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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사(神光寺)의 인공 석굴 안에 모셔져 있는 이 붙상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9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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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불상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으며, 불상이 앉아 있는 8각 받침대[臺座]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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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1930년대에 인근에서 논을 개간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50년대에 지금의 자리에 신광사의 전신(前身)인 석불암(石佛庵)을 세워 안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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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에서 이 불상이 발견되자 통영 안정사에서 이 석불을 모셔가고자 했는데, 10m가량 이동한 후 석불이 꿈쩍도 하지 않아 지금의 자리에 불전을 조성하고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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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의종(毅宗, 1127~1173)이 1170년 거제도에 유배를 오게 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폐왕성(廢王成)을 쌓고 3년간 머물 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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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당시 목이 부러져 있었고, 귀·코·손가락 부분이 파손돼 있었다. 불대좌는 중대석이 없이 발견되어 후에 새로운 부재로 교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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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7일 (월) 11:08 판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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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영문명칭 0
한자 巨濟 烏良里 石造如來坐像
주소 경상남도 거제시 오량2길 108 (사등면, 신광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지정일 1972년 2월 12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좌
웹사이트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불상은 1950년 무렵에 석불암石佛庵 앞 산밑에서 논을 개간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된 뒤, 이 곳 석불암에 모셔지게 되었다. 석불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계란형의 단아하고 근엄함 인상이었다. 왼쪽 어깨偏袒左肩에 걸친 옷자락法衣은 몸에 바짝 붙어있고 옷 주름의 조각도 촘촘히 표현되어 어느 정도 입체감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어깨 부분을 너무 각이 지게 처리하여 풍성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잃어 버렸다. 손 모양은 부처가 악마를 누르고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을 상징한다는 모습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本尊佛과 같이 가부좌跏趺坐를 한 불상에서만 볼 수 있다. 상체가 왜소하게 보이는데 비해 하체는 상대적으로 길고 높게 표현하여,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받침대는 통일신라 말기에 볼 수 있는 8각 연꽃무늬 받침대 양식이다. 불상의 조성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초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신광사(神光寺)의 인공 석굴 안에 모셔져 있는 이 붙상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92cm이다.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불상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으며, 불상이 앉아 있는 8각 받침대[臺座]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이 불상은 1930년대에 인근에서 논을 개간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50년대에 지금의 자리에 신광사의 전신(前身)인 석불암(石佛庵)을 세워 안치하였다고 한다.

  • 절골에서 이 불상이 발견되자 통영 안정사에서 이 석불을 모셔가고자 했는데, 10m가량 이동한 후 석불이 꿈쩍도 하지 않아 지금의 자리에 불전을 조성하고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고려 의종(毅宗, 1127~1173)이 1170년 거제도에 유배를 오게 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폐왕성(廢王成)을 쌓고 3년간 머물 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출토 당시 목이 부러져 있었고, 귀·코·손가락 부분이 파손돼 있었다. 불대좌는 중대석이 없이 발견되어 후에 새로운 부재로 교체하였다.

1차 수정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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