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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재는 남의록(南義祿, 1551~1620)과 아들 남경훈(南慶薰, 1572~1612) 부자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631년 문중의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세워졌으나, 이후 후손들이 용도를 바꾸었다. 1886년 중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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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록은 영덕에서 의병을 모아 임진왜란에 참여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603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남경훈은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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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재는 두 선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제관의 숙소로도 사용되는 건물,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 그리고 관리하는 건물 등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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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9일 (화) 13:14 판


영덕 이전재
영덕 이전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덕 이전재
한자 盈德 泥田齋
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길 471-24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6호
지정(등록)일 2013년 10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곽(3동)
웹사이트 영덕 이전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전재는 남의록(南義祿, 1551~1620)과 남경훈(南慶薰 1572~1612) 부자의 묘소 아래에 있다. 18세기 중엽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건물은 1631년(인조 9)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세워졌으나 후손들이 이후 재사로 용도를 바꾸었다. 1886년 중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남의록은 영덕에서 의병을 모아 임진왜란에 참여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603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남경훈은 남의록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부자는 함께 곽재우의 진영에서 활약하였다. 남경훈은 학문과 문장도 뛰어나 당대 석학인 정경세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전재는 두 선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제관의 숙소로도 사용되는 건물,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 그리고 관리하는 건물 등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차 수정

이전재는 남의록(南義祿, 1551~1620)과 아들 남경훈(南慶薰, 1572~1612) 부자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631년 문중의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세워졌으나, 이후 후손들이 용도를 바꾸었다. 1886년 중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남의록은 영덕에서 의병을 모아 임진왜란에 참여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603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남경훈은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전재는 두 선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제관의 숙소로도 사용되는 건물,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 그리고 관리하는 건물 등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자문의견

2차 수정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