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진도 정유재란 순절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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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정유재란은 진도 울돌목을 중심으로 수군전이 치러진 전쟁이었다. 1597년 8월 29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바로 신안 당사도로 후퇴했기 때문에 진도는 상륙한 왜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당시 관군은 군수인 송덕일이 이끌었고, 명량대첩 때 전사한 진도 사람 중 관군으로 이름이 나오는 인물은 조응량 등 8명이다.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와 오일시장 사이의 산기슭에 있는 이 묘역은 벽파진이나 명량진에서 15리 거리이며, 진도 설군 당시인 1440년대는 토반인 창녕조씨와 김해김씨 들에게 하사된 땅이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1598년경부터 이 묘역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묘역의 면적은 50,553㎡이고, 232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묘역의 많은 봉분 중 창녕조씨나 김해김씨 등 진도 토반씨족 인물들 16기 이외에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다.
진도 군내 사족인 조응량(선무원종공신), 그의 아들 조명신(선무원종공신), 박헌(병조참판 증직), 김성진(선무원종공신, 남원전투 순직), 김홍립 등의 무덤도 있지만, 나머지는 이름 없이 종군했던 현지 향민들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정유재란 때 순절한 사람들의 무덤을 집단적으로 조성해놓은 묘역이다. 명량대첩 직후에 이순신은 수군의 함대 보전을 위해 곧바로 서쪽 바다로 이동했으나, 해남 전라우수영과 진도는 뒤쫓아 온 일본수군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진도지역 관군은 군수 송덕일(宋德馹)의 지휘 하에 반격했으나 전투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순절한 병사들을 수습하여 매장한 무덤이 도평리 송우산 기슭에 있는데, 이곳이 정유재란 순절묘역이다. 진도군 내 사족인 조응량(曺應亮)의 무덤을 비롯하여 모두 232기이다. 일부 무연고자의 묘가 섞여 있기는 하나 대부분 정유재란 때 순절한 사람들이다.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은 조응량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명신(命新·선무원종공신), 박헌(朴軒·증병조참판), 김성진(金聲振·선무원종공신, 남원전투 순직), 김홍립(金弘立) 등 16기이다. 그 나머지는 이름 없는 무덤이다. 이곳은 벽파진이나 명량진에서 15리 거리이며, 처음 진도군이 생길 때인 1440년경에 창녕조씨와 김해김씨에게 나누어준 땅이었다고 한다. 묘역 아래에는 순절자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을 건축해놓았다.
문맥요소
- 명량대첩 – 사건 -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어란포(於蘭浦)를 출발한 왜선 133척을 맞아 이순신의 지휘 하에 12척의 병선으로 필사의 전투를 벌여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리친 전투이다.
- 송덕일 – 지휘관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치원(致遠), 호는 조은(釣隱). 진도군수로 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서훈되었다.
- 조응량 – 묘주 - 본관은 창녕. 명량대첩에서 부자가 함께 순절한 선무원종공신이다.
검토의견
2차 수정
1597년 정유재란 때 순절한 진도 사람들의 묘역이다.
진도의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수군은 함선을 보호하기 위해 곧바로 서쪽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진도는 상륙한 왜군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진도지역 관군은 군수 송덕일(宋德馹)의 지휘 하에 반격했으나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순절한 병사들을 수습하여 묻은 곳이 정유재란 순절묘역이다.
이곳에는 모두 232기의 무덤이 있는데, 대부분 정유재란 때 순절한 사람들의 묘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가운데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은 진도의 사족인 조응량(曺應亮·선무원종공신), 그의 아들 조명신(曺命新·선무원종공신), 박헌(朴軒·증병조참판), 김성진(金聲振·선무원종공신, 남원전투 순직), 김홍립(金弘立) 등 16명이다.
묘역 아래에는 순절자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 있다.