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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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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함양극락사지석조여래입상.jpg
 
|사진=함양극락사지석조여래입상.jpg
 
|사진출처=[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419 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디지털함양문화대전.
 
|사진출처=[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419 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디지털함양문화대전.
|대표명칭=함양 극락사지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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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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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Stone Standing Buddha at Geungnaksa Temple Site, Hamyang
|한자=極樂寺址石造如來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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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咸陽 極樂寺地 石造如來立像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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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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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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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불상은 부근 밭에서 출토된 여래불 입상으로 극락사지라고 추정되는 이곳에 옮겨 봉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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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1957년 마을 주민이 부근 밭에서 발견하였다. 심하게 파손된 것을 복원하여 극락사 절터로 추정되는 이곳에 옮겨 세웠다.  
  
몸이 두 동강이 났고, 팔과 코는 없었는데 이를 새로 만들고 보수하여 극락사지와 연관된것으로 생각하여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
불상은 몸체와 받침대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두 동강이 난 몸체와 손상된 팔과 코는 복원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몸체에 비해 큰 얼굴, 좁은 어깨, 유난히 길쭉한 허리, 몸에 밀착된 양팔, 긴 하체 등은 원통형의 기둥과 같은 인상을 준다.  
  
불신과 대좌를 한 돌로 조성한 이 불상은 얼굴과 손 등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불신에 비해 큰 얼굴, 좁은 어깨, 유난히 잘쑥한 허리, 몸에 밀착된 양팔, 하체가 눈에 띄게 긴 직립한 자세 등은 마치 원기둥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 두 어깨를 감싼 얇은 불의의 옷주름은 U자형으로 촘촘하게 흘러내려 신라 불상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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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의 얇은 주름이 U자형으로 촘촘하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한 것은 통일신라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신체를 전체적으로 경직되게 표현한 것이나 형식화한 옷주름 등은 고려 시대 석불의 특징을 보여주므로 통일신라 양식을 절충하여 고려 시대에 제작한 석불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불상이 안치된 극락사에 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에 "극락암은 백운산에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때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다리 부분의 표현이나 가라앉은 얼굴표정, 형식화된 옷 주름등에서 당대의 독립원각상의 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석불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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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년(성종 12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극락암(極樂庵)은 백운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중종 25년(1530)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극락암은 영취산(靈鷲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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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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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 Standing Buddha at Geungnaksa Temple Site, Hamyang'''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이 불상은 1957년 인근의 밭에서 출토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지금 불상이 서 있는 곳은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사라는 사찰의 옛터로 추정된다.
 
 
발견 당시 몸은 두 동강이 나 있었고 코도 없었는데, 이를 새로 만들어서 보수하였다. 손목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은 별도로 제작하여 끼워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직된 자세와 가슴부터 다리까지 촘촘하게 흘러내린 U자형의 옷주름 등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계승하였다.
 
 
====자문의견====
 
#분야별 자문위원 1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 이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분야별 자문위원 2
 
#*전체 높이 2.6m로서 대좌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훤칠한 상으로 잘록한 허리와 물 흐르듯이 유려한 옷주름의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경직된 자세와 촘촘한 옷자락이 규칙적으로 표현된 점 등은 고려 전기 조각의 특징으로 생각된다
 
 
====2차 수정====
 
이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여래(如來)는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덕성을 표현하는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이 불상은 1957년 인근의 밭에서 출토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지금 불상이 서 있는 곳은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사라는 사찰의 옛터로 추정된다.
 
 
발견 당시 몸은 두 동강이 나 있었고 코도 없었는데, 이를 새로 만들어서 보수하였다. 손목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은 별도로 제작하여 끼워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잘록한 허리와 물 흐르듯이 유려한 옷주름의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전통을 계승한 특징이다.
 
 
=='''문맥요소'''==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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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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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 마을 주민이 인근의 밭에서 발견하였으며, 몸이 두 동강이 나 있고 팔과 코가 손상된 상태였다. 이후 보수하여, 극락사라는 사찰의 옛터로 추정되는 현재 위치에 옮겨 놓았다.
  
 +
불상의 받침대와 몸체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몸체에 비해 큰 얼굴, 좁은 어깨, 유난히 길쭉한 허리, 몸에 밀착된 양팔, 긴 하체 등은 원통형의 기둥과 같은 인상을 준다. 손목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은 별도로 제작하여 끼워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의 주름을 U자형으로 촘촘하게 표현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신체를 전체적으로 경직되게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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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시도유형문화재]]
 
[[분류:시도유형문화재]]
 
[[분류:불상]]
 
[[분류: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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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7월 18일 (토) 17:51 판


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Stone Standing Buddha at Geungnaksa Temple Site, Hamyang
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디지털함양문화대전.
대표명칭 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영문명칭 Stone Standing Buddha at Geungnaksa Temple Site, Hamyang
한자 咸陽 極樂寺地 石造如來立像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지정일 1972년 2월 12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함양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불상은 1957년 마을 주민이 부근 밭에서 발견하였다. 심하게 파손된 것을 복원하여 극락사 옛 절터로 추정되는 이곳에 옮겨 세웠다.

불상은 몸체와 받침대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두 동강이 난 몸체와 손상된 팔과 코는 복원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몸체에 비해 큰 얼굴, 좁은 어깨, 유난히 길쭉한 허리, 몸에 밀착된 양팔, 긴 하체 등은 원통형의 기둥과 같은 인상을 준다.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의 얇은 주름이 U자형으로 촘촘하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한 것은 통일신라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신체를 전체적으로 경직되게 표현한 것이나 형식화한 옷주름 등은 고려 시대 석불의 특징을 보여주므로 통일신라 양식을 절충하여 고려 시대에 제작한 석불로 추정할 수 있다.

1481년(성종 12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극락암(極樂庵)은 백운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중종 25년(1530)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극락암은 영취산(靈鷲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영문

Stone Standing Buddha at Geungnaksa Temple Site, Hamyang


영문 해설 내용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 마을 주민이 인근의 밭에서 발견하였으며, 몸이 두 동강이 나 있고 팔과 코가 손상된 상태였다. 이후 보수하여, 극락사라는 사찰의 옛터로 추정되는 현재 위치에 옮겨 놓았다.

불상의 받침대와 몸체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몸체에 비해 큰 얼굴, 좁은 어깨, 유난히 길쭉한 허리, 몸에 밀착된 양팔, 긴 하체 등은 원통형의 기둥과 같은 인상을 준다. 손목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은 별도로 제작하여 끼워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의 주름을 U자형으로 촘촘하게 표현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신체를 전체적으로 경직되게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