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청주 최석정 묘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청주최석정묘소.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301690000&pageNo=1_1_1_1 청주...)
 
23번째 줄: 23번째 줄:
 
=='''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기존 국문===
+
없음.
 +
 
 
===수정 국문===
 
===수정 국문===
 
====초고====
 
====초고====
 +
이곳은 조선 후기 문신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묘이다.
 +
 +
그는 당시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문인으로, 167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의 신뢰를 받았으며 1710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
 +
1697년에는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을 일부라도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조선 전기에 폐위되었던 단종(1452~1455 재위)의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의리론,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
 +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조부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학문을 계승하여 정제두(鄭齊斗, 1649~1736)와 함께 당시 배척을 받고 있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저서로는 당시 폐단을 개선하라는 요구 등이 담긴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당시 사대부층의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
 +
묘소의 형태는 무덤 둘레를 보호하는 호석(護石)을 두른 봉토분으로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사망 당시 조성된 것이고, 석물은 그의 증손자대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묘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차 수정====
 
====1차 수정====
+
조선 후기 문신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묘이다.
 +
 
 +
최석정은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제자이다. 167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1674~1720 재위)의 신뢰를 받았으며 1710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
 
 +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의리론,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저서로는 당시 폐단을 개선하라는 요구 등이 담긴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당시 사대부층의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
 
 +
봉분 아래에는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석물은 최석정의 증손자대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
 
 
=='''참고자료'''==
 
=='''참고자료'''==
 +
* 청주 최석정 묘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301690000#
 +
* 최석정(崔錫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B2%AD%EC%A3%BC%20%EC%B5%9C%EC%84%9D%EC%A0%95%20%EB%AC%98%EC%86%8C&ridx=1&tot=496
 +
* 남구만(南九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2%A8%EA%B5%AC%EB%A7%8C&ridx=0&tot=34
 +
* 박세채(朴世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B0%95%EC%84%B8%EC%B1%84&ridx=0&tot=32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문화유산해설문]]

2020년 6월 9일 (화) 13:39 판


청주 최석정 묘소
청주 최석정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최석정 묘소
한자 淸州 崔錫鼎 墓所
주소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37-15
지정번호 충청북도 기념물 제169호
지정일 2019년 6월 7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수량/면적 1원
웹사이트 청주 최석정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조선 후기 문신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묘이다.

그는 당시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문인으로, 167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의 신뢰를 받았으며 1710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1697년에는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을 일부라도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조선 전기에 폐위되었던 단종(1452~1455 재위)의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의리론,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조부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학문을 계승하여 정제두(鄭齊斗, 1649~1736)와 함께 당시 배척을 받고 있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저서로는 당시 폐단을 개선하라는 요구 등이 담긴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당시 사대부층의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묘소의 형태는 무덤 둘레를 보호하는 호석(護石)을 두른 봉토분으로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사망 당시 조성된 것이고, 석물은 그의 증손자대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묘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차 수정

조선 후기 문신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묘이다.

최석정은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제자이다. 167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1674~1720 재위)의 신뢰를 받았으며 1710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의리론,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저서로는 당시 폐단을 개선하라는 요구 등이 담긴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당시 사대부층의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봉분 아래에는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석물은 최석정의 증손자대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