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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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불상은 1950년 무렵에 석불암石佛庵 앞 산밑에서 논을 개간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된 뒤, 이 곳 석불암에 모셔지게 되었다. 석불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계란형의 단아하고 근엄함 인상이었다. 왼쪽 어깨偏袒左肩에 걸친 옷자락法衣은 몸에 바짝 붙어있고 옷 주름의 조각도 촘촘히 표현되어 어느 정도 입체감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어깨 부분을 너무 각이 지게 처리하여 풍성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잃어 버렸다. 손 모양은 부처가 악마를 누르고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을 상징한다는 모습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本尊佛과 같이 가부좌跏趺坐를 한 불상에서만 볼 수 있다. 상체가 왜소하게 보이는데 비해 하체는 상대적으로 길고 높게 표현하여,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받침대는 통일신라 말기에 볼 수 있는 8각 연꽃무늬 받침대 양식이다. 불상의 조성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초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신광사(神光寺)의 인공 석굴 안에 모셔져 있는 이 붙상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92cm이다.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불상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으며, 불상이 앉아 있는 8각 받침대[臺座]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이 불상은 1930년대에 인근에서 논을 개간하던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50년대에 지금의 자리에 신광사의 전신(前身)인 석불암(石佛庵)을 세워 안치하였다고 한다.

  • 절골에서 이 불상이 발견되자 통영 안정사에서 이 석불을 모셔가고자 했는데, 10m가량 이동한 후 석불이 꿈쩍도 하지 않아 지금의 자리에 불전을 조성하고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고려 의종(毅宗, 1127~1173)이 1170년 거제도에 유배를 오게 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폐왕성(廢王成)을 쌓고 3년간 머물 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출토 당시 목이 부러져 있었고, 귀·코·손가락 부분이 파손돼 있었다. 불대좌는 중대석이 없이 발견되어 후에 새로운 부재로 교체하였다.

1차 수정

오량리 석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이 불상은 1930년 무렵 오량리 절골마을의 논에서 괭이질 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불상은 목이 부러져 있고 귀와 코, 손가락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다. 이후 1950년대에 마을 주민들이 지금 자리에 신광사의 전신(前身)인 석불암(石佛庵)을 세워 안치하였다고 한다.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불상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으며, 불상이 앉아 있는 8각 대좌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이 불상은 1930년 무렵 오량리 절골마을의 논에서 괭이질 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 목이 부러져 있고 --> 목이 부러져 있었고
    •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데, -->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 앞에 두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1.문화재 안내 문안 전면 재작성이 필요함.
    • 2.불상이 자리한 환경과 유래에 대한 설명
    • 3.대좌와 관련된 내용을 더 추가할 것
    • 4.좌상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음. 석가여래좌상으로 명칭 변경 고려
    • 첫 문장은 생략, 머리, 가슴, 대좌의 형태를 순차적으로 요약 설명할 필요가 있음
    • 법의 -> 대의
  1.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오량리 석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오량리 석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여래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다. 불상의 8각 연꽃 받침대와 불상 조성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2차 수정

오량리 석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이 불상은 1930년 무렵 오량리 절골마을의 논에서 괭이질 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불상은 목이 부러져 있었고 귀와 코, 손가락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다. 이후 1950년대에 마을 주민들이 지금 자리에 신광사의 전신(前身)인 석불암(石佛庵)을 세워 안치하였다고 한다.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 앞에 두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으며, 부처가 앉아 있는 8각 대좌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