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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3일 (목) 12:21 판


오리이원익영우
오리 이원익 영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오리이원익영우
한자 梧里李元翼影宇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지정일 1996년 12월 24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오리 이원익 영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중기의 문신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이다. 영우(影宇)는 ‘영정이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 사당에는 일반적으로 고인의 신주나 위패를 모시지만, 이곳은 이원익의 영정, 즉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원익의 신주는 종묘의 인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어 있다.

이원익은 전주이씨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1569년(선조 2) 문과에 급제했으며, 호조·예조·형조의 정랑과 동부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평안도도순찰사로서 군병 모집의 책임을 다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인조반정 후에는 반정의 주역인 서인이 아닌 남인으로서 영의정에 올라 정국의 균형추 역할을 하였다. 이괄의 난(1624년) 때에는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원익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소박한 성품,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아 선조-광해군-인조 세 임금 대에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오리 이원익 영우는 1693년(숙종 19)에 건립되었다. ‘오리영우(梧里影宇)’ 현판은 숙종이 하사한 것이며, 이관징(李觀徵, 1618~1695)이 글씨를 썼다. 현판 좌측에 ‘숙종 19년(1693) 인조께서 하사한 집의 옛 터에 사우를 건립한다.’는 내용이 있다. 사당 안에는 감실(龕室)이 있으며, 그 안에 이원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정면 1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남향을 하고 있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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