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 묘와 신도비
한준 묘와 신도비 Tomb and Stele of Han Jun |
|
대표명칭 | 한준 묘와 신도비 |
---|---|
영문명칭 | Tomb and Stele of Han Jun |
한자 | 韓準 墓와 神道碑 |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계수동 산 3-23번지 |
지정(등록) 종목 | 부천시 향토유적 제3호 |
|
해설문
국문
조선시대의 문신 한준(韓準, 1542~1601)의 묘와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한준은 청주한씨 중 부천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한언(韓堰, 1448~1492)의 4대손이다. 명종 21년(1566) 과거에 급제해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다. 선조 22년(1589)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던 당시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역모 사건을 고발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려 공신이 되었고, 임진왜란 중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평생 근면하고 검소하여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내려준 돈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한준의 묘는 부인 완산최씨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으며 왼쪽이 한준의 묘이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약간 동쪽에 있었는데, 2009년 주택건설 사업지구에 포함되면서 201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묘 앞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려놓는 향로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을 갖추었다.
신도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는 우의정이었던 허목(許穆, 1595~1682)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바람에 손상되어 상단에 쓰인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자 외에는 판독이 어렵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영문
Tomb and Stele of Han Jun
This is the tomb and stele of Han Jun (1542-1601),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tomb consists of two burial mounds: Han Jun’s mound to the left and his wife Lady Choe’s mound to the right. The tomb was originally located slightly to the east, but i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2013 due to urban development.
Han Jun was a great-great-grandson of Han Eon (1448-1492), the first person from the Cheongju Han Clan to settle in the Bucheon area.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66 and served various important posts. In 1589, when he served as a governor of Hwanghae-do Province, he earned the title of a meritorious subject by presenting to the royal court a document reporting on a treason plot by Jeong Yeo-rip (1546-1589).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Han participated in the diplomatic exchange between Korea with China. It is said that Han was a humble and hard-working person who did not seek material wealth, and so the money provided by the state after his death was just enough to organize his funeral.
The stone sculptures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include a tombstone, a table, an incense table, two pillars, a lantern, and two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and a roof-shaped capstone. It is said that the text of the stele, which commemorates Han Jun’s life and achievements, was calligraphed by the third state councilor Heo Mok (1595-1682). However, due to severe erosion, the text is barely legible. The stele is now housed in a pavilion.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한준(1542-1601)의 묘와 신도비이다. 두 봉분 중 왼쪽이 한준의 묘이고 오른쪽이 부인 완산최씨의 묘이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약간 동쪽에 있었는데, 도시개발에 따라 201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한준은 청주한씨 중 부천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한언(1448-1492)의 4대손이다. 1566년 과거에 급제해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다. 1589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던 당시 정여립(1546-1589)의 역모 사건을 고발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려 공신이 되었고, 임진왜란 중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평생 근면하고 검소하여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내려준 돈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한 쌍의 망주석, 장명등, 한 쌍의 문인석이 있다.
신도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한준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문의 글씨는 우의정이었던 허목(1595-1682)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이 어렵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있다.
참고자료
- 청천군 한준 신도비,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s://gjicp.ggcf.kr/archives/artwork/청천군-한준-신도비 → 이미지 출처 / 이 신도비는 비석 윗부분에 쓰인 “신도비명”이란 글자가 아니면 일반 비석으로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별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보존상태도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우의정 허목이 써서 오석에 새긴 글자는 마멸되어 판독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한준(韓準, 1542∼160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돈령부도정 한수경(韓守慶)과 정경부인 진주 유씨 사이의 외아들로 중종 37년(1542년) 11월 1일 태어났으며, 자를 공칙(公則), 아호를 남강(南崗)이라 하였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예조좌랑·장령·좌승지·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588년(선조 21) 우참찬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연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알리는 고변서(告變書)를 조정에 비밀장계로 올렸다. 그 공으로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이 되고 좌참찬에 올라 청천군(淸川君)에 봉하여졌다.1592년 임 진왜란 때 호조판서로 순화군(順和君)을 호종, 강원도로 피난하였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전임되었으며, 진하 겸 주문사(進賀兼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고, 1595년 사은 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써서 사자관(寫字官)을 지냈고, 광주(廣州)의 「우언겸묘표(禹彦謙墓表)」를 썼으며, 필적으로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평소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았으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죽은 뒤 장사를 치를 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조실록’에서 한준의 청렴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병으로 오랜 고생도 했지만 재물에 탐욕이 없었던 탓으로 조정에서 보내준 것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한준의 시호는 정익공(靖翼公)이다. 그는 모습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중후하고 말이 적어 한 때 ‘장덕거인(長德鉅人)’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천성이 사귀어 놀기를 즐겨하지 않고, 명성과 세도롤 회피하여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을 좋아하였다. 벼슬에 나가서는 나라가 평화로울때나 어려울 때를 막론하고 흔들리지 않는 지조를 보여 당시 사람들은 그의 됨됨이를 산악의 의연함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 한준 묘와 신도비,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한준_묘와_신도비 → 한준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부천시 계수동에 있다. 1998년 2월 5일 부천시의 향토문화재 제3호 한준 신도비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5월 2일 한준 묘와 신도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부천시 공고 제2012-43호,《부천시 향토유적 지정 및 보호구역 설정 예고(안) 공고]
- (부천)이조판서 한준(韓準)묘‧신도비-청주한씨, 개미실 사랑방, 네이버 블로그, 2019.01.24. https://blog.naver.com/roaltlf/221441908505 → 문화재 지정 기념비 내용 출처 ; 2009년 일대가 주택건설 사업지구로 선정되면서 청주한씨 선조들의 모든 묘를 이장해야 하는 위기가 있었으나, 지자체와의 협의 끝에 2013년 산 3-26 소재 묘와 신도비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으로 이장 및 이전하였다.
- [부천의 인물] 청주한씨 이양공(청평군)파 종중 한용진 회장, 부천신문, 2019.01.22. http://www.bucheon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5803 → 청주한씨 종중회장으로 처음 취임한 2011년 대규모 택지개발지구 내에 소재한(부천시 소사구 계수동 산3-22, 23) 분묘 이장 공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한용진 회장은 취임 후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한준 묘와 신도비를 한언 묘와 묘표가 있는 곳으로 이장하여 부천시 향토유적 지정과 보호구역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 - 한언 묘와 묘표(계수동 산3-23) 신도비가 아닌 묘표로 확인되었고, 묘와 묘표 함께 향토유적으로의 가치 인정받아 한언 묘로부터 반경 21M 구역 묘표로부터 반경 5M 보호구역 지정 - 한준 묘와 신도비(계수동 산3-22) 묘와 신도비와 향토유적으로의 가치 인정, 한준 묘로부터 반경 13M 구역 신도비로부터 반경 5M 보호구역 지정
- 한준, 디지털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273
- 한준 묘, 디지털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