의 명문은 丙午(1606), 丁未(1607), ?戌, ?申(1608), 己酉(1609), 辛亥(1611), 壬子(1612)가 발견된 바 있어 탄벌동의 운영년대가 1606-1612년경으로 비정되어 왔다.

광주 상림리 요지
조선 17/19세기
현재 16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된 상림리에는 세 개의 요지군이 있는데 사기소, 승방골, 시어골 요지이다.사기소와 시어골 요지의 경우 17세기, 승방골 요지는 19세기에 운영된 가마터이다. 그동안 발견된 상림리 요지의 간지는 '신미(1631)', '계유(1633)', '을해(1635)', '유?(1636)', '을(1629 또는 1639)' '십구경(1640)'이 보고된 바 있다. 김영훈 선생 자료에서 '술진(1628)'이 있어 1629-1640년으로 추정되던 상림리 요지의 운영시기가 앞당겨지게 되었다.

광주 선동리 요지
조선 17세기
(1)선동리 요지는 지금까지 5개소가 보고되었다. 1640-1648년까지의 간지가 출토되었으며 유물은 백자반상기, 문방구, 제기뿐만 아니라 철화백자와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 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2)선동리가마는 1640년 분원이 설치된 이후 10년이 지난 1649년 초봄, 광주 동면 송치松峙(지금의 송정동)로 이설하였다는 운영기록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전해진다. 확인된 4기의 가마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2-1호와 2-4호는 길이 22m이상, 너비 180∼300cm로 아궁이와 4개의 번조실, 굴뚝부로 갈수록 약간 넓어지는 반지하식 등요이며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가 나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번조실 중심에 불기둥을 둔 조선전기 가마와 달리 불턱으로 경계를 구분하고 번조실 내부에 2~3개의 방형 불기둥을 두었는데, 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발달된 구조로 여겨진다. 가마 외에도 인근에서 추가로 2기의 가마폐기물퇴적과 공방지가 발견되어 여러 가마가 함께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굽 안바닥에 새겨진 辛巳(1641년)~戊子(1648년)에 해당하는<左/右+간지> 명문과 기존에 발견된 庚辰(1640년) 간지를 통해 기록에서처럼 1640~48년까지 운영된 지역임이 증명되었다. 유물은 백자반상기를 중심으로 대발, 합, 병, 호, 문방구, 돈, 명기, 장군, 향로, 제기 등이 만들어졌다. 병,편병 등 특수기종을 중심으로 철화문이 장식되었으며 17세기 가마터에서는 처음으로 나비문이 시문된 청화백자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광주 송정동 요지
조선 17세기
(1)광주읍에서 번천리로 가기 전 송현 아래에 송정리 마을이 있다. 송정리는 1914년 송정松亭과 수하水下를 합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릇 안 바닥에는 간지(제작연도) 그리고 숫자가 표기되어 있다.
(2) 1649년 초봄 무렵, 송정동(옛 송치松峙) 가마는 선동리에서 옮겨와 10여년간 어기御器 생산을 지속하였다. 송정동의 가마터 8곳 가운데 두 차례 조사된 5호·6호 가마는 조선중기 관요의 구조를 규명하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호 가마는 경사도 16°의 바닥을 조성한 뒤 점토로 벽체와 천정을 축조하여 총길이 22.5m, 최대너비 255cm의 반지하식의 등요를 만들었다. 부채꼴 모양의 이 가마는 경사면을 따라 아궁이와 3개의 번조실, 굴뚝을 배치하고 번조실 앞쪽 우측에 출입구를 두었다. 특히, 불턱과 3줄의 고래가 있는 아궁이 위로 불턱과 3개의 불기둥으로 번조실의 경계를 만들어 불의 흐름에 효율을 더하였다. 가마주변으로는 추정 지붕시설을 두고 가마의 안전을 비는 진단구鎭壇具를 아궁이 옆에 묻어 특이 할만하다. 6호에 비해 갑발이 많이 발견되는 5호는 회청색 백자를 중심으로 사군자문, 포도문, 시 등이 그려져 있는 철화백자와 청자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반상기외에 호, 병, 합, 향로, 마상배, 제기, 명기 등 다양한 기종이 제작됐다. 한편, 굽 안바닥에 새겨진 <左/右+간지>, <左/右+간지+숫자> 명문은 5호에서 己丑(1649년)~甲午(1654년)까지, 6호에서는 己丑(1649년)~壬辰(1652년)까지의 간지가 확인되어 운영시기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광주 신대리 요지
조선 15/17세기
(1) 신대리는 신대동 혹은 새태말이라고 하는데, 새태말은 새터말 즉 새터를 잡아 이전해온 마을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도자기를 생산하는 사옹원 소속 도자기 생산집단이 새로 도요를 개설하기 위해 이전하여 붙여진 명칭일 것이다. 신대리 요지는 15, 17세기의 가마터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출토된 백자의 간지명문과 1677년 지월리로 가마를 이전했다는 <승정원일기> 기사를 통해 1665-1676년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광주 신대리에는 15*17세기에 운영된 분원 가마터가 29개소 남아 있다. 2008년 도로공사 중 처음 발견된 신대리 29호 가마는 조선 전기 가마의 구조 및 제작기술을 살펴보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큰 유적으로 현재 경기도자박물관내로 이전하여 야외전시되고 있다. 출토유물은 연지어문을 흑상감한 대발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회청색의 백자들로, 4~5개의 태토빚음을 받쳐 포개구운 조질 그릇들이다. 기종은 주을 이루는 일상기명과 함께 화형잔, 양이잔, 고족배, 병, 호 등의 특수기종, 그리고 도침, 굽통 등 각종 작업도구가 발견되었다. 1665년경 조선왕실은 과거 15세기에 백자생산 이력이 있는 신대리로 분원을 이전하였다. 신대리 18호 요지는 2008년 발굴조사에서 17세기에 운영되었던 가마로 확인되었다. 유물은 대부분 회청색 백자로 사군자문과 운문, 용문, ‘+’자문 등을 장식한 철화백자, 소량의 명문백자가 수습되었다. 대발, 호, 병, 제기, 벼루 등 특수기종을 비롯한 오목굽의 조질 반상기종이 주생산품으로, 신대리의 조질백자는 동시기의 지방백자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상호영향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광주 궁평리 요지
조선 17-19세기
궁평리는 우리 토속어로 '궁뜰'이라고 한다. 가마터는 모두 2개소의 집단요지가 있는데, 하나는 조선조 사옹원의 관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선조말기의 민요지이다. 즉 17세기말-18세기초의 가마와 19세기 가마가 중복되어 나타난다. 궁평리의 도자기는 반상기에 굵은 모래나 황갈색의 흙모래를 받쳐 포개구이한 조질백자가 주를 이룬다.

광주 관음리 요지
조선 15-18세기
(1) 관음리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어 관음골 혹은 관음동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상, 하 관음동과 광복동 일부를 병합해서 관음리라 하였다. 관음리의 도장동陶庄洞은 토속어로 도장골이라고 하는데, 사옹원 소속 사기장이집단이 살던 곳으로 추정되며 '도장陶庄'이 아니고 동음이의어의 '도장陶匠'이였을 것으로 본다.
(2) 관음리는 경안천의 지류인 우산천을 끼고 있는 수운이 용이한 지리적 요충지로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장기간에 거쳐 분원 가마가 운영된 곳이다. 관음리 8호 백자가마터 인근에서는 다량의 자기편과 굽통, 굽칼, 갑발편을 비롯하여 수비찌꺼기가 발견되어 수비시설을 포함한 공방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방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발, 잔, 접시, 병, 호, 뚜껑, 고족배, 제기를 비롯한 원통형 갑발과 삿갓형 갑발뚜껑이 수습되었다. 관요발굴조사에서는 드물게 발견된 공방지와 완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철제 굽칼은 16세기 백자생산체계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 금사리 요지
조선 18세기
금사리 요지는 1752년, 분원리 가마로 이설하기 직전에 운영된 가마이다. '설백자'로 일컬어지는 금사리의 백자는 굽이 높은 반상기형 제기, 각병, 각발 등 다각으로 면취한 각형백자의 제작량이 증가했고, 간결하게 그려진 죽문, 칠보문, 운룡문과 수, 복, 제의 문자문이 장식된 품위있는 청화백자가 발견된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 김영훈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본 연구자는 <세종실록> 「지리지」 기록을 바탕으로 15세기 전국에 소재하였던 자기소 분포현황에 관한 역사지도를 제작하였다. 역사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형도 등의 기본 자료는 김종혁선생님에게 전달 받아 김종혁선생님의 지도 하에 오픈소스 지리정보체계 응용프로그램인 QGIS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