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한준 묘와 신도비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한준(韓準)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공칙(公則)이며, 호는 남강(南岡)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한수경(韓守慶)이고,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이며,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완산최씨(完山崔氏)이다. 1566년(명종 21)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듬해에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알리는 「고변서(告變書)」를 조정에 올린 공으로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이 되었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호조판서(戶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전임되었고, 1595년 사은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다시 명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써서 사자관(寫字官)을 지냈고, 광주(廣州)의 우언겸묘표(禹彦兼墓表)를 썼다. 1601년(선조 34)에 사망하였고 평소에 근면, 검소하여 장사를 치를 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한준 묘는 신도비와 함께 1998년 2월 5일 부천시 향토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정 국문
초안
- 2012년 5월 2일 명칭 변경 예고, 2013년 5월 13일 변경 : 한준 묘와 신도비(韓準 墓와 神道碑)
조선시대의 문신 한준(韓準, 1542∼1601)과 부인 완산최씨의 무덤이 자리한 묘역과, 한준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한준은 명종 21년(1566)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고발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렸고, 임진왜란 중 두 차례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나란히 자리한 두 봉분은 보호석을 둘렀으며, 이 중 왼쪽의 것이 한준의 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는데, 묘비는 최근에 새로 세운 것이다.
봉분의 오른편에 한준의 신도비가 있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는 우의정이었던 허목(許穆, 1595~1682)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많이 손상되어 상단에 쓰인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자 외에는 판독이 어렵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한준 부부의 무덤과 한준의 신도비는 201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본래 묘역과 비석이 있던 청주한씨의 선영(先塋)이 2009년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강제로 이장될 위기에 처했었는데, 후손들이 노력하여 한언의 묘와 묘표(향토유적 제2호)가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 문중 소유의 계수동 선영 일대가 2009년 부천 옥길지구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청주한씨 선조들의 묘를 이장해야 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후손들의 노력으로 지자체와 문중이 한언의 묘와 묘표, 2008년 이장해 온 한명진의 묘역, 한준의 묘와 신도비를 보존하는 데에 협의하였으며, 2013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으로 이장 및 이전하였다고 한다. (문화재 지정 기념비 내용 요약) / 기념비에 한준 묘 기존 위치로 적혀 있던 ‘산 3-26’ 인근은 현 계수터널 인근으로 추정됨.
- 묘역 왼쪽에 있는 비각은 한언의 묘표가 있는 곳이며, 한준 부부의 묘역 뒤편으로 한언 부부의 묘역과 한명진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1차 수정
조선시대의 문신 한준(韓準, 1542~1601)의 묘와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한준은 청주한씨 중 부천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한언(韓堰, 1448~1492)의 4대손이다. 명종 21년(1566) 과거에 급제해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다. 선조 22년(1589)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던 당시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역모 사건을 고발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려 공신이 되었고, 임진왜란 중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평생 근면하고 검소하여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내려준 돈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한준의 묘는 부인 완산최씨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으며 왼쪽이 한준의 묘이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약간 동쪽에 있었는데, 2009년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201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묘 앞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려놓는 향로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을 갖추었다.
신도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는 우의정이었던 허목(許穆, 1595~1682)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바람에 손상되어 상단에 쓰인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자 외에는 판독이 어렵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