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영덕 이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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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전재는 남의록(南義祿, 1551~1620)과 남경훈(南慶薰 1572~1612) 부자의 묘소 아래에 있다. 18세기 중엽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건물은 1631년(인조 9)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세워졌으나 후손들이 이후 재사로 용도를 바꾸었다. 1886년 중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남의록은 영덕에서 의병을 모아 임진왜란에 참여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603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남경훈은 남의록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부자는 함께 곽재우의 진영에서 활약하였다. 남경훈은 학문과 문장도 뛰어나 당대 석학인 정경세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전재는 두 선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제관의 숙소로도 사용되는 건물,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 그리고 관리하는 건물 등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차 수정

이전재는 남의록(南義祿, 1551~1620)과 아들 남경훈(南慶薰, 1572~1612) 부자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631년 문중의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세워졌으나, 이후 후손들이 용도를 바꾸었다. 1886년 중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남의록은 영덕에서 의병을 모아 임진왜란에 참여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603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남경훈은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전재는 두 선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제관의 숙소로도 사용되는 건물,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 그리고 관리하는 건물 등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건물구성은 두 선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제관의 숙소로도 사용되는 이전재,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 그리고 관리하는 건물 등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 배치는 튼‘ㄷ’자형을 이룬다. 이전재 전방에 좁은 안마당 건너편에 위치한 제수청과 二자형을 이루고 안마당 우측에 관리사, 좌측에는 이전재와 제수청간을 토석담장으로 막고 그 사이에 출입문인 일각문을 내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 배치형태를 이룬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이전재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 활동을 한 남의록(南義祿, 1551~1620)과 남경훈(南慶薰, 1572~1612) 부자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를 지내기 위해 1631년에 건립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86년에 중건한 것이다.
    • 이전재는 회합과 숙소용으로 쓰이는 중심 건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건물은 팔작지붕의 누각 형태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 구조이다. 중간에 마루를 두고 마루 좌우칸은 전면에 마루, 후면에 방을 두었으며 그 옆 칸은 전체가 방이다. 이전재는 경상북도 지역의 보편적 재사와 구별되는 독특한 구조로서 시대성과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2차 수정

이전재는 남의록(南義祿, 1551~1620)과 아들 남경훈(南慶薰, 1572~1612)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사이다. 1631년 문중의 강학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세워졌으나, 이후 후손들이 용도를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86년에 중건한 것이다.

남의록은 임진왜란 당시 영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603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남경훈은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전재는 회합과 숙소용으로 쓰이는 중심 건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경상북도 지역의 재사들이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전재는 중심 건물 앞에 제수청이 있고 오른쪽에 관리사가 있으며 왼쪽은 토석 담장에 출입문을 낸 구조이다. 중심 건물은 가운데에 누마루를 두고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