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건봉사
금강산 건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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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금강산 건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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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剛山 乾鳳寺 |
주소 |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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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건봉사(乾鳳寺)는 전국 4대사찰의 하나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지((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誌)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화상이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고, 그 후 도선국사가 중수한 뒤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말엽 나옹화상이 중수하고 건봉사(乾鳳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경덕왕 17년(서기 578년) 발징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었으며, 현존하는 “등공탑비”는 서기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가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 하였다고 전하고 그 부도를 모신 것이다.
서기 1456년 세조임금이 건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서기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全燒)되었으나, 여러차례 복원작업을 통하여 서기 1911년에 9개 말사(末寺)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왜병(倭兵)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사명대사가 사행(使行)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또한 구한말인 서기 1906년 “봉명학원”을 설립하여 개화사상과 신문화를 받아들인 관동지방 교육의 도장이 되었으나, 그후 일제에 의해 강제폐교 되었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쳐 아국 5,8,9사단 및 미군 제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서기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되었고, 지금도 사찰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전 건봉사는 총 642칸과 보림암 등 124탄 18개 부속암이 있었다.
수정 국문
초고
건봉사는 520년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아도화상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했다고 전한다.
758년에는 발징(發徵)이/발징(發徵)화상이 사찰을 중건한 후 1만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다. 이것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통일신라 때의 고승 도선(道詵, 827-898)이/도선국사가 서봉사(西鳳寺)라는 이름으로 중수하였고, 고려 때의 고승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이/나옹화상이 1358년에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456년 조선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건봉사를 자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사찰[원당(願堂)]으로 삼은 이후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조선 4대 사찰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이곳에서 승병을 조직했고, 전쟁 후인 1605년에는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가 되찾아온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봉안하고 1606년 사찰을 중건하였다.
1878년 산불로 인해 가람 전체가 전소되기도 했지만, 이듬해부터 중건을 시작해 1911년에는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사세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고성 지역에서 휴전 직전까지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건봉사 역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모두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1994년부터 대웅전 등 중심 전각의 복원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10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사찰의 면모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토대로 사찰의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