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김천계림사석조불보살좌상.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6700000 김천...)
 
 
(사용자 4명의 중간 판 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문화유산정보
|사진=김천계림사석조불보살좌상.jpg
+
|사진=김천계림사석조나한좌상.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6700000 김천 계림사 석조불보살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사진출처=작성자 류혜숙,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0724.010360818190001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 김천 개령면 감문산 계림사>, 영남일보, 2015.7.24.
|대표명칭=김천 계림사 석조불보살좌상
+
|대표명칭=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영문명칭=0
+
|영문명칭=Stone Seated Arhat of Gyerimsa Temple, Gimcheon
|한자=
+
|한자=金泉 鷄林寺 石造羅漢坐像
 
|주소=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1길 212
 
|주소=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1길 212
 
|소장처=
 
|소장처=
|지정번호=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0호
+
|지정번호=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1호
|지정일=2019년 3월 25일
+
|지정일=2014년 10월 20일
 
|분류=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분류=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소유자=
 
|소유자=
15번째 줄: 14번째 줄:
 
|시대=조선시대
 
|시대=조선시대
 
|제작시기=
 
|제작시기=
|수량/면적=3구
+
|수량/면적=1구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6700000 김천 계림사 석조불보살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6210000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위도=36.172769
 
|위도=36.172769
 
|경도=128.181521
 
|경도=128.181521
22번째 줄: 21번째 줄:
  
 
=='''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
===국문===
기존 문안 없음.
+
이 불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인 나한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인근 산기슭에 있었는데 계림사 경내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수정 국문===
+
높이 170cm, 너비 170cm, 두께 30cm 크기의 바위 표면에 나한의 모습이 3cm 정도 깊이로 얕게 양각되어 있다. 나한은 결가부좌하고 앉아 머리에 귀를 덮는 두건을 쓰고 있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엄지를 맞대고 있다. 이러한 모양은 다른 불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두건을 불상도 현재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적다.  
====초고====
 
계림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삼존불상은 1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보살이 앉아 있다.  
 
 
 
석가모니불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특히 왼손의 엄지와 중지가 서로 맞닿아 있는 모습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처음 설법할 때의 모양이다.
 
약사불은 두 손을 겹쳐 모아 배꼽 주변에 두었고, 보관을 보살상은 석가모니불과 방향만 반대일 뿐 동일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불상들은 모두 경상도 지역에서 많이 나는 희고 무른 재질의 불석(佛石)을 조각해 형태를 만든 후 그 위에 금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이나 옷 주름 표현 등을 비교해볼 때, 석가상과 보살상은 17세기 후반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승 승호(勝湖)의 계보를 이은 조각승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약사상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조각승 금문(金文)과 청윤(淸允)의 계보에 속한 조각승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사는 고구려의 승려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눌지왕 때인 419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후 조선 순조 때에 중창되었으며,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참고> 불석(佛石) : 제올라이트(Zeolites). 규산염의 일종으로 희고 무른 재질의 돌로 조각에 적합. 우리나라에서는 경북 경주, 포항 등에서 많이 나오는 듯. (기존 문화재 안내 문안 중 ‘경주에서 생산된 불석’이라는 설명 확인됨)
 
*<참고> 혜희스님의 계보 : 법령(1615-1641 : 17세기 초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서 활동한 조각승) → 혜희(1640-1677) → 금문(1655-1706), 마일(1655-1701), 청윤(1684-1716) → 세균(1703-1730), 여찬(1706-1746) (출처 : 김제...금복사 목조여래좌상, 옛님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daum.net/12977705/8726428)
 
 
 
====1차 수정====
 
  
 +
===영문===
 +
'''Stone Seated Arhat of Gyerimsa Temple, Gimcheon'''
  
 +
This Buddhist sculpture is presumed to have been made at the turn of the Goryeo (918-1392) and Joseon (1392-1910) periods. It is presumed to depict an arhat, or a person who has attained enlightenment through the teachings of the Buddha. It is said that the sculpture was originally located at the foot of the nearby mountain and was later moved to be enshrined inside Gyerimsa Temple.
  
 +
The image is carved in relief at a depth of about 3 cm on a boulder measuring 170 cm in height, 170 cm in width, and 30 cm in depth. The arhat is depicted seated with his legs crossed. His hands are clasped together with his thumbs pressed against each other. This hand gesture has not been seen in other Buddhist sculptures. He wears a hood over his head, which is also uncommon among extant Buddhist sculptures.
  
 +
===영문 해설 내용===
 +
이 불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인 나한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인근 산기슭에 있었는데 계림사 경내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
높이 170cm, 너비 170cm, 두께 30cm 크기의 바위 표면에 나한의 모습이 3cm 정도 깊이로 얕게 양각되어 있다. 나한은 결가부좌하고 앉아 머리에 귀를 덮는 두건을 쓰고 있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엄지를 맞대고 있다. 이러한 손 모양은 다른 불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두건을 쓴 불상도 현재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적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 지자체 제공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설명과 동일함)계림사 석가삼존불좌상은 1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계림사 대웅전에 봉안 중이다.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주존으로 향좌측에 약사불좌상, 향우측에 보살좌상이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촉지인의 수인을 결하며, 보살좌상은 양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승기지, 보살좌상은 승기지와 부견의, 대의를 걸친 모습이다. 3구의 불상은 모두 불석(拂石)으로 보이는 돌로 제작되었으며, 양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18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석가상과 보살상은 18세기 초반 승호파 조각승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반면 약사상은 금문(金文)-청윤(淸允)의 계보에 속한 조각승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김천의 문화재』, 78쪽. (김천시청 제공 자료)
*[[상주 상락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 → 본존불 수인 설명 인용 / 왼손 촉지인 차이 없다고 봄(확인 요.)
+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개령면 감문산 계림사, 영남일보, 2015.07.24.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0724.010360818190001 → 이미지 출처 / 계림사(鷄林寺)는 도리사와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때인 419년에 초창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이후 조선 후기에 중창될 때까지 계림사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순조 때 중창이 있었고, 1922년에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1990년대의 것이라 한다. 계림사의 창건에는 산의 기를 누르기 위해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닭 천 마리를 기르면 나쁜 일이 사라질 것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말대로 절을 짓고 닭을 기르자 안 좋은 일들은 모두 사라졌고, 이후 닭 기르기를 대신해 절 이름을 계림사(鷄林寺)로 고쳤다 한다. / 대웅전 옆 노천에 마애불이 한 분 계신다. 작은 절집이지만 꼭꼭 숨겨진 것처럼 자리하고 계신다. 높이가 170㎝, 두께 30㎝가량의 바위 표면에 3㎝ 정도의 깊이로 얇게 부조된 부처님이시다. 10년쯤 전, 인근 산기슭에 묻혀 있던 것이 홍수 때 발견되어 계림사에 모셨다 한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대부분 흐릿한데 손만이 뚜렷하다. 앙상한 두 손을 깍지 끼고 엄지를 맞대고 있는 수인으로 이 마애불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두건을 쓴 모습도 그 예가 매우 드물어 희귀한 마애불로 여겨진다.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두 손을 모은 모습이 너무나 간절하다. 누구의 기원이 깃들었기에 저리도 간절할까. 아주 빼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모습이다. 석공의 소원 같기도 하다.
*김천 계림사, story77616,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story77616/221766673237
+
* 김천 계림사, 낭만적 이데아, 네이버 블로그, 2019.10.23. https://blog.naver.com/pjk3108/221686032437  → 마애지장보살은 절 마당 왼편 언덕 위 솔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 '''홍수로 인해 토사가 쓸려 내려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옛 절터 기슭에 자리하고 있던 불상은 2004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안하여 모시고 있다고 한다. (이 포스팅 외에 정확한 날짜가 언급된 기록이 없으므로 본문에는 2000년대 초반으로 작성함 / 확인 요)'''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개령면 감문산 계림사, 영남일보, 2015.7.24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0724.010360818190001 → 대웅전에는 석가여래 삼존좌상과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데, 석가여래상의 복장기에 의하면 영조 4년인 1728년에 봉안했다고 한다. 상당한 연륜의 부처님이시다. : 맞는 설명인지 알 수 없음 (문화재청이나 지자체 제공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 정보이므로 인용 위험)
+
* 동부리 마애지장보살석불좌상,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0556
 
+
*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149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문화유산해설문]]

2022년 6월 9일 (목) 07:26 기준 최신판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Stone Seated Arhat of Gyerimsa Temple, Gimcheon
작성자 류혜숙,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 김천 개령면 감문산 계림사>, 영남일보, 2015.7.24.
대표명칭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영문명칭 Stone Seated Arhat of Gyerimsa Temple, Gimcheon
한자 金泉 鷄林寺 石造羅漢坐像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1길 212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1호
지정일 2014년 10월 20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구
웹사이트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불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인 나한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인근 산기슭에 있었는데 계림사 경내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높이 170cm, 너비 170cm, 두께 30cm 크기의 바위 표면에 나한의 모습이 3cm 정도 깊이로 얕게 양각되어 있다. 나한은 결가부좌하고 앉아 머리에 귀를 덮는 두건을 쓰고 있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엄지를 맞대고 있다. 이러한 손 모양은 다른 불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두건을 쓴 불상도 현재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적다.

영문

Stone Seated Arhat of Gyerimsa Temple, Gimcheon

This Buddhist sculpture is presumed to have been made at the turn of the Goryeo (918-1392) and Joseon (1392-1910) periods. It is presumed to depict an arhat, or a person who has attained enlightenment through the teachings of the Buddha. It is said that the sculpture was originally located at the foot of the nearby mountain and was later moved to be enshrined inside Gyerimsa Temple.

The image is carved in relief at a depth of about 3 cm on a boulder measuring 170 cm in height, 170 cm in width, and 30 cm in depth. The arhat is depicted seated with his legs crossed. His hands are clasped together with his thumbs pressed against each other. This hand gesture has not been seen in other Buddhist sculptures. He wears a hood over his head, which is also uncommon among extant Buddhist sculptures.

영문 해설 내용

이 불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인 나한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인근 산기슭에 있었는데 계림사 경내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높이 170cm, 너비 170cm, 두께 30cm 크기의 바위 표면에 나한의 모습이 3cm 정도 깊이로 얕게 양각되어 있다. 나한은 결가부좌하고 앉아 머리에 귀를 덮는 두건을 쓰고 있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엄지를 맞대고 있다. 이러한 손 모양은 다른 불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두건을 쓴 불상도 현재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적다.

참고자료

  • 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김천의 문화재』, 78쪽. (김천시청 제공 자료)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개령면 감문산 계림사, 영남일보, 2015.07.24.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0724.010360818190001 → 이미지 출처 / 계림사(鷄林寺)는 도리사와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때인 419년에 초창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이후 조선 후기에 중창될 때까지 계림사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순조 때 중창이 있었고, 1922년에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1990년대의 것이라 한다. 계림사의 창건에는 이 산의 기를 누르기 위해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닭 천 마리를 기르면 나쁜 일이 사라질 것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말대로 절을 짓고 닭을 기르자 안 좋은 일들은 모두 사라졌고, 이후 닭 기르기를 대신해 절 이름을 계림사(鷄林寺)로 고쳤다 한다. / 대웅전 옆 노천에 마애불이 한 분 계신다. 작은 절집이지만 꼭꼭 숨겨진 것처럼 자리하고 계신다. 높이가 170㎝, 두께 30㎝가량의 바위 표면에 3㎝ 정도의 깊이로 얇게 부조된 부처님이시다. 10년쯤 전, 인근 산기슭에 묻혀 있던 것이 홍수 때 발견되어 계림사에 모셨다 한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대부분 흐릿한데 손만이 뚜렷하다. 앙상한 두 손을 깍지 끼고 엄지를 맞대고 있는 수인으로 이 마애불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두건을 쓴 모습도 그 예가 매우 드물어 희귀한 마애불로 여겨진다.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두 손을 모은 모습이 너무나 간절하다. 누구의 기원이 깃들었기에 저리도 간절할까. 아주 빼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모습이다. 석공의 소원 같기도 하다.
  • 김천 계림사, 낭만적 이데아, 네이버 블로그, 2019.10.23. https://blog.naver.com/pjk3108/221686032437 → 마애지장보살은 절 마당 왼편 언덕 위 솔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 홍수로 인해 토사가 쓸려 내려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옛 절터 기슭에 자리하고 있던 불상은 2004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안하여 모시고 있다고 한다. (이 포스팅 외에 정확한 날짜가 언급된 기록이 없으므로 본문에는 2000년대 초반으로 작성함 / 확인 요)
  • 동부리 마애지장보살석불좌상,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0556
  •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