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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일자 문화재 명칭 변경 : 한준 묘와 신도비(韓準 墓와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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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일 명칭 변경 예고, 2013년 5월 13일 변경 : 한준 묘와 신도비(韓準 墓와 神道碑)'''
  
조선시대의 문신 한준(韓準, 1542∼1601)묘역과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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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 한준(韓準, 1542∼1601)과 부인 완산최씨의 무덤이 자리한 묘역과, 한준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한준은 명종 21년(1566)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고발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렸고, 임진왜란 중 두 차례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한준은 명종 21년(1566)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고발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렸고, 임진왜란 중 두 차례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한준의 묘는 그와 부인 완산최씨의 무덤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두 봉분은 보호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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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자리한 두 봉분은 보호석을 둘렀으며, 이 중 왼쪽의 것이 한준의 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는데, 묘비는 최근에 새로 세운 것이다.
  
봉분 오른쪽 아래에는 한준의 신도비가 있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는 우의정이었던 허목(許穆, 1595~1682)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많이 손상되어 상단에 쓰인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자 외에는 판독이 어렵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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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의 오른편에 한준의 신도비가 있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는 우의정이었던 허목(許穆, 1595~1682)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많이 손상되어 상단에 쓰인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자 외에는 판독이 어렵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한준의 묘와 신도비는 본래 지금보다 남쪽에 있는 다른 봉우리에 있었는데, 이곳은 2000년대에 이루어진 도시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당시 강제로 이장될 위기에 처했던 것을 후손들이 노력하여 한언의 묘와 묘표(향토유적 제2호)가 있던 지금의 위치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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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 부부의 무덤과 한준의 신도비는 201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본래 묘역과 비석이 있던 청주한씨의 선영(先塋)이 2009년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강제로 이장될 위기에 처했었는데, 후손들이 노력하여 한언의 묘와 묘표(향토유적 제2호)가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묘비는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문중 소유의 산 일대가 2009년 부천 지역의 주택건설 사업지구로 선정되면서 청주한씨 선조들의 묘를 이장해야 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후손들의 노력으로 한준의 묘와 신도비는 2013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으로 이장 및 이전하였다고 한다. (문화재 지정 기념비 내용 요약) / 기념비에 한준 묘 기존 위치로 적혀 있던 ‘산 3-26’ 인근은 지금 위치에서 남쪽 방향에 있는 현 계수터널 인근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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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소유의 계수동 선영 일대가 2009년 부천 옥길지구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청주한씨 선조들의 묘를 이장해야 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후손들의 노력으로 지자체와 문중이 한언의 묘와 묘표, 2008년 이장해 온 한명진의 묘역, 한준의 묘와 신도비를 보존하는 데에 협의하였으며, 2013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으로 이장 및 이전하였다고 한다. (문화재 지정 기념비 내용 요약) / 기념비에 한준 묘 기존 위치로 적혀 있던 ‘산 3-26’ 인근은 현 계수터널 인근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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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왼쪽에 있는 비각은 한언의 묘표가 있는 곳이며, 한준 부부의 묘역 뒤편으로 한언 부부의 묘역과 한명진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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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1일 (월) 13:33 판

청천군 한준 신도비
청천군 한준 신도비, 경기문화재연구원.
대표명칭 청천군 한준 신도비
한자 淸平君 韓準 神道碑
주소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계수동 산 3-23번지
지정번호 부천시 향토유적 제3호



해설문

기존 국문

한준(韓準)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공칙(公則)이며, 호는 남강(南岡)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한수경(韓守慶)이고,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이며,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완산최씨(完山崔氏)이다. 1566년(명종 21)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듬해에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알리는 「고변서(告變書)」를 조정에 올린 공으로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이 되었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호조판서(戶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전임되었고, 1595년 사은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다시 명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써서 사자관(寫字官)을 지냈고, 광주(廣州)의 우언겸묘표(禹彦兼墓表)를 썼다. 1601년(선조 34)에 사망하였고 평소에 근면, 검소하여 장사를 치를 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한준 묘는 신도비와 함께 1998년 2월 5일 부천시 향토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정 국문

  1. 2012년 5월 2일 명칭 변경 예고, 2013년 5월 13일 변경 : 한준 묘와 신도비(韓準 墓와 神道碑)

조선시대의 문신 한준(韓準, 1542∼1601)과 부인 완산최씨의 무덤이 자리한 묘역과, 한준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한준은 명종 21년(1566)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고발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렸고, 임진왜란 중 두 차례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나란히 자리한 두 봉분은 보호석을 둘렀으며, 이 중 왼쪽의 것이 한준의 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는데, 묘비는 최근에 새로 세운 것이다.

봉분의 오른편에 한준의 신도비가 있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는 우의정이었던 허목(許穆, 1595~1682)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많이 손상되어 상단에 쓰인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자 외에는 판독이 어렵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한준 부부의 무덤과 한준의 신도비는 201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본래 묘역과 비석이 있던 청주한씨의 선영(先塋)이 2009년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강제로 이장될 위기에 처했었는데, 후손들이 노력하여 한언의 묘와 묘표(향토유적 제2호)가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 문중 소유의 계수동 선영 일대가 2009년 부천 옥길지구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청주한씨 선조들의 묘를 이장해야 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후손들의 노력으로 지자체와 문중이 한언의 묘와 묘표, 2008년 이장해 온 한명진의 묘역, 한준의 묘와 신도비를 보존하는 데에 협의하였으며, 2013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으로 이장 및 이전하였다고 한다. (문화재 지정 기념비 내용 요약) / 기념비에 한준 묘 기존 위치로 적혀 있던 ‘산 3-26’ 인근은 현 계수터널 인근으로 추정됨.
  • 묘역 왼쪽에 있는 비각은 한언의 묘표가 있는 곳이며, 한준 부부의 묘역 뒤편으로 한언 부부의 묘역과 한명진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1차 수정

영문

참고자료

  • 청천군 한준 신도비,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s://gjicp.ggcf.kr/archives/artwork/청천군-한준-신도비 → 이미지 출처 / 이 신도비는 비석 윗부분에 쓰인 “신도비명”이란 글자가 아니면 일반 비석으로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별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보존상태도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우의정 허목이 써서 오석에 새긴 글자는 마멸되어 판독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한준(韓準, 1542∼160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돈령부도정 한수경(韓守慶)과 정경부인 진주 유씨 사이의 외아들로 중종 37년(1542년) 11월 1일 태어났으며, 자를 공칙(公則), 아호를 남강(南崗)이라 하였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예조좌랑·장령·좌승지·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588년(선조 21) 우참찬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연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알리는 고변서(告變書)를 조정에 비밀장계로 올렸다. 그 공으로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이 되고 좌참찬에 올라 청천군(淸川君)에 봉하여졌다.1592년 임 진왜란 때 호조판서로 순화군(順和君)을 호종, 강원도로 피난하였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전임되었으며, 진하 겸 주문사(進賀兼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고, 1595년 사은 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써서 사자관(寫字官)을 지냈고, 광주(廣州)의 「우언겸묘표(禹彦謙墓表)」를 썼으며, 필적으로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평소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았으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죽은 뒤 장사를 치를 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조실록’에서 한준의 청렴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병으로 오랜 고생도 했지만 재물에 탐욕이 없었던 탓으로 조정에서 보내준 것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한준의 시호는 정익공(靖翼公)이다. 그는 모습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중후하고 말이 적어 한 때 ‘장덕거인(長德鉅人)’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천성이 사귀어 놀기를 즐겨하지 않고, 명성과 세도롤 회피하여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을 좋아하였다. 벼슬에 나가서는 나라가 평화로울때나 어려울 때를 막론하고 흔들리지 않는 지조를 보여 당시 사람들은 그의 됨됨이를 산악의 의연함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 한준 묘와 신도비,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한준_묘와_신도비 → 한준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부천시 계수동에 있다. 1998년 2월 5일 부천시의 향토문화재 제3호 한준 신도비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5월 2일 한준 묘와 신도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부천시 공고 제2012-43호,《부천시 향토유적 지정 및 보호구역 설정 예고(안) 공고]
  • (부천)이조판서 한준(韓準)묘‧신도비-청주한씨, 개미실 사랑방,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roaltlf/221441908505 → 2009년 일대가 주택건설 사업지구로 선정되면서 청주한씨 선조들의 모든 묘를 이장해야 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지자체와의 협의 끝에 2013년 산 3-26 소재 묘와 신도비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으로 이장 및 이전하였다.
  • [부천의 인물] 청주한씨 이양공(청평군)파 종중 한용진 회장, 부천신문, 2019.1.22. http://www.bucheon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5803 → 청주한씨 종중회장으로 처음 취임한 2011년 대규모 택지개발지구 내에 소재한(부천시 소사구 계수동 산3-22, 23) 분묘 이장 공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한용진 회장은 취임 후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한준 묘와 신도비를 한언 묘와 묘표가 있는 곳으로 이장하여 부천시 향토유적 지정과 보호구역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 - 한언 묘와 묘표(계수동 산3-23) 신도비가 아닌 묘표로 확인되었고, 묘와 묘표 함께 향토유적으로의 가치 인정받아 한언 묘로부터 반경 21M 구역 묘표로부터 반경 5M 보호구역 지정 - 한준 묘와 신도비(계수동 산3-22) 묘와 신도비와 향토유적으로의 가치 인정, 한준 묘로부터 반경 13M 구역 신도비로부터 반경 5M 보호구역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