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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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Stone Seated Buddha in Oryang-ri, Geoje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영문명칭 Stone Seated Buddha in Oryang-ri, Geoje
한자 巨濟 烏良里 石造如來坐像
주소 경상남도 거제시 오량2길 108 (오량리, 신광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지정일 1972년 2월 12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좌
웹사이트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이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래(如來)는 ‘깨달음을 통한 진리를 보여주러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공덕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이 불상은 1930년 무렵 오량리 절골마을의 논에서 괭이질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불상은 목이 부러져 있었고 귀와 코, 손가락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다. 이후 1950년대에 지금의 자리에 신광사의 전신(前身)인 석불암(石佛庵)을 세워 안치하였다고 한다.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 앞에 두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귀의 유혹을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으나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으며, 부처가 앉아 있는 8각 대좌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결가부좌 : 가부좌(오른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얹은 다음 왼발을 오른 허벅지 위에 얹어 앉는 자세)의 자세로 앉는 법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영문

Stone Seated Buddha in Oryang-ri, Geoje

This stone statue depicts a buddha seated with his legs crossed. It is presumed to have been made at the turn of the Unified Silla (668-935) and Goryeo (918-1392) periods.

This statue was found around 1930 in a rice paddy in Jeolgol Village, Oryang-ri, by a farmer. At the time of its discovery, the head of the statue had toppled over and its ears, nose, and the part of its fingers were destroyed. It is said that in the 1950s, local residents built Seokburam Hermitage (today’s Singwangsa Temple) at its current location to enshrine the statue.

The right hand of the buddha reaches down toward the ground, while the left hand is in front of the stomach, indicating his defeat of worldly desires and his attainment of spiritual enlightenment. Due to severe erosion, the facial features cannot be verified, and the three creases encircling the neck, which represent the “three destinies” of afflictions, actions, and suffering, are faint. The outer robes drape across only the left shoulder. The statue sits atop an octagonal pedestal engraved with lotus designs.

영문 해설 내용

이 불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1930년 무렵 오량리 절골마을의 논에서 괭이질 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불상은 목이 부러져 있었고, 귀, 코, 손가락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다. 이후 1950년대에 마을 주민들이 지금 자리에 신광사의 전신(前身)인 석불암을 세워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부처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 앞에 두었는데, 이는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고,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으며, 부처가 앉아 있는 8각 대좌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참고자료

  • 거제 오량리 석조여래좌상, 경상남도 문화재 DB, 경남관광길잡이 http://tour.gyeongnam.go.kr/index.gyeong?menuCd=DOM_000009404005001000&no=284&page_no=1429&reurl=DOM_000009404005000000 → 1950년경에 오량리 절골의 석불암 앞산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거제도에서 이런 큰 불상이나온 것은 드문 일인데, 1170년에 고려 의종이 거제도에 폐왕성廢王成을 쌓고 3년간 머물면서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백분이 두껍게 발려 있으며, 생경한 인상을 보이는 얼굴은 아마도 훼손되어 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리를 세워 정면관을 하고 있으며, 어깨는 높고 허리는 잘록하며 결가부좌한 다리는 무릎이 두툼하여 하반신이 둔중하게 보인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손을 무릎 위로 올리고 손가락이 아래로 향하고 있으며 배 앞의 왼손은 다리 위에 놓여 있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편단우견식으로 입었으며, 가슴과 왼쪽 팔 위에는 균등하고 밀집된 옷주름선이 있다. 결가부좌하여 양발이 다리 위로 올라와 있으며, 다리에는 역 C자형의 옷주름이 선각되어 있다. 또한 다리 사이로는 부채꼴 모양의 옷자락도 표현되어 있다. 이 상이 앉아 있는 3층 기단의 대좌(臺座)는 큼직한 복판의 연잎이 새겨진 상대석과 하대석만 남아 있고 현재의 중대석은 후대에 제작한 것이다. 경직되어 보이는 어깨와잘록한 허리, 둔중한 하반신의 신체 표현, 가슴과 팔 위에 드러나는 밀집된 옷주름, 다리위에 역 C자형의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고려 초의 불상의 양식적 특징으로, 고려 초를 전후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거제의 석굴암 – 오량석조여래좌상, 새거제신문, 2014.5.19. http://www.saegeoj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6757 → 거제시지와 사등면지에 따르면 오량석조여래좌상은 1930년경 오량리 절골마을에 있던 현 신광사 아래쪽 논에서 괭이질 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발견 당시 불상은 목이 부러져 있고 귀와 코, 손가락 부분은 훼손됐으며 불상의 하연좌대와 상연좌대만 발견되고 상ㆍ하 연좌대를 잇는 8각 좌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석불이 발견된 지 20여 년이 지난 1950년경 통영출신 유지 송 모 씨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석불을 안치할 법당과 불단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석불암’이라 지었는데 이 과정엔 마을 주민들로부터 전해오는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석불이 출토된 후 마을 주민들은 석불에 집안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했는데 석불의 영험한 기운 탓인지 마을 사람들의 기도가 모두 이뤄지자 통영의 안정사에서 소문을 듣고 석불을 옮겨가려 했다. 10여 리를 옮기던 도중 안정사 스님들은 휴식을 위해 쉬었다가 다시 불상을 옮기려 했지만 불상은 말 그대로 ‘돌부처’가 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후 불상은 ‘석불암’에 옮겨졌다가 지난 1972년 2월 동아대학교의 도움으로 고려시대 불상으로 확인한 뒤 문화재로 지정됐다.
  • 사찰 소개, 신광사 홈페이지 http://shingwangsa.or.kr/bbs/content.php?co_id=about → 신광사(神光寺)의 성보 중 '오량석조여래좌상(烏良石造如來坐像)'은 1930년대 지금의 해수 관음상이 모셔진 연못을 파던 중 출토되어 오늘날 '삼천불조오십삼불전(三千佛祖五十三佛殿)'에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의 위치에 목조 3간 집을 지어 석불을 모셔두고 석불암이라 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신광사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오량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신광사의 이모저모, 역사와 야생화, 다음 블로그, 2016.10.4. https://blog.daum.net/win690/15938395 → 사진 상세 / 절골에서 이 불상이 발견되자 통영 안정사에서 이 석불을 모셔가고자 했는데, 10m가량 이동한 후 석불이 꿈쩍도 하지 않아 지금의 자리에 불전을 조성하고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