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창원 진해 웅천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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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웅천읍성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세종 16년(1434)에 남해안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와 인접한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된 연해읍성이다. 읍성은 지방의 주요거점에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이 복합되어 축조된 성곽으로 웅천읍성은 남해안지역에 축조된 연해읍성이다. 이 웅천읍성은 왜구의 침입과 조선전기에 개항한 삼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왜인거류지가 조성되어 있는 제포와는 불과 1km 남짓 떨어져 있으며,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에게 함락되어 동문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임진왜란시 웅천왜성의 자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에도 조선군의 대일본방어의 최일선 기지로서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웅천읍성은 2001년도부터 2008년도까지 4차례에 직간접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동벽, 남벽 체성부, 동문지, 옹성, 동북, 동남 치성, 북, 동, 남쪽의 해자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웅천읍성은 1434년 세종 16년에 둘레 3400척, 높이 15척으로 초축된 이래 문종과 단종조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수개축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평면형태의 경우 정방형의 읍성에서 장방형의 읍성으로 증개축 되었다. 체성부는 세종조 축성신도(築城新圖)가 반강된 전후의 축조양식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해자는 초축 해자 및 증축 해자가 확인되고 있고 또한 해자 내 도개교 및 목익(적이 해자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박아 놓은 나무말뚝)이 확인되었다.

수정 국문

초고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1407년 일본과의 개항으로 일본인의 불법입주가 늘자 이것을 막고 주민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종 21년(1439)에 축조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의 동·서·북쪽에 수로를 만들어 성 일부를 확장하였다. 중종 5년(1510)에는 삼포왜란으로 함락되어 동문이 소실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웅천왜성의 자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에도 조선군의 대일본방어의 최일선 기지로서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벽면은 땅과 수직이 되도록 쌓았고 커다란 면석 사이의 틈에 작은 돌들을 끼웠다. 동문터의 폭은 4m이고 성벽 높이는 5∼8m, 두께는 3m이다. 현재 총 길이는 500m, 넓이는 3만 1120㎡, 동벽 북단의 남쪽 100m 정도에 누지(樓址)가 남아 있다.

  • 축조년도에 대한 확인이 필요
    1. 웅천읍성 안내판 : 1434년(세종 16년); '웅천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1434)에 남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와 인접한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연해읍성이다'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 정보 : 1439년(세종 21년); '경상남도 진해시 성내동에 있는 산성으로, 조선 세종 21년(143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437년(세종 19년); '1407년(태종 7) 일본과의 선린책으로 내이포를 개항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게 되자 일본인의 불법거주가 많아져 이를 막고 읍면을 보호하기 위하여 1437년(세종 19) 웅천수군절제사영으로 축조한 것이 이 석성이다'
    4. 향토문화전자대전 : 1434년(세종 16년) 착수, 1435년(세종 17년) 완공; '1434년(세종 16년)에 건립에 착수하여 1435년(세종 17년)에 완공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생략)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4년(세종 16년)에 김해 읍성과 웅천 읍성을 함께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435년(세종 17)에는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아 결국 각 포진의 수군을 동원하여 완공하였다고 한다. 『경상도 속찬 지리지』에서도 1434년에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 5)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5일 기유 4번째기사 (1434년) - 내이포 등지에 사는 왜인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8005_004 → 황희 등이 의논하기를, “그들이 와서 살기를 허락한 것이 이미 오래었는데, 이제 이르러 거절하고 들이지 아니하기는 때가 늦었습니다. 또 각도에 나누어 두려면 저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진퇴(進退)가 어렵습니다. 아직 그대로 두되, 신 등이 다만 원하는 것은 금년에 먼저 김해 읍성을 쌓고 다음에 내이포 현성(縣城)을 쌓아서, 만일 왜적의 변이 있거든 백성들로 하여금 옮겨 들어와서 피난하게 하옵소서.”

1차 수정

읍성은 관청과 민가를 비롯한 고을 전체를 둘러 쌓은 성이다.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에 착공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오랜 기간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을 방어하는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원래 이곳은 태종 7년(1407) 내이포를 개항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던 곳인데, 일본인의 불법입주가 점차 늘자 이것을 막고 주민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읍성을 지었다. 중종 5년(1510)에는 삼포왜란으로 함락되어 동문이 소실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주둔하던 웅천왜성에 딸린 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읍성으로서의 기능은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 이후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웅천읍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읍성의 전체 둘레는 936m, 현재 남아있는 길이는 약 500m이고, 성벽의 폭은 4.5m, 높이는 4.4m 정도이다. 성벽은 땅과 수직이 되도록 쌓았고,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들을 끼웠다. 동벽만이 문터와 함께 완전히 남아있고, 북벽은 진해-부산간 국도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으며, 서벽과 남벽은 후대에 민가와 도로 등이 들어서면서 일부 훼손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읍성의 기능 :기존 문안의 내용과 통일성이 있는지 확인 필요.
    • 읍성의 개축과정 및 변화내용 보완-> 읍성은 세종대 처음 축조되어 문종․단종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평면형태도 정방형에서 장방형으로 변형되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읍성은 관청과 민가를 비롯한 고을 전체를 둘러 쌓은 성 → 읍성은 ‘고을 전체를 둘러 쌓은 성’이 아니라 ‘고을 중심부를 둘러쌓은 성’ 또는 ‘고을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쌓은 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 일본인의 불법입주가 점차 늘자 → 약정한 거주인 수를 초과하였으므로 ‘정원을 초과하여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자’ 또는 ‘내이포의 일본인으로부터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로 표현을 바꾸는 것이 좋을 듯하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전체적으로 양호합니다
    • ‘불법 입주’라는 표현이 어색함. ‘불법 거주’ 혹은 ‘불법 거류’ 정도가 무난할 듯합니다.
    •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 이후’ 표현은 1895년에 갑오개혁이 이뤄졌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갑오개혁 이후 고종 32년(1895)’으로 바꾸는 것이 정확한 표현 같습니다.
    • 착공 연도를 1434년으로 적시하는 것이 다소 모호하다면 ‘1434년경’으로 표현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2차 수정

읍성은 관청과 민가를 비롯한 고을 중심부를 둘러 쌓은 성이다.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웅천읍성은 세종(1418~1450 재위) 때에 처음 축조된 이후 여러 차례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평면 형태도 정방형에서 장방형으로 바뀌었다. 원래 이곳은 태종 7년(1407) 내이포를 개항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그러나 불법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점차 늘자, 일본인들로부터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지었다. 중종 5년(1510)에는 삼포왜란으로 함락되어 동문이 소실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주둔하던 웅천왜성에 딸린 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랜 기간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을 방어하는 주요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며, 읍성으로서의 기능은 갑오개혁 이후 고종 32년(1895)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웅천읍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읍성의 전체 둘레는 936m, 현재 남아있는 길이는 약 500m이고, 성벽의 폭은 4.5m, 높이는 4.4m 정도이다. 성벽은 땅과 수직이 되도록 쌓았고,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들을 끼웠다. 동벽만이 문터와 함께 완전히 남아있고, 북벽은 진해-부산간 국도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으며, 서벽과 남벽은 후대에 민가와 도로 등이 들어서면서 일부 훼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