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금강산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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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건봉사(乾鳳寺)는 전국 4대사찰의 하나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지((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誌)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화상이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고, 그 후 도선국사가 중수한 뒤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말엽 나옹화상이 중수하고 건봉사(乾鳳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경덕왕 17년(서기 578년) 발징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었으며, 현존하는 “등공탑비”는 서기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가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 하였다고 전하고 그 부도를 모신 것이다.

서기 1456년 세조임금이 건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서기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全燒)되었으나, 여러차례 복원작업을 통하여 서기 1911년에 9개 말사(末寺)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왜병(倭兵)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사명대사가 사행(使行)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또한 구한말인 서기 1906년 “봉명학원”을 설립하여 개화사상과 신문화를 받아들인 관동지방 교육의 도장이 되었으나, 그후 일제에 의해 강제폐교 되었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쳐 아국 5,8,9사단 및 미군 제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서기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되었고, 지금도 사찰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전 건봉사는 총 642칸과 보림암 등 124탄 18개 부속암이 있었다.

수정 국문

초고

건봉사는 520년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아도화상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했다고 전한다.

758년에는 발징(發徵)이/발징(發徵)화상이 사찰을 중건한 후 1만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다. 이것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통일신라 때의 고승 도선(道詵, 827-898)이/도선국사가 서봉사(西鳳寺)라는 이름으로 중수하였고, 고려 때의 고승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이/나옹화상이 1358년에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456년 조선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건봉사를 자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사찰[원당(願堂)]으로 삼은 이후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조선 4대 사찰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이곳에서 승병을 조직했고, 전쟁 후인 1605년에는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가 되찾아온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봉안하고 1606년 사찰을 중건하였다.

1878년 산불로 인해 가람 전체가 전소되기도 했지만, 이듬해부터 중건을 시작해 1911년에는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사세를 회복하였고, 1906년에는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원을 설립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고성 지역에서 휴전 직전까지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건봉사 역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모두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1994년부터 대웅전 등 중심 전각의 복원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10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사찰의 면모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토대로 사찰의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 아름다운 홍교(虹橋)인 건봉사 능파교(보물 제1336호)가 있다. 능파교는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였다.
  • 건봉사에는 원래 12과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1986년 사리탑이 도굴되면서 일부가 사라져 8과만 남아 있으며, 지금은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도굴꾼 일당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꾸짖자, 8과의 사리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 만해스님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지>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 이후 도선국사가 중수했고 고려 말에는 나옹스님이 중수했다고 한다.
  • 782년에는 염불만일회에 참가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얻어 육신을 버리고 극락왕생했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등공탑비가 세워져 있다.

1차 수정

건봉사는 대한민국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성보(聖寶)로 여겨지는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유서 깊은 사찰이며, 임진왜란 때 승병이 일어나고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건봉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520년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758년에는 신라의 승려 발징(發徵, ?~785)이 사찰을 중건하고 1만일 동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만일회’를 열었으며, 이 모임은 우리나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서봉사(西鳳寺)라는 이름으로 중수하였다고 하며, 고려시대인 1358년에는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1456년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행차하여 왕실 원당(願堂)*으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御室閣)을 지었다. 이후 건봉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사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던 건봉사는 1878년 산불로 인해 가람 전체가 전소되었다가 이듬해부터 중건을 시작하였다. 1906년에는 개화사상 및 신문물 교육을 위한 봉명학원을 설립하였고, 1911년에는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는 등 사세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고성 지역에서 약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건봉사 역시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휴전 후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게 되면서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되었다가 1992년부터 출입이 가능해졌으며, 1994년부터 지금까지 사찰의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 염불만일회: 극락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며 만일동안 염불하는 불교의식
  • 원당: 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