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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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7일 (월) 15:45 판


해설문

국문

1789년(정조13)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수원읍의 관청으로 지었으며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행궁으로 썼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화산 아래 조성하면서 정조가 이곳에 머물기 시작했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역대 임금들이 이곳을 찾았다. 행궁은 왕이 도성을 벗어나서 머무는 곳을 가리키며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 행궁이나 북한산성 행궁, 온양 온천 행궁 등 여러 곳에 있었다. 전국의 행궁 가운데 화성행궁은 규모에서나 격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었다.

1793년(정조17) 수원읍의 명칭을 화성부로 고치고 그 장관인 유수는 한성 판윤과 같은 정2품 당상관으로 높였으며 이듬해 화성의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그와 함께 행궁도 규모를 크게 늘렸다. 1795년(정조19) 왕의 어머니인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치르면서 건물 이름도 고치고 건물도 새롭게 지었다. 정문인 신풍루를 들어서면 정당인 봉수당에 이르기까지 2개의 문을 지나도록 했으며 봉수당 뒤에는 장락당을 짓고 그 곁에는 유수가 거처하는 복내당을 갖추었다. 봉수당은 회갑연이 치러진 곳이고 장락당은 혜경궁이 머물던 곳이다. 봉수당 남쪽에는 왕이 머물던 유여택이 있고 북쪽에는 큰 행사를 벌이던 낙남헌이 자리 잡았다. 낙남헌 동쪽에는 객사인 우화관이 있다. 객사는 화성 유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서울에 계신 왕에게 절을 올리던 곳이다. 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의 자혜의원으로 활용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행궁 건물도 철거되어 사라지고 낙남헌만 남았다. 도립병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면서 1996년부터 발굴조사와 함께 사라졌던 건물의 복원이 추진되어 2002년에 옛 모습을 되찾았다. 2009년에는 행궁 앞에 광장이 마련되고 2015년 시립미술관이 건립되어 수원의 가장 중심이며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왕이 수원에 내려와 머물 때 거처로 삼았기 때문에 왕이 이동하며 사용하는 궁전이란 뜻으로 행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조선시대 수원(화성)의 시청사와 같은 곳이었다. 정문은 2층의 누각으로 되어 있고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중심 건물이 자리 잡았다. 모든 건물은 팔달산 아래 동쪽을 향하고 있다. 다만 북쪽에는 장관이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기 위해 마련한 건물이 있으며 이 건물만은 임금이 있는 북쪽에 자리 잡고 남향을 했다. 건물은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기던 1789년에 지어졌다. 1794년부터 화성의 축성을 시작하면서 이곳도 크게 증축해서 왕이 머물 충분한 공간을 확보했다. 1795년에는 왕의 어머니 60세 생일을 맞이하여 큰 잔치를 이곳에서 열었다. 20세기 초에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었다가 2002년 에 본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행궁 앞에 넓은 광장을 마련하여 수원시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