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도동서원
김천 도동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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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천 도동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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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 道東書院 |
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481-2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63호 |
지정(등록)일 | 2018년 7월 16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
수량/면적 | 1동, 130.97㎡ |
웹사이트 | 김천 도동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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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김천 도동서원은 연안이씨 가문의 문중 서원으로, 연안이씨 선조 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오현원(五賢院)’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곳은 이숭원(李崇元, 1428~1491)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 영조 47년(1771)에 사당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이숙기(李淑琦, 1429~1489)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후 정조 20년(1796)에 이숙기의 증손자 이호민(李好悶, 1553~1634)을, 이듬해(1797)에는 이숙기의 동생 이숙함(李淑瑊, 1429~?)과 그의 증손자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도동서원은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으며,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1918년 후손 이경균(李璟均, 1850~1922)이 강당인 명례당(明禮堂)을 재건해 서당으로 명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하였으며, 전면에 툇마루를 달고, 대청 배면에는 열고 닫을 수 있는 판벽을 세웠다.
- 이숭원은 중종 대에 청백리로 뽑힌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아버지 이보정의 대를 이어 김천 구성면 상좌원리에 정착하여 현재 이 마을에 세거하는 충간공파의 파조가 된다.
이숙기는 연안이씨 중 김천 지역에 처음 정착한 이말정(1395~1461)의 넷째 아들이자 상원리에 세거하는 정양공파의 파조로, 세조 13년(1467) 함경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호민은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조선의 안정을 위한 명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남인과 노론의 당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중의식으로 극복한 흔치 않은 사례이다. => 도동서원의 운영에는 이숙기의 후손인 정양공파와 이숭원의 후손 충간공파가 공동으로 참여하였는데, 상좌원리에 세거하던 이숭원의 후손은 영남 노론 학단을 대표했고, 상원리에 세거하던 이숙기의 후손은 남인 계열에 속했다고 한다.
- 서원이 사라질 때 이숭원의 위패와 초상화는 상좌원리의 충효당(忠孝堂)으로 옮겼고, 이숙기의 위패는 상원리의 명성재[별칭 경호영당]로 옮겨 모셨다. 현재 충효당에는 1907년에 배향한 이장원(李長源)의 위패를 왼쪽에, 1929년에 배향한 이민관(李民觀)의 위패를 오른쪽에 두고 제사를 드리고 있다. 충효당 건물은 1954년 연안이씨 가문의 후손이 보수하였다.
이숭원의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이숭원 초상화)은 충효당에 임시로 모셨다가 고종 14년(1897) 옆에 경덕사를 새로 짓고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원본은 현재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1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도동서원은 이숭원(李崇元, 1428~1491), 이숭원과 사촌인 이숙기(李淑琦, 1429~1489)와 이숙감(李淑瑊, ?~?), 이숙기의 증손자인 이호민(李好悶, 1553~1634), 이숙감의 증손자인 이후백(李後白, 1520~1578) 등 연안이씨 가문의 선조 5명을 기리던 서원이다. ‘다섯 현인을 모신 서원’이라는 뜻에서 ‘오현원(五賢院)’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연안이씨 5세 이보정(李補丁, 1393~1456)과 이말정(李末丁, 1395~1461) 형제가 처음 김천 지역에 정착한 뒤 이보정의 아들 이숭원과 이말정의 아들 이숙기, 이숙감이 조정에 진출하여 고위 관직을 지내면서 연안이씨는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 사대부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후손들이 구성면 상좌원리와 상원리 지역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도동서원의 역사는 인조 26년(1648) 이숭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시작되었다. 영조 47년(1771)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서원을 지으면서 이숙기를 추가로 모셨고, 정조 20년(1796)에는 이호민을, 이듬해(1797)에는 이숙감과 이후백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리자 연안이씨 후손들은 선조를 모시는 제향공간과 교육을 담당하는 강학공간을 분리하기로 하였다. 이숭원의 후손들이 주로 모여 사는 상좌원리에는 고종 34년(1897) 경덕사를 세워 이숭원의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을 모셨고, 이숙기의 위패는 그의 후손들이 사는 상원리 원터마을에 옮겨 모셨다. 도동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1918년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경균(李璟均, 1850~1922)이 강당인 명례당(明禮堂)을 다시 지었다. 현재 경내에는 외문과 명례당만 남아 있다.
- 이숭원은 단종 1년(1453)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성종(1469~1494 재위)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이숙기는 단종 1년(1453) 무과에 급제하였고, 세조(1455~1468 재위)가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세조 13년(1467)에는 함길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여 다시 공신이 되었고 이후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숙감은 단종 2년(1454)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균관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참고자료
- 김천 도동서원, 『김천의 문화재』, 81쪽. (김천시청 제공 자료)
- 연안이씨,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0740 → 연안이씨 김천 입향조는 중시조로부터 5세(世)인 이보정과 이말정이다. 이보정의 후손은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이말정의 후손은 구성면 상원리와 부항면 사등리에 집성촌을 이루면서 상좌원파(上左院派)를 형성했다. 이보정은 조선 전기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했고 이들 이숭원(李崇元)은 성종 때 예빈소윤(禮賓少尹)을 지낸 뒤 구성면 상원리에 입향했다. 이말정의 4남인 이숙기(李淑琦)는 호조판서를 지내고, 좌리공신으로 녹권되는 등 조선 말까지 명문가로서 김천의 대표적인 사대부가로 불렸다.
- 상원리·상좌원리 연안이씨 문중 가례,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dir/GC03201642 -> 붕당과정에서 남인계열에 선 상좌원리에서는 노론계를 따른 맞은편 상원리 연안이씨와 정치, 학문적으로는 차이를 보였으나 관혼상제를 비롯한 예(禮)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
- 도동서원, 서원연합회. http://www.seowonstay.com/bbs/board.php?bo_table=slist&wr_id=1022 → 1648년(인조 26) 연안 이씨 문중은 상좌원리의 현조이자 불천위인 충간공 이숭원을 제향하기 위해 도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이후 1771년(영조 47)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 그 해 이숭원을 불천위로 하여 정양공 이숙기를, 1796년(정조 20) 이숙기의 증손이면서 예조판서를 지낸 문희공 이호민을, 다음 해 이숙기의 동생 문장공 이숙함을, 이숙기의 증손 문청공 이후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5명이 배향되면서 도동서원(道洞書院)은 ‘오현원(五賢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의 실시로 훼철되었다. 훼철 과정에서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을 분리하여 유지·지속시키고자 했다. 훼철 직후 상좌원리 충간공파 종중은 이숭원의 영정을 이장원의 재실이었던 충효당에 임시로 이전하였다. 그 뒤 1897년(고종 14) 상좌원에 경덕사를 세워 이숭원의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현재 명칭 이숭원 초상화]을 모셨다. 현재 경덕사에는 이숭원뿐 아니라 상좌원리의 중시조 이장원[1560~1649], 도동서원 건립에 노력한 이민관을 배향하고 있다. 상원리 종중에서는 이숙기의 위폐를 이숙기 후손들이 거주하는 원터마을로 옮겨 명성재[별칭 경호영당]에 모셨다. 그 뒤 1918년 이경균[1850~1922]의 주도로 도동서원 옛 강당터에 명례당을 재건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 이숭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920
- 이숙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874
- 이숙함(이숙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884
- 이호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549
- 이후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655
- 이시애의 난 진압 공신록에 오른 이숙기 선생 불천위 모셔, 경북일보, 2011.06.02.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1149 → 이 마을에 연안이씨들이 세거하게 된 것은 조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말정(1395~1461)이 낙향하면서부터다. 이말정은 지품에 내려온지 얼마안돼 감천이 범람하면서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자 거창군 모곡면(못질)으로 이사했다. 이후 다시 지품으로 돌아와 별세했다. / 그의 다섯 아들 중 숙황, 숙형, 숙규, 숙기는 문과에, 숙함은 무과에 각각 급제해 요직에 등용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동량이 됐다. 불천위 이숙기(1429~1489)는 이말정의 넷째아들로 본관은 연안이고 시호는 정양이다. 1453년(단종1)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고 같은해 무과에 장원급제했으며 이조참판과 호조참판을 지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당시 전북장군 강순 휘하의 맹폐장으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특진되고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됐다. 이숙기는 공신책록을 통해 나라에서 부조의 명을 내린 국천불위다. 매년 음력 11월 4일이 불천위 기일이며 그 비위의 기은 음력 4월 10일이다. 종택에서는 고조고비위 3위를 포함해 총 11회의 4대조 기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정월 설날과 팔월추석에는 차사(茶祀)를 지낸다. 예전에는 단오와 한식에도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 [종가] 34. 김천 연안 이씨 정양공파, 경북일보, 2016.11.06.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5507 → 김천시 구성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연안 이씨는 정양공 이숙기를 현조로 하는 정양공파와 충간공 이숭원을 현조로 하는 충간공파로 갈라진다. 원래 연안 이 씨는 지금의 서울시 중구 필동 일대를 기반으로 세거해왔으나, 1400년 무렵 연성부원군 이말정이 김천시 구성면 지품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김천지역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이말정의 후손들은 지품 마을의 인근으로 점차 확산해 갔는데, 특히 황계천을 사이에 둔 상원리와 상좌원리에 밀집해 있다. 그중에서도 상원리에는 정양공파 후손들이, 상좌원리에는 충간공파 후손들이 터를 잡았다.
- [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24] 구성면 이숭원 초상화, 영남일보, 2013.09.24.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30924.010150744530001 -> (요약)방계 후손 이호민의 꿈에 이숭원이 나타난 이후 문중의 후손들이 세거하던 상좌원리의 도동서원으로 초상화가 모셔졌다. / 이숭원의 초상화는 19세기 중반 서원철폐령으로 상좌원리의 충효당으로 옮겨졌다. 1897년 후손인 학계(鶴溪) 이규성(李圭性)이 경덕사를 지어 영정과 위패를 모시면서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됐다.
- 김천 도동서원, 사랑이 메아리치는 집, 다음 블로그, 2020.01.26. https://blog.daum.net/kakhabang/2371 → 서원 사진 비교적 상세 / 충효당, 경덕사 정보 확인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