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청주 최석정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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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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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이곳은 조선 후기 문신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묘이다.
그는 당시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문인으로, 167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의 신뢰를 받았으며 1710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1697년에는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을 일부라도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조선 전기에 폐위되었던 단종(1452~1455 재위)의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의리론,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조부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학문을 계승하여 정제두(鄭齊斗, 1649~1736)와 함께 당시 배척을 받고 있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저서로는 당시 폐단을 개선하라는 요구 등이 담긴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당시 사대부층의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묘소의 형태는 무덤 둘레를 보호하는 호석(護石)을 두른 봉토분으로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사망 당시 조성된 것이고, 석물은 그의 증손자대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묘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차 수정
조선 후기 문신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묘이다.
최석정은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제자이다. 167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1674~1720 재위)의 신뢰를 받았으며 1710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의리론,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저서로는 당시 폐단을 개선하라는 요구 등이 담긴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당시 사대부층의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봉분 아래에는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석물은 최석정의 증손자대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조선 후기 소론계 정치인 겸 학자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 본관 ; 전주)의 묘소이다.
- 병자호란 당시 주화판 관료였던 최명길의 손자로, 타협적이고 개방적인 정치관을 지녔다. 사상적으로도 성리학 외에 양명학·음운학·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의리론과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당쟁의 폐단을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1671년(현종 12) 문과 급제 후 검열·우의정·영의정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단종복위를 성사시켰으며 격렬한 당쟁의 와중에도 소론의 대표로 1710년(숙종 36)까지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당면 현실의 해결 대안을 담은 시문집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의 저서가 있다.
- 사후 청주 대율리 최명길의 묘소 서쪽 구릉에 묻혔다. 1716년(숙종 42)에 만들어진 묘소는 둘레돌(護石)을 두르고 흙으로 쌓았으며, 석물은 1740년(영조 16) 경에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다. 조선 후기 사대부 묘제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청주 최석정 묘소 (淸州 崔錫鼎 墓所) → 최석정 묘소 (崔錫鼎 墓所)
- 수정이유: 청주 지명을 밝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정식 명칭만 기재하는 것이 적절하겠음.
- 최석정은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제자이다. → 최석정은 병자호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명길(崔鳴吉)의 손자이며,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제자이다.
- 수정이유: 최석정은 누구의 제자라는 사실보다 최명길의 손자라는 점이 그를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하다고 판단됨.
- 청주 최석정 묘소 (淸州 崔錫鼎 墓所) → 최석정 묘소 (崔錫鼎 墓所)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봉분 아래에는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막기 위해 -> 막기 위한)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2차 수정
조선 후기 문신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묘이다.
최석정은 최석정은 병자호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손자이며,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제자이다. 167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타협적이고 개방적인 정치관을 지녔고, 성리학 외에 양명학, 음운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소론의 영수로서 숙종(1674~1720 재위)의 신뢰를 받았으며 1710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의리론,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저서로는 당면 현실의 해결 대안을 담은 시문집인 『명곡집(明谷集)』,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를 연구한 『경세정운(經世正韻)』, 당시 사대부층의 수학관을 보여주는 『구수략(九數略)』 등이 있다.
봉분 아래에는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석물은 1740년 경에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