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천 도동서원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김천 도동서원은 연안이씨 가문의 문중 서원으로, 연안이씨 선조 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오현원(五賢院)’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곳은 이숭원(李崇元, 1428~1491)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 영조 47년(1771)에 사당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이숙기(李淑琦, 1429~1489)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후 정조 20년(1796)에 이숙기의 증손자 이호민(李好悶, 1553~1634)을, 이듬해(1797)에는 이숙기의 동생 이숙함(李淑瑊, 1429~?)과 그의 증손자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도동서원은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으며,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1918년 후손 이경균(李璟均, 1850~1922)이 강당인 명례당(明禮堂)을 재건해 서당으로 명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하였으며, 전면에 툇마루를 달고, 대청 배면에는 열고 닫을 수 있는 판벽을 세웠다.
- 이숭원은 중종 대에 청백리로 뽑힌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아버지 이보정의 대를 이어 김천 구성면 상좌원리에 정착하여 현재 이 마을에 세거하는 충간공파의 파조가 된다.
이숙기는 연안이씨 중 김천 지역에 처음 정착한 이말정(1395~1461)의 넷째 아들이자 상원리에 세거하는 정양공파의 파조로, 세조 13년(1467) 함경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호민은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조선의 안정을 위한 명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남인과 노론의 당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중의식으로 극복한 흔치 않은 사례이다. => 도동서원의 운영에는 이숙기의 후손인 정양공파와 이숭원의 후손 충간공파가 공동으로 참여하였는데, 상좌원리에 세거하던 이숭원의 후손은 영남 노론 학단을 대표했고, 상원리에 세거하던 이숙기의 후손은 남인 계열에 속했다고 한다.
- 서원이 사라질 때 이숭원의 위패와 초상화는 상좌원리의 충효당(忠孝堂)으로 옮겼고, 이숙기의 위패는 상원리의 명성재[별칭 경호영당]로 옮겨 모셨다. 현재 충효당에는 1907년에 배향한 이장원(李長源)의 위패를 왼쪽에, 1929년에 배향한 이민관(李民觀)의 위패를 오른쪽에 두고 제사를 드리고 있다. 충효당 건물은 1954년 연안이씨 가문의 후손이 보수하였다.
이숭원의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이숭원 초상화)은 충효당에 임시로 모셨다가 고종 14년(1897) 옆에 경덕사를 새로 짓고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원본은 현재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1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도동서원은 이숭원(李崇元, 1428~1491), 이숭원과 사촌인 이숙기(李淑琦, 1429~1489)와 이숙감(李淑瑊, ?~?), 이숙기의 증손자인 이호민(李好悶, 1553~1634), 이숙감의 증손자인 이후백(李後白, 1520~1578) 등 연안이씨 가문의 선조 5명을 기리던 서원이다. ‘다섯 현인을 모신 서원’이라는 뜻에서 ‘오현원(五賢院)’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연안이씨 5세 이보정(李補丁, 1393~1456)과 이말정(李末丁, 1395~1461) 형제가 처음 김천 지역에 정착한 뒤 이보정의 아들 이숭원과 이말정의 아들 이숙기, 이숙감이 조정에 진출하여 고위 관직을 지내면서 연안이씨는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 사대부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후손들이 구성면 상좌원리와 상원리 지역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도동서원의 역사는 인조 26년(1648) 이숭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시작되었다. 영조 47년(1771)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서원을 지으면서 이숙기를 추가로 모셨고, 정조 20년(1796)에는 이호민을, 이듬해(1797)에는 이숙감과 이후백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리자 연안이씨 후손들은 선조를 모시는 제향공간과 교육을 담당하는 강학공간을 분리하기로 하였다. 이숭원의 후손들이 주로 모여 사는 상좌원리에는 고종 34년(1897) 경덕사를 세워 이숭원의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을 모셨고, 이숙기의 위패는 그의 후손들이 사는 상원리 원터마을에 옮겨 모셨다. 도동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1918년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경균(李璟均, 1850~1922)이 강당인 명례당(明禮堂)을 다시 지었다. 현재 경내에는 외문과 명례당만 남아 있다.
- 이숭원은 단종 1년(1453)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성종(1469~1494 재위)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이숙기는 단종 1년(1453) 무과에 급제하였고, 세조(1455~1468 재위)가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세조 13년(1467)에는 함길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여 다시 공신이 되었고 이후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숙감은 단종 2년(1454)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균관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