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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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아전(衙前) 임술증(林述曾)의 아내 밀양(密陽) 박씨(朴氏)의 열(㤠)을 기려 세운 정려비(旌閭碑)이다. 밀양박씨는 안의 사람으로 19세에 병든 신랑 임술증과 혼인 약속을 지켜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른 다음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한 열녀로서 정조17년(1793년) 안의현감(安義縣監)으로 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유명한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의 실제 인물이다.
밀양 박씨의 열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 산청현감(山淸縣監) 이면제(李勉齊), 거창의 신도향 사인(士人) 이학전(李學傳), 벽송사(碧松寺)의 승려 응윤(應允)등도 각각 기록을 남긴바 있다. 비문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7대손인 청하현감(淸河縣監) 정덕제(鄭德齊)가 짓고 썼다. 정조21년(1797년)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19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조선시대의 열녀(㤠女) 밀양박씨의 정려비(旌閭碑)이다. 조선시대의 여성이 절의(節義)를 지켜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널리 권장하기 위해서 그 사적과 칭송을 기리는 비를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정려비라고 한다.
밀양박씨는 안의 사람으로 19세에 병환 중이던 아전(衙前) 임술증(林述曾)과의 혼인 약속을 지키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사망하였는데 밀양박씨는 3년상을 치른 다음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고 한다.
밀양 박씨의 행동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 산청현감(山淸縣監) 이면제(李勉齊), 거창의 신도향 사인(士人) 이학전(李學傳), 벽송사(碧松寺)의 승려 응윤(應允)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질 만큼 널리 알려졌다. 당시 안의현감(安義縣監)으로 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또한 이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한문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비문은 정여창(鄭汝昌)의 7대손인 청하현감(淸河縣監) 정덕제(鄭德齊)가 지었다. 1797년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19일 현재의 위치로 옮졌다.
1차 수정
조선시대의 열녀(㤠女) 밀양박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이다. 정조 21년(1797)에 함양향교 입구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시대에는 효자, 충신,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정려 현판을 달아 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았다.
밀양박씨는 19세 때 함양 지역 관아의 하급 관리였던 임술증(林述曾)과 결혼하였다. 당시 임술증은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박씨는 혼인 약속을 지켰고, 남편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부가 된 박씨는 삼년상을 치른 뒤 남편이 죽은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
박씨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 윤광석, 산청현감 이면제, 승려 응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이 1792년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뒤 박씨의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한문 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에 몸돌을 올린 형태이며, 주변에 돌기둥 4개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 비각을 만들었다. 비문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7세손 정덕제(鄭德齊)가 짓고 썼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7세손 정덕제(鄭德齊)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는지?
- 정덕제는 묘표에서 鄭德齊가 아닌 鄭德濟로 확인됨.
- 정려란 효자, 충신, 열녀에 대한 표창의 일종으로, 현판에 달아 문에 세우거나 돌에 새겨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 밀양박씨는 안의 출신으로, 아버지는 하급 아전인 통인(通引) 박상효(朴相孝)이다. 19세 때 함양 지역 관아의 하급 관리였던 임술증(林述曾)과 결혼하였다.
- 박씨의 행동은 주변에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 윤광석, 산청현감 이면제, 거창의 신돈항, 승려 응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1793년에 박씨의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한문 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정려 현판을 달아 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 “정려 현판을 달아 정려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또는 “정려 현판을 달아 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비를 세우고”
- 밀양박씨는 19세 때 함양 지역 관아의 하급 관리였던 임술증(林述曾)과 결혼하였다. 당시 임술증은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박씨는 혼인 약속을 지켰고, 남편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부가 된 박씨는 삼년상을 치른 뒤 남편이 죽은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 → 결혼 전에 임술증의 투병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밀양박씨는 19세 때 함양 지역 관아의 하급 관리였던 임술증(林述曾)과 결혼하였다. 임술증은 지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박씨의 가족들은 결혼을 만류했지만 박씨는 혼인 약속을 지켰다. 결혼 직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박씨는 삼년상을 치른 뒤 남편이 죽은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
- 박씨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 윤광석, 산청현감 이면제, 승려 응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이 1792년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뒤 박씨의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한문 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 현재까지 박씨의 열녀전으로 알려진 작품으로는 윤광안의 <朴烈婦傳>, 박지원의 <烈女咸陽朴氏傳)>, 승려 응윤의 <朴烈婦傳>, 정덕제의 <烈女學生林述曾妻密陽朴氏之閭>, 윤광석의 <烈婦朴氏傳>, 이면제의 <朴烈婦傳)>, 신돈항의 <烈婦朴氏行錄>, 《閒汨董》에 실린 <烈女朴氏傳>, 이학전의 <朴氏烈婦傳> 윤광안의 <朴烈婦傳>입니다. 또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뒤에 박씨의 죽음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박씨의 백부 박상효가 안의의 아전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음독한 사실을 박지원은 금방 알았고, 다음날 새벽 박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해당 부분은 “안의현감으로 있던 박지원이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다.”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문 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는 삭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傳은 한문의 한 문체입니다. 전 중에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박씨에 관한 전은 實傳이므로 소설이라 할 수 없습니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조선시대의 열녀(㤠女) 밀양박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정조 21년(1797)에 함양향교 입구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시대에는 효자, 충신,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정려 현판을 달아 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았다.
밀양박씨는 19세 때 함양 지역 관아의 하급 관리였던 임술증(林述曾)과 결혼하였다. 결혼 전부터 이미 임술증은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박씨는 혼인 약속을 지켰고, 결혼 후 얼마 안가 남편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부가 된 박씨는 삼년상을 치른 뒤 남편이 죽은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
박씨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 윤광석, 산청현감 이면제, 승려 응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특히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1792년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뒤 박씨의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한문 소설을 썼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에 몸돌을 올린 형태이며, 주변에 돌기둥 4개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 비각을 만들었다. 비문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정여창의 7세손 정덕제(鄭德齊)가 짓고 썼다.
- 조선시대의 열녀(㤠女) 밀양박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정조 21년(1797)에 함양향교 입구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차 수정
이 정려비는 조선시대의 열녀 밀양박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정조 21년(1797)에 함양향교 입구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시대에는 효자, 충신,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현판을 달아 정려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았다.
밀양박씨는 19세 때 함양 지역 관아의 하급 관리였던 임술증(林述曾)과 결혼하였다. 결혼 전부터 이미 임술증은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박씨는 혼인 약속을 지켰고, 결혼 후 얼마 안 가 남편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부가 된 박씨는 삼년상을 치른 뒤 남편이 죽은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하였다. 박씨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군수 윤광석, 산청현감 이면제, 승려 응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안의현감으로 있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이 박씨의 이야기를 듣고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을 남기기도 하였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에 몸돌을 올린 형태이며, 주변에 돌기둥 4개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 비각을 만들었다. 비문은 청하현감 정덕제(鄭德濟)가 짓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