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노진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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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신도비는 고인이 살았을 때의 일들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는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그것은 동남쪽을 “신령의 길(神道)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신도비는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선생의 덕을 기리기위해 세운 것이다. 선생은 1546년(명종 원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를 시작으로 예조(禮曹) 및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선생은 평소에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여 청백리(淸白吏)로, 또 효자(孝子)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 비는 1631년(인조 9)에 임금의 명으로 건립되었다. 비석의 돌은 황해도에서 생산된 백색 대리석이다. 비문(碑文)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인 동양위(東陽慰) 신익선(申翊善)이 썼다. 비석의 머릿돌에는 구름 사이로 용 여섯 마리가 뒤엉켜 서로 여의주를 차지하려는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다. 거북받침(龜趺) 밑에 마련된 받침돌(臺座)의 정교한 조각은 당대(當代)의 걸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며, 대체로 신도비는 묘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 신도비는 경상남도 함양국 지곡면 평촌리에 있는 노진(盧禛, 1518~1578)의 신도비이다. 노진은 16세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자는 자응(子膺)이고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등으로 일컬어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의 증조부는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이고 조부는 노분(盧昐, 1437~1478)이다. 부친은 노우명(盧友明, 1471~1523)이며 외조부는 권시민(權時敏)이다.

이 신도비는 인조 9년(1631) 왕명으로 건립되었으며 비석의 비신(碑身)은 인조가 하사한 백색 대리석인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비문은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

크기는 비의 높이 328㎝, 비신의 높이 185㎝이고, 이수의 크기는 높이 78㎝, 너비 175㎝이다. 비두(碑頭)에는 구름 사이로 용 6마리가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이수 아래 좌대(座臺)의 정교한 조각이 있다.

1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옥계 노진(玉溪 盧禛, 1518~1578)을 기리기 위해 인조 9년(1631) 왕명으로 건립되었다. 노진은 조선 초의 문신이자 풍천노씨의 개평마을 입향조인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의 증손이다. 명종 1년(1546)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지냈으나,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여러 차례 지방직을 자청하였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여러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며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혔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은 인조(재위 1623~1649)가 하사한 백색 대리석인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3.28m이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인조 9년(1631) 왕명으로 건립'되었다는 내용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확인 필요.
    • 해중석을 인조가 하사했다는 내용도 근거 확인 필요.
    •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옥계 노진(玉溪 盧禛, 1518~1578)을 기리기 위해 인조 9년(1631) 왕명으로 건립되었다. 신도비는 고인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한때 임금의 신도비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주로 2품 이상 역임한 관원을 대상으로 세웠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으로 비석은 무덤의 앞이나 남동쪽에 세웠다.
    • 명종 1년(1546) 과거에 급제한 뒤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지냈으나,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여러 차례 지방직을 자청하였다.
    •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여러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고 청렴하여 살아서 청백한 관리에 뽑혔다.
    •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인조 9년(1631) 왕명으로 건립되었다. -> 지침에 의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현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1631년(인조9)”와 같이 표기함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지침이 정해졌다면, 지침 개정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명종 1년(1546)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지냈으나,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여러 차례 지방직을 자청하였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여러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며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혔다. -> “여러”가 세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뒤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방직을 자청할 정도로 효행이 뛰어났다. 부임한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에 뽑혔다.” 정도면 어떨까 합니다.
    •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은 인조(재위 1623~1649)가 하사한 백색 대리석인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3.28m이다. -> ‘비석의 규모와 비문으로 순서를 정하면 어떨까요.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은 인조(재위 1623~1649)가 하사한 백색 대리석인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3.28m이다.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마지막 문장의 전체 높이는 불필요한 정보입니다.
    • 거북이 형상의 좌대 위에 비를 세우고 그 위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된 머릿돌을 놓았다. 머릿돌의 뿔 없는 용머리와 그 아랫부분에 정교한 조각은 당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 이 정보는 이 비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첨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이 신도비가 왜 문화재급인지 설명이 되겠지요?

2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옥계 노진(玉溪 盧禛, 1518~1578)을 기리기 위해 인조 9년(1631)에 건립되었다. 노진은 조선 초의 문신이자 풍천노씨의 개평마을 입향조인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의 증손이다. 명종 1년(1546) 과거에 급제한 뒤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방직을 자청할 정도로 효행이 뛰어났다. 부임한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에 뽑혔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28m로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은 인조(재위 1623~1649)가 하사한 백색 대리석인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려고 다투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