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오리 이원익 영우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중기의 문신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이다. 영우(影宇)는 ‘영정이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 사당에는 일반적으로 고인의 신주나 위패를 모시지만, 이곳은 이원익의 영정, 즉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원익의 신주는 종묘의 인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어 있다.

이원익은 전주이씨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1569년(선조 2) 문과에 급제했으며, 호조·예조·형조의 정랑과 동부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평안도도순찰사로서 군병 모집의 책임을 다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인조반정 후에는 반정의 주역인 서인이 아닌 남인으로서 영의정에 올라 정국의 균형추 역할을 하였다. 이괄의 난(1624년) 때에는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원익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소박한 성품,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아 선조-광해군-인조 세 임금 대에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오리 이원익 영우는 1693년(숙종 19)에 건립되었다. ‘오리영우(梧里影宇)’ 현판은 숙종이 하사한 것이며, 이관징(李觀徵, 1618~1695)이 글씨를 썼다. 현판 좌측에 ‘숙종 19년(1693) 인조께서 하사한 집의 옛 터에 사우를 건립한다.’는 내용이 있다. 사당 안에는 감실(龕室)이 있으며, 그 안에 이원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정면 1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남향을 하고 있다.

1차 수정

조선 중기의 문신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우(影宇)는 신주나 위패 대신 고인의 초상화인 영정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이원익은 전주이씨로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1569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군병 모집의 책임을 다했고,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1623~1649 재위)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원익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소박한 성품,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아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대에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이 사당은 1693년에 건립되었다. 정면에 걸려 있는 ‘오리영우(梧里影宇)’ 현판은 숙종(1674~1720 재위)이 하사한 것이며, 문신이자 뛰어난 서예가였던 이관징(李觀徵, 1618~1695)이 글씨를 썼다. 현판 좌측에 ‘숙종 19년(1693) 인조께서 하사한 집의 옛 터에 사우를 건립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도순찰사(都巡察使): 조선시대에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에 관한 일을 처리하던 임시직 벼슬.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옛 터에 → 옛터에
수정이유: 옛터는 한 단어이므로 붙여 씀.
    •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군병 모집의 책임을 다했고, →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군병 모집과 일본군 토벌의 책임을 다했고,
수정이유: 군병모집만으로 한정하기에는 그의 업적이 매우 많았음.
  1. 분야별 자문위원 2
    • “고인의 초상화인 영정을 모신 사당”→“고인의 초상화를 영정으로 모신 사당”(초상화와 영정은 다른 개념 아닌가? )
    • “이원익은 전주이씨로 한양에서 태어났으며”→“이원익은 전주이씨로”(굳이 한양에서 출생한 것을 밝힌 이유가 없다면 삭제해도 무방함)
    • “임진왜란 때에는 평안도 도순찰사로서”→“평안도 도순찰사,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내며 군병의 모집과 전란 극복에 책임을 다했고”
    • 건립 주체에 대한 설명 추가 필요→ “이 사당은 1693년 옛 집터에 증손 이상현(李象賢)이 건립하였다.”
    • 초상화에 대한 설명 추가 필요 → “적혀 있다. 이원익의 초상화는 6점 정도가 전하는데, 오리영우에 모셔진 초상화는 대략 1679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2.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임진왜란 때에는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군병 모집의 책임을 다했고,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 ~ 책임을 다했고, 난이 끝난 후에는 전후 복구와 민생안정을 위해 (밑줄 친 부분을 삽입해야 함)

2차 수정

조선 중기의 문신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우(影宇)는 신주나 위패 대신 고인의 초상화인 영정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이원익은 전주이씨로, 1569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평안도 도순찰사* 등을 지내며 군병의 모집과 일본군 토벌의 책임을 다했고, 난이 끝난 후에는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1623~1649 재위)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원익은 뛰어난 업무능력과 소박한 성품,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아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대에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이 사당은 1693년에 건립되었다. 정면에 걸려 있는 ‘오리영우(梧里影宇)’ 현판은 숙종(1674~1720 재위)이 하사한 것이며, 문신이자 뛰어난 서예가였던 이관징(李觀徵, 1618~1695)이 글씨를 썼다. 현판 좌측에 ‘숙종 19년(1693) 인조께서 하사한 집의 옛터에 사우를 건립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도순찰사(都巡察使): 조선시대에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에 관한 일을 처리하던 임시직 벼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