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진표율사(김제 금산사 일원)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미륵신앙 대가람으로 일으킨 중창 조사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완산주 만경현에서 아버지 정진나마와 어머니 갈보랑 사이에서 태어났다.
율사는 12세에 우연히 아버지의 사냥길을 따라갔다가 연못에 놀고 있는 개구리를 잡아 화살촉에 꿰어두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듬해에 우연히 그곳을 다시 지나다가 전 해에 잡아둔 개구리들이 가엾게 울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지난 행동을 마음 속 깊이 뉘우쳤다. 이에 출가하여 금산사의 순제법사(혹은 숭제법사)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율사의 나이 23세가 되어서는 1년동안 간절히 공부하면 문수보살의 현신계를 받을 수 있다는 은사의 가르침에 따라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몸을 바위에 던지는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하자, 율사는 내생을 기약하며 벼랑에 투신하였더니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율사를 구하였다.
그 후 다시 7일간 용맹 정진하여 지장보살의 현전 수기로 계율을 받았다. 그러나 율사는 미륵보살에 뜻이 있었으므로 변산의 영산사로 자리를 옮겨 수행한 끝에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證果)의 괘쪽을 받았다.
이후 율사는 금산사로 자리를 옮겨 금당(미륵전)을 짓고 그 안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하는 등 금산사를 미륵도량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해마다 단(壇)을 만들고 널리 설교하니 단을 베푼 좌석의 정결하고 엄숙한 품이 말세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현세에 용화세계를 건설하고자 전생에 지은 악업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열가지 선업을 닦도록 한 것이나, 미륵으로부터 전해받은 점찰경을 바탕으로 점찰법회를 봉행한 것 등은 모두 율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불법의 교화가 삼한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금산사를 중창한 후, 율사는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 등으로 자리를 옮겨 미륵신앙의 대중화에 노력하였으며, 삼국통일 이후 이반된 민심을 위로하는 일에도 크게 애쓰셨다. 이에 경덕왕은 진표율사를 경주에 초청하여 보살계 계단을 열게하고, 율사의 미륵신앙 대중화 운동을 크게 지원하였다. 이에 율사의 미륵신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에 간략히 기록하여 둔다.
수정 국문
초고
진표율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금산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이다.
진표는 김제 출신으로 원래 진표의 집안은 대대로 사냥을 잘하던 가문이었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사냥에 나섰다가, 물가에 개구리를 보고는 모두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놓았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갈 때 가져갈 생각으로 개구리를 물속에 담가두었는데, 너무 사냥에 열중한 나머지 그만 개구리를 잊고 말았다. 이듬해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그곳을 다시 지났는데, 전에 잡아두었던 개구리들이 나뭇가지에 꿰인 채 가엽게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진표는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이를 계기로 12살 어린 나이에 금산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진표는 전국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 직접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겠다는 뜻을 세운 뒤 온몸으로 바위를 두들기며 수행하였고, 마침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친견하였다.
엄격한 수행을 통해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은 진표는 곧 금산사로 돌아와 미륵전을 짓고 금산사를 미륵도량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절을 중창하면서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서 계를 받았던 모습을 미륵전에 벽화로 그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산사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의 본산이 되었고, 미륵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는 유가종의 성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금산사를 중창한 후에는 속리산과 금강산 등으로 옮겨 중생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당시 그의 명성이 왕실에까지 퍼져 나갔으며, 왕실에서도 진표의 미륵신앙 대중화 운동을 크게 지원하였다.
말년에는 금산사 발연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수행하다가, 사찰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제자들은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유골이 흩어지자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금산사 부도전에는 진표율사를 기리는 승탑이 세워져 있다.
자문의견
- 불교문화재 위원1
- 명칭 부합, 객관적 설명
- “온몸으로 바위를 두들기며 수행하였고~ 친견하였다”는 문장은 기존문안에서 사용된‘ 망신참법’설명이 더 적절하다.
- 적절하다
- 진표율사와 금산사, 미륵신앙에 대한 설명은 기존문안이 더 적절해 보인다.
- 불교문화재 위원2
- ‘금산사 발연사’ -> ‘금강산 발연사’
2차 수정
진표율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금산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이다.
진표는 김제 출신으로 원래 진표의 집안은 대대로 사냥을 잘하던 가문이었다. 열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사냥에 나섰다가, 물가에 개구리를 보고는 모두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는데, 깜빡 잊고 말았다. 이듬해 다시 그곳을 지났다가 전에 잡아두었던 개구리들이 나뭇가지에 꿰인 채 가엽게 울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지난 행동을 마음 속 깊이 뉘우쳤다. 이에 금산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진표는 전국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 직접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겠다는 뜻을 세운 뒤 온몸을 바위에 던지는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수행하였고, 마침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친견하였다.
엄격한 수행을 통해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은 진표는 곧 금산사로 돌아와 미륵전을 짓고 그 안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하는 등 금산사를 미륵도량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미륵전에는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서 계를 받았던 모습을 벽화로 그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산사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의 본산이 되었고, 미륵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는 유가종의 성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진표는 속리산 법주사 등에서 삼국통일을 겪은 민심을 위로하며 미륵신앙의 대중화에 힘썼다. 당시 그의 명성이 왕실에까지 퍼져 나갔으며, 왕실에서도 진표의 미륵신앙 대중화 운동을 크게 지원하였다.
말년에는 금강산 발연사에서 수행하다가, 사찰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제자들은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유골이 흩어지자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금산사 부도전에는 진표율사를 기리는 승탑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