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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3000000 함양 노진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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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함양 노진 신도비
 
|대표명칭=함양 노진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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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Stele of No Jin, Ham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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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咸陽 盧禛 神道碑
|주소=경남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3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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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3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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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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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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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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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는 고인의 발자취를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도비는 고인이 살았을 때의 일들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는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그것은 동남쪽을 “신령의 길(神道)로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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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 신도비는 인조 9년(1631)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졌다. 비석의 돌은 황해도에서 생산된 백색 대리석이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선조의 사위인 신익성이 글씨를 썼다.
  
이 신도비는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선생의 덕을 기리기위해 세운 것이다. 선생은 1546년(명종 원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를 시작으로 예조(禮曹)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선생은 평소에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여 청백리(淸白吏)로, 또 효자(孝子)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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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 노진(玉溪 盧禛)명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예조 및 이조판서를 지냈고 검소한 청백리와 지극한 효자로 선정되었다. 저서로는 『옥계문집』이 있다.
  
이 비는 1631년(인조 9)에 임금의 명으로 건립되었다. 비석의 돌은 황해도에서 생산된 백색 대리석이다. 비문(碑文)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인 동양위(東陽慰) 신익선(申翊善)이 썼다. 비석의 머릿돌에는 구름 사이로 용 여섯 마리가 뒤엉켜 서로 여의주를 차지하려는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다. 거북받침(龜趺) 밑에 마련된 받침돌(臺座)의 정교한 조각은 당대(當代)의 걸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
비석의 전체 높이는 약 3.28m로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졌으며, 머릿돌에는 구름 사이로 용 여섯 마리가 뒤엉켜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받침돌에는 거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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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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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e of No Jin, Hamyang'''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며, 대체로 신도비는 묘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 신도비는 경상남도 함양국 지곡면 평촌리에 있는 노진(盧禛, 1518~1578)의 신도비이다. 노진은 16세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자는 자응(子膺)이고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등으로 일컬어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의 증조부는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이고 조부는 노분(盧昐, 1437~1478)이다. 부친은 노우명(盧友明, 1471~1523)이며 외조부는 권시민(權時敏)이다.
+
This stele was bestowed in 1631 upon royal order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No Jin (1518-1578), a scholar and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이 신도비는 인조 9년(1631) 왕명으로 건립되었으며 비석의 비신(碑身)은 인조가 하사한 백색 대리석인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비문은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
+
After No Ji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46, he served several government posts. He was a filial son, volunteering for a local post in order to take care of his elderly mother. He served as the magistrate of several places, each time governing with benevolence. He was bestowed with the honorable title of Pure and Untarnished Official (''Cheongbaengni'') in recognition of his upright life.
  
크기는 비의 높이 328㎝, 비신의 높이 185㎝이고, 이수의 크기는 높이 78㎝, 너비 175㎝이다. 비두(碑頭)에는 구름 사이로 용 6마리가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이수 아래 좌대(座臺)의 정교한 조각이 있다.
+
The stele measures 3.28 m in height and consists of a tortoise-shaped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capstone is exquisitely carved to depict six dragons intertwined around a wish-fulfilling jewel among clouds. The inscription on the stele was composed by the great writer Yi Jeong-gu (1564-1635) and calligraphed by Sin Ik-seong (1588-1644), the son-in-law of King Seonjo (r. 1567-1608).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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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노진(1518-1578)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31년 왕명으로 건립되었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옥계 노진(玉溪 盧禛, 1518~1578)을 기리기 위해 인조 9년(1631) 왕명으로 건립되었다. 노진은 조선 초의 문신이자 풍천노씨의 개평마을 입향조인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의 증손이다. 명종 1년(1546)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지냈으나,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여러 차례 지방직을 자청하였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여러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며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혔다.  
+
노진은 1546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지냈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방직을 자청할 정도로 지극한 효자였다. 부임한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에 뽑혔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은 인조(재위 1623~1649)가 하사한 백색 대리석인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3.28m이다.
+
비석의 전체 높이는 3.28m로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 사이로 용 여섯 마리가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인 신익성(1588-1644)이 썼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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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유산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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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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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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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7월 12일 (월) 17:23 기준 최신판

함양 노진 신도비
Stele of No Jin, Hamyang
함양 노진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 노진 신도비
영문명칭 Stele of No Jin, Hamyang
한자 咸陽 盧禛 神道碑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32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지정일 1994년 7월 4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함양 노진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도비는 고인의 발자취를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노진 신도비는 인조 9년(1631)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졌다. 비석의 돌은 황해도에서 생산된 백색 대리석이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선조의 사위인 신익성이 글씨를 썼다.

옥계 노진(玉溪 盧禛)은 명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예조 및 이조판서를 지냈고 검소한 청백리와 지극한 효자로 선정되었다. 저서로는 『옥계문집』이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약 3.28m로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졌으며, 머릿돌에는 구름 사이로 용 여섯 마리가 뒤엉켜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받침돌에는 거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영문

Stele of No Jin, Hamyang

This stele was bestowed in 1631 upon royal order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No Jin (1518-1578), a scholar and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fter No Ji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46, he served several government posts. He was a filial son, volunteering for a local post in order to take care of his elderly mother. He served as the magistrate of several places, each time governing with benevolence. He was bestowed with the honorable title of Pure and Untarnished Official (Cheongbaengni) in recognition of his upright life.

The stele measures 3.28 m in height and consists of a tortoise-shaped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capstone is exquisitely carved to depict six dragons intertwined around a wish-fulfilling jewel among clouds. The inscription on the stele was composed by the great writer Yi Jeong-gu (1564-1635) and calligraphed by Sin Ik-seong (1588-1644), the son-in-law of King Seonjo (r. 1567-1608).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노진(1518-1578)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31년 왕명으로 건립되었다.

노진은 1546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지냈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방직을 자청할 정도로 지극한 효자였다. 부임한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에 뽑혔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28m로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 사이로 용 여섯 마리가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인 신익성(1588-1644)이 썼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