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천 계림사 석조나한좌상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마애불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에 유사한 도상이 제작된 예가 있어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인근 산기슭에 묻혀 있던 것을 홍수가 지나간 후 발견해 2000년대 초반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고,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과 가슴 부근에 있는 두 손의 모양이 확인되지만, 어떤 존상(尊像)을 표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귀를 덮는 두건을 쓰고 있는 불상은 지장보살(地藏菩薩),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인 나한(羅漢), 인도 출신의 고승인 승가대사(僧伽大師) 등의 사례가 있다. 그러나 두 손을 깍지낀 채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불상의 손 모양은 이 마애불 외에는 아직 확인된 예가 없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높이와 너비가 각각 170cm, 두께가 30cm 가량으로, 바위의 규모로 볼 때 단독 전각의 주존불(主尊佛)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며, 모든 중생을 구원할 때까지 성불을 미루는 보살이다.
- 승가대사는 당나라에서 전도에 전념하여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까지 추앙받았던 인도 출신의 고승이다.
- 계림사는 고구려의 승려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눌지왕 때인 419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후 조선 순조 때에 중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1990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도화상이 감문산의 호랑이 산세로 인해 흉악한 일이 자주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이곳에 절을 지은 후 닭 1천 마리를 길렀고, 이후 닭을 키우는 대신 절의 이름을 ‘계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1차 수정
이 불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인 나한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인근 산기슭에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에 계림사 경내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높이 170cm, 너비 170cm, 두께 30cm 크기의 바위 표면에 나한의 모습이 3cm 정도 깊이로 얕게 양각되어 있다. 나한은 결가부좌하고 앉아 머리에 귀를 덮는 두건을 쓰고 있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엄지를 맞대고 있다. 이러한 손 모양은 다른 불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두건을 쓴 불상도 현재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적다.
한편 두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을 지장보살 또는 승가대사(僧伽大師, 628~710)로 보는 의견도 있다. 지장보살은 저승세계인 명부(冥府)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보살이고, 승가대사는 인도 출신의 고승으로 당나라에서 불법을 펼쳐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 이 불상이 계림사 경내로 옮겨진 시기가 언제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보내주신 『김천의 문화재』 자료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모두 ‘10여 년 전’이라고 하는데 어느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문화재 지정 시기를 기준으로 두 자료가 작성되었다는 가정 아래 ‘2000년대 초반’이라고 적었으나, 정확한 연도를 확인해서 적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