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홀어머니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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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대모산성(大母山城) 또는 백산리 산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고려와 조선 초기에 군량을 비축해 두던 곳이다. 대모산성은 고려 말에 어떤 어머니가 아홉 아들과 함께 이 성을 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에는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과부 양씨와 설씨 총각 사이의 사랑 이야기도 전한다. 총각이 양씨를 너무도 사모하여 결혼하기를 원하자 부인은 “내가 이 산에 성을 쌓기 전에 그대가 나막신을 신고 서울에 갔다 온다면 결혼을 허락 하겠다”고 하였는데, 성을 다 쌓기 전에 총각이 돌아오자 부인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살함으로써 정절을 지켰다. 이 전설로 인하여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산성은 대모산성(大母山城) 또는 백산리 산성으로 불리는데,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군량을 비축해 두는 창고의 기능을 수행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세 차례의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삼국시대 백제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백제의 산성에서 보이는 입지적 조건이나 성문의 위치 선정 등이 이 산성에도 적용되고 있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임이 확인되고, 순창군은 백제의 지방 행정의 하나인 도실군(道實郡)을 두었던 기록이 남아 있어 도실군의 치소지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와 조선의 문헌 기록을 통해 1700년 이전까지 군량을 비축해 두는 창고의 역할을 수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산성의 내부에는 대모암이라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성의 이름인 홀어머니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양씨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설씨 총각이 결혼할 것을 요구하자 부인은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부인이 마지막 성돌을 채 올리기 전에 총각이 돌아오자,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쓰고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로 인하여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1차 수정
대모산의 두 봉우리를 감싼 형태로 쌓은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이다.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시대까지 군량을 비축해 두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전체 둘레는 약 875m이며, 성벽은 무너진 부분이 많고 북벽과 서벽이 일부 남아 있다. 남쪽과 북쪽에서 성문 터가 발견되었고, 북쪽의 평탄지에서는 창고가 있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기와이다. 현재 산성의 내부에는 대모암이라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성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한 과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양씨 부인이라는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설씨 총각이 양씨 부인을 너무 사모하여 끈질기게 청혼하였다. 견디다 못한 부인은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마지막 성돌을 채 올리기 전에 총각이 돌아왔고, 부인은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쓰고 그대로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고 한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대모산성의 축조 당시의 기능 보완
대모산의 두 봉우리를 감싼 형태로 쌓은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이다.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시대까지 군량을 비축해 두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 대모산의 두 봉우리를 감싼 형태로 쌓은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군량을 비축해 두는 창고가 있었다.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불린다.
- 몸을 날려 →몸을 던져
- 분야별 자문위원 2
- 대모산(해발 150m)의 동쪽과 서쪽 두 봉우리를 돌로 감싸듯 둘레 약 875m 규모로 쌓은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이다.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시대까지 군량을 비축해 두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북벽과 서벽이 일부 남아 있다. 남쪽과 북쪽에서 성문 터가 발견되었고, 북쪽의 평탄지에서는 창고가 있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기와로 삼국시대 백제의 것과 고려시대기와 조각들이다. 그 가운데 『연우원년(延禑元年, 1413년(고려 충숙왕 1))』, 『도곡관(刀谷官)』 등의 기와 조각들로 미루어 보아 백제 때 순창지역에 두었던 도실군(道實郡)의 정치, 행정적 중심 역할을 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산성의 내부에는 대모암이라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 이 산성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한 과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양씨 부인이라는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설씨 총각이 양씨 부인을 너무 사모하여 끈질기게 청혼하였다. 견디다 못한 부인은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총각이 돌아왔고, 부인은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쓰고 그대로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고 한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성벽은 무너진 부분이 많고 북벽과 서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2차 수정
대모산(해발 150m)의 동쪽과 서쪽 두 봉우리를 감싸듯 쌓은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이다.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시대까지 군량을 비축해 두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전체 둘레는 약 875m이며,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북벽과 서벽이 일부 남아 있다. 남쪽과 북쪽에서 성문 터가 발견되었고, 북쪽의 평탄지에서는 창고가 있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백제와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들이다. 현재 산성의 내부에는 대모암이라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성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한 과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양씨 부인이라는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설씨 총각이 양씨 부인을 너무 사모하여 끈질기게 청혼하였다. 견디다 못한 부인은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마지막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총각이 돌아왔고, 부인은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쓰고 그대로 성벽 위에서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