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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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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참고자료'''==
*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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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400000,38&pageNo=1_1_1_0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2400000,38&pageNo=1_1_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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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학생임술증처유인밀양박씨지려(烈女學生林述曾妻孺人密陽朴氏之閭),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137&cid=40942&categoryId=33080
* 열녀학생임술증처유인밀양박씨지려(烈女學生林述曾妻孺人密陽朴氏之閭),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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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열녀 밀양박씨 지려(咸陽烈女密陽朴氏之閭), 디지털함양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53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137&cid=40942&categoryId=33080
 
* 함양 열녀 밀양박씨 지려(咸陽烈女密陽朴氏之閭), 디지털함양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534  
 
 
* “남편의 삼년상 마치고 자결한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지역N문화. https://local.nculture.org/0bzuj  
 
* “남편의 삼년상 마치고 자결한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지역N문화. https://local.nculture.org/0bzuj  
  

2021년 4월 9일 (금) 19:55 판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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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함양군 문화관광.
대표명칭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영문명칭 0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249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0호
지정일 1997년 1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아전(衙前) 임술증(林述曾)의 아내 밀양(密陽) 박씨(朴氏)의 열(㤠)을 기려 세운 정려비(旌閭碑)이다. 밀양박씨는 안의 사람으로 19세에 병든 신랑 임술증과 혼인 약속을 지켜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른 다음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한 열녀로서 정조17년(1793년) 안의현감(安義縣監)으로 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유명한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의 실제 인물이다.

밀양 박씨의 열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 산청현감(山淸縣監) 이면제(李勉齊), 거창의 신도향 사인(士人) 이학전(李學傳), 벽송사(碧松寺)의 승려 응윤(應允)등도 각각 기록을 남긴바 있다. 비문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7대손인 청하현감(淸河縣監) 정덕제(鄭德齊)가 짓고 썼다. 정조21년(1797년)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19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조선시대의 열녀(㤠女) 밀양박씨의 정려비(旌閭碑)이다. 조선시대의 여성이 절의(節義)를 지켜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널리 권장하기 위해서 그 사적과 칭송을 기리는 비를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정려비라고 한다.

밀양박씨는 안의 사람으로 19세에 병환 중이던 아전(衙前) 임술증(林述曾)과의 혼인 약속을 지키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사망하였는데 밀양박씨는 3년상을 치른 다음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고 한다.

밀양 박씨의 행동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 산청현감(山淸縣監) 이면제(李勉齊), 거창의 신도향 사인(士人) 이학전(李學傳), 벽송사(碧松寺)의 승려 응윤(應允)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질 만큼 널리 알려졌다. 당시 안의현감(安義縣監)으로 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또한 이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한문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비문은 정여창(鄭汝昌)의 7대손인 청하현감(淸河縣監) 정덕제(鄭德齊)가 지었다. 1797년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19일 현재의 위치로 옮졌다.

1차 수정

조선시대의 열녀(㤠女) 밀양박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이다. 정조 21년(1797)에 함양향교 입구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시대에는 효자, 충신,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정려 현판을 달아 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았다.

밀양박씨는 19세 때 함양 지역 관아의 하급 관리였던 임술증(林述曾)과 결혼하였다. 당시 임술증은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박씨는 혼인 약속을 지켰고, 남편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부가 된 박씨는 삼년상을 치른 뒤 남편이 죽은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

박씨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 윤광석, 산청현감 이면제, 승려 응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이 1792년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뒤 박씨의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한문 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에 몸돌을 올린 형태이며, 주변에 돌기둥 4개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 비각을 만들었다. 비문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7세손 정덕제(鄭德齊)가 짓고 썼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