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민간용 자기 가마

metaArchive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가평 하판리 백자 요지
조선 17-18세기
가평의 백토는 조선후기 관요에서 사용할 흙을 공급할 만큼 품질이 우수하여 청계산, 운악산 일대에는 많은 수의 도자기 가마가 입지하였다. 특히, 하판리의 노채(가마 노爐와 영지 채埰의 합성)라는 지명은 관에 납품하였던 가마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하판리에서는 백자가마 4기를 비롯하여 인근에서 확인된 공방지 12기, 숯가마 1기, 조선시대 주거지 1기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가마는 불기둥을 경계로 3개의 번조실을 구성한 반지하식 등요로 조선중기 관요가마와 구조상 유사성을 보인다. 건조시설과 수비시설을 갖춘 공방지에서는 물레부속구 뿐만 아니라 장인들이 사용했던 굽칼, 벼루, 숯돌, 도기호 등이 함께 수습되었다. 출토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청색의 백자는 굵은 모래를 받쳐 포개구운 반상기로 특히, 광주 분원가마에서 출토되는 철화운룡문호가 지방가마터로는 처음 확인되어 주목된다. 이와 함께 발견된 서울지명을 뜻하는 한글명문은 경기지역에서 생산된 백자가 한양에서 소비되는 조선중기 백자의 생산과 유통, 소비루트를 추정하게 한다.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안성 화곡리 백자 요지
조선 17-18세기
안성시는 조선시대 백자요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 가운데 하나로 특히,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화곡리는 일찍이 고려도기를 생산한 유서깊은 곳이다. 화곡리에서는 조선백자가마 2기(2·3호 백자가마터) 및 건조시설, 수비공 등 추정공방시설이 확인되었다. 2·3호 백자가마는 모두 훼손되어 가마의 구조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길이 15m이상, 폭 1.9m 정도의 등요로 나타났다. 대부분 문양이 없는 회청색 무문백자가 출토되었으나 간략한 초화문을 장식한 철화백자와 함께 도침등 요도구도 소량 출토되었다. 기종은 일상용 반상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호, 병 등의 특수기종은 극히 소량 만들어졌다. 도기가마가 폐요된 이후 수백년이 지나 또다시 같은 지역에 백자가마가 입지한 예는 흔치 않은 일로 화곡리 가마터는 도자기를 꾸준히 생산했던 안성의 중요한 요업단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

파주 설마리 흑유자기*도기 요지
조선 19-20세기
감악산지의 크고 작은 골짜기들을 따라서 가마터들이 산재하고 있는 설마리는 마을지명이 ‘사기막’으로 불릴 만큼 예로부터 도기, 백자 등 도자기를 만드는 집단 요업지역이었다. 조사지역에서는 흑유자기가마와 도기가마가 각각 1기씩 확인되었는데, 흑유자기가마는 아궁이부와 9개의 번조실, 굴뚝부로 이루어진 긴사다리꼴의 반지하식 연실 등요로 전체길이 26.1m, 번조실의 너비는 140~270cm이다.각 번조실은 7~9개의 불창기둥열로 경계를 이루고 양측면에 출입구가 나있다. 유물은 소량의 백자와 도기를 제외하면 모두 흑유자기로서, 호, 뚜껑, 병류가 주를 이루며 가마 내부에 모래를 깔고 번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도기가마는 약 24°정도로 경사가 급한 지역을 활용한 반지하식 등요로 아궁이는 유실되고 남아있는 길이가 10.56m, 너비는 176cm규모로 벽체와 바닥에 보수하여 사용한 흔적이 있다. 폐기물퇴적층에서는 내박자흔과 일부 자연유가 형성된 회청색 태토의 경질 도기가 출토되었다. 설마리의 가마군은 19~20세기의 경기북부지역 가마 구조와 성격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치가 큰 유적이다.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