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선생 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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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인조·현종 시기의 문신 조경(趙絅, 1586~1669)과 부인 안동김씨의 합장묘다. | ||
− | + | 조경은 광해군 4년(161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이 폭정을 하자 거창으로 은거하였다. 인조 4년(1626)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거쳐 대제학 형조‧예조‧이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좌천‧강등‧파직‧하옥을 무릅쓰고 직간(直諫)을 서슴치 않은 강직한 성품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고 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문집 『용주유고(龍洲遺稿)』와 인조 21년(1643) 일본 통신사 행의 부사(副使)로 다녀와서 지은 『동사록(東槎錄)』을 남겼다. 묘소의 봉분 앞에는 비석이 서 있고,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 근래에 조성된 장명등과 망주석 등이 있다. 묘비에는 증직된 영의정 조경의 묘이며 정경부인 안동김씨를 합장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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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조선 인조·현종 시기의 문신 조경(趙絅, 1586~1669)과 부인 안동김씨의 합장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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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조경은 광해군 4년(161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이 폭정을 하자 거창으로 은거하였다. 인조 4년(1626)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거쳐 대제학 형조‧예조‧이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좌천‧강등‧파직‧하옥을 무릅쓰고 직간(直諫)을 서슴치 않은 강직한 성품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고 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문집 『용주유고(龍洲遺稿)』와 인조 21년(1643) 일본 통신사 행의 부사(副使)로 다녀와서 지은 동사록(東槎錄)을 남겼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간(文簡)의 시호를 받고 춘천의 문암서원‧포천의 용연서원‧흥해의 곡강서원에 배행되었다. 1984년에 중건된 이 사당은 정경부인 안동김씨와 함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1655년 기로소에 들 때 그린 영정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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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9일 (월) 17:30 판
조경 선생 묘 Tomb of Jo Gy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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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조경 선생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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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Jo Gyeong |
한자 | 趙絅 先生 墓 |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산1-1 |
지정번호 | 포천시 향토유적 제42호 |
지정일 | 1994년 5월 2일 |
소유자 | 사유 |
해설문
국문
조선 인조·현종 시기의 문신 조경(趙絅, 1586~1669)과 부인 안동김씨의 합장묘다.
조경은 광해군 4년(161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이 폭정을 하자 거창으로 은거하였다. 인조 4년(1626)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거쳐 대제학 형조‧예조‧이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좌천‧강등‧파직‧하옥을 무릅쓰고 직간(直諫)을 서슴치 않은 강직한 성품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고 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문집 『용주유고(龍洲遺稿)』와 인조 21년(1643) 일본 통신사 행의 부사(副使)로 다녀와서 지은 『동사록(東槎錄)』을 남겼다. 묘소의 봉분 앞에는 비석이 서 있고,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 근래에 조성된 장명등과 망주석 등이 있다. 묘비에는 증직된 영의정 조경의 묘이며 정경부인 안동김씨를 합장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별묘
조선 인조·현종 시기의 문신 조경(趙絅, 1586~1669)과 부인 안동김씨의 합장묘다.
조경은 광해군 4년(161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이 폭정을 하자 거창으로 은거하였다. 인조 4년(1626)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거쳐 대제학 형조‧예조‧이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좌천‧강등‧파직‧하옥을 무릅쓰고 직간(直諫)을 서슴치 않은 강직한 성품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고 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문집 『용주유고(龍洲遺稿)』와 인조 21년(1643) 일본 통신사 행의 부사(副使)로 다녀와서 지은 동사록(東槎錄)을 남겼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간(文簡)의 시호를 받고 춘천의 문암서원‧포천의 용연서원‧흥해의 곡강서원에 배행되었다. 1984년에 중건된 이 사당은 정경부인 안동김씨와 함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1655년 기로소에 들 때 그린 영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