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건봉사
금강산 건봉사 Geonbongsa Temple of Geumgangsan Mount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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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금강산 건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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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Geonbongsa Temple of Geumgangsan Mountain |
한자 | 金剛山 乾鳳寺 |
주소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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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건봉사는 대한민국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전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금강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성보(聖寶)*로 여겨지는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유서 깊은 사찰이며, 임진왜란 때 승병이 일어나고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건봉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520년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758년에는 신라의 승려 발징(發徵, ?~785)이 사찰을 중건하고 1만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으며, 이 모임은 우리나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서봉사(西鳳寺)라는 이름으로 중수하였다고 하며, 고려시대인 1358년에는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1456년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행차하여 왕실 원당(願堂)*으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御室閣)을 지었다. 이후 건봉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사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던 건봉사는 1878년 산불로 인해 가람* 전체가 전소되었다가 이듬해부터 중건을 시작하였다. 1906년에는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관동지방 교육의 도장이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폐교 되었다.
1911년에는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사세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고성 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건봉사 역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휴전 후에는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게 되면서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되었다. 건봉사의 옛 절터는 1982년 ‘건봉사지’라는 이름으로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89년부터 출입이 가능해졌으며, 1994년부터 지금까지 사찰의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 성보(聖寶): 성스러운 보물
- 염불만일회: 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동안 염불하는 불교의식
- 원당: 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
- 가람: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 말사: 본사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본사에서 갈라져 나온 절
영문
Geonbongsa Temple of Geumgangsan Mountain
Geonbongsa Temple, located on the eastern slope of Gamnobong Peak of Geumgangsan Mountain, is the northernmost Buddhist temple in South Korea. The temple has a deep religious history as it enshrines a tooth of Sakyamuni, the historical Buddha who lived in ancient India. It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defending the countr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temple mobilized monks to fight the invaders, a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it became one of the cente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t is said that Geonbongsa Temple’s history starts in 520 during the Goguryeo period (37 BCE-668 CE), when a temple called Wongaksa was established by the monk Ado. In 758,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the temple was rebuilt by the monk Baljing (?-785). At this temple, Baljing chanted Buddhist prayers for 10,000 days to pray for rebirth in the Western Paradise, which became the origin of such ceremonies in the Korean Buddhist tradition. Later, State Preceptor Doseon (827-898) renovated the temple and renamed it Seobongsa. In 1358,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the monk Naong (1320-1376) rebuilt the temple and gave it its current name, Geonbongsa. In 1456, King Sejo (r. 1455-1468)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visited the temple and designated it as a place to hold prayers for the well-being and longevity of the royal family. He ordered the construction of the Eosilgak Hall to enshrine the spirit tablets of several generations of kings. With the support of the royal family, the temple prospered. Unfortunately, in 1878, all of the temple buildings were lost in a forest fire. The reconstruction started the following year. In 1906, the temple established the Bongmyeong School to teach the youth in the Gangwon-do region about modern ideas and Western culture.
In 1911,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the Japanese government designated 31 of the largest temples in the country as main temples. Geonbongsa Temple was included among them and managed nine branch temples, gradually regaining its status.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the Goseong area was immersed in heavy fighting for almost two years, resulting in complete destruction of all of Geonbongsa Temple’s buildings apart from Burimun Gate, built in 1920. After the armistice in 1953, the temple’s site ended up north of the Civilian Control Line, resulting in restricted civilian access. In 1982, the Geonbongsa Temple Site was designated as Gangwon-do Monument. Since 1989, civilians have been allowed to visit the site, and since 1994, the temple’s buildings have been reconstructed.
영문 해설 내용
건봉사는 대한민국 최북단 지역인 금강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유서 깊은 사찰이며, 임진왜란 때 승병이 일어나고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건봉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520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758년에는 신라의 승려 발징(?-785)이 사찰을 중건하였다. 발징은 이 사찰에서 1만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열었으며, 이 모임은 한국에서 거행되는 이러한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도선(827-898)이 서봉사라는 이름으로 중수하였다고 하며, 고려시대인 1358년에는 나옹(1320-1376)이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1456년 세조(재위 1455-1468)가 행차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 지정하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지었다. 이후 건봉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사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1878년 산불로 인해 가람 전체가 전소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중건을 시작하였다. 1906년에는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강원도 지역 청소년들에게 개화사상과 신문물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일제가 전국의 사찰 중 31개의 큰 사찰을 본사로 지정하였다. 이때 건봉사도 9개의 말사를 거느린 본사가 되었으며, 이후 점차 사세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고성 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건봉사 역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휴전 후에는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게 되면서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되었다. 건봉사의 옛 절터는 1982년 ‘건봉사지’라는 이름으로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89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으며, 1994년부터 지금까지 사찰의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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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 Place | 건봉사 | |
원각사 | Place | 원각사 | 초창 시 명칭 |
서봉사 | Place | 서봉사 | 중창시 명칭(도선). 서쪽에 봉황 모양의 바위가 있다는 의미. |
아도 | Actor | 아도(阿道) | 창건자로 전해짐. |
도선 | Actor | 도선(道詵,_827-898) |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서봉사로 중창.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함. |
혜근 | Actor | 혜근(慧勤,_1320-1376) | 나옹선사의 법명. 혜근(惠勤), 또는 혜근(彗勤). 사찰 중건 후 건봉사로 개명. |
나옹 | Actor | 나옹(懶翁,_1320-1376) | 혜근의 호. |
발징 | Actor | 발징(發徵) | 건봉사(당시 원각사) 주지로 있을 때 만일염불회를 주관함. |
758년_만일염불회 | Event | 758년_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 발징이 건봉사 주지일 때 주관한 법회로 후대 염불만일회의 시초가 됨 |
만일염불회 | Concept |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 만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것. 염불만일회라고도 함. |
등공탑비 | Object | 등공탑비 | 782년에 염불만일회에 참가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얻어 육신을 버리고 극락왕생한 것을 기념하여 그 자리에 세운 비석이라고 함. |
조선_세조 | Actor | 조선_세조(世祖,_재위_ 1455-1468) | 1456년 건봉사를 방문해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고 함. |
한용운 | Actor | 한용운(韓龍雲,_1879-1944) |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로도 활동한 승려.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
건봉사_급_건봉사_말사_사적지 | Record | 건봉사_급_건봉사_말사_사적지(乾鳳寺_及_乾鳳寺_末寺_史蹟誌) | 건봉사 연혁을 기록한 한용운의 저술. |
봉명학원 | Actor | 봉명학원 | 1906년에 건봉사에서 설립한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 기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음. |
1878년_화재 | Event | 1878년_화재 | 가람 전체가 전소되었음 |
한국전쟁 | Event | 한국전쟁(1950) | 불이문 제외한 가람 전체 소실됨. |
삼십일본산 | Concept | 삼십일본산((三十一本山) |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전국 사찰을 31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본산(本山)을 두었던 제도. 1911년부터 시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건봉사_진신치아사리 | Object | 건봉사_진신치아사리 | 건봉사에 봉안되어 있는 진신사리는 석가모니불의 치아사리이며, 12과가 있었으나 도난당했다가 8과만 되찾았다. |
건봉사_적멸보궁 | Plcce | 건봉사_적멸보궁 | 8과 중 5과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음. |
건봉사_사리탑 | Object | 건봉사_사리탑 | 8과 중 3과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음. |
임진왜란 | Event | 임진왜란(1592) | |
1604년_일본_사행 | Event | 1604년_일본_사행 |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에 포로 송환 등을 요청하기 위해 이 사행길에 사신 자격으로 참여했다. |
사명대사 | Actor | 사명대사(四溟大師,_1544-1610) |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사명대사는 1604년 사행길에서 통도사에서 빼앗겼던 치아진신사리를 되찾아 건봉사에 다시 봉안했다. |
고성_건봉사_능파교 | Object | 고성 건봉사 능파교 (高城 乾鳳寺 凌波橋) |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했던 무지개 모양의 다리. |
고성_건봉사_능파교 | Heritage | B00-1336-0000 | 2002년에 보물 제1336호로 지정되었다. |
적멸보궁 | Concept | 적멸보궁 |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에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전각을 말한다. |
진신사리 | Concept | 진신사리 |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사리.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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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 원각사 | hasOldName |
건봉사 | 서봉사 | hasOldName |
원각사 | 아도 | founder |
서봉사 | 도선 | renovator |
원각사 | 발징 | renovat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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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근 | 나옹 | same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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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염불회 | 758년_만일염불회 | type |
758년_만일염불회 | 건봉사_등공탑비 | isRelatedTo |
건봉사 | 조선_세조 | isRelated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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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_급_건봉사_말사_사적지 | 건봉사 | mentions |
건봉사_급_건봉사_말사_사적지 | 한용운 | writer |
건봉사 | 봉명학원 | isRelated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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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 삼십일본산 | isRelatedTo |
건봉사 | 사명대사 | renovator |
사명대사 | 임진왜란 | isRelatedTo |
사명대사 | 1604년_일본_사행 | participates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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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_건봉사_능파교 | B00-1336-0000 | isDesignated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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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 건봉사_적멸보궁 | type |
진신사리 | 건봉사_진신치아사리 | type |
적멸보궁 | 진신사리 | isRelatedTo |
참고자료
- 건봉사 홈페이지 https://www.geonbongsa.org/ → 이미지 출처(아름다운 건봉사 2)
- 고성 금강산 건봉사, 조선시대 전국 4대 사찰이었던 곳, Culture & History Traveling, 개인 블로그 http://www.dapsa.kr/blog/?p=29264 → 실제 답사 사진.
- 50. 금강산 건봉사, 법보신문. 2017.2.27.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774 → 진신치아사리 관련 이야기 상세(사명대사가 임진·정유난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포로들을 송환시키려 도일 했을 때 통도사 사리도 되찾아 왔다. 파헤쳐진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해 사리를 봉안하고, 그 중 불치사리 12과를 이곳 건봉사 사리탑에 안치했다. 1986년 6월10일 건봉사에 도굴꾼이 난입해 사리를 훔쳐 달아났다. 주범은 거의 매일 같은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께서 ‘사리를 돌려주어라!’고 꾸짖는 꿈이었다. 주범은 결국 7월14일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모 호텔에 사리를 맡겨 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찾은 건 8과. 4과는 끝내 공범이 들고 달아나 사라졌다. 현재 불치사리 3과는 건봉사 적멸보궁에 안치돼 있고, 5과는 불자들의 친견을 위해 염불당에 모셔져 있다. / 만일염불회 관련 이야기
- 고성군, 건봉사지 사적 지정 재추진 나선다, 강원도민일보 2021.3.11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63991 → 군은 2019년 3~4월 대웅전지 2066㎡의 면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건물지를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웅전지 1287㎡ 일원에 대해 정밀발굴조사를 벌여 현재 복원된 대웅전,보안원 등 가람배치가 선대 건물지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으며, 건물지 8동의 유구와 고려시대 어골문기와,청자편 등 약 20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고성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비록 6·25전쟁으로 소실됐으나, 조선시대 4대 사찰 중의 하나였고 그 위상에 걸맞게 사찰 내에 굴지의 문화재들이 소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으로 ‘만일염불회’의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10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사지의 전모가 드러났다.
- [문화재, 사람에게 말을 걸다] 18. 고성 건봉사, 강원도민일보, 2011.1.25.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98693
- “당신은 나의 죽음까지도 사랑한 까닭입니다” 강원도 고성, 불교신문, 2016.2.3.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6645 → 사찰 연혁 간략 정리
- 발징스님의 만일염불회, 명상가의 쉼터,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ym4206/16930394 → 만일염불회 간략하게 설명
- "만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7702 →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1만일을 기한으로 잡고 행한다고 하여 만일회라 부른다. 이 모임은 염불수행을 위하여 따로 이 전답을 마련하고 재정을 충실히 한 뒤에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발징(發徵)이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최초로 개설하였으며,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크게 성행하였다.
- 건봉사 템플스테이 http://kb1.templestay.com/board.asp?t_id=gunbong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