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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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李相卨, 1871년 1월 27일(1870년 음력 12월 7일) ~ 1917년 양력 3월 2일)은 조선(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혹은 부재라고도 읽음)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907년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광복군정부 수립을 주관하여 정통령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헤이그 밀사

1907년,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헤이그 밀사 사건 참조.)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1907년 7월 5일에 이상설이 만국평화 회의장에 나가 호소하는 글을 발표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48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 세 개 열거해보면,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1]


헤이그 밀사에 실패한 그는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미주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 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EC%84%A4
  1. 박은식, 《한국통사》(김승일 역, 범우사. 1997)381~382쪽(3편 46장)에 전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