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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9일 (화) 00:3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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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大首
Queen.png
ckid costume0871
한글 대수
한자 大首
영문(음역) Daesu
영문(의미) Queen’s ceremonial hair style
분류 머리모양
성별
시대 조선
연령 성인
신분 왕족
데이터 소스:
☞ 한국연구재단 한국복식사전 【대수】



정의

  • 조선후기 왕비와 왕세자빈이 국속의 적의를 입을 때 적관을 대신하여 사용하는 체발 형태의 머리 양식

해설

조선에서는 왕이 새로 등극하면 명의 제후국으로서 왕위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명나라 황제의 공식적인 책봉을 받는 절차를 거쳤는데, 이 때 왕을 책봉하는 고명과 함께 면복, 채폐 등의 예물을 반사받았다. 왕비는 왕의 면복에 상응하는 예물로써 관복을 사여받았는데, 이중 관에 해당하는 것이 주취칠적관이다. 명나라 멸망 이후인 1645년(인조23) 봉림대군 부인의 세자빈 책봉례를 치루기 위해 적관에 대해 논의한 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적관은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제작할 수 있는 장인 또한 없기 때문에 조선에서 적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적관을 대체할 수 있는 관을 마련하여야했다. 이에 조선초기부터 사용되었던 국속제의 체발형의 머리양식을 사용하였으며, 점차 변화하여 대수 형태의 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가례 시 착용하였던 대수는 체발을 이용한 가체 위에 장잠, 선봉잠, 후봉잠, 떨잠, 용잠, 진주동곳, 대요반자, 마리사기 등 다양한 수식품으로 장식하였으며, 이는 『궁중발기』의 '수식칠보'에 나타난다. 또한 1922년 영친왕비가 착용하였던 대수의 사진과 유물이 남아있어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지원, 2008, 「조선시대 궁중 예관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오선희, 2019, 「조선시대 궁중 대례용(大禮用) 수식(首飾) 제도의 성립과 변천」, 이화여자대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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