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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옥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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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5월 13일 (목) 01:12 판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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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옥룡사지
Ongnyongsa Temple Site, Gwangyang
광양 옥룡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광양 옥룡사지
영문명칭 Ongnyongsa Temple Site, Gwangyang
한자 光陽 玉龍寺址
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302번지 외
지정(등록) 종목 사적 제407호
지정(등록)일 1998년 8월 3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관리자 광양시
시대 통일신라
수량/면적 183,548㎡
웹사이트 광양 옥룡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광양 옥룡사는 우리나라 불교와 민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이 35년(864~898) 머물다가 입적한 유서 깊은 곳이다. 옥룡사는 8세기 초 통일신라 때에 창건됐다고 전하는데, 1878년 화재로 불탔다. 절 동편 비석거리에는 도선국사와 통진대사 부도와 비석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 파손되었다고 한다. 1997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건물 터와 비석 조각을 찾아냈고,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과 관을 발견했다. 이는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도선국사는 옥룡자 주변의 땅 기운을 복돋우기 위해 동백나무 숲을 조성하였고, 차밭을 일구어서 보급한 것으로 전해온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는 옥룡사의 옛 터이다.

옥룡사는 도선이 통일신라 경문왕 4년(864)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은 이후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사찰은 1878년의 화재로 인해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부도와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는 원래 사람들을 괴롭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큰 연못이었는데, 도선이 마지막까지 대항하던 백룡의 눈을 지팡이로 멀게 한 후 연못의 물이 끓어오르게 해 용들을 쫓아내고, 숯을 모아 터를 닦아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도선은 이름에 ‘백(白)’이 들어가는 사람은 절에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조선시대에 백룡(白龍)이라는 이름의 거사가 이름을 속이고 들어와서 살다가 절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994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1997년 첫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탑비전지 등의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승탑재들과 탑비의 파편,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첫 발굴조사 때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담긴 관이 발견되어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되었으며, 출토된 유물들을 토대로 이곳에 옥룡사 창건보다 앞서는 시기인 8세기 경에 이미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절터의 동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도선이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함께 조성했다고 전하는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489호]이 있다.

  • 1872년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 옥룡사지는 5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정비가 된 상태이다. 조사 결과 건물지 17동, 탑비전지 등의 건물지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찰의 운영시기는 문헌기록과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9세기경부터 조선 후기까지로 추정된다.
  • 옥룡사지는 옥룡면 추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온다.
  •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간행된 5차 발굴보고서가 있으나, 검색으로는 내용 확인이 불가능하여 사지현황보고서의 개요 내용으로 갈음함.

1차 수정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이 자리는 원래 용 아홉 마리가 사는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용들이 사람들을 괴롭히자, 도선이 용들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도선은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인해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승탑 부재, 탑비 파편,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절터의 동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도선이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조성했다고 전하는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489호)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옥룡사를 도선국사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발굴조사 결과 옥룡사의 상한은 적어도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 가운데 인화문토기와 사각편병 그리고 같은 시기의 기와 등이 입증하고 있으며, 아울러 864년에 선각국사 도선이 옥룡사에 처음 왔을 때 옥룡사를 古寺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부터 머물면서 크게 번창한 옥룡사의 옛터인데 발굴 결과로 드러난 토기류로 보아 창건연대는 8세기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 인골 출토 위치에 정보 추가.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인골이 담긴 석관이 부도전지에서 발견되었는데,’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 “이후 도선은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 “도선국사는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 인과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도록 수정 기술 요망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인해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이후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다.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2차 수정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이 자리는 원래 용 아홉 마리가 사는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용들이 사람들을 괴롭히자, 도선국사가 용들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도선국사는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승탑 부재, 탑비 파편,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부도전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절터의 동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도선이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조성했다고 전하는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489호)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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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_옥룡사지 Place 광양_옥룡사지
옥룡사 Concept 옥룡사
도선국사 Actor 도선국사(道詵國師,_827-898) 창건
광양_옥룡사지_지표조사 Event 광양_옥룡사지_지표조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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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대학교_박물관 Actor 순천대학교_박물관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담당
호남읍지 Record 호남읍지(湖南邑誌)
광양_옥룡사지_5차_발굴조사 Event 광양_옥룡사지_5차_발굴조사(2009)
1878년_화재 Event 1878년_화재
광양_옥룡사_동백나무_숲 Place 광양_옥룡사_동백나무_숲
광양_옥룡사_동백나무_숲 Heritage F00-0489-0000 천연기념물 제489호로 지정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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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_옥룡사_동백나무_숲 도선국사 isRelatedTo

갤러리

참고자료

  •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 숲 항목 참조
  • 옥룡사지,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전라남도 1』, 문화재청, 2011, 243쪽.→ 1872년에 간행된 『湖南邑誌』의 기록을 통해 존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폐사와 관련해서 『光陽邑誌』에는 ‘폐사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옥룡사는 9세기 중반에도 법등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19세기 말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백계산 남쪽 계곡 하단부에 위치한 옥룡사지는 천연기념물 제489호로 지정된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있고, 입구에서부터 약 800m 정도 숲길을 지나면 확인할 수 있다. 조사구역은 5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1차와 2차 발굴조사에서는 탑비전지와 관련 건물지, 조선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당시 탑비전지에서는 승탑재들과 탑비편이 발견되었다. 3차 발굴조사에서는 사역의 경계가 확인되었고, 4차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연못지 및 조선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5차 발굴조사에서는 1960년에 조성된 옥룡사 관련 건물을 철거한 후 해당 지역에 대해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 17개소와 석축 4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1, 2차 발굴조사에서는 출토된 승탑제와 탑비편으로 보아 주변 건물지가 승탑을 보호하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승탑편과 탑비편은 특성상 羅末麗初의 것으로 판단되어 『梵宇攷』에 기록된 도선국사와 동진대사의 승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5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출토된 유물들은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 당초문, 당초귀목문, 명문 막새편과, 선문, 사격자문, 복합문, 어골문, 무문 와편, ‘成化十日年’명, ‘弘治六年 瓦判…’명 ,‘擁正五年 丁未 月日’명, ‘玉龍寺…造成’명, ‘松峙’명, ‘亭井’명 와편 등이 있다. 현재 사역은 발굴지역을 중심으로 정비되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어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비구역 중심 석축 쪽에는 현재 옥개석과 탑신석 등의 석탑재가 남아 있으나 출토지나 조성시기 등은 명확하지 않다. 중심사역으로 확인된 발굴구역 주변 기타 사역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유물이나 유구가 확인되지 않는다. / 옥룡사지는 5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정비가 된 상태이다. 조사결과 건물지 17동, 탑비전지 등의 건물지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찰의 운영시기는 문헌기록과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9세기경부터 조선후기까지로 추정된다. 현재 정비된 발굴지역 외에는 옥룡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와 유물이 지표상 확인되지 않아 사역이 더 확장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 광양 옥룡사지 일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 - 사적 및 명승』, 문화재청, 2003, 381~416쪽. → 유적지 개요 및 1997년 발굴조사보고서 내용 수록되어 있음. / 조선후기인1878년 화재로 소실 폐사되었고.비석거리로 불리던 탑비전지에 세워졌던 도선국사와 수제자 통지대사의 부도탑과 비석도 1920년을 전후하여 파손됨. / 현 절터에는 1969년에 건립한 대웅전1동(25평)과 토지관리인 주백 1동(15명)이 들어서 있으며,이외 토지는 밭으로 경작 중임.(2011년 간행된 사지현황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해당 건물은 이후 발굴조사를 거치며 철거된 것으로 보임)
  • 옥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702 → 864년(경문왕 4)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이 절을 세운 곳에는 원래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면서 도술을 부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도선이 그들의 퇴거를 명하자 여덟 마리는 따랐으나 백룡만은 도술을 부리면서 대항하였다. 도선이 지팡이로 용의 왼쪽 눈을 멀게 하고 물을 끓게 하여 용을 쫓은 뒤 절터를 닦았다. 그러나 습지를 메우고 땅을 굳게 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그런데 주변 마을에 갑자기 원인 모를 눈병이 유행하였는데, 풍문을 좇아 눈병 있는 사람들이 숯 한 섬씩을 가져다가 연못에 부으면 감쪽같이 눈병이 나았다. 이렇게 절터를 닦아 건물을 지은 뒤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때 도선은 승속을 막론하고 이름에 ‘백(白)’자가 들어가는 사람을 이 절에 들이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300년 뒤에 백룡(白龍)이라는 거사가 이름을 속이고 들어와서 살다가 절을 불태웠으며, 그 뒤 방치되었다. 1967년에 혜성(慧性)이 중창하여 법왕사(法王寺)라 하였으며, 당우로는 인법당(因法堂)만이 있다. 원래 이 절에는 954년(광종 5)에 세운 동진대사비(洞眞大師碑)와 1150년(의종 4)에 세운 도선국사비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원래의 절터에는 영모재(永慕齋)라고 하는 재실이 있고, 사찰주변에는 도선이 창건할 때 땅기운이 약한 것을 보하기 위해서 심은 동백나무의 번식목들이 있다.
  • 옥룡사지, 광양문화관광. http://festa.gwangyang.go.kr/culture/destination/172/destinationDetailView.do?category=destination → 도선국사와 통진대사의 부도전지 및 탑비전지 등 건물지, 명문비편 90여 점과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이 발견되어 당시 승려들의 장례풍습을 알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 옥룡사지는 옥룡면 추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온다. 옥룡사지를 싸안고 있는 백계산(505.8m)은 주산인 백운산(1,222m)에서 뻗어 내린 지맥으로 형성된 아담한 산으로 백운산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터는 큰 연못이었는데 이 연못에 9마리의 용이 살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한다. 이에 도선국사가 용을 몰아냈는데 유독 백룡만이 말을 듣지 않자, 지팡이로 용의 눈을 멀게 하고 연못의 물을 끓게 하여 쫓아낸 뒤 숯으로 절터를 닦아 세웠다고 한다.
  • “옥룡사지 옛 모습 되찾는다”, 영암신문, 2001.8.11.http://www.yasinmoon.com/news/articleView.html?idxno=36022 → 도선국사와 그의 제자인 통 진대사(법명 경보)가 오랜기 간 도를 닦았던 옥룡사지가 소실된지 120년만에 광양시에 의해 옛 모습으로 복원된다. 광양 백계산 옥룡사는 도선 국사의 행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으로 도선이 옥룡사를 중심으로 광양 일대에서 35년간이 나 머무르면서 선풍을 일으킨 터전이다. 광양시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대 창건돼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이 도량했던 옥통사가 화재로 소실된 이후 사찰에 대한 실상파악이 어려웠으나 시가 지난 94년부터 정밀지표조사·발굴 등을 통해 도선국사의 유골과 석관,도선국사와 통진대사의 쌍비·쌍탑·부도전 등을 발굴 확인하고 문화재관리청의 사업승인을 얻어 연내 복원사 업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